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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 王 朝 世 家
AD, 1368∼AD, 1644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 성: 朱(주)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AD, 1368∼AD, 1398 | 太祖(태조) | 朱元璋(주원장) | 南京(남경) | 江蘇省,南京 | |
제 2대 | AD, 1398∼AD, 1402 | 惠宗(혜종) | 朱允炆(주윤문) | 태조의 적장손 | 강소성. 남경 | |
제 3대 | AD, 1402∼AD, 1424 | 成祖(성조) | 朱棣(주체) | 태조의 4남 | ||
제 4대 | AD, 1424∼AD, 1425 | 仁宗(인종) | 朱高熾(주고치) | 성조의 아들 | ||
제 5대 | AD, 1425∼AD, 1435 | 宣宗(선종) | 朱瞻基(주첨기) | 인종의 아들 | ||
제 6대 | AD, 1435∼AD, 1449 | 英宗(영종) | 朱祁鎭(주기진) | 선종의 장남 | ||
제 7대 | AD, 1449∼AD, 1457 | 代宗(대종) | 朱祁鈺(주기옥) | 영종의 동생 | ||
복위 | AD, 1457∼AD, 1464 | 英宗(영종) | 朱祁鎭(주기진) | 선종의 장남 | ||
제 8대 | AD, 1464∼AD, 1487 | 憲宗(헌종) | 朱見深(주견심) | 영종의 장남 | ||
제 9대 | AD, 1487∼AD, 1505 | 孝宗(효종) | 朱祐樘(주우탱) | 헌종의 장남 | ||
제 10대 | AD, 1505∼AD, 1521 | 武宗(무종) | 朱厚照(주후조) | 효종의 장남 | ||
제 11대 | AD, 1521∼AD, 1567 | 世宗(세종) | 朱厚總(주후총) | |||
제 12대 | AD, 1567∼AD, 1572 | 穆宗(목종) | 朱載垕(주재후) | 세종의 3남 | ||
제 13대 | AD, 1572∼AD, 1620 | 神宗(신종) | 朱翊鈞(주익균) | |||
제 14대 | AD, 1620∼AD, 1620 | 光宗(광종) | 朱常洛(주상락) | 신종의 장남 | ||
제 15대 | AD, 1620∼AD, 1627 | 熹宗(희종) | 朱由校(주유교) | 광종의 장남 | ||
제 16대 | AD, 1627∼AD, 1644 | 毅宗(의종) | 朱由檢(주유검) | 광종의 5남 |
제 1대 太祖 洪武帝(태조 홍무제 AD, 1328∼AD, 1398)
묘호는 태조 시호는 高皇帝(고황제)이며, 휘는 원장이고 연호는 洪武(홍무). 그리고 연호를 붙여서 洪武 帝(홍무제)라고도 불린다.
주원장은 AD 1328년 9월, 원나라 안휘이성 봉양현 지방에서 가난한 논부인 아버지 주세진과 어머니 진 씨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重八(중팔)이었다.
소년시절 지주의 소를 치기(서리)도 했었는데, 너무 배고픈 나머지 친구들과 작당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먹고 꼬리만 남겨서 바위틈에 끼워 놓고는, 지주에게 송아지가 아무리 당겨도 나오지 않는다며 얼 렁뚱땅 둘러댔다. 그러나 지주도 얼간이는 아진지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년들, 특히 사건의 주동자 였던 주중팔을 엄청나게 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주중팔은 목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친구들과 허기 를 채워주기 위해서 과감하게 송아지를 잡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 일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 다. 훗날 명나라의 개국 공신이 되는 서달, 탕화, 주덕홍 등이 당시 중팔과 함께 목동 노릇을 한 친구들 이었다.
그러다가 17살이 되던 해에 심한 가뭄이 들고 메뚜기 때에 전염병까지 돌아 마을은 줄줄이 초상집이 되 었는데 그 와중에 중팔이도 부모와 큰 형을 잃었다. 절에 의지하여 탁발승을 하다가 어릴 때 죽마고우 였던 탕화가 비밀리에 서찰을 보내왔다. 곽자홍이 이끄는 홍건군에 종군하라는 내용이었다.
주중팔은 곽자홍의 부대에 가담하였는데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오로지 본인의 실력만으로 곽자 홍 군단의 2인자 위치까지 올라 곽자홍의 양녀 마씨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다. 이때 주중팔은 곽자 홍 부대에서 주공자라는 칭호까지 얻어 이름도 주원장으로 고쳤다. 지정 13년, 고향에서 병사를 모집 했는데 목동 노력을 하면서 어울렸던 서달, 주덕홍, 곽영 등의 죽마고우 들이 그의 수하로 들어왔다
한편 곽자홍의 고향 정원은 호주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인데, 정원의 장가보에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민병 3천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홍건군에 귀부하지 않는 세력이었고 이에 주원장이 군영으로 다가가 3일 안에 귀순을 귄유했으나 수령이 거절하자 300여 명을 거느리고 계획을 세워 수령 을 사로 잡고 민병 3천 여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활비산에 주둔하고 있던 민병 800여 명도 주원장 의 부대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병력 증강에 성공한 주원장은 밤을 틈타 정원 황윤산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영을 공격 했고 원나라 장수 무대영이 투항하여 마침내 정원성이 주원장의 수중에 들어왔다. 주원장은 항복한 병 사들 가운데 한족 출신 병사 2만 여명을 뽑아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켰다. 정원이 함락되자 그곳의 토호 풍국영과 풍국승 형제가 농민군을 거느리고 투항하어 왔다. 주원장은 풍씨 형제를 군영에 머무르게 하 고 참예기무로 삼았다.
그가 정원을 평정하고 안휘성 저주로 진군하는 도중에 정원사람 이선장(AD,1314∼AD, 1390)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각종 문서와 서적을 관자롸는 서기의 직책을 맡겼고 이선장의 책략에 힘입 어 저주성을 점령했다.
