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킴스특허법률사무소
 
 
 
카페 게시글
일본 스크랩 대마도(2) - 와타츠미 신사 외
킴스특허 추천 0 조회 44 09.10.03 2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와타츠미 신사



 
‘토요타마쵸(豊玉町)’의 상징인 이 신사는 일본 건국신화의 주역인 하늘신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와 용왕의 딸 ‘토요타마히메(豊玉姬)’를 제사지내는 해궁(海宮)으로 바다 신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신사이다.

  가야의 김수로왕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와 세웠다는 설과 장보고 장군의 소가(小家)였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본전 정면의 바다 속에 서 있는 토리이(신사 문)는 만조 시 2m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가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신사 뒤로 돌아가면 ‘토요타마히메(豊玉姬)’의 무덤으로 알려진 석관묘(실제는 묘가 아니고 제를 지내는 장소로 판단된다)가 외롭게 서 있고 주위엔 울창한 숲과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신사가 있는 곳의 행정구역 이름이 ‘토요타마쵸(豊玉町)’인데, ‘토요타마히메’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라한다. 대마도에서 아주 귀한 수백 년 묵은 海松이 신전 뜰에 심어져있다. '쵸'는 우리나라 면에 해당되는 행정구역이다.  
 


 
 
이 신사는 출입문인 토리이가 바다속에 있기에 신사로 들어가려면 예전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지금은 매립 공사를 해서 토리이 3개만 상징적으로 바다속에 있고 나머지는 육지에 있다.   
 
 
 
 
[일본의 건국 신화와 '와타츠미 신사']
 
 일본 황실의 족보를 보면, 고사기(古事記)의 신화에서 보았듯이 많은 신들을 조상신으로 해서 황실의 계보가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것이 소위 건국신화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결국엔 신화적 영역에서 현세적 영역으로 변신하면서 맥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까미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강림한 ‘니니기(彌微藝)’의 아들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가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을 찾아 헤매다가 용궁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용왕의 딸 ‘도요다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3년을 보낸 후 낚시 바늘을 찾아가지고 나왔는데, 그 때는 아내가 아기를 배어 만삭이 되었으므로 같이 뭍으로 나오지를 못하였다. 며칠 뒤 풍랑이 심한 어느 날 풍랑을 타고 여동생 ‘다마요리히메(玉依姬)’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 뭍으로 나왔다. 해변에 손수 산옥을 짓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남편에게 당부를 하였으나 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결국 큰 뱀이 괴로워 나뒹구는 꼴을 엿보임 당했다고 화가 난 ‘도요다마히메’는 낳은 아이를 해변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우나사까(海坂, 용궁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나타나고, 이곳을 메우면 사라진다는 곳)를 다시 메워서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고사기에 써 있다. 이 때 낳아서 버린 아이가 별명을 ’이소라(磯良)‘라고 하는 ‘우가야후기아에즈(鵜茅葺不合)’신이고, 그 신이 다시 용궁의 차녀, 즉 이모인 ‘다마요리히메’신과 결혼하여 처음으로 인격화 된 천황 ‘진무덴노(神武天皇)’을 낳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사람으로서의 초대 천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지금의 황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이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 ‘와다즈미(和宮)’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니이’지역이야말로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와다즈미’의 ‘와다’는 우리말의 바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마도에서는 지금도 바다의 후미진 곳을 ‘와다(わざ)’라 부르고, 일본의 옛말에서도 바다를 ‘와다(わざ)’라고 했다. ‘쓰미(つみ)’의 ‘つ ’는 조사이고, ‘み’는 신성한 뱀을 뜻한다고 ‘나가도메’선생이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와다쓰미’란 다름 아닌 바다의 용궁이란 뜻이다. 오늘의 첫 일정은 이 용궁신화의 발원지 ‘와다쓰미’신사를 찾아보는 것이다.

