|
튀르키예 6 - 셀주크 투르크의 시대에 침략당해 십자군 왕국이 세워진 시리아!
1. 시리아 할랍(알레포) 의 토착 미르다스 왕조
11세기에 시리아 할랍(알레포) 통치자 미르다스 왕조의 티말은 북쪽의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 남쪽 이집트 파티마 왕국에 "모두 조공해 평화를 유지" 하며 번영하는데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남하한 "셀주크 투르크족" 은 이란 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운후에 이슬람 압바스조 이라크를 손에 넣고는 "시리아" 까지 손을 뻗칩니다.
1071년 초엽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할랍(알레포)을 포위
하였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티말 사후 통치자가 된 마흐무드가 4월에
복속을 표시하자 만족하고 북상해서는 그 틈에 침공해온 동로마 비잔틴 대군을 1071년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만지케르트 전투" 에서 격파하고 황제를 사로잡는등 대승을 거둡니다.
한편 할랍(알레포) 의 마흐무드는 집권에 도움을 주었던 튀르크인들이 동족들을 부르며 세력을
증대시켜서는 시리아의 할랍(알레포) 일대에 불안정을 초래하자... 1070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이들의 통제를 부탁하면서 후자의 호의를 사기 위해 마흐무드는 "시아파" 에서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파티마 대신 "셀주크 보호" 하의 압바스 칼리파에 복속합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위협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할랍(알레포) 미르다스 왕조의 왕 마흐무드는 1075년
사망하고 장남 나스르가 집권하였는데..... 그해 가을 나스르 휘하의 튀르크 용병들은 동로마로 부터
만비즈, 파티마조로 부터 라파니야를 수복하였지만, 나스르는 그 대장 아흐마드 샤를 이드 알 피트르
때에 체포해 감금하였고 알 하디르의 튀르크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1076년 5월에 활에 맞아 전사합니다.
나스르의 동생 사비크가 카파르탑의 아미르 알리의 도움을 받아 즉위했는데 다른 동생 와싸브가
바누 킬랍의 지지하에 반발하며 내전으로 이어졌고 승부가 나지않고 전투가 길어지자
1080년 인근 모술-라카 일대를 지배하던 셀주크 제국의 속국 우카일 왕조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한편 이집트의 이슬람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쇠퇴하던 11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총독이던
이븐 우바크 라는 호라즘 출신 튀르크계 용병이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점거하고는
1071년에 바그다드의 이슬람 압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사실상 독립하였습니다.
이후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아트시즈 이븐 우바크는 이집트 본국을 공격하는 모험을 감행하였으나 패배
하고 오히려 파티마 군대의 반격에 마주하자 셀주크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니 이에 셀주크 투르크의
말리크샤는 1078년에 동생 투투쉬 1세를 파견하니 다마스쿠스를 포위한 이집트 파티마조 군대를
격퇴한 투투쉬는 1079년에 아트즈를 감금하였고 곧 곧 살해하니 시리아 남부는 셀주크 영토가 됩니다.
2. 우카일 왕조
알레포 북쪽 모술-라카 일대를 지배하던 대셀주크의 속국 우카일 왕조의 무슬림 샤라프 앗
다울라는 1079년 시리아 남부 다마스커스를 손에 넣은 투투쉬의 요청으로.... 1080년
알레포의 내전에 개입하니 시민들의 요청으로 할랍(알레포)에 입성하자 통치자 사비크
는 시타델에서 농성했지만, 후원자 알리의 중재에 부근 작은 영지를 대가로 항복하니
이듬해 무슬림은 하란까지 점령해 미르다스 왕조의 동맹인 누마이르 왕조를 멸하였습니다.
모술과 하란-할랍(알레포)-홈스에 이르는 대국을 통치하게 된 우카일 왕조 무슬림은 자신감이
생긴지라 주군인 대셀주크 투르크의 말리크샤에게 반기를 들었고 진압되었으나 사면받은
후에 안정적으로 할랍(알레포)을 통치하던 무슬림은 1085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남진해온 셀주크 투르크의 분파인 룸 술탄국 쉴레이만의 침공에 맞섰으나 패하고 전사합니다.
무슬림 샤라프 앗 다울라의 동생 이브라힘이 모술을 계승하였고 할랍(알레포)은 민병대장 하산
이븐 히바트가 맡았는데 그는 알레포를 내주기로한 투투쉬와의 약속을 어기고 대셀주크
투르크의 말리크샤에 복속하였으며, 말리크샤의 동생 투투쉬는 룸 술탄국 쉴레이만을
전사시키고는.... 1086년 5월 도시 할랍(알레포)를 장악했는데 하산은 시타델에서 저항합니다.