지정 16년(1356), 주원장이 일거에 화주를 함락시켰다. 곽자홍이 사망하자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 으며, AD 1356년에 난징을 점령하면서 남부 지방에 할거하던 군벌의 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 다.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AD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력을 흡 수 한 후에는 스스로 오왕임을 선포하였고, AD 1367년 몽골족의 위험에서 한림이를 보호하기 위해 난 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 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 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원나라에 투항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계속 북벌을 단행하면서 원나라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 거둔 끝에 AD 1368년, 여름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금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였다.
건국 후 건국 공신들중 몇 사람을 빼고 모두 숙청하였다.
제 2대 惠宗 建文帝(혜종 건문제 AD, 1377∼AD, ?)
주원장의 장손이며, 아버지 의문태자 주표가 일찍 죽어 황태손니 되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주원장은 막판에 어마어마한 숙청을 진행했다. 특히 자신을 도와 싸웠던 공신들과 일족을 대규모로 숙 청하였고, 전한의 유방처럼 자신의 일족과 황자들을 차례대로 번왕에 봉했다. 이때 각 지역에 보낸 번왕 들은 통치권을 갖진 않으나 장수들 대신 각 지역의 군권을 가지는 형태였다. 이것이 실책이었다.
주원장으로서는 왕실 정통성을 위해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황태손을 후계자로 했다. 황손을 황태손으 로 봉할 때 주원장은 65세 였고 황손은 10살이었다. 당연히 황자들은 대개 당당한 청년, 또는 심지어 중 년이었다. 어린 황태손을 후계자로 하면서 황자들을 번왕으로 보내 군사 지휘권을 준 것은 이후 후계 갈 등 문제의 불시를 만들어 놓은것과 같았다.
즉위 후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 위협을 느끼게 된다. 주원장에게는 무려 스물여섯 명의 황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전원이 번왕이었으니 이것이 앞날의 화근으로 느껴지게 된다. 특히 연왕 주치 는 가장 큰 경계 대상이었다. 연왕 주체는 당시 명나라 최북방 지역에서 몽골족 침입을 막으며 무인으로 성장 중이었고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주원장이 죽은 직후부터 신료들은 각지 제왕의 세력을 진압할 것을 간언하였고 건문제는 몇 차례 망설이다 결국 삭번을 단행하였다.
결국 전부터 황제의 꿈을 가진 연왕이자 숙부인 주체가 황제 주변에 있는 간신들한테서 미숙한 황제를 구출하는 것이 숙부인 자신의 도리라고 선언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 한다.
결정적인 영락제의 남경 진격에서 사전에 내통뒨 궁정의 환관들이 성문을 열어 수도 남경이 함락되었고 건문제는 불타는 궁궐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일설에는 그때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또는 난전중에 불 에 타죽었다고 한다. 불을 끈 후 그의 아내 효민양황후 마씨의 시체는 환관에게 확인되었으나, 그의 시체 는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로 건문제와 효민양황후 마씨 사이에서는 2남이 있었다. 당시 6살이던 장남 화간 태자 朱文奎(주문 규)는 건문제와 함께 실종되었고, 1살이던 朱文圭(주문규)는 영락제가 아기까지 차마 죽일 수 없어 살려 주긴 했지만 이후 56년 동안 유폐되었다. 그는 AD 1457년 그의 칠촌 조카 천순제 덕에 풀려났으나, 아 기 때부터 유폐되어 평생을 감금되었서 인지 바깥 세상에 적응 하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제 3대 成祖 永樂帝(성조 영락제, AD, 1360∼AD, 1424)
AD 1398년 홍무제가 죽고 즉위했는데, 건문제와 그 측근들은 숙부 주체를 비롯한 다른 숙부들이 막강한 군권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황제권을 유린할 수 있는 것으로 우려하여 다섯 번왕을 없애는 등 각지의 번왕 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자 주체는 조카와 그 측근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북경에 서 거병, 건문제와 내전을 벌였다. 비록 주체의 전력은 건문제에 비해 열세였으나 주체 본인의 기량과 건 문제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승기를 잡은 정난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남경까지 몰아쳤고 건문 제는 궁에 불을 지른 후 행방불명, 결국 남경은 함락되었고 주체는 황제에 등극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서적을 편찬했으며, 이를 통해 유교를 통 치 이념으로 삼았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 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 시 설도 보안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만큼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AD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 한 이후 재위 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몽골을 친정했다.
하지만 막북 친정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는데 영락제는 영락 8년에서 영락 22년까지 전후 다섯 차례 에 걸쳐 막북에 출정했다. 그 중 네 차례가 달단과 올량합(우랑카이)를 대상으로 삼았고, 한 차례는 와자 를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친정은 세 차례가 규모가 컸고, 그 작전 지역도 알난하(금 몽공 악눈하), 홀란홀실온(금 몽골국 오란타팍 이남), 활란해자(금 내몽골 호륜호)와 굴렬인하(금 몽골 내의 도하 지류인 귀류하)등지로 나누어져 있다. 이후의 두 차례 친정은 모두 타타르의 아룩타이나 오이라트의 마흐무드가 곧바로 도주함으로써 직접 교전을 하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영락제는 베트남을 영토화시키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여 호왕조 베트남을 정복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조선의 태종과 협력하여 대마도 정벌을 추진하였다. 또한 왜구 관리를 위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하였다. 특히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보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국왕으로 봉하고 감합 무역을 실시 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원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정화의 해외 원정이다. AD 1405년에 첫 함대가 파견한 이후 AD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7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 어 동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명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 았다. 하지만 선덕제 재위 시기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해상 원정은 없었고 이후 명은 해금 정 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AD 1424년, 5번째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 결국 진중에서 향년 64세로 영락제가 죽었 다. 조선에서 많은 수의 공녀들이 명나라에 바쳐졌다.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현인 비 권씨, 여미인 갈혜장숙여비 한씨, 임순비, 이소의, 최미인, 정비. 송비, 황비, 그중 한 명인 권씨가 현 인비로 봉해졌고 환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 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서달의 딸)가 죽고 없어서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권씨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 중 한명의 공녀가 용케도 살아 남아 조선으로 귀환한 이도 있다.
