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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스크랩 캄보디아 전반적인 아웃라인
킴스특허 추천 0 조회 101 09.10.25 00: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크메르 루즈 공산당의 공산 혁명

1975-1979년 1월 사이에 캄보디아를 천둥과 비바람으로 휩쓸고 강타했던 공산혁명은 1백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30여만 명의 난민을 만들어낸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비극과 공포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의 캄보디아는 동물 농장이었으며 혁명지도부와 그 하수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만 하는 동물이나 다름 없었다. 혁명 지도부 대변인이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점령 직후 캄보디아의 2쳔년 이상의 역사는 끝났다고 밝혔듯이 공산 혁명의 시대는 캄보디아의 역사와 전통을 크게 변화 시켰다.

  

바로 '민주 캄푸치아 (Democratic Kampuchea)'로 외부세계에 알려진 크메르 공산혁명 정권의 3년 7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의 기간이 말해주듯이 공산혁명정권의 학정과 살해로 점철된 악행의 세월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크메르 루즈 공산혁명 지도부는 프놈펜을 점령한 직후부터 조직의 모습을 공개하지 않고 배후에 남아 그들의 혁명사업을 가차없이 진행시켰다. 점령직후 수도 프놈펜은 한마디로 몇 주일간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혁명지도부는 화폐, 시장, 종교조직, 학교, 사유재산 그리고 이동의 자유를 일거에 철폐하고 프놈펜 도시민들을 지방으로 강제 이동시켰다.

 

그 동안 전쟁과 크메르 루즈의 학정을 피해 몰려들었던 프놈펜의 인구는 약2백만명 이상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전쟁의 공포와 식량부족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이들은 혁명 사업의 일환으로 각 지방 농경지대에서 노역하기 위해 강제 이동되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말라리아에 죽어 갔으며 논놀 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했거나 군부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프놈펜에서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오직 혁명지도부의 가족과 몇백여 명의 공장 노동자들만 프놈펜에 남을 수 있었다. 강제 이동에 반항하는 자들은 닥치는 대로 처형되었고 심지어 병원의 병상에 있는 환자는 물론, 어린이, 노약자들도 강제 이동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추방길에 버려지거나 죽어 갔다.

 

이후 2개월간 전국적으로 2-3백만 명의 인구가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마침4월의 건기라 마실 수 있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림과 허기, 말라리아로 길거리에서 암담하게 숨을 거두어 갔다.

 

크메르 루즈 공산군들의 대부분은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이들은 시아누크 치세와 논놀정권 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아무런 특권도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 CPK에 가입하여 공산당으로부터 무산 계급의 혁명을 교육 받으며 착취 계급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정말로 가축이나 가재도구는 물론 땅 한뙈기도 없는, 가난한 사람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모택동 어록을 빌린다면 이들은 혁명이 잘 새겨질 수 있는 '가난하고 명청한 애들'이었다. 1975년 이들의 숫자는 만오천명이나 되었으며 공산당의 충직한 하부 조직원으로 활약했다. 한편 공산지도부는 이들과 더불어 행동대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13-15세 사이의 청소년들을 점령지역에서 징모하여 간단한 정치사상 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켜 전투에 투입시키고 공산혁명의 첨병대원으로 육성하였다.

 

이들은 가족의 의무, 사회전통의 관습, 종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오직 절대적인 혁명조직에 충성할 것을 교육받음으로써 혁명의 칼날이 되었다. 무산자 계급, 공산당 하부조직원들의 가난한 과거의 기억과 새로 획득한 공산당의 힘과 그리고 전통사회를 부정하고 혁명조직에 충성할 것을 교육받은 반항적 기질의 청소년들의 대담성은 혁명의 과제를 가차없이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2. 숙청 작업

1975년 10월9일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당지도부 위원들이 혁명지도부의 기초 내각의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경제 및 국방에 서기장 폴 포트, 당조직업무와 교육에 부서기장 누온치아, 외무에 당서열3위인 이앙사리, 국민통합전선과의 연락업무 및 재정에 키우삼판, 통상업무에 코이투온 등 남성11명과 여성2명이 23개 부서의 책임을 맡았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고 폴포트가 수상에 오르면서 집단 지도체제는 붕괴되고 엄청난 희생을 불러 일으킨 숙청작업이 이어졌다.

