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의 살륙전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이제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들의 이러한 참여와 투쟁은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질적인 변화를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치열하고 공세적인 국면으로 상황이 변화된다. 개머리판과 대검을 휘둘러대며 점점 더 포악해지는 공수부대에 맞서 일부 고등학생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뒤처진 공수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했다. 가톨릭센터에서는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총과 방패를 빼앗았으며 광주고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밤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군이 3특전여단으로 교체되고 20일 오전부터는 시위진압의 양상이 달라진다.
13:00 - 15:00 가톨릭센타 앞 시위
- 금남로에 진주해 있던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빠져 나간 오후 1시 반경부터 시민, 학생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4, 5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아붙였다. 청년들은 금남로 2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군경저지선에 힘껏 굴려보냈다. 군과 경찰은 갑자기 시위대로 접근, 곤봉과 총, 대검을 휘둘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도로변의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박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돌을 던졌다. 오후 3시쯤 군경저지대는 진압화기가 바닥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 긴장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백여 명의 청년들이 가톨릭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7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공수대원이 시민들의 시위상황을 무전기로 연락하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 빌딩 안으로 올라간 청년들 중 몇몇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세례를 퍼붓자 공수부대원들이 비틀거렸다. 그러자 청년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려눕혔다. 한 청년은 그들로부터 빼앗은 M16 소총 한 자루를 치켜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을 인질로 삼는 것도 잠시였다. 오후 3시 20분경 점심을 끝낸 공수병력이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리버 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신동아, 1985. 10)
- 가톨릭센터 차고에서 전남 1사 5236호 승용차 등 4대를 끌고 나와 화염병으로 차에 불을 붙여 도청 앞 공수대 쪽으로 몰아붙임. (신동아, 1985. 10)
- 11:30 - 13:00 광주은행 앞 등에서 소요자 연행
전남대 4, 조선대 26, 동신전문 4, 한국체대 1, 광주보건전문 1, 공원 8, 조대공전 1, 안양공전 1, 노동자 1, 목포대 1, 시내고교 1, 상업 1, 한양대 1, 전도사 1, 재수생 20, 농업 1, 농원공전 1, 회사원 9, 종업원 10, 전자공 1, 건축가 1, 운전사 1, 기타 11(계 107명). (계엄사 상황일지)
- 가톨릭센터 앞에 시민,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대치중이며 광주은행 앞의 아치 파괴.
- 군중 7, 8천 명이 드럼통에 기름을 부어 노상에서 불을 지름. (시청 상황일지)
* "많은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앞에 모여 화단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가톨릭센터 옆 골목에 세워둔 승용차를 끄집어내 불을 질렀다. 그때 몇 명의 시위대가 가톨릭센터 안으로 뛰어가자 곧바로 공수 6, 7명이 후다닥 쫓아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많은 시민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몰려갔다. 상황의 전개가 궁금하던 우리는 숨을 죽이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옥상과 5층에서 시민들이 M16과 철모를 높이 쳐들자 밑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도 잠시,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 1개 대대병력 정도가 4개 중대로 나뉘어서 줄을 맞춰 달려왔다. 종대로 달려오던 그들은 대열을 횡대로 바꾸더니 주변의 시민을 향해 달려들어 미친 듯이 진압봉을 휘둘렀다." (구술 : 박남규, 현사연 조사)
* "점심 무렵 금남로 3가 광주은행 앞으로 갔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몇 사람만 모여도 최루탄을 쏘며 난폭한 진압을 하던 공수들이 웬일인지 그날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우-' 하는 함성과 함께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건물로 도망치는 공수들을 뒤쫓아갔다. 나도 재빨리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우리는 옥상까지 그들을 쫓아갔다. 공수 한 명에 시민 여러 사람이 붙어서 그들이 갖고 있던 M16을 세 자루 빼앗았다. 우리는 총을 높이 쳐들어 흔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총 한 자루를 가지고 옥상을 내려와 총을 분해했다. 실탄은 없었다.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에게 총을 건네주고 나는 밖으로 나와 가톨릭센터 뒤쪽으로 갔다. 시민들이 공수가 몰려온다고 소리치면서 발을 구르며 옥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맣게 몰려드는 공수들을 보고 다급해진 사람들은 미처 계단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그곳은 차고라서 위에 천막이 쳐져 있었다. 뛰어내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밀려드는 공수를 피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달아났다." (구술 : 김영남, 현사연 조사)
- 가톨릭센터 건물 안에서 시체 6구가 발견됨.(KSCF,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금남로 2가에 운집한 시민, 관광호텔 앞에 있는 계엄군에 맞서 투석.
* "나는 가톨릭센터 상황을 지켜보다 금남로 2가 상업은행 앞으로 갔다. 관광호텔 앞에는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공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상업은행 앞에 있던 시민들이 돌을 던지자 공수들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의 기세에 눌려 곧바로 도망쳤다. 시민들 틈에 끼여 달려가다 내 앞 사람이 넘어진 바람에 나도 넘어지고 말았다. 연속해서 여러사람이 넘어졌다. 우리가 미쳐 일어서기도 전에 밀어닥친 공수들이 발길질을 해댔다. 곤봉으로 내리치는 소리, 신음소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수들의 구타가 멎자 주위를 살펴봤다. 쓰러진 시민들이 끙끙 거리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착검한 공수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 트럭 1대가 왔다. 공수들은 2인 1조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을 양쪽에서 붙잡고 트럭으로 던졌다. '트럭에 실리면 영영 죽겠구나' 생각이 들어 나는 상업은행 쪽으로 기어갔다. 은행 앞에는 한 여자가 눈알이 빠진 채 죽어 있었다. 나는 공수들의 눈에서 벗어났다 싶자 재빨리 일어서 도망쳤다." (구술 : 이희승, 현사연 조사)
13:40 무차별 살륙에 방화로 맞서
- 트럭 18대분의 병력 진입, 그 뒤 후속부대 진입. 진입과정에서 학생, 시민 4,5 천 명이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 모여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14시 30분까지).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도로변의 화분대(길이 1.5m ,폭 40cm ), 공중전화 박스, 버스 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길 가운데 바리케이드 설치. 제일교회 공사장에 있던 기름 2드럼에 불질렀는데, 하나는 폭발함. (월간조선, 1985. 7)
14:00
- 시위학생 조선대와 전남대 운동장으로 연행.