제 4대 仁宗 洪熙帝(인종 홍희제 AD, 1378∼AD, 1425)
영락제와 인효문황후의 큰아들이며, 선덕제의 아버지이고 정통제와 경태제의 할아버지다. 참고로 어머니 인효문황후는 명나라 개국공신인 서달의 딸로 홍희제는 서달의 외손자다.
AD 1395년, 당시 연왕이었던 주체의 후계자로서 연왕 세자에 책봉되었다. 정난의 변 당시에는 연의 땅 을 맡아 지켜주어 주체의 총애를 받았고, 주체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주고치는 항상 인자 했으며, 자상했다고 한다. 주고치의 이러한 성격은 어머니 인효문황후의 영향을 받았다.
문무에 뛰어났지만, 어릴때부터 병약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비정상으로 뚱뚱 하며,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스로 걷기도 힘들어 수레를 타고다녀야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영락제 는 그를 폐위하고 차남인 한왕 주고후를 새로운 황태자로 삼는 걸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주고치가 장자 인 데다가, 주고후의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무산되었다. 그 후에는 그의 장남인 주첨기(선덕제)가 어렸을 때부터 황제의 자질을 보였고, 자신의 부인인 황태자비 장씨에 대한 총애가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 자리 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영락제는 궁궐을 자주 비우고 외정을 나갔으므로, 그럴 때마다 태자로써 황제를 대신하여 황제의 엄무와 정사를 맡아 보았다. 때문에 홍희제는 즉위하자마자 능숙한 유교 정치를 펼쳐, 정난의 변 당시 멸문당한 일가를 신원하는 등의 선정을 펼쳤다.
아버지의 팽창 정책에 부정적이었던 황제로 정화의 원정을 취소했으며, 또한 홍희제는 태생이 남경 출신 인지라, 춥고 황량한 북경을 싫어하여 말년에는 남경 천도를 검토하여, 황태자 주첨기를 보내 준비하도록 하였으나 병마에 시달려 재위 10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제 5대 宣宗 宣德帝(선종 선덕제 AD, 1399∼AD, 1435)
홍희제의 장남으로 휘는 瞻基(첨기)요, 연호는 宣德(선덕)이다
건국조 홍무제, 조부 영락제와 더불어 명나라의 몇 없는 명군 중 하나인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과감했으며 무예에도 소질이 있어서 할아버지 영락제와 아버지 홍희제의 총애을 받았다. 특히 잦은 원정 을 벌렸던 영락제가 어린 손자 선덕제를 원정에 자주 대동할 정도였다고, 그에 비해 아버지 홍희제는 문 에 치우쳤던 스타일이라 영락제는 홍희제보다 손자 선덕제를 더 후계자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다.
선덕제가 황태손으로 책봉되었기에 황태자였던 홍희제의 제위가 보장된 것으로 보일 정도라.
AD 1424년, 영락제가 죽고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이듬해 바로 죽는 바람에 27세의 나이로 명나라 제 5대 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 숙부인 한왕 朱高煦(주고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주고후의 반란을 진압했다. 주고후를 사로 잡은 뒤에 자금성 내부에 소요 정이라는 건물은 짓고 유폐해버렸다. 이후 선덕제는 자신의 숙부님의 근황이 궁금해 소요성에 행차하였 는데 주고후는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를 발로 차서 뒤로 넘어 뜨렸다. 선덕제는 크게 분 노하여 주고후를 붙잡아 구리 항아리에 집어 넣었고, 힘이 장사였던 숙부가 이 항아리의 뚜껑을 밀어 젖 히고 나오자 더욱 화가나 다시 집어넣고 항아리를 장작 더미에 달궈 그를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주고후의 아들 10명도 모두 처형되었다.
AD 1435년, 재위 10년 만에 향년 35세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는 어린 정통제가 즉위하고 토목 의 변을 겪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명나라 황실의 역사가 시작된다
선덕제는 조선 여자를 후비로 들였는데 이 때 후비로 들어간 공신부인 한씨는 한확의 누이 동생으로 인 수대비의 고모가 되며, 할아버지 영락제의 후궁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제 6대 英宗 正統帝 또는 天順帝(영종 정통제, 천순제 AD, 1427∼AD, 1464)
영종은 선종 선덕제의 장남으로, 선덕제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9세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의 할머니인 태황태후 장씨의 三楊(삼양)이라고 불리는 3명의 훌륭한 신하들이 보필을 해서 나라를 적절히 꾸려나갔다. 그러나 3양은 이미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이들이 은퇴한 뒤에 영종은 총애하는 환관 왕진이 전횡을 일삼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환관의 전횡 등으로 명나라 초기의 탄탄했던 조정은 해이해졌다. ad 1446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늘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명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족장 에센이 이끄는 오 이라트족이 명의 변방에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은 영종에게 친정을 간청했고, 여러 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황제 영종은 이를 받아들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그러나 이 군대는 전쟁과 무관한 이들까지 싸잡아 넣어 숫자 를 과시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군대의 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선발대가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했지만, 그 럼에도 영종과 왕진은 전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오이라트족에게 보급이 차단당한 명군은 고립되었고,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삽질을 거듭 일삼 던 왕진은 마침내 피살 당하였다. 에센의 오이라트족이 토목보를 포위하여 황제를 잡아갔다.
명나라를 혼내 주는 것을 넘어 황제를 포로로 잡는 의외의 성과를 거둔 에센은 다시 명과의 교섭을 시작 하려 했으나 북경 조정은 이미 영종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경태제가 즉위하니 교섭에서도 영종의 존재감은 별볼일 없어 영종을 송환했다. 그렇게 개망신만 당하고 돌아온 영종은 송환 되어 태상황이 되었으나, 형인 영종의 경태제에게 압박을 주었는지 영종은 남궁에 유폐되었다.