  

숙청의 발단은 1976년9월에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의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 기념일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 되었다. 이때 두 명의 고위 당간부 케오 미아스 (Keo Meas)와 논 수온 (Non Suon)이 당지도부를 배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심문센타 툴 슬랭 (Tuol Sleng)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 심문센타는 프놈펜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정권의 악명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만행의 전시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캄보디아 관광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이 센타는 직원이 1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타자수, 사서, 사진사, 전기기사, 대필사, 전직교사, 심문관등으로 구성되어 혁명지도부의 충직한 집행자로 활약하였다.

 

폴포트는 두명의 고위 강간부를 숙청한 이후부터 미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었다면서 악덕 세균 색출을 지시하였다. 악덕 세균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혁명 분자, 전직교사, 지식인, 의사, 약사, 논놀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중산층등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맹이 주도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 외국과 관련을 맺었던 사람들, 베트남 국경지대인 동부지역에 연관된 관리나 그 지역 사령관이나 군인들이 포함되었다.

 

일단 의심을 받아 심문센타에 끌려 가면 자술서에 3명의 다른 사람들을 거명해야 했다. 이 거명된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다. 이 심문센타에 끌려온 사람들은 거의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혁명기간에 약2만명이 이 심문센타에 끌려와 심문과 고문을 거쳐 처형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들어가지만 나오지는 못하는 곳'으로 알려 졌다. 이곳에 끌려간 약2만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약10여 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끌려온 자들은 억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는데 현재 4천여장이 남겨져 보관되고 있다.

 

공산당에 대하여 가지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가능한 적을 처형하고 혁명정권의 권력을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대상도 가리지 않으로써 숙청의 희생자는 불어났다. 미처 출국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미국CIA 정보 요원이나 공산베트남의 정탐요원으로 간주되어 심문센타로 보내져 결국 처형되었다.

이 숙청작업은 1930년대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행한 숙청작업과 2차대전 이후 동구 유럽공산국가에서 이루어진 고위 당간부의 전례를 훨씬 뛰어넘는 크메르 루즈 공산당의 악랄성과 잔혹성을 말해주는 고유 대명사가 되고 있다.

 

3.폴포트 그는 누구인가? (1928-1998) 

캄보디아 공산혁명의 지도자 폴포트는 (Pol Pot)는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톰 (Ka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양부모가 크메르족인 아버지 팬랙 스바우브 (Pen Saloth)와 어머니 속 넴 (Sok Nem) 사이에서 9남매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으로 마을의 유지였고 어머니는 자비심이 많아 마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살로수 사 (Saloth Sar)이며 폴포트는 공산혁명 이후 1976년에 '민주 캄푸치아'국 선포와 함께 만든 이름이다.

 

1935년 살로쓰 사는 왕궁에서 직원과 궁중 무용수로 각각 일하고 있는 형과 누나의 자취집으로 옮겨 생활하다 왕궁 근처에 있는 바트 보툼배디 (Vat Botum Vaddi)라는 불교사원에 행자승으로 들어가 캄보디아 글과 불교의 기초 경전을 공부하였다. 당시 캄보디아는 불교사원에서 초급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초급 교육을 받던 시절에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다투거나 싸우는 일이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사원의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형의 학자금 지원으로 에껄미르 (Ecol Miche)라는 프랑스계 초등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기독교 교리를 접하며 정상교욱을 받았다. 1942년에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세번째로 큰도시이며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캄퐁참 (Kampongcham)에 새로 개교한 노로돔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입생은 20명이었는데 이들은 각 주에서 선발되었고 살로쓰 사는 캄퐁톰의 대표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공부를 하였고 그는 여기에서 바이올린을 교습받기도 하였다.

