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도약은 위험합니다
롬 12:1-2
도약은 건너뛰는 것으로 중간단계를 밟지 않고 뛰어넘는 행위를 말합니다. 신앙에서 도약은 합리성을 뛰어넘어 아무런 근거 없이 종교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월적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고 다만 자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초월적 존재를 믿기 위해 믿는 것을 말합니다. 춘향전에서 춘향 모 월매가 정한수 한 그릇을 소반에 밭쳐놓고 천지신명께 이도령의 알성급제를 비는 것은 무속이고 이것은 전형적인 신앙의 도약입니다.
기독교에서 신앙의 도약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간단하게 단정할 수 없는 다양한 철학적 사고와 성경말씀의 깊은 묵상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로마서 12;1-2절 말씀은 기독교에서 신앙생활은 믿음의 도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생의 현장에서 합리성이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산 재물로 드리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준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동물을 죽여서 재물로 드리는 것과 대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 제물이 자기 것이 아니고 제물을 받는 하나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원래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출생한 것도 아니고 장차 올 죽음도 인간 의지 밖에서 느닷없이 들어오는 것으로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태어나고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인간 영역 밖에서 들어온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그것이 순리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원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오직 죽어서 가는 피안(彼岸)의 세계만을 위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 구원이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 보증하여 그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을 대면할 필요도 없고 이 땅에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지금 이 현실에 있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지금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구원이 저 피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고…. 이 땅에서…. 지금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 삶과 우리의 전 인격에 실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에게는 존재적 불안과 영원에 대한 소망이 있는데 이것은 태생적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그 불안을 해소하고 영원에 대한 소망을 채워줄 초월자를 찾아 종교심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이 문제에서 성경은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믿음으로 불안과 영생의 소망을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행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전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인간은 죄인이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으니 이제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받았음을 확신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구원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단순히 그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확신에 차서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은 하였지만 고백할 당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것이고 그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의지를 발동하여 결단하여 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위하여 너의 자존심이 죽어야 믿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 자존심을 죽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체험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심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영적인 지식을 터득했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근거가 단순히 결심과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지요. 성경을 닫아놓고 믿거나 표면적인 의미를 따르면서 합리성 없이 단순한 결심과 결단으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신앙의 도약으로 가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경험을 공유함으로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이 없는 믿음은 공허해지기 마련입니다...신앙의 도약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북유럽의 그린랜드에서 찬란한 밤하늘의 오로라 현상을 목격한 사람이 신과 맞닿은 체험을 하고 분명히 창조주가 있다고 확신하여 자기부인 없이…. 하나님께 자기가 드려진 바 없이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도약입니다.
신앙에서 도약이 일어나면 구원받은 자기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진바 되지 못하여 자기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정체성을 배우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기 삶을 경영하는 주체가 자기가 되고 자기라는 틀 안에 갇혀서…. 자기의 꿈과 소원만 바라보고 사는 것…. 주로 신비하고 신기한 일로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 베드로가 그랬지요…. 자기 세계관에 갇혀 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던 예수님이 죽고 나니 더는 무엇을 기대할 수 없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고 자기 고향 갈릴리로 가버렸습니다. 그러한 삶은 공허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공허해진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을 체우기 위하여…신앙의 도약을 추구합니다.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중요한 신앙의 덕목으로 생각하여 그 체험을 그리워하고 찾아다닙니다. 결국에는 사이비 이단으로 빠지고 맙니다. 영적인 것은 신비한 것이라는 아주 잘못된 카태고리(category) 안에 같혀 있어서 눈앞에 초월적인 현상을 목도하게 되면 사람들은 도약하여 이성을 잃어버리고 맹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사랑 안에서 범사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라고 하십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3-15)
.......................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이 우리 모두의 인생길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