이렇게 영종이 유폐되자, 조정은 영종파와 경태제파로 나누었다. 경태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황태 제였던 영종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주견제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AD 1457년 1월 경태제가 병을 앓아 누눠 있는 중에 대장 石亨(석형), 태감 曹吉祥 (조길상), 徐有貞(서유정)이 정변을 일으켰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다. 폐위된 지 한 달후에 병사했다.
그렇게 영종은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전 연호를 그대로 쓰고 천순이라는 새로운 영호를 사용한다.
제 7대 代宗 景泰帝(대종 경태제 AD, 1428∼AD, 1457)
묘호는 대종으로 휘는 주기옥이며 선종 성덕제의 둘째 아들이자, 영종 정통제의 동생이다.
토목보에서 오이라트 에센 군에게 영종 정통제가 잡혀가는 변을 당하자, 명의 조정은 급히 세로운 황제 를 옹립하고 북경을 사수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 명나라 황실에는 나이도 적절하고 황제의 동생이기도 한 주기옥이 있었다. 그래서 주기옥은 새로운 명나라의 황제로 옹립되었고, 연호를 경태라 하 였다.
다음해 명의 군대가 오이라트 족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고 화의가 체결되자 존재감이 없는 정통제는 아무 조건 없이 석방된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 황실에는 어엿한 황제가 있었으니, 경태제는 돌아온 형에게 태 상황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형이었던 정통제의 존재는 경태제에게 아주 큰 위협이 되었으므로 경태제는 정통제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이래서 정통제는 명목상 태상황이었으나, 남궁에 유폐당한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정통제 파와 경태제 파로 나누워 버렸다. 그리하여 2년 후 AD 1452년, 본래 황태자 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나 주견제는 병으로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AD 1457년, 경태제가 앓아눕자, 정통제 파인 대장 石亨(석형), 태감 曹吉祥(조길상), 徐有貞(서유 정)은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켰다. 이렇게 정통제는 다시 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천순으로 바꾸 웠다. 그리고 경태제는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병사했다.
제 8대 憲宗 成化帝(헌종 성화제 AD, 1447∼AD, 1487)
묘호는 헌종이며, 연호는 成化(성화)이고 정통제의 맏아들이며, 생모는 貴妃 周氏(귀비 주씨)이다.
토목의 변으로 경태제가 즉위한 이후 잠시 황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아버지인 영종이 다시 즉위하여 무 사히 황위에 올랐다.
성화제 시기에는 변방에서 일어난 큼직한 사건(형양의 반란이나 광서지역의 반란 등)몇 개를 제외하면 대 체로 평온한 편이었으며, 대체로 원만한 치세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명사에서는 평하기를 인선의 치세 가 돌아왔다고 할 정도였으며, 명대 사람들은 성화-홍치로 이어지는 시기가명나라의 마지막 평화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23년, 끝까지 이대로 갔으면 좋아겠지만 나중에가면 실책을 계속해서 저지르기 시작한다.
말년에 성화제는 불교를 지나치게 믿어 승려들을 고관에 앉히는가 하면 환관들을 기용해, 권력을 잡은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또한 성화제는 19세 연상의 공숙황귀비인 萬貞兒(만정아), 통칭 만 귀비를 매우 총애하였다. 당대의 사회 상을 생각하면 거의 모자 관계 수준의 나이 차이인데 실제로 만정아는 성화제를 열 살때부터 모신 유모 같은 여인이었다.
성화제가 만 귀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신분도 낮고 궁녀 출신인 그녀를 황후로 만들려고 온갖 애를 썼 으나 신하들가 태후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오씨 성을 가진 여인을 황후로 삼고 만씨는 비빈 중 하나 인 귀비로 두긴 했으나 당연히 궁내 실세는 만 귀비였다
이 만귀비도 황제만큼이나 심각한 인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자 후궁들과 궁녀들을 대상으로 온 갖 패악질은 기본에, 성화제의 다른 후궁이 임신하면 기어이 낙태시키고야 말았다. 가까스로 태어난 황태 자 주우극은 모친과 함께 독살당했다. 이 때문에 성화제는 말년까지도 후사가 없었고, 환관이 숨겨서 기 른 주우탱이 나타나 겨우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 한편 만 귀비는 주우탱마저 죽이려고 하였으나 태후가 맡아 기르는 바람에 실패했다.
만 귀비는 나이가 든 후에는 뚱뚱해졌는데, 이 때문에 고혈압이 왔던지 궁녀에게 무슨 일로 화가 나 궁 녀를 때리다가 혈압이 올라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60세에 사망, 성화제는 이를 슬퍼한 나머 지 만 귀비가 저승으로 떠났으니 내가 살아 뭐하겠소, 하는 말을 남기며 시름시름 앓다 결국 같은 해에 죽고 말았다.
제 9대 孝宗 弘治帝(효종 홍치제 AD, 1470∼AD, 1505)
태아 때부터 부친 성화제의 후궁인 만 귀비에 의해 낙태약으로 독살 될 뻔했으나 무사히 태어났다. 그 러나 만 귀비의 끊이지 않는 핍박 때문에 어머니가 결국 만 귀비에게 독살 당하고 민가에서 몰래 양육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고난이 많은 소년기를 보냈다.
주우탱이 태어나자 만 귀비는 갓 태어난 주우탱을 죽이라고 환관에게 시켰는데 환관은 그런 아기인 주 우탱을 보면서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걸 각오하고 아기를 궐 밖으로 빼돌려서 자신의 지인이 사는 집에 숨겨 기르게 했다. 당연히 만 귑에게는 죽였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후 성화제가 후사가 없 어서 걱정을 하자 이 환관이 자신이 빼돌린 황자가 있다고 보고를 했고 이에 주무탱은 성화제의 명령에 따라 입궁하게 된다.
