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총을 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혹은 먼 이국 땅에서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정작 그 총과 선언문이 가능하도록, 돈을 대고 사람을 키우고 사상을 심은 사람은 어디 있는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라는 이름을 들어본 이가 얼마나 될까.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59세로 세상을 떠난 이 인물은, 동시대를 살았던 누구보다도 넓은 방면에서 일제에 맞섰다. 교육자로, 언론인으로, 기업가로, 그리고 마지막엔 대종교(大倧敎) 전강(典講)으로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있다면, 그것은 대종교다.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이 민족종교와의 인연이 그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또 그 믿음이 어떻게 그를 죽음으로까지 이끌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안희제라는 사람의 절반은 보지 못한 것이다.
안희제가 대종교와 처음 연결되는 맥락은 그가 스물네 살이던 1909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래에서 결성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은 17세에서 30세 미만의 청소년 80여 명으로 구성된 비밀결사였다. 안희제는 이 단체의 부단장을 맡았고, 이 단체의 회원 명단에는 훗날 대종교의 핵심 인물이 되는 윤세복의 이름이 함께 올라 있었다.
윤세복은 대동청년단이 발족한 지 1년여 만인 1910년 12월, 대종교의 중광교조 홍암 나철을 직접 찾아가 입교한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종교적 신앙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던 바로 그 시점에,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줄 사상적 무기로서 대종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윤세복이 훗날 남긴 기록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국권 회복과 근대 민족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종교보다 더 나은 가치가 없다는 것, 그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이 맥락은 안희제의 입교 시기를 둘러싼 논란과 직결된다. 일부 기록은 1931년 혹은 1934년을 주장하지만, 대종교 자체 기록 및 <대종교중광육십년사>는 1911년 10월 3일을 입교일로 명확히 적고 있다. 이 날은 곧 안희제가 경술국치를 당한 이듬해, 대종교 중광교조 나철에게 봉교를 서약한 날이며 1914년 3월 15일에는 영가(靈戒)를 받았다.
대종교에서 입교와 영가수수(靈戒授受)는 엄격히 구별되는 별개의 절차다. 1934년 입교설은 이 두 개념의 혼동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1931년 입교설 역시 안희제의 실제 동생인 안국제의 기억에 기댄 것으로, 뚜렷한 문헌 근거가 없다. 결국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는 윤세복의 기록이다. 그와 안희제는 30년 지기였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어떤 증인보다도 가까웠다.
안희제가 대종교 활동에서 남긴 가장 구체적인 공헌 중 하나는 교적간행(敎籍刊行)이다. 1939년 10월, 그는 해산 강철구와 함께 대종교서적간행회를 조직하고 교도들의 정성금을 모아 2년 뒤인 1941년 대규모 교적 출판을 주관한다. 당시 발행된 서적의 종류와 부수를 보면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홍범규제(弘範規制)> 5백 부, <삼일신고(三一神誥)> 2천 부, <신단실기(神檀實記)> 1천 부, <종례초략(倧禮抄略)> 2천 부,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3천 부, <종문지남(倧門指南)> 2천 부 등 6종류에 걸쳐 총 1만 5백 부를 간행했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한얼노래 4천 부를 경성에서 추가로 출판했다.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3대 경전 중 하나로, 천훈·신훈·천궁훈·세계훈·진리훈의 다섯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전은 고구려를 거쳐 발해로 이어진 도맥의 산물로 이해되는데, 대종교에서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들 대야발이 전한 책이라는 기록도 함께 전해진다. 단순한 종교서가 아니라, 역사와 민족 정체성을 동시에 담은 텍스트였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중광 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1914년에 저술한 것으로, 단군 관련 사적과 신교사상의 흔적을 내외문헌에서 발췌해 정리한 자료집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명칭을 '신단(神檀)'이라 명명한 것은 삼신일체인 하늘의 교화와 치화를 받은 천민(天民)이자 천손(天孫)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출판 활동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 이행이 아니었다. 대종교는 1920년 청산리독립전쟁의 승리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1926년 12월에는 장작림(張作霖)이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렸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암흑기는 계속되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경전을 인쇄하고 배포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저항이었다. 사상을 인쇄된 문자로 고정시키는 것, 그것이 곧 일제가 지우려는 민족의 기억을 붙드는 방식이었다.