1086년 5월, 투투쉬는 알레포를 공격하여 시타델을 제외한 도시를 장악하였고 얼마후 남진해온
룸셀주크국의 쉴레이만샤를 전사시키며 시리아 전역을 움켜쥐었지만 하산의 편지를 받은
형인 대셀주크극의 말리크샤가 알레포를 향해 진군하자 투투쉬는 10월 다마스쿠스로 돌아갑니다.
1086년 12월 알레포를 접수한 대셀주크의 말리크샤는 1087년 아크 산쿠르 알 하집을 알레포
및 하마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동생 투투쉬를 견제하였는데 말리크샤 사후 벌어진 내전
에서 산쿠르는 1093년 투투쉬 대신에 술탄 바르키야루크를 선택하였으니 투투쉬가
북진하여 산쿠르를 패배시키고 처형한 후 1094년에는 알레포를 점령하지만 이듬해
라이에서 투투쉬 역시 바르키야루크 에게 패해서 전사하면서 "레반트는 재차 분열" 됩니다.
3. 셀주크 투르크의 시리아 지배
1086년 10월 대셀주크 투르크의 말리크샤가 할랍으로 향하자 동생 투투쉬는 다마스쿠스
로 철수하였으며 12월 할랍(알레포)에 입성한 말리크샤는 튀르크인 아크 순쿠르를
총독으로 봉하였고 1092년 말리크샤가 사망한후 터진 내전에서 동생 투투쉬는 다시
할랍을 점령하였으며 1094년에 자신에 충성하길 거부한 아크 순쿠르를 처형했으나 그도
이듬해에 전사하니... 장남 리드완이 할랍(알레포), 사남 두카크가 다마스쿠스를 계승합니다.
죽은 투투쉬의 아들인 형제들은 안티오크와 예루살렘 총독들을 끌어들여 서로 싸웠고 이
내전은 2년 후에 1차 십자군이 당도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할랍(알레포)의 리드완
(파크르 알 물크)의 소극적 대처에 안티오크는 십자군에게 함락되었고 이후 할랍은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기독교 십자군 안티오크 공국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4. 제1차 십자군 안티오크를 함락하고 예루살렘왕국을 세우다!
1차 십자군은 기병 8천명에 보병 4만 2천등 5만명에 달했는데 아마데우스 주교 외에 제후들은 프랑스
남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와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과 동생 보두앵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공작 보에몽(보에몬드) 과 조카 탕크레드에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프랑스왕제 위그 드 베르망두아에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사위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등입니다.
십자군은 1097년 5월 니케아성을 함락하고 아나톨리아를 종단하며 룸 술탄 군대를 도릴라이온
에서 격파한후 실레지아로 남하해 10월 안티오키아성에 도착해 1년에 가까운 포위 공격
끝에 다음해 1098년에 이슬람 셀주크 투르크족 야기 시안이 7천으로 다스리던 안티오키아성
을 천신만고 끝에 힘겹게 함락시키는데 야기 시안은 이 도시를 불과 10년 전인 1088년에
손에 넣었으며 그는 대셀주크 말리크 샤 1세의 동생인 시리아의 군주 투투시 1세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이때 형님인 말리크 샤 1세기 죽자 시리아를 무력으로 빼앗은 투투시 1세도 죽고
장남은 알레포를 그리고 4남은 다마스커스를 통치하면서 형제끼리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기독교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공격해 오자 할랍(알레포)의
리드완은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남쪽 다마스쿠스의 통치자인 동생 사남 두카크가
자신의 근거지 할랍(알레포)을 노릴까 걱정이 되니 선뜻 구원군을 보내지 못한 것입니다.
할랍(알레포)의 리드완은 자기 신하이자 장인인 야기 시안의 숨넘어가는 구원 요청에 머뭇거리는 사이
다마스쿠스 지배자 두카크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군대를 끌고 오니 포위가 2달이나 계속된 1097년
12월 말인데 식량이 떨어진 십자군이 약탈에 나섰으니 보에몽과 로베르 부대와 마주친 다마스쿠스
군대의 소심한 두카크는 싸우지도 않고 후퇴해버리지만 십자군도 식량을 얻는데는 소득이 없었습니다.