 

그의 동창생 가운데 후님 (Hu Nim)이 있었는데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폴포트 정권의 공보부 장관을 지냈으며 한 학년 후배 였던 키우삼판 (Khieu Sampan)은 프랑스 유학을 거쳐 폴포트 정권의 상징적 국가 원수를 지냈다. 그는 중간치의 학업 성적을 유지하였으나 선생의 강의에 충실하였으며 유쾌하고 올 곧고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크반 시판 (Khvan Siphan)이라는 선생님이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상기시키며 식민통치하의 연약한 조국의 현실을 토로할때 그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후에 사립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1948년 그는 캄보디아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리씨 시소와쓰 (Lycee Sisowath)에 입학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기술 고등학교인 에꼴태 끄니끄 (Ecole Technigue)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다음 해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49년 9월말 그는 파리에 도착하여 싸뜨 대학 (Cite Universitaire) 전파전기학과에 등록하였다. 1950년 여름방학을 맞아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그는 사회주의 써클 조직의 홍보에 매료되어 유고슬라비아를 위한 자원노력 봉사대에 참여하여 1개월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는 여기서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지도자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가 이끄는 전국민을 동원한 나라 복구 정책에 매료되게 된다. 후에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이 되어 학업은 점점 멀리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된다.

  

1952년 12월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파리를 떠나 학위도 없이 새해 1월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1953년8월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정치 학습을 마치고 프놈펜의 좌경단체와 협조하기 위해서 프놈펜에 돌아와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하다 1955년 총선이후 시아누크의 좌경 및 공산주의자 강경탄압으로 활동이 제한되자 프놈펜의 시립고등학교 참라온 비치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6년7월 그는 리씨 시소와쓰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던 키우포너리 (Khieu Ponnary)와 결혼하고 교직에 충실하며 공산주의 지하 활동을 펴나갔다.

1960년데에 들어서면서 그때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던 '토우 사모스가 시아누크 경찰에 의해 실종 되면서 사로쓰 사가 캄보디아 노동당 중앙 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이후 캄보디아 동부지대, 동북부 라타나기리(Ratanakiri)주, 캄퐁톰 (Kompongtom)주 등 변방 시골 지역과 산악지대에 공산당 게릴라 본부를 설치하고 이동하면서 베트맹 공산당으로부터 무기와 군사훈련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공산당의 전투력을 증대시켜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 선언을 하였다.

 

1968년에는 캄보디아 서북부 바탐방주와 캄보디아 남동부 캄포트 지역 등 몇 개주를 장악하면서 프놈펜 정부를 계속해서 압박하였다.

1972년 미국과 베트맹의 파리 종전 협정으로 캄보디아 내 베트맹군이 철수하고 1973년 미국의 공산게릴라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폭격으로 크메르 루즈 공산게릴라군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후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국군이 철수하자 공격을 가속하여 마침내 1975년 4월17일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는 공산혁명 정권의 최고지도자, 큰형 으로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을 연출하였다. 3년7개월간의 통치기간중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그는 그의 민족에게 저질렀던 것이다.

 

그후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공산당이 북쪽 산악지역으로 물러가며 그도 역시 그때부터 산악에 묻혀사는 은둔생활과, 간혹있는 게릴라 전으로 활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을 연출하고 1998년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에서 이름도 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캄보디아의 역사                                                   