* "조선대학교 수도공사를 급히 해야 한다는 사장의 말을 듣고 동료 5명과 함께 갔다. 조선대 정문을 지키고 있던 7, 8명의 공수에게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았다. 점심을 먹은 후 잠시 쉬고 있는데, 군용트럭 1대가 30-40명 청년들을 싣고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팬티만 입은 사람도 있었다. 트럭에 있던 청년을 끌어내린 후 낮은 포복으로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리고 무자비한 구타를 했다. 그런 다음 체육관으로 끌고 갔다. 그후로도 계속 군용트럭에 청년들을 싣고와 같은 방법으로 기합을 주고 구타하기를 되풀이했다. 그날 내가 확인한 것만해도 여덟 차례나 청년들을 싣고 왔다." (구술 : 황강주, 현사연 조사)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2백 명의 시민 투석전.
14:00 - 17:00
- 군사령관 전투교육사령부 및 제31사단에 작전지도차 내방. (전교사 작전일지 )
14:25
- 3천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금남로 가톨릭센터의 유리창을 파손시키며, 전시민은 나오라고 외치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14:30
- 금남로에서 일반인이 합류하여 1천여 명이 투석하면서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중. (계엄사 상황일지)
14:35
- 송정리 광산여고 학생회장 3학년 김영란(18)은 정광고 학생회장과 점심시간에 만나 5교시가 끝나면(14:35), 교외로 뛰어나가자고 합의하고 김영란은 동교 실장 5명을 소집하여 행동 통일토록 결의함.(계엄사 상황일지)
- 시내는 거의 철시하고 있으며, 차량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음. 일반건물, 독서실, 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가고 있음.
- CBS 승용차 1대, MBC 승용차 3대, 일반승용차 2대에 방화. 시민,학생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에 위치) 앞, 금남로 지역 등 3개소에서 군인들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에 있음. 한 곳에 시민 학생 2천 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시작할 기미를 보이자 군인들이 출동하였고, 이들이 학교를 포위해 학생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음 .
- 군인들이 일부 웅성거리는 시민들에게 들이닥치면 시민들은 가정집이나 가게 등에 뛰어들어 숨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4:50 일반시민들의 합류로 불어나는 시위대
- 한일은행 앞 사거리에 학생 및 군중이 증가되어 현재 2천여 명이 도청 앞으로 진출. 관광호텔 옆 성결교회 공사장에서 각목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한편, 건축에 소요되는 인화물질에 불을 지르면서 전진하며 군경과 투석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 11여단 61, 62, 63대대, 7여단 35대대가 한일은행 앞 군중 2천 명 해산. (특전사 전투상보)
화염방사기를 시위진압에 사용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 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소방서 뒤쪽에는 장갑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 공수들과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도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 민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곳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온몸을 구타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갔다. 오후 3시경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살인적인 구타와 기합을 받은 후 저녁 6시경 전경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최충용, 현사연 조사)
- 한일은행 ∼ 관광호텔 부근에서 시민 학생 2천여 명이 합류하여 시위. 성결교회 공사장 각목으로 바리케이드 설치. 인화물질을 불태우고 군경과 대치. CBS 건물에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5:00
- 금남로에 있던 경찰은 이미 최루탄이 소진되어 저지선에서 몸으로 막고 서 있음.
- 상공에서는 헬기가 날면서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계속함.
- 광주공원 부근에서 공수대와 시위대의 충돌.
- 시위대가 문화방송에 진입하여 화염병을 던졌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 문화방송 차고에서 승용차 5대를 끌어내어 방화중. (신동아, 1985. 10)
- 헬리콥터 3대가 시위군중에게 해산하라고 방송. 시위대는 CBS에 몰려가 방송 기재 등을 파괴했고, 전남체신청 앞에서 시민 학생 8백여 명 계엄군과 투석전.
- 광주 유지들 도청에 모여 부지사에게 무차별 구타에 항의, 이런일 다시 없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 (월간조선, 1985. 7)
-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6, 7층을 완전 점령하여 유리창을 파손하였으며, 동구청 앞 자가용차 1대에 방화. (시청 상황일지)
- 권승만 중령이 이끄는 제33대대 병력이 계림동으로 출동. 그러나 33대대는 계림극장 앞에서 곤봉과 대검을 난자질하는 살육전을 벌이다 오히려 군중들 에게 포위당하여 많은 군인들이 부상당하였고, 결국 밤 10시 20분 조대 교정으로 겨우 철수. (말, 1988. 5)
15:04
- 계엄군 1개 대대의 증원군이 도청 앞 광장에 도착하여 7공수여단 제35대대와 합류. 이때 5분간 경고문이 방송됨. (말, 1988.5)
15:08
- 가톨릭센터 앞에서 승용차 3대가 불탔으며, 1대는 시민들이 불을 질러서 밀고 도청 쪽으로 향함. (시청 상황일지)
- 광주 대동고등학교는 15:00를 기하여 무기한 가정학습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은 2개 파트로 나뉘어 1개 파트 5백 명씩 짝을 지어 스크럼을 짜고 정의가를 부르며 운동장에서 시위중. (계엄사 상황일지)
15:14
- 조선대에서 전차 1대, 장갑차 1대, 트럭 22대에 병력을 싣고 도청 쪽으로 내려옴. (시청상황일지)
15:15
- CBS 방송국 건물이 점거되어 파괴되고 있으며, CBS에서 M16 1정, 실탄 15발 분 실. 방송국 앞에 있던 포니차량 4대 방화됨. (전교사 작전일지)
- 금남로에 시민 및 학생 3천여 명으로 증가, 민간인 승용차(포니) 2대 방화. (육본 상황일지)
- 35대대 충장로, 금남로로 출동. (특전사 전투상보)
15:25
- 군인의 투입으로 시민들은 해산되었고, 제일은행 앞에서 남학생 1명이 사망.