비가 수주간 이어지는 가운데 십자군은 기아로 내몰리니 1098년초 7명 중 1명이 사망했으며
말도 700마리를 제외하고 다 죽었고 살기위해 죽은 말은 물론 무슬림의 시체까지
먹었으니.... 신의 징벌로 생각되는 지진까지 발생하자 십자군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진지안에서 매춘부를 내치며 금식기도를 했으니 살기위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1098년에 드디어 할랍(알레포)의 리드완이 구원병을 보내왔으나 2월 9일 하림에서 십자군
에게 격파되었으며, 3월이 되자 동생에게 왕위를 뺏긴 자칭 영국왕 에드가가 함대를
이끌고 시메온항에 도착했는데 병력외에 공성무기등 보급품을 가지고 있었으니
3월 6일 탈취하려는 안티오키아성 투르크 군대 공격을 십자군의 고드프루아가 물리칩니다.
한편 모술의 아타베크 카르부카가 대군을 소집했으나..... 2달 전인 1098년 3월 양아버지를
죽이고 에데사를 훔쳐서 백작이 된 십자군 보두앵 때문에 에데사 부터 공격하는데 보에몽
은 안티오크성 두자매의 탑 수비대장 피루즈를 배신시켜 1098년 6월 3일 새벽 피루즈가
내려준 사다리 덕으로 도시에 몰래 침투한 십자군은 무슬림을 몰살시키고 성을 점령합니다.
그때 모술의 카르부카는 성전을 벌인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모았으니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도 참가
했는데 안티오크성에 도착하니 간발의 차이로 십자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십자군도
도시를 점령햇지만 오랜 포위전으로 식량이 다 떨어진터라 포위된 십자군은 다시 굶주리게 됩니다.
포위된 성 안에 전염병이 퍼지고 굶어죽게 되었을때 수도승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롱기누스의 창)" 을 발굴(?) 했다는 거짓말로 사기가 오른
십자군이 성문을 열고 돌격해 나오자.... 이슬람군은 패퇴하는지라 포위가 풀리니
식량을 구한후 다시 남진해 몇몇 전투를 거쳐 1098년 6월에 예루살렘성에 도착합니다.
이슬람 세 원군은 각개격파된 것인데... 무슬림 소왕국들은 이게 종교전쟁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용병으로만 생각한 것이니, 만약 알레포와 다마스커스에 홈스와
모술 등 이슬람 군대들이 사태를 직시해 단결하여 반년간 공성전에 굶주림에 지친 십자군을
포위공격했으면 십자군은 전멸했을 것이니 십자군 다섯 왕국이 세워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5만 대군에서 불과 1만 5천으로 줄어든 십자군은 예루살렘성을 공격했지만 이집트 파티마 왕조 의
총독 이흐티카르는 식량을 저장하며 저수조를 보강했으니,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공성탑" 을
만들고서야 성벽을 넘었으니...... 1099년 7월 15일 광신도 십자군은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사흘간 약탈을 벌이면서 말 고삐까지 피가 닿도록 사람을 무차별로 죽였으니, "예루살렘
은 피바다" 로 변했고 이교도의 피로 정화(?)된 도시에 십자군은 기독교 "예루살렘왕국" 을 세웁니다.
레반트에 안티오키아공국, 에데사백국, 예루살렘왕국에 트리폴리백국과 기존의 아르메니아까지 5개
기독교 왕국이 세워졌는데, 1102년에는 십자군 예루살렘왕국의 장수로 갈릴리를 점령한
탕크레드의 협박에 알레포 대사원에 십자가를 게양할 정도로 위축되었으며 다만 알레포는
1108년 노르만인 십자군 탕크레드의 도움으로 이슬람 모술 총독 자왈리와 기독교 에데사공국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나 그 원조의 대가로 할랍(알레포)은 안티오크 공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5. 할랍(알레포), 대셀주크에 기독교 십자군과 지하드를 요구하다.
이에 할랍(알레포)의 카디 이븐 알 카샤브가 1111년 바그다드에서 지하드를 요구하며 시위하기도
하였는데 1113년 리드완은 사망하고 아들 알프 아르슬란(샴스 알 물크)이 계승했으며 1114년
에는 리드완 대에 우대되던 아사신들이 학살되었고 같은해 아타베그인 환관 룰루가 주군 알프
아르슬란을 시해하고 동생 술탄 샤를 옹립했지만 1117년 룰루도 암살되어 할랍은 혼란에 빠집니다.