황태자가 된 후 황제 수업에 충실했으며 AD 1487년, 성화제가 죽자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 신하들이 만 귀비의 전횡을 징계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홍치제는 이를 그냥 없던 일로 했다.
성화제 때까지 혼란에 빠졌던 국정을 수습하고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재정비하여 문형조례를 반포했 다. 외정적으로는 건주 여진과 타타르 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AD 1505년, 감기를 앓다가 어의가 가져온 약을 마기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져 재상들에게 태자를 부탁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재위 기간은 18년이었지만 향년 34세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 다.
제 10대 武宗 正德帝(무종 정덕제 AD, 1491∼AD, 1521)
정덕제 주후조는 어릴 때만 해도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불교에 대해 잘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덕제 는 황제가 된 후엔 방탕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환관 劉瑾(유근)을 너무나 총애했고, 결국 유근은 권신이 되었다. 재위 초반에 일어났던 유육유칠의 난 도 유근의 부하가 유근을 믿고 가혹하게 농민들을 쥐어짜다 일어난 결과였는데, 이후 유근은 황제의 권 위를 등에 업고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다가 반역까지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형에 처해졌다.
미녀들을 모아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정작 후계자를 얻지 못해 사망할 당시 아들도 형제도 없 어서 제위는 사촌동생인 주후총에게 넘어간다. 쵶후도 뱃놀이 하다 물에 빠져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한다.
제 11대 世宗 嘉靖帝(세종 가정제 AD, 1507∼1567)
성화제의 4남이자. 홍치제의 이복동생이 되는 흥헌왕 주우원(예종)의 차남이다. 그러니까 전임 황제인 정덕제에게는 사촌동생이다. 만력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즉위당시 겨우 15세이다.
AD 1521년 즉위 당시에 가정제는 대신 양정화 등이 건의한 바를 따라 정덕제의 측근들을 처치하고 그 악정을 고침으로써 민심의 일신을 꾀했다. 당연히 새 황제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히 놓았다.
황제는 할아버지 성화제처럼 도교를 신봉하여 스스로를 신선으로 칭하고 긴 도호를 붙이는가 하면, 월 경혈과 아침 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다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또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 슬리게 하면 사정없이 매를 쳤다. 명나라 황제 가운데 즉위 후 가장 빨리 여색에 빠졌는데, 이것도 도교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총애하는 도사들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이 그나마 다행일까?
그가 얼마나 궁녀들을 혹사했는지, 가정 21년(AD, 1542년)황제의 행실을 견디지 못한 궁녀 16명이 애 첩과 동침하던 황제를 목졸라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 사태를 임인궁변이라 한다. 궁녀들의 계획이 성공 하여 가정제가 죽었다면 역사상 최악의 죽음을 당한 황제가 되었겠지만 궁녀들이 긴장을 타서 매듭을 잘못 지은 바람에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비녀로 찔러댔지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와중에 황제가 계속 죽지 않자 한 궁녀는 두려워서 황후한테 보고 하였고, 황후가 사람을 이끌고 와서 황제를 구해주 었다. 물론 가정제 암살을 시도한 궁녀 16명 저원이 저자거리에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가정제가 통치한 16세기 중엽은 북로남왜, 즉 몽골과 왜구의 침공으로 나라가 어지로운 시기였다.
북쪽으로는 토목의 변 굴욕을 겪은지 101년 후인 AD, 1550년에 몽골의 알탄 칸이 베이징을 포위한 경 술의 변이 일어났다.
제 12대 穆宗 隆慶帝(목종 융경제 AD, 1537∼AD, 1572)
묘호는 목종이며 휘는 재후고 가정제의 3남으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康妃 杜氏(강비 두씨)였다.
융경제 주재후는 유왕에 책봉되었다. 융경제가 즉위할 당시에는 융경제의 두 형 주재기, 주재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장자로 간주되어 자연스럽게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융경제는 가정제 생 전에 태자로 책봉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가정제가 도사 도중문의 주장인 二龍不相見(이륭불상견)을 맹 신했기 때문이다. 가정제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차남인 주재예가 죽자 이룡불상견을 맹신했다. 대 례의 의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가정제로서는 후사를 두는 것이 중요했으며, 태자를 다시 세우면 그 또 한 요절할까봐 아예 태자를 책봉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융경제는 태자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즉위하게 되었다.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문제점을 파악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왜구를 강력하게 진압함과 동시 에 융경제 원년 복건순무어사 도택민이 바다의 신 마조의 고향, 미주도를 동서 무역의 요충지로 삼아 개방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했다. 목종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종이 제정한 법률을 과감하게 고쳐 국외무역을 허가하였다. 국외무역을 허가함과 동시에 명의 무역량은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당시 포르투 갈 상인과 같은 외국들이 중국에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한 연구에 따르면 융경제가 국외 무역을 개방한 이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입된 은의 양이 3억냥을 넘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1/3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한 가정제 시기를 몽골의 문제점을 해결하였는데, 당시 몽골의 왕 엄답은 조공무역을 줄기차게 요구 했다. 그는 몽골족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조공을 통해 얻고자 했다. 가정 33년 백련교의 지역 교주 조천이 명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몽골로 집단 망명했다. 그는 명나라 침략을 수시로 종용했으며 침략 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몽골군의 무기 개량에 큰 공적을 세워 엄답이 변방을 침입할 때는 사전 에 조전의 거처로 찾아가 조언을 구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조전은 아예 엄답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명나라에서 도망오거나 포로로 잡아온 한족을 활용하여 문자를 아는 자는 군사와 행정엄무를 맡기고 그렇치 않는자는 토지를 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또 대규 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다판승성(금 내몽고 호화호특)을 건설했다. 그 동안 유목 생활을 하며 지냈던 엄 답은 이곳에 정주하며 자뭇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시작했다.