(시청 상황일지)
15:30 격렬해지는 시위대
- 광주지역 학생, 시민 합류하여 1천여 명이 투석하면서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군중 3천여 명 군경에 강력히 대항.(전교사 작전일지)
- MBC 방송국 앞에서 분산된 시위군중 2백여 명이 MBC 앞에 세워둔 승용차 등 8대를 방화 및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5:42
- 33특전대대 MBC 방송국 경계병 1/9명 구출작전 실시. (전교사 분석집)
15:45
- 시민들이 한일은행 앞과 중앙극장 앞에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있으며, 현대극장 쪽에서 계엄군 1개 중대, 유동 쪽에서 1개 중대가 금남로 쪽으로 밀고 올라오다 충금지하상가에서 시민과 충돌. (시청 상황일지)
15:50
- 가톨릭센터에서 CBS 보도부 차장과 미국인 1명이 부상한 남자를 들것에 싣고 관광호텔 쪽으로 감. (시청 상황일지)
15:55
- 35대대 도청에서 금남로 쪽으로 시위진압.
- 33대대 30/250명 출동. 계속 기동하면서 시위진압. (특전사 전투상보)
- 계엄군 1명(거점 배치자)이 양림동 적십자병원 앞에서 수명의 학생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총기를 피탈당했음.(계엄사 상황일지)
- 불로교 옆에서 군인 1명이 학생을 붸다가 놓치고 인근시민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함. 적십자병원에 입원중. (현사연 조사 종합)
* "광주공원 앞에 모인 시민들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는 한 청년의 분노어린 절규에 시민들의 함성소리가 들끓었다. 시위대들이 '계엄령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투석하자 계엄군들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했다. 시위대들이 흩어지지 않고 몰려가자 계엄군이 후퇴했다. 그런 와중에서 끝까지 곤봉을 휘두르던 공수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시위대에게 포위당할 지경에 이르자 광주천으로 뛰어내려 도망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쫓아가 그 공수에게 돌을 던졌다. 시위대가 천변을 따라 달려가며 돌을 던지고 있는 사이에 양림동 쪽에서 수백 명의 공수들이 진압봉을 들고 돌진해 왔다. 시위대들은 일시에 흩어져 도망갔다. 공수들은 이리처럼 달려들어 뒤처진 시민을 향해 미친 듯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살인적인 구타를 했다."(구술 : 최동복, 현사연 조사)
15:58
- 금남로 시위군중 3천여 명을 계엄군이 분산 조치중. (계엄사 상황일지)
16:00 고등학생들까지 투쟁의 대열에 합류
-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집회 후 시내진출 시도함.
- 금남로에 있던 학생들이 현대극장, 전남의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계림파출소 등 4개소에 분산하여 대치 투석전.
* "양동 복개상가 앞에서였다. 계엄군이 흰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입은 여고생의 가슴을 대검으로 그으며 희롱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이 '그러지 마라'고 항의하였고, 할머니 한 분이 '내 새끼를 왜 이러느냐'고 하자 군화발로 할머니를 걷어차고 여고생 가슴 위로 대검을 그어내렸다. 그것을 본 시민들이 짐승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며 돌을 던지자 놈들은 대검을 들고 쫓아왔다." (구술 : 박남선, 현사연 조사)
- 계엄군 2명 구타 당함. (전교사 작전일지)
- 3천여 명의 시위대를 진압부대가 전후에서 협공하자 시위대가 산발적으로 골목길로 분산 도주 잠적중. (계엄사 상황일지)
- 관광호텔 쪽으로 이동중인 학생 및 민간인은 계엄군에 의해 해산. 소수인원이 산발적으로 소요중. (육본 상황일지)
16:10
- 전남도교욱위원회에서 5월 20일부터 광주시 중.고등학교 가정학습시킬 방침 (계엄사 상황일지)
16:15
- 장동 전신전화국 앞 김정형외과 앞 사거리에서 잠적중이던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집결중이며 1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관망중임. (계엄사 상황일지)
* "전남여고와 전신전화국 사이에 시민들이 모여 데모를 하고 있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는데 공수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닥치는 대로 때리고 짓밟더니 우리를 트럭에 태웠다. 트럭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다 간간이 멈출 때마다 피투성이가 된 시민들이 트럭에 던져졌다. 우리는 조선대 강당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서너 시간 이상 그들의 명령에 따라 '낮은포복', '원산폭격' 등의 기합을 받았더니 양쪽 팔꿈치가 벗겨져 피가 흘렀다. 몇 차례의 매 타작과 기합이 끝나자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으라고 했다. 그날 밤 닭장차에 실려 계림동파출소 앞을 지날때 5, 6명의 공수들이 승차해 '니놈들 때문에 우리가 잠도 못 자고 죽을 고생을 한다'면서 닥치는 대로 몽둥이를 휘두르고 차에서 내렸다. 몇 차례의 몽둥이 세례를 받고 31사단으로 끌려갔다. 그곳은 먼저 잡혀온 시민들로 꽉차 있어 차를 돌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허현, 현사연 조사)
16:20
- 조선대 정문 앞에서 학생 5백여 명 소요중, 시민 1천여 명 구경. (육본 상황 일지)
- 35대대, 도청 방향으로 재배치. (특전사 전투상보)
- 김정형외과 앞 사거리, 시위군중 3천여 명 강력진압으로 해산, 분산된 군중 1천여 명이 관망. 재집결한 학생 5백여 명이 가드레일과 공중전화 파괴.(전교사 작전일지)
16:30
- 유동삼거리에 경찰이 5겹으로 배치되어 경계근무를 서고 있으며, 금남로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도로를 차단중. (시청 상황일지)
- 북동사무소 앞에서 계엄군 3백여 명이 가택을 수색하며 학생을 구타.(시청 상황일지)
- 소방서 앞 구역 사거리에서 전옥주 씨는 시민들이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함.