1-6 세기 경 현재의 캄보디아에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로를 차지하고, 번성을 구하하던 후난 (Funan) 왕국이 있었다. 건축과 조각에서 두각을 나타낸 앙코르 시대는 800년 경 자야바르만 2세 (Jahavarman II) 에 의해 시작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정교 일치의 권한을 가진 데바라자 (Devaraja; (신왕) 의 크메르 통치가 성립되었다. 앙코르 주변에 관개 시설을 이용한 집약적인 농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크메르 인들은 고도로 중안집권화된 국가에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1863년부터 90년 동안 프랑스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식민지 통치했으며, 1953년 캄보디아는 독립을 선언 했다. 그후 15년 동안 노로돔 시하누크 (Norodom Sihanouk) 왕이 캄보디아 정치를 좌지우지 했다 (후에 그는 수상, 국가 원수를 거친 다음 다시 왕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좌우 세력을 오가며 연합전선을 펴는 변덕 스러움과 억압적인 정치 스타일 때문에 1970년 군부에 의해 쫓겨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69년부터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에 말려들었다. 미국은 캄보디아 내에 있다고 의심되는 공산군 기지를 부수기 위해 비밀 융단 폭격을 실시 했으며, 1970년 쿠데타후에 미국과 월남군은 월맹군의 뿌리를 뽑기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들의 침략은 실패했지만 캄보디아의 자체 혁명 세력인 크메르루즈 (불어로 루즈는 붉은색을 뜻한다) 를 내륙 오지로 몰아내게 되었다. 이후 캄보디아는 전체가 참혹한 싸움에 빠져들었으며 사이공이 함락되기 2주 전인 1975년 4월17일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곧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포트 (Pol-Pot)의 지휘아래 지금까지 행해진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보다 급진적이고, 잔인한 사회개조가 시도되었다. 목표는 캄보디아를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농업협동조합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4년동안 식자층을 포함한 대부준의 도시인들이 농촌 지역으로 재배치 되었으며, 고문을 당해 죽거나 처형당했다. 크메르푸즈의 정책 때문에 적어도 백만명, 많게는 2백만명의 캄보디아 인들이 1975-1979년 사이에 죽었다.

1978년 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했으며, 그 결과 크메르루즈는 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캄보디아 서쪽의 정글로 쫓겨 갔다. 1970년대 후반 부터 1980년대에 걸쳐 크메르루즈는 중국과 태국 (간접적으로 미국이 지원)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의 조종을 받는 프놈펜 정부에 대항하여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1993년 중순 유엔의 관리하에 캄보디아에서 선거가 치뤄졌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가 다시 왕이 되었다. 현 정부는 독립연합전선 (United Front for an Independent)으로 노로돔 나나리드 왕자 (Prince Norodom Ranariddh) 가 이끄는 FUNCINPEC (Neutral and Free Cambodia) 당과 훈센 (Hun Sen)이 이끄는 캄보디아 민중당 (Cambodian People's Party)이 합쳐진 연정이다.

캄보디아 정부와 연정 수립을 위해 많은 협상에도 불구하고 크메르루즈는 여전히 제도권 정치 밖에 있으면서 캄보디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8월 UN의 감시하에 치른 선거에서 훈센이 승리를 거둠으로서 2원 집정체제의 문을 내리고 1원 집정체제로 정치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 시켰던 크메르 루즈군도 이제 거의 투항하여 극 소수의 일부를 제하고는 이제 정부군으로서 혹은 사회에 복귀함으로서 정치와 사회적인 안정을 되찾고 있다.

 

캄보디아의 종교                                                 
 
캄보디아는 98%가 불교이며 정령숭배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소승불교가 캄보디아에서는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1975년 까가지는 국교였다. 1980년대 후반 소승불교는 국교로 복귀했다. 1975-1979년 사이 수많은 캄보디아 승려들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살해 당했으며, 3천개가 넘는 절들이 파괴되었다. 1990년대 많은 절들과 모스크가 복원되었으며 스님들의 탁발이 다시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대부분 크메르족은 불교 신앙에 곁들여 초자연적 존재인 "네악 타"(neak taa)를 믿는다. '네악 타'는 죽음의 영도 될 수 있으나 항상 살아있는 영으로 간주된다. 그 영은 적절한 경의를 표하면 해를 받지 아니하나 그렇지 않으면 질병이나 가뭄을 가져온다고 믿어진다. 크메르족들은 석가의 생애를 경축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가지고 있다. 폴포트 정권의 붕괴이후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불교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동남아의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모슬렘이 부흥하고 있고, 힌두교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타일랜드에 있는 크메르 난민촌 피난민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난 15년동안 캄보디아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아왔다. 크메르족은 기독교를 서구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민족주의와 불교사이의 괴리현상으로 인하여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1954년에 전체 성경이 크메르 언어로 번역되었다. 크메르어로 된 신앙서적이 있으며 영화 '예수'가 크메르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 크메르족에게는 무엇보다도 현재 그들의 육체적, 정서적 요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역이 요구된다. 20년이 넘도록 그들은 전쟁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문화                                                 

