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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하는 기현두 목사(온세교회) |
왜 보여주셨습니까?
1972년 6월 주선애 교수는 제자들에게 얼마전 자신이 보았던 망원동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소개한다. 3백여대의 분뇨차가 쏟아내는 인분주변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 관한 예기다. 거기 약 1만여 명에 달하는 빈민들이 살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들이 눈에 밟힌다는 내용이다. 주 교수는 하나님에게 저에게 그 현장을 "왜 보여주셨냐"는 절규의 기도를 드린다.
* 고 이상양 전도사 생전(남성)과 주선애 교수와 동료들 |
주 교수로부터 이런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여럿이지만 이상량 학생의 마음은 편지 않았다. 며칠 후 동료들과 함께 주 교수를 따라 뚝방마을 갔고 그중에 이전도사는 거기 정착을 하게 된다.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과 함께 자고 그들이 맡는 냄새를 함께 맡고 살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느끼며 해결을 모색한다.
주 교수는 훗날 말하기를 이 전도사가 이 동리를 처음 보고 했던 말을 전한다. "선생님, 발이 안떨어집니다. 여기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 보여 주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헌신과 사약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잘먹고 휴식을 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상량을 통하여 장신대 학부생들의 사역의 현장이 된 이곳에는 김동호 목사 류영모 목사등이 야학교사와 목회자로 거쳐갔다.
이상양 전도사의 일생(뚝방마을 이야기)
이 전도사의 요절을 아쉬워 하는 그의 친구 김기복은 그런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뚝방마을 이야기” 라는 이름으로 두란노 출판사에서 1982년 초판이 나온 이후 2012년 증보판이 나왔다.
이 전도사의 망원동 사역지에는 이렇게 그의 친구와 장신대 학부 후배들의 현장훈련지가 된다. 가난하고 순수하고 꿈많던 갈릴리의 작은 예수를 꿈꾸던 이들이다. 임규일, 한재신, 임재환, 안기성, 신재영(도미), 박진석등이다.
임규일은 그날의 시간을 이렇게 반추했다. “우리들 젊은 시절 저 치열했던 1970년대 양화대교 옆 한강변 뚝방 분뇨처리장 부근 뚝방촌 신학과 신학실천 현장 그 뜨거운 도전과 비젼을 품고 나누던 한알의 밀알 고 이상양전도사님 40주기 추도식으로 옛 동역자들이 모였습니다.
이전도사의 후임으로는 류영모 목사가 잠깐 시무를 한바 있었고 그후 친구인 김기복 목사가 그리고 현재는 유병호 목사가 20여년째 목회를 하고 있고 당시 동료 중 한분인 임정자 전도사는 지금도 망원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충청도의 불교가정에서 태여나 충북대학교에 재직하다가 장신에 편입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망원동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장신대 학부 출신 선후배들의 민중사역지였고 출구였다.
이전도사의 6년은 봉사활동만이 아니다. 1972년 첫 방문후 그해 7월에 애린교회를 세우고 야학과 진료소등 주민들의 삶의 개선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또 당시 연세대학교 부설 도시문제연구소 박창빈 목사를 만나게 되고 도시 주민조직에 대하여 공부한다.
이 전도사의 사모 박영혜 장로(도림교회)
그리고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사역하는 신학교 선배인 인명진 목사로부터 소개받은 박영혜 간사(영등포신협) 와 결혼한다. 박 사모는 첫 인생에 대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뚝방마을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하게 됐다" 고 하며 질병으로 수술을 받은 가운데도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 앞줄 우측 부터 김기복, 최양춘 목사와 뒷줄 박영혜 장로(고 이 전도사 사모) |
이 전도사와 사별후 뚝방마을에서 어린이집을 섬기며 훗날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도림교회 부설 어린이집에서 원장을 지내고 현재는 도림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다. 당시 어린 아들 이선배는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웠다.
"이상양 전도사 기념선교회“는 2011년 조직되었다. 그리고 지난 34주기 추모행사는 온새교회(기현두 목사)에서, 35회는 모래내교회(최양춘 목사), 36회는 영락공원에서, 37회는 다시 온새교회에서 열렸다.
그후 매년 추모보다는 특별한 기간에 모이기로 하게 된다. 그리고 장신대 후배들에게 이전도사의 신앙과 정신을 전수하도록 하는 기념강좌와 기일에 채플을 요청하기로 하고 40주기()2017년)에 모이기로 결정한바 있다.
고 이전도사는 큰 교회를 이룬 목회성공자도 공부를 많이 해서 유명한 분도 아니다. 또 평생을 원없이 목회하고 은퇴한 분도 아니다. 짧고 굵지만 그의 신앙과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 목회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에서의 사역의 열매는 바로 하늘 나라에서의 상급일 것이다.
이 전도사는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교인들을 모은 목회자는 아니다. 그러나 질병가운데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민중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며 그들의 삶의 개선과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살았던 목회자요 사회운동가였다.
* 좌로 부터 한재신, 전천혜, 고애신, 000, 김기복, 최양춘 목사 |
저자소개
김기복 목사는 공주교대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에 뚝방 마을 야간학교 교사로 섬기다가 고(故) 이상양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2년 뒤 이상양 전도사가 개척한 망원제일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으며 이상양 전도사 소천 후 망원제일교회의 후임 목회자로 사역을 이어 갔다. 8년간 망원제일교회를 섬긴 뒤 부산 성광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2010년에 은퇴했다. 현재 이상양기념선교회 대표 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성광교회 40년사』와 『행복한 교회 (설교집)』가 있다.
첫댓글 세상에 이거 어디서 보시고 여기까지 옮긴 겁네까... 오, 참으로 그날 은혜충만 감동 충만 이었사옵나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하고요... 맨 아레 사진 설명이 틀렸네요... 좌로부터... 한재신, 임규일, 이희숙, 고애신, 조혜선, 김기복, 최양춘....*가운데 사진 "주교수와 동료들은.. 주교수와 영락교회 백합회 회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람다움을 추구하고 회복해아 할 신앙마저 또 하나의 욕심의 도구로 전락한 오늘의 세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순수함과 진실의 삶을 살다 가신 분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기현두 목사가 섬기는 교회 이름이 "온세"가 아니고 "새온"교회 입니다.
고 이상양 전도사님과 희성교회에서 1년 가까이 동역했던 저는 남다른 기억이 있네요.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던 그 모습.
뚝방 마을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힘드시겠구나 했는데 역시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셨네요. 귀한 삶을 사셨지요. -박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