- 소방서 앞, 2, 3천 명의 시민 운집. 계엄군과 충돌. 부상자를 실어나르던 택시 기사 3명 사망설. (신동아, 1985. 10)
- 교내시위중이던 광주 대동고생 1천여 명 현재 전원 귀가. (상황 끝)
- 적십자병원에 계엄군 2명 치료중.
명단 : 제31사단 일병 용의섭, 제11특전단 하사 김병수. (계엄사 상황일지)
16: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학생 2천여 명 소요중. 제11공수 제61대대 (27/172), 진압중. 전교사 11병참 정비대대(11/360, 방위병), 노동청, 수협도지부, 대성학원, 전신전화국, 대인슈퍼체인 부근 4차로에 배치 완료. (육본 상황일지)
16:45
- 진압작전을 위한 병력배치
11특전여단 61특전대대 : 시외버스터미널
11특전여단 62특전대대 : 한일은행 앞
11특전여단 63특전대대 : 광주고교 앞
7특전여단 35특전대대 : 광주소방서 (전교사 교훈집)
16:50 최초의 발포
-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빌딩 앞에 고장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중고생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시청 상황일지)
* "전신전화국 앞에서 계엄군 진압에 밀려 계림극장 앞으로 갔다. 장갑차 한 대가 시민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었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장갑차의 눈 역할을 하는 양옆의 감시경이 깨져 있었다. 한 시민이 볏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 바퀴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주어 다시 불을 붙이고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았다. 그때 뚜껑이 열리더니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란 시민들이 순식간에 흩어지자 '공포탄이니 놀라지 말고 모이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나고 옆에 있던 조선대부속고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총에 맞은 학생을 보고 시민들이 당황해 있는 틈을 타서 장갑차는 총을 겨눈 채 사라졌다." (구술 : 위성삼, 현사연 조사)
* "군용 장갑차 한 대가 계림동 동원예식장 건너편 도로에 정지해 있었다. 시민군들이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 장갑차에 올려놓자 갑자기 해치가 열리더니 M16 총구가 나왔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란 나는 도망치다, '시민 여러분! 공포탄입니다. 속지 말고 다시 모입시다'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아스팔트 위에 불꽃이 파다닥 튀었다. 나는 도망가려고 애를 썼으나 하체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총알이 복부를 통해 좌측 엉덩이를 뚫고 나갔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계림파출소 부근의 병원으로 나를 옮겨줬다. 그때 밀려온 공수들이 우리가 병원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병원으로 최루탄을 쏘아댔다. 나는 배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과 최루탄가스 때문에 실신해 버렸다." (구술 : 김영찬, 현사연 조사)
- 신원미상의 남자 1명이 북동 삼화약국 앞에서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당하여 기절했으나 생사여부가 불확실함.
- 35세 가량의 남자 1명이 7, 8명의 특전대원에게 쫓기다 인근 주점에 대피하였으나 뒤쫓아온 공수대원들이 주점을 부순 후 남자 1명을 붙잡아 구타. 김엽외과 병원으로 후송됨. (시청 상황일지)
동료기사의 부상에 격분한 택시기사
* "청년 3명을 태우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을 지나는데 공수들이 달려들어 차를 세웠다. 그들은 청년들을 차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나를 향해 '이 자식도 데모하고 다니는 놈들을 실어다주니 똑같은 놈이다'면서 상스런 욕을 내뱉고 곤봉으로 후려쳤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병원이었다. 상처를 치료받은 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동료기사들이 한쪽에 모여 공수들의 만행을 이대로 보아넘길 수 없으니 우리들도 힘을 합쳐 시위를 하자고 했다. '내일 무등경기장에서 기사들이 모여 대대적으로 차량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으니 모두 참석하자'고 말했다." (구술 : 정영동, 현사연 조사)
17:15
- 광주은행 앞에 시위군중 2백여 명 재집결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17:30
- 광주일고 앞 광주공과기술학원에서 2층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는 학원생, 교사, 사무원 등 40명을 특전대원들이 연행.
- 현재 5백여 명이 대인동 소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모여서 군병력과 대치중(민간인 1천여 명 관망).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재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의 강력한 저항으로 장갑차 2대 출동하여 분산시키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소방서 앞에서 5백∼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을 뿌리며 저지하는 계엄군에 밀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로터리까지 밀려났다. 공수 중대병력이 소방서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공중전화 박스와 가드레일을 부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 쪽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는 보도블럭을 깨서 공수들을 향해 무수히 던졌다. 몇몇 청년들이 공중전화 박스 뒤에 몸을 숨기고 서서히 공수들을 향해 접근하자 최루탄이 날아왔다. 다시 시내를 향해 전진하자 공수들 뒤쪽에서 장갑차가 정면으로 돌진해 와서 바리케이드를 부숴버렸다. 이런 진압과정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시위 군중이 점차 불어나자 광남로에서 군용트럭 10여 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들이 시위대의 앞뒤에서 포위하면서 최루탄을 수없이 발사했다. 완강히 버티던 우리는 거의 질식상태에 이르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 5백여 명 군경과 대치.
- 학강국민학교 부근에서 시위대 체포. 군 중상 2명, 총 1정 분실.
-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시위대 2백 명 군경에 강경히 대치. 장갑차 2대를 출동 시켜 강력대치.