1) 축제, 오락

신년, 물 축제, 프라츔, 메아카 바우자, 비자 바우자, 카텐 축제등이 있는데 대부분 종교성을 띠고 있고 특히 불교적인 색체가 강하다. 매년 11월 21-23일 사이에 프놈펜메콩강에서 물 축제가 벌어 진다.


2) 예술형태

크메르 건축은 앙코르 시대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훌륭한 건축물들 중 일부가 앙코르왓 (Aagkor Wat)과 앙코르 톰 (Angkor Thom)이다. 뛰어난 크메르 조각품의 다수가 푸놈펜에 있는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타이댄스와 비슷하고 원류도 같은 앙코르 댄스로부터 채택된 전형화된 캄보디아의 고전춤이 전통악단과 여러 사람의 이야기꾼을 동반해서 공연되고 있다. 프놈펜과 시엠립 (Siem Reap)에서 고전춤을 볼 기회를 쉽게 가질 수 있다. 힌두 서사시에 기초한 민속무용, 극, 민속음악 등이 있다.



3) 전통 음악

불교의 영향으로 절안에서 실로폰과 같은 전통악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지금도 축제때나 어떠한 행사때 이러한 악기를 사용하여 흥을 돋구고 있다. 핀핏 음악 (Pin Peat)


 

캄보디아 사회

 

1) 인구와 주민

1997년 기준 캄보디아의 인구는 11,163,861 (1997) 명이다. 유아 사망률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아 1천명당 120명에 이르고 있으며, 여성이 전체 인구의 54%를 차지하고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인구의 95%가 크메르 족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구 구성에서 가장 큰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에서 밝히는 것보다 많은 수의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에 살고 있다.

캄보디아의 소수계 중 가장 중요한 민족은 1975년까지 캄보디아의 경제계를 장악했었던 화교들이다. 최근들어 해외에 있는 화교들의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다시 캄보디아 경제계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5만명, 비공식적으로는 약40만명의 화교가 캄보디아에 있다.

캄보디아의 참 (Cham) 무슬림 (크메르 이슬람)은 공식적으로는 20만명, 비공식적으로는 50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75-79년 사이에 특히 탄압을 많이 받았으며, 대부분의 공동체가 붕괴 되었다. 이외 6-7만 명에 이르는 다양한 소수 산간 부족들이 산악 지역에 살고 있다.

2) 사회 관습

크메르 인들은 동남아시아 전체를 통털어 가장 사귀기 쉬운 사람들이다. 태국에서처럼 캄보디아 인들은 손을 기도하듯이 앞으로 모아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부를 때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야하며,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된다.

3) 의식주및 생활 환경

1) 의식주 : 크메르족의 주식은 쌀과 생선이다 특히 생선은 보편화되어 있고 풍부한데 말리거나 훈재해서 또는 생선소스를 만들어 양념으로 먹는다. 간혹 논 주위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과일을 먹기도 한다. 야자 나무로 덮은 전형적인 시골풍의 초가집은 진흙으로 덮은 지붕에다 대나무위에 지어진목조 건물로 바뀌고 있다. 전통적인 크메르 여인 의상은 사롱처럼 생긴 스커트인 삼포트와 그 위에 브라우스를 입고 크라마라고 부르는 바둑판 무늬의 베일(head covering)을 쓴다. 남자들 역시 삼포트를 입는다. 도시인들은 서구식의 옷을 입는 경향이 있다.