1118년 7월, 마르딘의 아미르 일가지(나즘 앗 딘) 가 할랍에 입성해 술탄 샤를 감금하고
질서를 회복하였으며 이듬해 그는 툭테긴과 동맹하고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기독교 십자군 안티오크공국의 로제르를 전사시키며 일약 지하드 영웅이 되었고
1122년 일가지가 사망하자 장남 술레이만이 마르딘, 조카 술레이만이 할랍을 계승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십자군 에데사 백작과 예루살렘 국왕을 연이어 사로잡은 일가지의 차남 발라크
(누르 앗 다울라)가 1123년 6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할랍에 입성하였고 그해 에데사
병력이 할랍 근교를 약탈하자 카디가 시내의 성당 5개 중 3개를 모스크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1124년 6월 발라크는 만비즈 포위 중 전사하였고 사촌 티무르타쉬가 계승했는데 그는 마르딘을 선호
하며 할랍을 방치하였으니 그해 10월 십자군이 할랍을 포위하였고 그러자 카디 이븐 알 카샤브의
요청에 모술의 총독 아크 순쿠르 알 보르소키가 포1125년 1월에 포위를 풀어내며 도시에 입성합니다.
알 보르소키는 카파르탑을 수복했으나 아자즈 전투에서 십자군에 패한후 1126년 11월
아사신에게 암살되었으며 이후 모술은 아들 마수드, 할랍은 부관 투만에게 맡겨졌는
데, 셀주크 술탄이 봉한 쿠틀라가 1127년 6월 도시를 장악하니 할랍 시민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그해 10월 총독을 축출하고 발라크의 사촌 술레이만을 아미르로 추대합니다.
그러자 다음달 십자군이 만비즈 영주와 재차 할랍을 포위하였으며 1127년 7월 마수드가 사망한후 그
어린 아들의 아타베그로 봉해진 이마드 앗 딘 장기(말리크샤의 할랍 총독 아크 순쿠르의 아들)는
술탄으로 부터 할랍 통치권을 인정받곤 포위된 도시에 부관을 파견해 1128년 1월 십자군을 격퇴
하고 할랍에 개선하였고 6월엔 장기가 입성하니 마르딘의 티무르타쉬와 홈스, 샤이자르가 장기에게
복속하였으며 이듬해 술탄이 모술 양도를 지시하자 장기는 무력시위와 선물로 명령철회를 유도합니다.
6. 이슬람 모술의 장기 왕조
모술의 태수 장기는 1130년의 홈스 원정 후 부관 사와르에게 할랍(알레포)을 맡기고 이라크
문제에 집중하니 1132년 술탄 마수드를 도와 바그다드로 진군하였지만 그해 8월에
칼리파군에게 대패한 장기는 홀로 쫓기다가 티그리트의 영주 아이유브에게 구출되며
이후 칼리파와 동맹한 장기는 1135년 실패한 다마스쿠스 원정의 이듬해에 술탄
마수드를 격파하고 칼리파 알 라시드의 모술 피신을 받아주나 술탄의 협박으로 축출합니다.
이라크 대한 야욕을 접기로 한 장기는 1137년 7월, 재차 홈스를 포위하던중 동맹인 십자군 트리폴리
백작을 바린 전투에서 격파하고 카파르탑과 마라트 알 누만을 점령하며 '지하드' 에 나섰으니
이듬해엔 아르카를 점령하였고 동시에 다마수쿠스 태후와 결혼, 지참금으로 홈스를 얻었으며
1138년 8월 시리아에서 23만명이 죽은 대지진이 발생해 할랍도 성벽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보았지만....... 1139년 바알벡을 점령한 장기는 이듬해 다마스쿠스를 포위해 아미르를 복속시킵니다.
장기의 위협이 증대하자 풀크 예루살렘왕은 1140년에 적이자 "이교도 이슬람인 다마스쿠스와 동맹" 을
맺으니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 그런데 풀크왕은 1143년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사고로 숨을
거두니 13살 아들을 밑천으로 왕비 멜리장드는 예루살렘왕위에 오르는데 풀크왕은 100개에 달하는
많은 성채를 건설했으니 1142년 죽기 1년전 성요한 기사단이 건설한 “크락 데 슈발리에” 는 유명합니다.
