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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제키바시와 러`일 전쟁 만제키바시
현재 다리는 1975년 대마 종관도로(국도382호) 개통때 새로 만든 다리로 본래 다리는 현 다리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옆에 있었다.
만제키바시에서 본 인공 수로
1904년 러`일 전쟁 때 일본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곳이다. 오른편을 자세히 보면 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보인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 를 단절하고 대(對)러시아 전쟁을 결정하였다. 2월 8일, 육군 선발대가 우리나라 인천항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일본 해군이 전격적으로 요동반도의 뤼순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우리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채택한 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하여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 ·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 번째 대규모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서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마도 주변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대마도 아소만에 미리 어뢰정을 주력으로 한 수뢰 특공단을 대기시켜 놓고 있다가 발틱함대가 대마도 동북쪽 지점에 이르자 만세끼운하를 이용하여 적 함대의 후면과 측면을 기습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한 후 주력 함대(우리나라 진해만에서 출동)가 러시아 발틱 함대의 정면을 가로막고 화력을 퍼부어 천하무적이라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켰다.
결국 이 전투는 볼셰비키혁명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만 러시아제국이 종말을 고하게되는 서곡이었고, 이렇게 러시아를 굴복시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일본은 1905년 18월에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 한·일병합을 단행하였다.
만제끼운하 위에 걸쳐진 다리는 1904년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총 3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였다. 지금의 다리(1975년 개통)는 처음보다 약 10M 정도 이동된 자리이며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 섬을 한 바퀴 돌아가는 불편을 없애고 군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이다. 이 지역의 수심은 4.5~5.1m이고 폭 40~65m, 길이 210m이다.
<출처;empas.com/sonsan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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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문보기 글쓴이: 너와집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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