2) 생활 환경: 보건 위생관계는 빈약하다. 폴포트 정권(1975-1979)이 거의 모든 의사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1989년 통계로는 1000명당 1.6개의 병원침대가 있고 10만명당 5,3명의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전국에 700명의 의사, 치과의사, 약사가 있을 뿐이다. 풍토병인 장티푸스, 말라리아, 이질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265명중 매달 지뢰로 인하여 지체를 잃어버린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아시아에서 최저인 49.7세이다. 전 인구의 5%만이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 기본적인 에너지원은 땔 나무이다.

4) 가족 구조

핵가족이 기본적이지만 경제상황이나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함께 사는 경우도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을 때 일반적으로 아들은 부동산을 받는 반면 딸은 동산(movable)을 물려받는다. 모든 가사일에 있어서 여성에게 발언권이 있으며 여성이 대부분 가정 경제를 주도한다. 부모들은 전통적으로 자녀의 결혼상대자를 선택한다. 여자들은 결혼할 때 가져온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이혼하는 경우에 모든 재산은 50:50으로 분배된다.

폴포트정권때 가족의 단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자녀들이 부모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자녀들은 더 이상 부모를 존경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남성들의 수가 줄었으므로 농촌 가정의 약 30%가량이 과부들에 의하여 생계가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크메르 루지 정권 때 심어진 공포와 불신으로 인하여 부부간의 신뢰성이 없어지고 남편들의 부정(외도)이 증가되고 있다. 현재 성인인구 중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고 고아와 과부도 많이 있다.

5) 어린이/청소년

대개 어린이들은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끝내는 도중 하차하는 비율이 40%나된다. 베트남 전쟁과 폴포트 통치시기에 교육은 파괴되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은 추방되거나 이 나라를 떠났다. 베트남 지지를 받는 홍 삼린(Heng Sam Rin)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이 우선시 되었고 800만 인구중 100만이상 되는 어린이들이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격을 갖춘 교사가 부족하고 교육자재와 교과서가 부족하다. 중등교육이나 그 이상의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 4년간 프놈펜대학이나 의과대학 같은 몇몇 기술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대부분 중등학교 이상 교육은 크메르어교과서가 없기 때문에 불어로 가르친다. 시골에서 어린이들은 쌀을 경작하고 땔감을 모으고 물을 운반함으로 부모들이 일손을 돕는다. 현재 인구의 44.5%가 15세 이하의 연령층에 해당된다.

 

캄보디아 경제

 

캄보디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에 하나로, 그들은 주로 공무원, 어업, 농업, 소규모 무역상, 식당경영, 상점주인, 자동 판매기업등에 종사한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활동에 종사하며 15%가 경제분야에서 봉사한다.

주 수입원은 잉여농산물 판매, 어업, 원목, 보석, 채광 및 판매, 소매사업등을 통해서 얻어진다. 생산물로서는 고무,쌀,콩,담배,시멘트,제지,생선,옷감,바스켓,비단생산과 직조등이며무역상대국은 러시아 동구유럽, 싱가포르, 타일랜드, 홍콩, 일본, 베트남 등이다. 고무, 원목, 콩, 담배등은 수출하고 식량, 원유, 소비재, 원자재등 수입한다.

현재 프놈펜에 4개의 전력발전소가 있고 그 외에 몇 개가 더 있다. 모든 연료와 대부분의 원료, 자본 재,소비재를 수입해야한다. 최근에 주 수출품이 고무에서 목재로 바뀌었다. 목재는 현재 캄보디아 수출액의 50%를 차지하고 있다.이외 금과 담배의 적환이나 외국의 원조가 경제를 지지하는 주요 재원이 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통화 단위는 리엘(Riel)이며, 금액 다음에 R 을 붙인다. 1989년 중반 U$1에 대해 200R 정도이던것이 지금은 3,800 R (1999년 11월1일 현재)을 하고 있다. 동전은 없고 모두가 지폐이며 100, 200, 500, 1,000, 2,000, 5,000, 10,000, 20,000, 50,000, 100,000짜리가 있다. 1인당 GNP는 U$285(1995년기준)달러로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

 

캄보디아 정치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이다. 역사적으로 캄보디아는 국경을 침범하고 그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두 나라의 위협가운데 있었다. 앙코르 왕조때 크메르는 지금의 베트남과 태국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15세기 앙코르 왕조가 몰락할 때 베트남과 태국으로부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1945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캄보디아 왕국이 되었으나, 1970년에 정변이 일어나 크메르 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대까지 시하누크 왕은 국가의 수반이요 절대적 권력자였다. 그러나 시하누크는 왕위를 사퇴하고 국무총리가 되었다.