- 금남로에서 시위군중 1천5백-2천여 명 재결집. (전교사 작전일지)
17: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민간인 1천여 명 완전히 분산시킴. (계엄사 상황일지)
18:0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시체 쌓여
-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죽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시체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부녀자나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난타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때려 즉사시켰다', '임신부를 죽였다'는 풍문들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셈이다.
K씨(40)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이날 낮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공용터미널에 갔었읍니다.
그러나 시외버스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아 돌아오려고 광남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나와 걸어오는데 시외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입구 안쪽에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아마 7, 8구는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제가 놀란 것은 맨 위 시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등에 X표로 칼자국이 나 있더군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은 장갑차 2대와 완강한 군경의 진압으로 분산되었음. (계엄사 상황일지)
- 전남기계공고 앞에 50여 명의 시민, 계엄군과 대치, 투석전.
* "오후 6시경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봤다. 전남기계공고와 조선대 입구 사이에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각목과 돌을 던졌고 계엄군이 최루탄을 난사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내가 느낀 것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을 살상할 목적으로 쏘아대는 것 같았다. 구경하는 시민들을 향해서 어찌나 최루탄을 던지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구술 : 이순자 현사연 조사)
18:00 어두워져도 시위는 계속되고
- 광주공원에 수천 명의 시민 집결, '전두환 타도'를 외침.
18:30
- 광주공원 광장에서 특전대원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 입힌 채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주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1천여 명 운집, 제11공수 61대대와 대치. 19:30 완전 해산(육본 상황일지)
- 33대대, 35대대 전남대 복귀 완료.
전과 : 35대대는 없음, 33대대는 9명 체포하여 31사에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19:00
- 2군사령부는 잠정부대(17/283)를 제31사에 배속토록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19:2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2천 명의 학생 해산. (육본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시위군중 5백 명 군경과 대치. (전교사 작전일지)
19:40
-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시위군중 1천여 명이 대형아치를 불태우며 공중전화 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남 넘버를 단 화물트럭에 방화. (월간조선, 1985. 7)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중이던 학생, 시민 5백여 명은 군경의 강력한 진압으로 완전 분산. (계엄사 상황일지)
- 대인슈퍼마켓 앞에 군중(학생, 민간인) 1백여 명 운집. (육본 상황일지)
19:45
- 시민들, 유동에 세워진 대형아치에 불질렀다. 시민들이 몽둥이와 곡괭이를 들고 군경과 대치하다가 군이 증원되자 흩어져. (월간조선, 1985. 7)
* "저녁 8시경 금남로 2가에서 시민과 계엄군 사이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는 계엄군과 그에 맞서 돌을 던지는 시민의 싸움이 쌍방간에 밀고 밀리는 접전을 거듭할 때였다. 공수들이 한국은행 건물의 담을 타고 투입돼 시민을 살벌하게 때리고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동네 아주머니와 구경하고 있던 나는 공수의 곤봉에 뒤통수를 맞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최영옥, 현사연 조사)
20:00 밤이 깊어지면서 파출소에 방화
- 6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누문동파출소 점거.
- 임동파출소 방화로 현재 불타고 있음.
- 광주고속버스터미널 부근 청과물시장 옆에 세워둔 경남 번호미상 화물차량을 1백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방화하면서 경상도 군인이 와서 광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외침. (계엄사 상황일지)
- 제7특전여단, 31사에서 작전회의. 출동준비 재점검. (특전사 전투상보)
- 중흥동 원예공판장 부근에서 시위군중 1백여 명 경남 화물트럭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20:20
- 특전대원들이 광주실내체육관에 있던 운동선수들을 귀가조치하고 10명이 수색을 하면서 유리창 5장을 파손. '죽기 싫으면 가만있으라'면서 운동중인 역도 선수 5, 6명 중 2명을 연행해 감. (시청 상황일지)
- UH-1H 헬기 1대 광주 도착, 임무:예비역 장성의 광주 도착. (육본 상황일지)
- 시위군중 5백여 명이 북구청 유리창을 파손, 군경이 출동하여 저지.
- 시위군중 2백여 명이 역전파출소에 들어와 투석, 유리창이 깨짐.
- 시위대 3백여 명이 도청 앞 꽃상자로 도로를 차단하고 선전탑에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20:05
- 시위대 1백여 명이 역전 파출소 점거했다가 퇴각. (전교사 작전일지)
20:25
- 시민, 학생 5백여 명이 북구청사 유리창 파손. (시청 상황일지)
20:30
- 시민,학생 2백여 명이 역전파출소와 누문동 파출소를 점거 기물 파괴, 직원들은 무사히 피신하였고, 무기와 서류는 미리 지출. (계엄사 상황일지)
- 시위중이던 학생, 시민 40여 명이 북구청에 돌을 던져 유리창 10개를 파손.(계엄사 상황일지)
- 누문동 파출소에 서부경찰서에서 2/25의 경찰이 출동, 군중 퇴진. (육본 상황일지)
20:40
- 북동 김엽병원 앞 노상에서 데모대원이 군지프를 빼앗으려하자 도망을 하면서 안성준(16세, 세차장 종업원)을 치어 중상(김엽병원 입원). (시청 상황일지)
- 임동 파출소 파괴 전소. (전교사 작전일지)
- 이 고장 출신 박경원, 고재필, 전부일, 김재명 등과 예비역 장성들 광주도착, 광주 유지들과의 화합 후 계엄분소 방문, 윤흥정 중장에게 강경진압 완화 요청. (10일간의 취재수첩)
20:45
- 시민 4백여 명이 유동삼거리 선전탑을 불태우고 각종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끄게 한 후 꽃상자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시위중. (시청 상황일지)
- 광주 역전파출소에 1백여 명의 시위대가 몰려와 유리창이 파괴되고 퇴각하였으며, 누문동 파출소는 6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었음(21:05 누문동파출소 퇴진). (계엄사 상황일지)
20:50
- 양동파출소 파괴. (전교사 작전일지)
- 양동파출소를 점거하여 유리창과 싸이카 1대를 파손 후 약 7백미터 위에 있는 임동 파출소로 진출.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시 서구 서2동 전남주조장 공터에서 대검으로 난자당해 피투성이가 된 월산 2동 김행부 씨(36) 변시체로 발견됨. (1980년대 민주화운동)
아침, 신임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정호용 특전여단장
- 정호용 장군은 국군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애섭 준장과 함께 광주에 와서 장형태 지사와 안병학 도경국장 경무관에게, "폭도의 총에 맞아 죽더라도 자리를 지키라"
고 지시하였다(그러나 자리를 이탈하여 시외로 도피하였다). 이날 소준열 중장이 전남북지역 계엄분소장 겸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현지의 정호용 장군과 상의하였다. 소준열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대로 방치하다간 큰일나겠소. 하루라도 빨리 평정을 시켜야 되겠소." 정호용 장군이 소준열 장군에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말, 1988.5)
오전, 대체로 소강상태
- 아침 라디오에서는 "광주시민 여러분, 공수부대는 이미 철수했읍니다"는 방송 이 한 차례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전날의 공수부대는 철수하고 새로운 공수 부대로 교체되었다. 오전의 시 중심가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런대로 평온했으며 거리를 경비하고 있는 새 공수대들에게 이틀간의 참상을 설명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많은 시민들은 전날 집에 들어오지 않은 가족을 찾아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등지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 지난밤의 유인물을 본 시민들 분노
<유인물 내용>
시내 죽은 인원 수십 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특정인 물러가라. (전교사 작전일지)
09:30
-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택시 1대 대파.