엄답의 손자 파한나길이 명나라에 투항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엄답은 황제로 등극하여 명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전을 희대의 매국노이자 불구대 천의 원수로 여겼다. 조부 엄답와의 갈등으로 명나라로 망명을 선택한 파한나길은 일족을 거느리고 대 동 패보호에서 투항을 원했다. 대동총병 왕숭고와 순무 방봉시는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즉시 조정에 보고 했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은 파한나길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목종은 우리 대명국을 흠모하여 왔으므로 거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몽골에서는 엄답의 아내가 명나라 조정에서 자기 손자를 죽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날마다 엄답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손자를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답도 자기 때문에 손 자가 명나라로 달아난 것을 후회했다. 무력으로 명나라 변방을 공격하면 명나라 조정에서 손자를 풀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동으로 진격했다. 왕숭고는 몽골 기병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엄답을 설득하는 게 유리하다 판단하여 백호 초숭덕을 엄답 진영으로 보내 파한나길을 죽이 지 않고 예우해주고 있다고 알렸다. 엄답은 왕숭고의 호의에 감동하여 조전 등 그동안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한족 출신 관리들을 명나라로 압송했다. 왕숭고도 파한나길을 돌려보내서 엄답의 성의에 화답했 다. 조전은 북경으로 끌려가 능지처참 당했다. 융경 5년 목종은 염답을 순의왕으로 책봉했다. 엄답은 명 나라 황제에게 신하국의 예의를 갖춤으로서 몽골족의 생존과 안정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있는 실리 를 챙겼다. 목종은 황제로서 위엄을 갖추고 북방을 안정시키는 통치력을 발휘했다.
왜구 문제가 잠잠해진 뒤 남쪽에서활약하던 척계광을 북쪽으로 불러들여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그 결 과 명나라의 서쪽과 북쪽 국경에서 쏠쏠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그 덕에 타타르왕의 평화 협상을 체결 하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대체로 유능한 신하를 알아보고 적제적소에 활용했다는 점, 근검절약하고 비교적 부지런한 편에 속했다 는 점에서 좋은 황제의 자질이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황제가 늘 그렇듯이 취약점이 있었다. 지나 치게 여색을 밝혀 수명을 단축한 호색한이었다.
이러한 호색과 최음제의 남용은 급기야 그의 몸을 망가트렸다. 결국 36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재위 기 간은 겨우 6년이었다.
제 14대 光宗 泰昌帝(광종 태창제 AD, 1582∼AD, 1620)
주상락은 만력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본디 신분이 미천한 궁녀였다.
만력제의 정실부인 왕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만력 9년(1581) 겨울의 어느날, 만력제가 어머니 이태 후를 배알하러 자녕궁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이태후가 외출 중이었을때 시중을 들던 왕씨와 한순간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운우지락을 나누었다. 만력제는 왕씨에게 머리장신구를 하사하고 간통을 비밀에 부 쳤다.
이듬해(AD, 1582년),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궁녀 왕씨가 황제의 은총을 입어 회임했다는 얘기 였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침내 이태후의 귀에 들어갔다. 이태후가 아들 만력제에게 사실 여부 를 물었지만, 만력제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묵묵부담이었다. 이태후는 내시에게 내기거주를 가져오하 고 했는데, 내기거주는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확히 기록한 문서였다.
사실을 확인하고 뜻밖에도 이태후는 기쁘했다. 대명천하의 종묘사직을 수호할 원손의 탄생을 얼마나 학 수고대 했던가? 이태후도 신분이 미천한 궁녀 출신이었다. 왕씨가 원손을 낳아준다면, 궁녀라고 해서 냉 대할 이유가 없었다. 신종은 지엄한 모후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해 6월에 회임한 왕씨를 공빈로 책 봉했다. 같은해 8월 왕씨는 신종의 장남 주상락을 낳았다.
하지만 만력제는 숙빈 정씨를 총애했으므로 공비 왕씨는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주상락과 함께 별 궁에서 긴 세월 동안 숨을 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만력제는 여러 비빈들 가운데 유독 정숙빈을 총애했 다. 정숙빈 또한 신종의 둘째 아들 주상서를 낳았지만 주상서가 요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력제는 여전 히 정숙빈을 총애했다. 황제의 사랑에 보답하듯 만력 14년(AD 1586년) 셋째 아들 주상순을 낳았다.
미천한 궁녀에서 귀빈까지 품계가 올라간 정귀비는 흥분했다. 아들 주상순을 태자로 옹립하고 난 뒤 훗 날 아들이 황제의 대업을 이어받는 날에는 태후로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을 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신종의 장남 주상락이 엄연히 살아 있는 상황 에서 셋째 아들을 옹립하는 일은 법도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종이 주상락을 미워하고 있기 때 문에 황제만 잘 구슬리면 서열을 무시하고 태자로 옹립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정귀비는 만력제에게 아들 을 태자로 삼아달라고 애원했고, 만력제는 황궁의 서북쪽에 있는 대고현전에서 부처님에게 예불을 올릴 때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밀약을 했다.
대신들은 황제의 장남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경양궁에서 숨어 지낸다고 크게 불만스러웠다. 대신 들이 연이어 상소하자 만력제는 마지못해 주상락이 13세가 되었을 때 강학을 윤허했지만, 태자교육의 규 정에 맞게 강학을 진행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귀비는 주상락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죽이려고 끓임없이 음모를 꾸몄다. 하루는 정귀비가 주상락이 하루종일 궁녀들과 놀아나 동정을 잃었다고 모함을 했다. 신종 이 왕공비와 주상락이 거주하는 경양궁으로 환관을 보내 사실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황제가 보낸 사람들 은 두 모자에게 어떤 꼬투리도 잡을 수 없었다.
만력 29년(AD, 1601년), 정월 신종이 자녕궁으로 가서 모후를 배알할 때였다. 이태후가 주상락의 나이가 이제 20세가 되었는데도 왜 태자책봉을 미루느냐고 묻자, 만력제는 주상락이 도인의 소생이기 때문이라 고 답했다. 이태후는 황상도 도인의 소생이 아니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도인이란 궁녀의 이칭이다. 이태후도 궁녀 출신이기 때문에 아들의 언사에 크게 분노했다.