1975년에는 크메르 루지가 정권을 장악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79년 베트남이 국경 분쟁을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크메르 루지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크메르 루지에 반대하는 그룹으로 허수아비 정부를 세웠으며 그 이후 10여년간 국내는 3개의 파벌로 나뉘어 분열상을 보이다가 1990년 UN에 의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1991년에는 UN에 의하여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되었고 1993년 5월 23일에 우여곡절 끝에 20억달러에 이르는 유엔임시행정기구의 엄청난 행정비용과 2만 2천명에 달하는 평화유지군의 분투적인 노력 속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크메르 루즈파가 빠지고 시아누크 계열의 노로돔 나라니드가 이끄는 캄보디아 민족통일 전선 (FUNCINPEC), 프놈펜 정부의 훈센 수상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 (CPP), 손산의 불교 자유민주당(BLDP) 등 20여개의 군소정당이 참가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비례 대표제로 실시된 이 선거에 서 펜신팩이 약 46%, 캄보디아 인민당이 약39%, 불교자유민주당이 약3.8% 기타 군소 정당 중에서 몰리나카가 약0.4%를 차지하였다.

이 결과에 따라 제헌 국회 의석수 120석에서 펜신팩이 58석, 인민당 51석, 불교자유민주당 10석, 그리고 몰나카당이 1석으로 각각 배분되기도 하였으나 선거에서 승리한 펜신팩의 정권인수와 정권장악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펜신팩 출범 당시 1만 2천여명에 달했던 병력이 난민틈에 끼어 해외이민과 이탈로 거의 반으로 줄어 훈센정권의 정규병력 10만여 명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으며 훈센 정권 또한 선거 결과를 순수히 승복하지 않고 선거 개표 부정을 이유로 일부 주에 대한 재선거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3년 9월 21일 제헌의회는 몇 차례 헌법 초안을 개정한 뒤 과도 정부 수반인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의 캄보디아왕국 (Kingdom of Cambodia)의 새 헌법안을 통과 시켰다. 

새 헌법의 주요 내용으로 국왕은 군 통수권과 각료 임면동의권, 국제 조약 비준권, 외교사절의 신용장 수리권등을 갖고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국가원수로 존재하고 캄보디아 왕국은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권을 강조하여 민족적. 종교적 평등을 보장하고 사형제도와 성차별을 금지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임시 조항을 두어 5년간의 신헌법1차 내각에 한해 2명의 공동총리를 규정하였다.

1993년10월 헌법에 따라 국왕에 노로돔 시아누크, 선거에서 승리한 캄보디아 민족 통일전선 FUNCINPEC의 당수이며 시아누크의 장남인 노로돔 라나리드가 제 1총리, 야당으로 전락한 전 정권의 수상인 훈센을 제2총리로 하는 캄보디아 왕국의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2원집정체제는 불안을 씨앗으로 안고 출발하여 급기야 1997년 7월에 제1총리와 2총리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라나리드가 망명을 가게되었고, 각국의 평화 중재로 다시 1998년 8월에 UN의 감시하에 다시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이 결과 지금의 CPP가 승리를 거두어 그동안 문제가 계속 되었던 2원집정체제를 거두고 이제 1원 집정체제로서 훈센 총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003년 7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캄보디아 인민당이 73석, 훈센텍 당이 26석, 그리고 삼량시 당이 24석을 차지하여 캄보디아 인민당과 훈센펙당이 연정을 구성하여 훈센이 총리로 그리고 라나리드가 국회의장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캄보디아 전반에 대하여

캄보디아 전반에 관하여


캄보디아는 앙코르 시대 (9-14세기)에 현재의 캄보디아 영토 뿐만아니라 베트남, 라오스, 태국까지 지배했던 강력한 크메르 제국 (Khmer Empire)의 계승자이다.