- 소강상태에서 계엄군이 증원 배치되었고 상가는 절반 가량 철시.
10:00
- 대인시장 앞 1천여 명의 시민 집결. 광주고교를 돌아 시민관 사거리로 진입.
금남로에 도착하기도 전에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짐.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요소요소에 집총 군인들 경계.
- 치안본부 발표 : 5월18, 19일 이틀간 광주에서 연행자 5백17명, 부상자 경찰 6명, 중상 1명.
- 임동 파출소 전소.
- 파악된 사망자 3명 : 적십자병원에 김종철, 김형렬(29. 백운동) 두 명. 한 명은 신원 밝혀지지 않고 19일 오후 6시 사망했다는 것만 알려져.
- 부상자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23명, 기독병원 4명, 조선대 부속병원 2명. 전남대 부속병원에 있는 김영찬(19. 조대부고 3년)은 19일 오후 4시 30분 계림파출소 앞에서 총격받고 왼쪽 배 관통상을 입었다고 함. 시민, 학생들에 의하면 중태인 사람은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자 늘어날 듯하다고 함. (월간조선, 1985. 7)
10:20 팬티만 입힌 채 기합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바로 앞이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4열로 줄지어 선 젊은이들. 나중에 필자가 좀더 가까이 다가가 세어보니 어떤 줄은 7명, 어떤 줄은 6명, 어떤 줄은 8명이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 못했으나 이 가운데 여자는 10여 명쯤으로 짐작되었다.
거의가 20대의 젊은 사람이었고 두어 명쯤 30대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의 신발은 굽높은 하이힐이 많았다.
10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손에 방망이를 들고 이 무리를 빙 둘러서서 지키고 있는 가운데 하사관인 듯한 군인이 줄 가운데서 구령을 하고 있었다.
'엎드려 뻗쳐, 뒤로 누워, 옆으로 누워, 다섯 번 굴러, 쭈그리고 앉아, 손을 귀에 대고 뛰어, 엎드려 기어, 한발 들고 서' 등 수없는 갖가지 동작을 강제로 하게 했다.
만약 구령에 조금이라도 따라하지 않거나 느리게 할 경우 몽둥이가 가차없이 날아갔다.
특히 여성들의 곤욕스러움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당하고 말지 눈으로 보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숙녀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 길 복판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광경은 많은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특히 가톨릭센터 6층에 있는 천주교 광주교구 주교관에서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가 내려다보고 있었고, 교구 사무실에서는 수녀와 일반직원들이 보고 있었다. 이때 조신부는 '내가 비록 성직자이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었던 심정이었다'고 뒤에 군법회의 법정에서 진술했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윤대주교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난 후 옆길을 보니까 어떤 젊은이가 두 군인에게 붙들려 수없이 두들겨맞고 있었어요. 머리는 무엇으로 찍어버렸는지 모르지만 피가 낭자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대로 놔두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 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쫓아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 그 뒤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왜 내가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을까. 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 아프고 또 두고두고 가슴이 메이게 하는 광경이었지요.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일반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미치광이짓을 하고 있었다. 남녀청년 10여 명을 붙잡아놓고 남자는 팬티만 입히고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힌 채 옆으로 굴러, 뒤로 굴러 등 기상천외한 기합을 줬다. 동작이 조금만 느려도 곤봉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도시복판에서 젊은이들을 반나로 만든 채 기합을 주다니……짐승한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옆에서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한쪽에서는 7, 8명, 다른 한쪽에서는 2, 3명의 남녀가 그런 기합을 받고 있었다." (구술 : 서명원, 현사연 조사)
11:30 광주에 특전여단 병력을 3개 여단 투입하여 경계 - 31사단 병력 배치현황
61대대 : 광주우체국
63대대 : 광주은행
35대대 : 한일은행
33대대 : 계림파출소(전교사 작전일지)
12:00 어제와는 다른 진압양상
- 제일은행 앞에서 시민 2백 명이 계엄군의 폭력에 항의하자 진압병력이 특전사 (공수부대)에서 일반군인으로 바뀌었다고 밝힘. 19일의 병력과는 다른 공수대가 남아서 페퍼포그를 사용.