15년 동안 끌어왔던 태자책봉 문제는 이렇게 이태후가 개입하여 결정되었다. 같은해 10월 주상락은 태자 로, 주상순은 낙양 일대를 영지로 하는 복왕으로 책봉되었다. 번왕이 된 주상순은 영지로 떠나지 않고 계 속 황궁에 머물렀다. 신종과 정귀비가 그를 태자로 옹립할 속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력제는 임종 전에 주상락에게 정귀비를 황후로 책봉하라고 유언했다. 실무를 맡은 예부시랑 손여유가 역대왕조에서도 이런 전례가 없다며 정귀비의 황후책봉을 강하게 반대했다. 정귀비의 발호를 우려한 대 신들의 반발에 태창제는 어명을 철회하는 수 밖에 없었다.
태창제에게는 조상들처럼 여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약점이 있었다. 정귀비는 일종의 화해의 제스처로 미 녀들만 가려낸 후궁 8명을 보냈고 태창제는 두말 없이 받아들였다. 밤에는 미녀들과 난잡한 성생활을 즐 겼고 이것이 건강을 악화시켰다. 결국 광종은 등극한지 10일 만에 갑자기 쓰러졌다.
병석에 누운 황제를 진찰한 사람은 태의원의 어의가 아니라 정귀비의 시중을 들던 환관 최문승이었다. 정귀비가 최문승에게 대황으로 제조한 지사제를 제조하여 광종에게 바치게 했다. 광종은 최문승이 제조 한 약을 먹고 설사를 견디지 못해 혼절까지 했다가 가까스로 깨어났다. 동림당 대신들은 의술을 모르느 최문순의 약 처방에는 필시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광종은 대신들을 침소로 불러 국정이 중요하니 마음을 다하여 나랏일을 보살피고 짐은 쇠약해진 몸을 회 복시키겠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양련을 가르키며 참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는 신하라며 충정을 칭찬했다. 결국 최문승은 황궁에서 쫒겨나고 양련은 고명대신에 임명되었다. 며칠 후 수명이 거의 다 했음을 직감 한 광종은 내각보수 방종철에게 홍려시의 관리가 만든 선약에 대해 묻고는 어서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홍려시는 조회, 종묘제사, 경연, 책봉 등 궁궐의 크고 작은 일들을 관장하는 황실 직속의 관청이다. 이 곳에서 단약을 제조하여 진상했다는 얘기를 들은 광종은 죽음을 앞두고 단약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방종철은 내각대신들과 논의 끝에 그를 내쳤다고 했으나 광종은 노기를 띠며 재촉했고 죽기 전날, 홍려 시승 이가작이란 인물이 바친 홍려시라는 붉은 환약(홍환)을 먹었다.
그런데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아서 하나를 더 먹었는데 그 다음날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홍환인이다. 역시 아직 살아있던 정 귀비의 암살이 점쳐지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를 보면 오래 살았더라도 결코 평 범한 황제로 남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연호
원래 황제가 즉위하면 그 해에는 전임 황제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그 다음 해부터 세 연호를 만들 기 때문에 AD 1620년은 만력 48년이고, 태창 원년은 AD, 1621년 태창 원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태 창제가 즉위한 뒤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AD 1621년은 천계 원년이 되었고, AD, 1620년(정 확하게는 그 중 태창제 사망부터 연말까지)를 태창 원년으로 쓰게 되었다.
제 15대 熹宗 天啓帝(희종 태창제 AD, 1605년 12월 23일∼AD, 1627년 9월 30일)
묘호는 희종, 휘는 유교이며 연호는 天啓(천계)이다
희종 주유교는 태창제 주상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력 41년(AD 1613년), 주상락이 태자였을 때 태자 비 곽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다시 태자비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는 엄귀비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 측실부인 중에서 태자비를 고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재인, 선시, 숙녀 등 품계가 낮은 측실들이 있었을 뿐이다. 만력 35년(AD 1605년) 재인 출신 왕씨가 주상락의 장남 주유교를 낳고 만력 47년(AD 1616년)에 사망했다.
신종은 장남 주상락을 냉대했다. 주상락의 생모 왕공비가 신분이 천한 궁녀 출신이라고 싫어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간사한 정귀비의 간계에 놀아났기 때문에 장남을 멀리했다. 신종의 장손으로 태어난 주 유교도 조부의 관심 밖에 있었다. 주유교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정귀비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 어린 시절을 불안 하게 보냈다. 아이 어린 주유교가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음산한 궁궐에서 유일하게 즐긴 일은 목공예였다.
16세의 나이로 즉위해 23세로 요절하기까지 7년간 재위했다. 재위기간 동안 국정의 돌봄보다 목공예와 또 귀뚜라미 싸움을 즐겼다. 이 때문에 천계제는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환관 魏忠賢(위충현)에게 정사를 모두 넘긴 뒤 취미생활인 목공과 귀뚜라미 싸움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뇌물이 끓이지 않고 별의별 막장 짓을 일삼았다. 그렇게 환관 위충현이 이선시와 결탁하여 천계제의 무능함과 무관심을 이용해 난동을 부려 명나라의 정 치를 막장으로 만들었을 때 명나라는 여진족이 요동을 다 장악하고, 농민들은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이 었다. 그러던 중 천계제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요절한다.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졌는데, 과거 정덕 제의 죽음을 너무 염두에 둔 나머지 생긴 노이로제가 사인이었다. 또한 방사(방술사)의 말을 믿고 옛 금나라 황능 일대를 파괴했다. 천계제는 누르하치가 저렇게 잘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금나라 황능의 왕 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진족의 용운이 아직 끓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풍수 를 파괴하고 용맥을 잘라 왕기를 없앤다는 신묘한 방책을 받아들였다. 그는 군대를 보내 금나라 왕능 지역을 파괴하고 불지르고 뽑은 다음 그 일대 산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게다가 천계제는 인원을 두 차례 파견하여 지상, 지하, 바깥, 내부 까지 구룡산 능원에 있는 금나라 황능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파냈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을 철거한 후 각 황능의 지궁을 파헤쳤고, 땅바닥에 흩어진 석주나 난간 같 은 건축 부자재와 돌맹이로 묘실을 메워버렸다. 이런 방식으로 여진의 왕기를 단절시키려 했으며, 풍수 사의 조언대로 금 태조의 예릉이 있던 용두에 흙을 파헤쳐서 용머리를 자르고, 용머리 아래에 있는 목 부위에도 큰 구멍을 파놓았다.