  ‘니이’읍내를 빠져 나와 오른편으로 호수같은 바다를 끼고 바다를 메워 축조된 길을 따라 얼마쯤 갔을까, 마치 잔잔한 호수같이 보였던 ‘니이아소우만(니이쪽으로 파 들어간 아소우만)’ 깊숙한 어귀에 정강이쯤이 물에 잠겨있는 ‘토리이’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50여m 간격으로 물에 잠긴 또 하나의 ‘토리이’가 보이고, 같은 간격으로 세 번째가 보이더니 바로 그 곳에 ‘와다쓰미’ 신사가 있었다.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세 번째가 되는 ‘토리이’는 육지와 바다의 경계지점에 서 있었는데, 그 곳에서 주위를 살펴본즉 이곳까지 들어온 길은 물론이고, 신사의 본당까지 약 100여m 이르는 모든 지역이 원래는 바다였던 것이 분명하다. 우선 넓은 주차장까지 조성해 놓은 품이나 세 번째 ‘토리이’형식이 다른 것들은 가로 걸쳐 놓은, 다시 말해 하늘 천(天)자에 비한다면 가로 그은 첫째 획과 둘째 획이 모두 네모진 통돌로 된 것인데 반해, 모두 둥근 통나무로 가로지른 형식으로 만든 것만 보아도, 필경 대마도에 남북종단 자동차도로가 건설된 뒤에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한 매립지가 틀림없다. 따라서 옛날에는 이곳에 와서 참배를 하려면 배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당 쪽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바다에서 본당까지 100여m가 넘어 보이는 긴 수로가 광장 왼편에 나있고, 20명 이상이 탈 수 있는 배가 본당 앞 수로 위에 준비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물 위에 밑돌을 받쳐 지어 올린 참배자 휴게소도 차려 놓았지만, 아무래도 실용적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수로는 분명히 바다에서 본당근처까지 나 있지만, 수로를 가로지른 찻길과 그 밑으로 흐르는 수위와의 공간의 차가 10센티미터도 안 돼, 배가 그 밑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이곳의 옛 모습의 맥을 상징적으로라도 이어 놓았다는 데 뜻이 있는 듯 했다. 즉 본당 앞까지가 원래는 모두 바다였다는 사실이다.
 


 
 
      본당 왼편에 놓여 있는 배. 지금도 신사에 큰행사가 있을 때는 사용한다고 한다.

 
  수로의 중간쯤에 있는 폭이 넓은 연못 가운데에, 위에서 보면 세모꼴이 되게 ‘토리이’ 세 개가 서로 모서리를 맞물고 물속에 서 있고, ‘이소라에비스(磯良惠比須)’라고 써 놓은 안내문이 옆에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이소라에비스’가 놓여 있는 곳이다. ‘이소라’는 용궁의 장녀 ‘도요다마히메’의 아들 ‘우가야후기아에즈’의 별명이다. 산옥에서 아이를 낳을 때 추한 꼴을 보였다고 버리고 간 바로 그 갓난아이의 별명이다. 그렇다면 여기가 버리고 간 그 장소란 말인가? 기록에 보면 이 신사에는 ‘이소라에베스’라고 불리는 전면에 비늘 같은 구열(龜裂)이 있는 바위가 있다는데, 예로부터 금줄을 쳐서 신성하게 모셔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세모꼴로 연결해서 세워놓은 ‘토리이’에는 모두 금줄을 쳐놓았다. 하지만 비늘이 있는 바위가 보이지를 않았다. 더 좀 자세히 들여다본즉 세모꼴 ‘토리이’ 한 가운데 거무스름하니 만조 때라서 보이지는 않지만은, 분명한 바위 그림자 같은 것을 물밑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물이 빠졌을 때 본 '이소라 에비스'

 
 
  이 신사의 본당 뒤로 난 길을 따라 우거진 숲 속을 올라가다 보면, 우선 발 밑 주위의 풀숲 사방에서 무엇인가가 마구 움직이는 섬뜩함에 놀라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니 의외로 큰 밤톨만한 바닷게들이었다. 이런데까지 바닷게가? 하지만 만조 때라 필경 바닷물이 이곳까지 스며들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본당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와다쓰미신사’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또 하나의 ‘토리이’가 있어 들어가 보니 ‘도요다마히메’의 묘였다. ‘도요다마히메지분모(豊玉姬之墳墓)’라 새겨 놓은 지름이 40Cm는 족히 될 둥글넓적한 돌비석을, 약 30Cm 높이가 될 만하고 펑퍼짐한 네모꼴이 세로나 가로의 길이가 1.5m 쯤 되는 돌무지 위에, 아주 단정히 올려놓았다. 큰 금줄을 친 고목과 바로 그 옆에 대략 우리 키만한 검고 둥근 큰 바위가 배경처럼 뒤에 서 있어서, 그 형상이 마치 첫애 돌날 받은 아이를 상 앞에 고여 앉히고 부모들이 감싸듯 둘러앉아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있는 장면 같았다.

  아이만 낳고 용궁으로 돌아갔다던 ‘도요다마히메’의 무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좀 더 살펴보면, 우선 ‘도요다마히메’의 분묘라고 새겨 놓은 비석이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너무도 이질감이 든다. 특히 반석처럼 깔고 앉은 돌무지와 그것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검은 바위나 고목들의 고색창연한 풍모에 비하여 너무도 새것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근래에 ‘토리이’와 함께 첨가 설치해 놓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뒤에 ‘나가도메’선생의 글을 읽고서야 알았지만 ‘와다쓰미’ 본전 뒤편에 ‘도요다마히메’의 분묘라고 전하는 천연의 암장(岩場)이 있어서, ‘토리이’를 세우고 금줄까지 쳐 놓았는데, 고고학적으로 볼 때 분묘는 아니다. 그 형태로 보아 분명히 ‘이와구라(盤座, 신령이 머물고 있는 곳)’로서, 신사가 이곳에 있기 이전에는 이 ‘이와구라’가 제를 지내는 제장(祭場)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돌무지가 바로 ‘이와구라’였던 것이다.