12:15
- 7공수여단 35대대, 조선대 경비임무 11여단에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12:50 계엄군의 출동대기
- 계엄군 2백50여 명이 10대의 차량에 분승, 시청에 대기 (계엄군이 교체되었다고도 함). (시청 상황일지)
12:55
- 방송용 헬기 1대 지원. (전교사 작전일지)
- 신현확내각 일괄사표. 최근의 소요사태 인책, 출범 5개월 6일 만에 퇴진. (조선일보, 5.21)
오후, 다시 시작되는 시민들의 시위
- 31사단의 시민, 학생 1천여 명 연행설.
- 19일 오후부터 전남북에 걸쳐 내리던 비 오늘 오전에 멈춰. 시민들 '내 아들, 내 동생 어떻게 됐나'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찾아다녀. 시민들 의견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으냐. 가면 갈수록 희생만 커진다', '계엄군을 교체해야 할 것인가'. 시민과 군인, 서로 적대감 느끼는 듯.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었는데 타도 사람으로 바꿨다'는 소문도 나돌아. 시민들이 어제 집단적, 무차별적으로 당해 거리에는 나오지 않고 있음. 오늘밤 게릴라식으로 군과 붙을 우려.
- 오후엔 상가 3분의 2 철시. 현재 중흥동지역에 군인들 가택수색(대학생)한다는 소문. 광주에 유학보낸 서울 학부모들 사태 궁금해 광주에 내려와. (월간조선, 1985. 7)
- 광주 상업은행 앞에서 군중 2백 명을 확성기로 해산 권유(경찰). (계엄사 상황일지)
14:20 시위진압에 화염방사기 사용
- 서방 삼거리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 충돌. 공수대 화염방사기 발사하여 까맣게 그을린 시체 및 부상자는 군용트럭에 싣고 감.(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서방 삼거리의 시민과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개의 불길을 뿜어댔고,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죽음. 공수부대는 시체 및 부상자를 군용트럭에 싣고 감.
- 광주역 부근 20여 대의 택시가 모여 동료기사들의 죽음에 분노, 조직적인 대응책으로 전환시키는 논의 활발.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계림동 동문교(계림극장 옆) 일대에 중고생 2백여 명이 집합. 가스탄 발사하여 분산, 계림파출소 부근 차단중. (계엄사 상황일지)
14:45
- 계림파출소 앞에서 7백 명의 시민이 군과 대치. (시청 상황일지)
- 무등경기장에 영업용 택시 집결 차량시위 계획. (말, 1988.5)
- 병력 배치현황
3공수여단 11대대: 황금동 주변
12대대: 광주시청
13대대: 광주일고
15대대: 누문동
16대대: 광주역 로터리
7공수여단 33대대: 계림파출소, 광주고
35대대: 한일은행 주변
11공수여단 61대대: 도청
62대대: 광주우체국 주변
63대대: 대인동 파출소 부근(전교사 작전일지)
- 시위군중 금남로 공사장 부근에서 연좌농성.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구호를 선창하며 유인물을 낭독.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의가', '아리랑'을 합창하며 시민들을 규합. 학생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스피커가 필요하게 되자 순식간에 40여만 원 모금. (신동아, 1985. 10)
15:30 중학생들도 투석전에 참가
- 하교중이던 중학생 3백여 명이 동명동에서 계엄군에 투석, 최루탄과 페퍼포그 난사로 해산.(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금남로 3가에 모였던 시민, 학생들이 '계엄철폐',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날에 이어 다시 농성을 시작. (월간조선, 1985. 7)
15:40
- 조흥은행 앞 시위대 2백 명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7공수여단 33대대 계림동으로 출동. (특전사 전투상보)
15:50
- 금남로 2가에서 3가까지 5천 명의 시민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가 금남로 입구까지 행진하여 연좌농성.
15:55 금남로 4가에 또다시 수천 명의 군중 결집
- 3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은 1가 쪽으로 이동하면서 '공수부대원 물러가라', '우리를 죽여라',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 무렵 이곳에는 공수부대원 대신 1천여 명의 경찰이 나타났다. 학생과 시민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연막탄을 터뜨리며 서서히 다가갔다. 군중들은 갖가지 구호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보도블럭을 깨서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며 대항했으나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자 1가 쪽으로 3개 소대 병력쯤 되는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진압에 나서는 바람에 군중들은 뒤로 후퇴하면서 밀려났다. 이 군중들은 충장로 쪽으로 빠져나가 구시청 부근인 우미여관 앞에 모였다. 이들 가운데는 고등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삽시간에 2천여 명이 넘는 숫자로 불어났다. 이들은 도청 광장 쪽으로 밀고 들어갈 기세였고, 일부는 도청 광장까지 진출했으나 수가 적어 금방 쫓겨나기도 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6:00
- 도청앞 공수대 4백여 명이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진압 시작.
- 금남로 2-3가에 시민, 학생 모이기 시작. 4시에 3천여 명 '계엄철폐' 외치며 애국가 합창, 일부 연좌농성. 군인들 밀고 내려와 5시쯤 3백 미터 밀려 금남로 3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군과 대치, 철책. 토관. 드럼통으로 바리케이드, 곧 강제진압할 듯.(월간조선, 1985. 7)
- 광주은행 앞, 금남로, 전일빌딩, 가톨릭센터, 등지에서 1천 명 단위로 다발적으로 운집해서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16:00
- 한일은행 앞 시위대 2백 명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도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지하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공수들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지하도로 도망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 한 명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공수는 여학생을 끌고 지하도 위로 올라온 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여학생은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공수는 더욱 악랄하게 굴었다. 대검을 들고 여학생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순식간에 옷은 모두 찢어져 흘러내렸고 팬티만 입혀져 있었다. 여학생의 몸은 이곳저곳을 대검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공수는 여학생의 가슴에 대검을 들이대고 '찔러 죽여버려야 해, 너는 간첩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여학생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공수는 한 손으로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혔다. 여학생은 반항도 못 하고 내팽겨쳐졌다. 이 광경을 본 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할말을 잃고 서 있는 나에게까지 공수들이 쫓아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 전남대 정문까지 도망갔다." (구술 : 김연태, 현사연 조사)
16:05
- 금남로 5가 국민은행 앞에 1천여 명이 모여 도청을 향해 올라오다가 16:20에 계엄군의 가스 살포로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 이 시간 이후 시내 중심가는 최루탄가스로 꽉찼고 금남로 일대를 장악. 시위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각곳에서 시위.