또 예능이 있던 자리에는 고탑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關羽(관우)와 南宋(남송)의 명장 牛皐(우고)의 영 혼을 불러내서, 명나라가 누르하치에 대항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후금(청나 라)이 강성해지자 그들의 조상들인 금나라 황제의 무덤을 파괴하여 막아보려는 주술적인 행위였으나, 이는 같은 여진족인 후금을 자극하여 침략원인을 제공하는 최악의 판단이었다. 이를 천계굴능 사건이 라고 부르는데, 후세의 고고학자들에겐 큰 골칫거리를 던져준셈, 이때 건립한 관제묘와 탑은 지금도 남 아있다.
아버지 태창제는 재위 29일 만에 죽고 말아 천계제는 정말 졸지에 황제가 되었다. 그의 정비 장 황후 는 항상 환관의 횡포를 견제한 덕에 숭정제 때 효애철황후라는 명칭을 받고 무사하게 지냈고 이자성의 난 때도 끌려나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자결했 다.
제 16대 毅宗 崇禎帝(의종 숭정제 AD, 1611∼AD, 1644)
휘는 유검이고, 태창제의 5남으로 천계제의 이복동생이다. 만력 38년(AS 1610년)에, 주상락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숙녀 유씨이다. 부친은 모친을 총애하지 않았고 주유검 역시 소실의 소생이라 는 이유로 사랑하지 않았다. 게다가 만력 42년(AS 1614년), 주유검이 5세 때 생모 유씨가 갑자기 사망 했다. 명사에서는 유씨가 광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쫓겨나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복형 주유교가 황제로 등극한 후 천계 3년(AD 1622년) 13세 나이로 신왕에 책봉되었으며, 천계 7년 (AD 1627년) 8월 희종이 붕어한 후 제위를 계승했다. 이복형과는 달리 강학에 열중하고 경전을 즐겨 읽었으며, 역대 성군과 현신들의 어진 정치와 가르침을 진정으로 배우고자 했다. 문화전, 무영전 등 궁 궐 곳곳에 그들의 초상화와 잠언을 걸어놓고 귀감으로 삼았다. 또 치국의 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의 지가 강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의심이 많고 독단적이라는 결점이 있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 숭정제는 생모 유씨를 효순황태후로 추증하고 시신을 광종의 경릉에 합장했다. 원한 을 품고 죽은 유씨가 아들이 황제가 된 덕분에 사후에라도 태후 자리에 오른 것이다. 숭정제는 외조모 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모시고 와서 영국태부인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동안 핍박을 당한 외척들을 우대하여 생모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숭정제는 생모가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이별한 까닭에 생모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 았다. 생모와 함께 지낸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초상화가 장엄한 의식속에 정양 문을 통해 황궁으로 들어올 때 숭정제는 오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끓은 채로 초상화를 맞이했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신하들도 따라서 울었다.
숭정제는 서양과학 기술의 도입과 歷法(역법)을 개정하여 서양역법을 도입하였다. 또 서양화기를 도입하 여 대포를 만들어 외적의 침략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명나라 말기에는 안으로 제 14대 신종 이래 당쟁의 여파가 남아 관료들 간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 고, 밖으로는 장병이 모두 부패하여 군사력도 약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후금 을 대비하기 위한 전비의 과다 충당으로 농민들은 중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 수해, 심각한 기근까지 겹쳐 도시에서는 폭동, 농촌에서는 반란이 빈발하였다.
이러한 반란군 중에서 샨시(陝西, 섬서)성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농민군은 규율이 엄격하고, 민생안정책 을 세워 민심을 모아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검약한 생활을 하 면서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를 부흥시키려고 열의를 다했다. 숭정제는 의심이 많고 신하들을 잘 믿지 않 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중신들을 여럿 죽이는 실수를 저지른게 된다. 특히 적의 간계에 빠져 山海關(산 해관)에서 만주족을 지키고 있던 명장 袁崇煥(원숭환)을 죽인 것은 명을 파국으로 이끈 큰 실수라고 지 적하고 있다. 명의 멸망 원인이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숭정제의 시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 한 이유에서이다.
결국 시안(西安, 서안)을 근거지로 大順(대순)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크게 세력을 펼치던 이자성 군대가 숭정 17년(AD, 1644년) 3월 17일에 베이징을 공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18일 밤에 세 아들 을 변장시켜 피신하게 하고, 적군의 손에 욕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빈과 공주를 자신의 손으로 죽 였다. 또 숭정제는 황후에게 자살을 명하고 자신은 옷을 갈아입고 충실한 내관 왕승은과 함께 景山(경 산)으로 올라가 수황정 누각 앞의 괴목에 목을 매어 자결하므로써 백성에게 사죄를 표했던 것이다.
베이징을 함락란 이자성은 숭정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명의 관료에게 숭정제와 주황후의 유해를 서 둘러 치우도록 명하였다. 숭정제는 즉위 후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온 정력을 쏟은 나머 지 미처 자신의 능도 미리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료들은 우선 숭정제의 유해를 측실의 전 귀비 묘에 넣기로 하였다. 전귀비 묘를 파고 거기에 숭정제를 한 가운데 놓고, 좌우로 주황후와 전귀비 를 매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료 출처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