  ‘와다쓰미’신사의 제신(祭神)은 ‘히고호호데미’와 ‘도요다마히메’로서 하늘과 바다가 영합한 축복을 기리며 제사를 드려온 곳이다. 본전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 한가운데까지 ‘토리이’다섯 개가 직선으로 까마득히 늘어서 있는 경관에서, 가히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연상케 한다. 이 ‘와다쓰미’신사를 『대주신사지(對州神社誌)』에서는 ‘와다쓰미궁(渡海宮)’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의미 없는 일본식 이두(吏讀)식으로 붙인 이름에 비하여,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 분명한 이 이름만 보아도, 이곳과 우리와의 짙은 관계를 짐작케 한다.  
                                                    <인재환의 『대마도 우리역사 답사기』에서 발췌 수록>
 

만제키바시와 러`일 전쟁

 




 
 
 
만제키바시
현재 다리는 1975년 대마 종관도로(국도382호) 개통때 새로 만든 다리로 본래 다리는 현 다리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옆에 있었다.
 


 
 
만제키바시에서 본 인공 수로
 1904년 러`일 전쟁 때 일본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곳이다. 오른편을 자세히 보면 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보인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 를 단절하고 대(對)러시아 전쟁을 결정하였다. 2월 8일, 육군 선발대가 우리나라 인천항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일본 해군이 전격적으로 요동반도의 뤼순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우리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채택한 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하여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 ·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 번째 대규모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서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마도 주변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대마도 아소만에 미리 어뢰정을 주력으로 한 수뢰 특공단을 대기시켜 놓고 있다가 발틱함대가 대마도 동북쪽 지점에 이르자 만세끼운하를 이용하여 적 함대의 후면과 측면을 기습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한 후 주력 함대(우리나라 진해만에서 출동)가 러시아 발틱 함대의 정면을 가로막고 화력을 퍼부어 천하무적이라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켰다.
  
  결국 이 전투는 볼셰비키혁명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만 러시아제국이 종말을 고하게되는 서곡이었고, 이렇게 러시아를 굴복시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일본은 1905년 18월에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 한·일병합을 단행하였다.

  만제끼운하 위에 걸쳐진 다리는 1904년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총 3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였다. 지금의 다리(1975년 개통)는 처음보다 약 10M 정도 이동된 자리이며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 섬을 한 바퀴 돌아가는 불편을 없애고 군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이다. 이 지역의 수심은 4.5~5.1m이고 폭 40~65m, 길이 210m이다. 

 

 

 

오후나에

 

 

 
 
대마도 관선들의 계류 시설인 오후나에 
 
 이즈하라 항구의 안쪽 후미진 곳에 설치되어 있기에 외부인의 눈에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에 양다리를 걸치고 양측의 눈치를 봐가며 힘겹게 살아야 했기에 이런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양측의 교역을 중재하는 입장에서 삥땅(?)도 필요했을 것이며, 양측에 다 만족을 줄 수 있는 줄타기 곡예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보호막이 필요했을 것이다. 혹자는 왜구들이 해적질 해온 물건을 내렸던 곳이라 하기도 한다. 
 


 
 
 
오후나에 입구  좁은 물길을 나가면 이즈하라 항구이다.
 
 
   1663년에 만들어진 번선(藩船)들의 계류시설(배를 매 두는 곳)로 길쭉한 물주머니처럼 생긴 ‘오후나에’는 입구 쪽을 교묘하게 만들어서 만조 때는 배들의 출입이 가능하지만, 간조 때는 물밑이 낮아서 배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바다 쪽에서 보면 마치 밑이 낮아서 배가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작은 개천의 입구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항상 적당한 물속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다. 나무가 울창한 산 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선거(船渠 : 배의 건조, 수리, 하역 등을 하기 위한 설비)가 있다.

 

 

여`원 연합군 내습지와 코모다하마 진자

 

 
 
코모다마을 풍경 벌판너머 집들이 있는 곳에 여`원 연합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현재는 우리나라 낚시꾼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원은 고려를 복속시킨 후 고려로 하여금 일본 원정을 준비시킨 뒤 1274년 10월 합포(마산)를 출발하여 일본 원정에 나섰다. 원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일본을 복속시키기 위해서였다.
 
고려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원나라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나선 원정이었다. 현재 우리가 미국 압력에 못이겨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니 어찌되었던 나라가 국력은 있어야 한다.
 
1274년 10월, 합포(마산)을 출발한 고려와 몽고의 일본 정벌군은 일단 이곳 코모다 해변으로 들어온다. 이때 대마도 도주는 67세의 노장이었는데, 내습해오는 여`원 연합군과 1만의 군사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도주의 시신은 후에 머리와 몸이 따로 발견되었다.
 
이후 이곳에 신사를 지어 이때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1월에 위령제를 지낸다.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코모다하마 신사

 

 

 

 

 

 

 

 <출처;empas.com/sonsang4>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