장기의 위협에 다마스쿠스의 섭정 우누르는 기독교 십자군과 동맹하였고 이에 장기는 안티오크
습격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지냈는데 1144년, 장기는 에데사 백작을 할랍 방면으로
유인한후 에데사(우르파)를 포위하였고 그해 12월 함락하니 장기는 일약 이슬람권의
영웅이 되었고 이듬해 칼리파로 부터 기존 아타베그 대신 정식 아미르 직위를 하사받습니다.
교황 에우제니우스의 재촉으로 1145년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콘라트 3세 독일왕
이 이끄는 2차 십자군이 일어나니 1차 제후십자군을 넘어 왕들이 참가하기 시작한 첫번째 십자군으로
콘라트 3세의 독일군은 1147년 9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주변을 약탈하자 견디다 못한 마누엘
1세는 이들을 소아시아로 건네주자 콘라트 3세는 1차 십자군의 이동 경로를 따라 안티오키아로 향합니다.
독일 십자군은 1차 십자군 처럼 도릴라이움에서 투르크 군대와 조우했는데....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룸셀주크국의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고 2만명 중에 1만 8천을 잃으며
전멸을 당한 콘라트 3세는 살아남은 기병대와 함께 니케아로 달아나서 프랑스 군대를 기다렸습니다.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합류한 루이 7세는 위험한 아나톨리아 대신에 에게해와 지중해 연안
의 동로마 영토를 따라 행군해 겨우 아달리아에 이르르서는 동로마 함대를 고용하여
배를 타고 성지로 이동하는데 배가 부족해 육지로 행군한 프랑스 군대는 라오디케아
에서 투르크 군대에게 패해 전멸당했고 극소수만이 안티오키아에서 루이 7세와 합류합니다.
한편 2차 십자군 최대의 적이었던 장기는 불만을 품었던 노예가 술에 취해 잠든 장기를 살해하니
옛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는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장기의
아들 누레딘은 보복으로 에데사의 기독교도들중 남자는 죽이고 아녀자는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레몽(프랑스 푸아티에 출신) 과 옛 에데사 백작인 조슬랭의 관계는
나빴고 십자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성지에 도착한 십자군은 대부분이
아나톨리아에서 죽고 소수에 불과했으니 에데사 탈환은 어림도 없었지만 다행히
프랑스왕 루이 7세는 많은 자금과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용병을 고용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공국의 레몽은 장기의 아들 누레딘이 모술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다투는
틈을 타서 알레포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금욕적인 성향의 루이 7세는 듣지 않으니
레몽은 조카인 프랑스 왕비 엘레오노르를 대신 설득하려 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도니 루이 7세는 매우 불쾌해 하자 와인산지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는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협박(?) 을 합니다.
격노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연금시켜버린 다음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프로방스에서 추가
로 도착한 십자군을 보충받아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고 콘라트 3세 독일왕도 용병을
고용하여 군세를 회복한 상태였으니 여기에 예루살렘 왕국 군대가 합세하면 엄청난
숫자의 대군을 동원할수 있었지만..... 십자군은 원래 목표인 에데사 탈환은 관심이 없었고
알레포는 루이 7세가 거부했던지라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의 우방국 다마스커스를 공격합니다.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한 이유는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면 예루살렘의 방벽이 된다
고 본데다가 바그다드의 투르크계 수니파와 카이로의 아랍계 시아파의 통합을
저지할수 있으며 서유럽에서는 에데사나 알레포 보다는 "다마스쿠스" 가 지명도가
10배나 더 높았으니 함락하면 훨씬 더 큰 명성을 얻을수 있다고 본 "허영심" 때문 입니다.
유럽에서 새로 온 십자군은 이교도와의 동맹 따위를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한데 1148년 7월 24일
에야 다마스커스 공략이 시작된 것은 4월 초에 회의를 하고도 3개월간 독실한 기독교도인 루이
7세가 적군의 성 공격보다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및 나사렛을 성지순례를 더 우선시 했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쿠스는 6개의 로마 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주변 농경지가 많아 부유한데다가 수공업도
발달했으니 유럽에서는 두꺼운 비단천에 호화로운 무늬가 들어간 직물을 “다마스쿠스 옷감” 이라
부를 정도이니 시리아에 통일국가를 세울 자라면 당연히 노리는데 북쪽에서 같은 이슬람 투르크계인
장기의 아들 누레딘이 압박하는 가운데 남쪽에서 우방이자 동맹이라 생각했던 십자군이 쳐들어 옵니다.