16:18
- CBS 앞 시위대 1천 명으로 증가. (계엄사 상황일지)
* "나는 광주역에서 금남로로 내려와 화니백화점 쪽으로 갔다. 시민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 수는 아마도 몇만 명이 될 듯하였다. 동구청 쪽에서는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더욱 불어났으며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학생 하나가 지하상가 공사장 한국은행 쪽 입구의 난간으로 올라서더니 구호를 외쳤고 시민들이 따라서 외쳤다. 시민들이 너무 많아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시민이 일어나 스피커를 준비할 수 있도 록 모금운동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후배 하나가 성금을 걷어 마이크를 하나 사왔다. 자동차용 밧데리에다 소형앰프를 달아 한 사람이 들고, 후배는 무등을 타고 시위대의 가운데로 들어가 확성기를 통해 선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 님들과 같이 죽읍시다' 시위대는 사기가 고양되어 투석이 치열해졌다. 시민들은 계속 불어났고 노소를 막론하고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등의 노래를 불렀다. '공수들을 뚫자' 하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열이 편성되었다. 각목과 쇠파이프 하나씩을 든 건장한 청년들이 선두에 서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이제 구경만 하거나 방관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도로 부근의 상점이나 주택가에서도 물통과 세수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서 밖으로 내놓았고, 리어커와 자전거로는 공사장 주변의 돌과 자갈을 실어날랐다. 시민들은 최루탄가스가 터져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주머니들과 요식업소 아가씨들은 물수건과 치약을 준비하여 군중들 사이로 시위하는 사람들 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시민들은 얼굴과 코 밑에 치약을 바르기도 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16:20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8백여 시민,학생들이 애국가 부르며 농성, '계엄해제' 외쳐. 계엄군 최루탄 발사, 일단 해산.
- 광주고 앞에서 4백여 명 계엄군과 대치.
- 번화가 충장로 등 교통차단. 골목길에서 계엄군과 경찰이 시민 접근 차단.
- 배명인 광주지검 검사장 말에 의하면 어제(19일)까지 9백8명 연행(고등학생 13명, 대학생 4백95명, 시민 4백 명). 이중 연행학생과 일반시민 중 1백67명은 오늘 오후 석방한다고. 계엄분소는 또 앞으로도 계속 주동자가 아닌 자는 선별 처리해서 석방한다고 밝히고 주동자는 엄히 다스린다고 발표했으며, 소요가담자 중 경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발표.
- 전남도 계엄분소, 전남 부지사, 검사장, 교육감, 목사, 신부 소집. 기관장 등이 "데모 진압방법 너무 지나치다. 이 때문에 시민, 학생들이 반발했다. 시민 선무가 급선무다. 석방할 사람을 빨리 가려 석방시키라"고 대책 건의. 계엄분소 대단히 고무적 반응. 실마리 조금씩 풀리는 듯. (월간조선, 1985. 7)
16:25
- 가톨릭센터 앞의 시민, 학생이 장갑차 1대와 군의 최루탄에 의하여 중앙극장까지 밀려 일부 고등학생 합세. (시청 상황일지)
16:50
- 해산된 군중이 국민은행 앞에 3백여 명 집결중. (계엄사 상황일지)
- 시위대는 도청으로 통하는 6개 방면의 모든 도로에서 물밀듯 밀어닥침. 대열 앞에 드럼통과 대형화분대 등을 굴리면서 경찰저지선에 다가섬. 일부 시위대는 쇠파이프, 식칼 등을 쥐고 '같이 죽자'고 외침. (현사연 조사 종합)
- 도청 분수대로 이어지는 6개 방향의 모든 도로에는 도청을 중심으로 이중, 삼중의 경찰저지선이 쳐졌고, 그 후방에는 군병력이 진주 시위군중과의 긴장 속에 대치를 계속.
17:00
- 도청 쪽에 있던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내려오자 3백여 미터쯤 후퇴, 금남로 4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2천여 명이 군과 대치. 이때부터 금남로는 다시 가스로 가득했고 군중들은 철책, 드럼통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 (월간조선, 1985. 7)
- 금남로 CBS, 광주은행 62대대가 투입되어 진압. (전교사 작전일지)
- 구시청 사거리에 칼을 든 시민,학생 4백여 명이 계엄군에 투석, 계엄군의 가스탄 발사로 분산.
- 영업용 택시기사 50여 명은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클랙슨을 누르면서 시위하던 중에 경찰 싸이드카 대원의 설득으로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17:10
- 충금지하상가에서 3백여 명의 시민이 계엄해제를 외치고 있음(골목길에는 많은 인파가 서성거림). (시청 상황일지)
17:40
- 금남로 한국은행 앞 5백여 명 계엄군이 분산시키자 금남로 공안의원 통로 5백여 명, 구역전 3백여 명, 대한극장 앞 2백여 명, 현대극장 앞 6백여 명, 구시청 앞 1백 명, 계 1천7백여 명이 산발적으로 계엄군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7:50
- 충장로에 운집한 시위대,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육탄돌격 시도하여 경찰과 충돌. 이들은 대도호텔 앞에서 연좌 후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대표자를 선출, 경찰저지선에 보내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낼 테니 경찰은 비켜달라"는 협상을 시도.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