1933년 안희제는 만주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 즉 발해의 옛 수도 터에 발해농장(渤海農場)을 세웠다. 표면적 목적은 토지를 잃고 만주를 떠돌던 한인 이주농민 300여 호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5개년 연부 상환 조건으로 자작농 전환을 추진했다. 농장 안에는 발해보통학교도 설립해 이주민 2세 교육을 맡겼다.
그런데 이 농장의 위치 선정은 단순한 지리적 편의가 아니었다. 동경성은 발해의 고도(古都)이며, 대종교의 교리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이해된다. 대종교의 도맥이 부여에서 고구려로, 그리고 발해로 전승되었다는 인식이 이 장소 선택의 배경이었다. 안희제가 꿈꾼 것은 단순한 농업 기지가 아니라, 고구려-발해의 역사적 연속성 위에 세우는 민족 독립의 거점이었다.
그의 셋째 아들 안상만은 이 시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발해농장의 자리를 발해의 고도 동경성으로 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안희제의 이상주의적 성향이, 독립운동의 직접적 목적을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세우고 발해농장을 기획하게 했다고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대종교 총본사까지 이 동경성으로 옮기게 된 경위다. 1934년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대종교 선도회가 재정난에 빠지고 인재 확보도 여의치 않자, 교주 윤세복과 안희제는 머리를 맞대고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총본사의 운영비뿐 아니라 대종교의 거의 모든 경비를 안희제가 단독으로 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교단에 쏟아부으면서도, 그것이 곧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는 일이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다.
안희제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의 나라사랑 방식 중에서도 가장 일관된 것이었다. 경남 의령에 창남학교, 구포에 구명학교,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운 것은 그가 아직 20대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이후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해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수많은 인재를 국내외로 유학 보냈다.
만주로 건너간 이후에는 대종교와 직접 연결된 교육 활동에 집중했다. 동경성에 이주 농민 자녀를 위한 발해보통학교를 세웠고, 더 나아가 1936년 동경성 대종교총본사 안에 설립된 대종학원(大倧學院)의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당시 대종교 지교(知敎)의 교질로 1937년 4월 5일부터 1940년 3월 30일까지 만 3년간 대종학원 원장직을 맡았다.
당시 대종학원 원장을 역임한 다른 인물들의 임기가 대개 1년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만 3년에 달하는 안희제의 임기는 각별한 헌신을 반영한다. 대종학원은 초등부, 중등부, 여자야간부를 아울렀으며, 교과 내용에 한국사와 대종교 경전을 정규과목으로 편성했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이 학원은 1941년 봄 일제의 탄압으로 초등부가 먼저 문을 닫았고, 중등부와 야간부도 1942년 봄에 폐쇄되었다.
대종학원의 정신은 일찍이 교주 윤세복이 1942년 9월 5일에 쓴 '널리 펴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체면을 유지할만한 天殿도 교당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교회의 일군을 길러 낼만한 교육기관도 없다. (중략) 그런데 이제 때는 왔다. 우리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대종교의 만년대계를 세우고 나아가야 된다. (중략) 기름진 만주 벌판에 대종학원을 세워서 억센 일군을 길러내자!"
일제는 이 글의 마지막 구절 "일어나라, 움직이라!"를 "蜂起하자, 暴動하자!"로 왜곡해 번역하고, 이것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몰아붙이는 빌미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임오교변(壬午敎變)의 도화선이 된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는 만주와 국내 각지에서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동시에 체포했다. 안희제는 이미 그해 10월 3일 천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으로 임명된 직후였다. 일제는 이 거사를 잠행징치반도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포장했다.