당시 다마스쿠스 태수는 우누르였는데 인근 소영주들은 십자군이 두려우니 구원오는 자가
없는지라 결국 내키지 않았지만 적인 알레포에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니 누레딘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등 유럽 상인들과 무역하던 아랍상인들을 통해 십자군의
규모가 별 것 아니라는 정보를 입수했는지 이때는 구원 약속만 하고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아코(아크레)에 집결한 십자군은 독일황제 콘라트의 기병 2천명, 프랑스왕의 기병 7백명, 플랑드르백작의
기병 6백명,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와 제후들의 기병 5백명에 보병 6천명, 템플기사단 기병 130명,
성요한 기사단의 기병 70명등 기병 4천명에 보병 6천명인데... 기병에는 보병 3명과 하인 2명이 따릅니다.
1차 십자군은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을 함락한 다음에야 지도자들이 성지순례에 나섰는데
2차 십자군은 거꾸로 성지순례 부터 먼저했으니.... 따라서 싸우기 좋은 계절인 4~5월을
놓치고 열사의 나라 사막에서 가장 뜨거운 7월 하순에 진격을 해서는 7월 24일에야
다마스쿠스 남쪽 4km 인 메제야발에 도착해 진영을 세우니 다마스쿠스군의 야습이 격렬합니다.
독일 기병은 말에서 내려 중무장 보병으로 싸우는 가운데 26일에는 일부가 다마스쿠스성 서쪽벽에
까지 진출했지만 공성기를 준비하지 못한데다가 공성탑을 만들 생각조차 못햇으니.... 도대체
공성전에 대해 이렇게도 준비가 허술하다는 것이 놀랄 지경인데 7월 27일과 28일 성벽에서
몇 km 나 떨어진 곳에서 전투에 쫃기고 있었으며 "총사령관" 이 존재하지 않았던게 큰 약점입니다.
도시를 빨리 점령하기 위해 물과 그늘이 있는 자리를 버리고 공격을 위해 고지로 올라가자
햇볕이 가장 뜨거운 7월 하순이라 강철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에게는 물과
그늘이 없으니 사기가 떨어진걸 보고는 아니다 싶어 원래의 주둔지로 다시 이동하니
고지로 주둔지를 옮겼던 사이 이슬람 군대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전과는 지지부진해 집니다.
1148년 7월 28일밤 누레딘이 알레포군을 이끌고 닷새 거리인 홈스까지 접근해 왔다는 급보를 받고
29일 철수하는데 적과 싸우기 시작한지 불과 "나흘" 만이라? 1차 십자군의 안티오키아성 공격은
무려 "8개월간에 걸친 악천고투 전투와 인내" 의 결과였고 예루살렘 공략도 머나먼 강에서 식수를
길어오고 먼 산에서 나무를 찍어와서 공성탑을 만들었는데 2차 십자군은 아무른 준비가 없었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철수를 거부하고 남은 제후는 플랑드르 백작이 유일하며 1148년 9월 8일 독일왕 콘라트
3세는 살로니카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황제의 환대를 받았으며 프랑스왕 루이 7세는 바로 귀국
하는게 창피하니 1149년 부활절까지 성지에서 머물렀는데 엘레오노르는 이혼하겠다고 외치고 있었고
루이 7세는 그녀 마음을 돌리느라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으니 원정도 실패하고 아내까지 잃은 것입니다?
1144년 에데사를 점령한 장기는 반란을 진압중이던 1146년 9월 암살되니 모술은 장남 사이프 앗딘,
할랍은 차남 마흐무드(누르 앗 딘)가 계승하였는데..... 마흐무드는 십자군의 에데사 공격을
격파하고 1147년 우누르를 도와 보스라의 십자군을 격퇴했으며 1148년 십자군의 다마스커스
공격을 저지시킨후 1149년 6월 이나브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작 레몽을 전사시키며 명성을
떨쳤는데 1150년과 1151년 다마스쿠스 포위에 나섰지만 십자군 예루살렘왕의 개입으로 실패합니다.
마흐무드는 1152년 타르투스를 일시 점령하는 등 힘을 과시한 후 마침내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도움
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했으며... 1157년 6월 야곱의 여울에서 보두앵 3세의 십자군을 격파했으나
병이나니 할랍(알레포)에선 일대 혼란이 일었는데, 1158년 조금 회복한 마흐무드는 샤이자르를 점령
하고 십자군이 포위한 다마스쿠스를 구원했는데 7월 부타이하 전투에선 십자군 보에몽 3세에 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