당시 제국의 영화는 전설적인 앙코르 사원의 유적에서 볼 수 있다. 정글 한 가운데 자라잡은 이 놀라운 유적은 프놈펜에서 보트나 비행기로 쉽게 가 볼 수 있다.캄보디아는 20년동안의 전쟁 후유증을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현재 회복기에 있다. 특히 크메르 루즈 (Khmer Rouge)의 4년 통치 기간중에는 (1975-1979) 대량학살이 자행되어 7백만 캄보디아 인구 중 약 2백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캄보디아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에 있는 공화국. 국토의 중앙부는 메콩강 하류의 넓은 평 원으로 전 국토의 4분의 3을 차지하며, 그 주변에는 낮은 산지가 있다. 전형적인 열대 계절풍 지역으로 남서 계절풍이 부는 5∼10월이 우기이고, 1∼4월에는 북동 계절풍의 영향으로 건조하다.

주민은 대부분이 크메르족이고 불교를 믿는다. 예로부터 거의 농업에만 의존해 온 나라로, 쌀과 고무를 비롯하여 옥수수, 바나나, 담배 등이 재배되고, 산지에서는 목재도 많이 난다.

크메르족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수가 많은 종족이다. 그들의 조상은1세기 남인도에서 이주해왔으며 크메르는 A.D.10세기까지 전체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할 만큼 고도로 정교한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최근 크메르족은20년 이상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관계로 경제가 파탄지경이 어서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중의 하나가 되었다.

원래 힌두교도인 크메르족은 15세기 이후로는 테라바다 불교를 믿었는데 그 불교의 특징은 힌두교와 정령숭배의 요소들이 가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기독교는 1970년대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크메르족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공산주의가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한 3년 동안 교회성장은 괄목할 만 하였다. 제한된 종교적 자유가 최근들어 다시 회복되고 있으며 크메르족 가운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캄보디아 의료상태

 

여러분 캄보디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49.5세입니다. 채50도 안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평균 연령은 우리나라 50년대의 평균 연령입니다. 왜 이렇게 평균 수명이 짧을까요? 거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의료 시설의 미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린아이 유아 사망율은 세계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이곳에서 사역하며 듣고 보는 것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같은 질병, 요즈음에는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에이즈로 인한 사망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예방주사니,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이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시설도 미비 되어 있거니와 비용 때문에 아프면 그냥 집에서 전통적인 처방에 따라 동전 같은 것으로 몸을 긁어대면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곳 캄퐁섬에는 정부 병원이 있고, 그리고 개인 병원이 있으며, 얼마전에 사설 병원이 한곳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원들의 시설, 수준등은 너무나 취약한 상태입니다. 

 

얼마전 가슴아픈일이 이곳 선교 현장에서 일어 났습니다. 그때 적절한 조치의 병원이 있었다면 아마 우리 신학생을 살릴 수 있지 안았겠는가고 생각 해 봅니다. 교통사고로 코에서 입에서,머리에서 피가 흘러 나오는데도 의사 선생님들이 어찌 처방할 줄을 모르고 있더란 이야기지요! 이 사고로 이 학생은 전혀 시설이 없는 엠블런스로 프놈펜으로 옮기는 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생각이 이곳에 위급시 적절한 병원이 제대로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점차 이곳도 상황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이나 싱가폴 혹은 선진 국가에서 믿음을 가진 우리의 의료 진들이 이곳에 와서 이들을 한번씩 진료해주며, 무료로 약을 나누어준다면 놀라운 선교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금년에 1,2차에 걸쳐 싱가폴 의료 선교팀이 다녀 가셨습니다. 이들의 방문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지금 캄보디아는 의료 선교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지금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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