이 사건은 우연히 불거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이 같은 날인 1942년 11월 19일, 국내외에서 동시에 터진 것은 일제가 오래전부터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워뒀음을 보여준다. 조선어학회의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가 검열 과정에서 발각되었고,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대종교를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조선어학회와 대종교의 관계는 실제로 깊었다. 조선어학회는 대종교 정신을 바탕으로 언어민족주의를 실천했던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조선어학회 구성원 중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정인보, 안호상 등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일제의 눈에 두 조직은 하나였다.
안희제는 9개월 동안의 미결 구금 상태에서 70여 회에 달하는 고문을 당했다. 당시 수감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방 안에서는 항상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게 했고, 서로 얼굴을 못 마주하게 했다. 추위에도 이불을 목에 두르거나 무릎을 덮지 못하게 했으며, 하루 두 끼 먹는 조밥은 돌이 많고 숙눙 한 공기로 끼니를 때웠다. 일제의 고문은 더 악랄했다. 배탈로 설사를 한 사람을 기진맥진하도록 구타하고 2, 3일씩 밥을 굶기는 것은 예사였다. 날마다 2, 3인 혹은 3, 4인씩 뽑아 취조할 때의 고문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1943년 8월 3일, 안희제는 목단강 영제의원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숨을 거뒀다. 향년 59세.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조국의 광복은 2년 뒤의 일이었다.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5명 가운데 열 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종교는 이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추존했다. 권상익(權相益, 향년 44세), 이정(李楨, 49세), 안희제(安熙濟, 59세), 나정련(羅正練, 62세), 김서종(金書鍾, 51세), 강철구(姜銕求, 53세), 오근태(吳根泰, 63세), 나정문(羅正紋, 54세), 이창언(李昌彦, 68세), 이재유(李在囿, 68세). 이 중 가장 젊은 이가 44세, 가장 나이 많은 이가 68세였다.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을 맞아 대종교총본사에서는 임오교변 순교십현 상호식(上號式)을 거행했다. 안희제에게는 정교(正敎)가 추호(追號)되었다. 안희제의 가장 절친한 동반자였던 단애 윤세복은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은 헌사를 남겼다.
"나라와 함께 희망 잃은 겨레여. / 현실에 헤매는 迷路를 버리고 / 단군님의 문을 두다리고 믿으라. / 거룩한 개천절에 계시를 받고 / 法悅을 참지 못해 부르짖는 純情과 / 그 길로 대종교에 바친 빛나는 공헌이여. / 그 반만년의 피로 이은 최고의 신앙, / 배달정신의 원천을 새롭게 길러서 / 항일광복의 悲願을 무장한 투쟁이여."
이것이 그의 동지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종교적 헌신과 무장 투쟁이 하나의 문장 안에 공존했다. 대종교는 믿음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싸움의 공간이었다.
안희제라는 인물의 활동 기록이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증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그의 모든 활동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둘째,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소식을 듣고 만주를 떠나면서 그가 기록해 놓은 <만몽일기(滿蒙日記)>와 여러 왕복 서류들을 모두 소각해 버렸다.
셋째, 대종교의 임오교변 당시 대종교총본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간서적 2만 여권 및 구존 서적 3천 여권, 각지의 대종교 지도자들이 체포될 당시 발견된 서물 6백 여종이 모두 일제에 압수된 뒤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들은, 그가 단순히 독립운동 자금을 댄 사람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증언한다. 그는 사상을 인쇄하고, 사람을 교육하고,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을 땅 위에 구현하려 했다. 발해농장의 위치는 지리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선언이었다. 대종교 경전 출판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무장이었다. 대종학원 운영은 교육 사업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저항의 재생산이었다.
백산(白山)이라는 호(號)는 백두산을 가리킨다.
한민족의 영산(靈山), 단군이 내려온 산, 대종교의 성지.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거기서 가져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그 산처럼 조용히 서 있으면서, 그 아래로 흐르는 민족의 강줄기를 지탱하려 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희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그를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조차. 총을 든 사람만이 기억되는 사회에서, 사상을 심고 사람을 키운 사람은 조용히 잊혀갔다. 그 망각이야말로 우리가 지금도 완수하지 못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