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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웅 김 영 옥 대령
한국?프랑스?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 수훈 / 미군 전투교본을 다시 쓰게한 전설적 작전장교
한반도 휴전선 60km 북상의 주역 / 국경을 초월한 영원한 인도주의자
여성?아동?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수호자 /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아들
애칭 : Captain Kim
국적 : USA
직업 : 美육군 예비역 대령
출생지 : Los Angeles
출생 : 1919
사망 : 2005.12.29(향년 86세)
학력 : 로스엔젤레스 시립대학 중퇴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학사
복무기간 : 1941년 ~ 1972년
지휘 : 미국 7보병사단 31연대 1대대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경력 : 1943.9 ~ 1945.2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美육군 작전참모로 참전
1951.3 ~ 1952.9 - 한국전쟁 참전 美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
1963 - 한국에서 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 창설
1973 ~1979 - Special Services for Groups 이사
1978 ~ 1988 - United Way LA지부 이사
1986 ~ 1988 - Family & Friends of the Keiro Homes 창립이사장
1989 ~ 2004 - 일본계 美장병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회 회장
1990 ~ 2003 - 韓美박물관(KAM) 창립이사, 이사장
1999 ~ 2001 - 美국방부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 위원
수상내역 : 국민훈장 모란장 - 대한민국 / United Way 표창장 - USA
美적십자 남가주지부 표창장 - USA / 캘리포니아 주자사 표창장 - USA
Los Angeles시 정부/의회, 시장 표창장 - USA / 美연방세관 표창장 - USA
San Fancisco시/카운티 정부 표창장 - USA
훈장 : 1945 -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
1950 - 프랑스 십자무공훈장
2004 - 美이민 100주년 선정 이민영웅
2005 - 프랑스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 무공 훈장
2005 -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 김영옥 연표
1919년 미국 LA에서 이민 1세대인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Nora) 고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6년 LA 벨몬트고등학교 졸업
1937년 LA 시립대학 입학
1938년 LA 시립대학 중퇴 후 프랭크 위긴스 국립 디젤엔진학교 입학
1941년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
1942년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장교 후보생으로 선발 (당시 유일한 유색인 후보생)
1943년 소위 임관 후 일본계 미국인 부대인 100대대 부임. 9월에 유럽 전선으로 파병돼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상륙 이후 1945년 4월 본국 귀환 때까지 로마·피사 해방전투 등을 치름
1944년 1월 중위, 6월 대위 진급
1946년 명예제대
1946~1950년 LA에서 세탁소 운영
1950년 9월 한국전 발발 소식을 듣고 재입대
1951년 3월 한국 도착. 이후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에 부임해 구만산·탑골·청병산·금대리·노동리 전투 등을 치름
1951년 9월 소령 진급, 10월 1대대장 부임
1952년 9월 한국을 떠남
1952~1956년 포트 베닝 보병학교 교관
1956~1959년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독일 근무
1959년 중령 진급
1959~1963년 캔사스 포트 리브에서 교관
1963~1965년 미군 고문으로 한국 근무. 1965년 대령 진급
1965~1971년 유럽, 하와이 등지에서 근무
1971년 부상 후유증으로 입원
1972년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
1978~1988년 미국 최대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 LA 지부 이사로 근무
2003년 한국의 국민훈장 모란장, KBS 해외동포상 수상.
2005년 12월 별세
고 김영옥 대령은 1919년 독립운동가 김순권 선생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 고 사이에서 4남 2녀 중 위로 누나 한 명이 있는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김순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하와이에서 출범시킨 대한인동지회의 북미총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누나인 윌라 김은 뮤지컬 의상디자이너가 되어 토니상을 두 차례 수상했습니다.
김영옥은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 들어갔지만 1년 후 자퇴하고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였으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육군 모병소를 찾아갔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1941년 아시아계도 징집대상으로 포함되는 법이 미국 연방의회에 의해 제정되어, 입대 영장을 받은 김영옥은 22세의 나이로 미국 육군 병사로 입대하였습니다.
사병으로 입대한 그는 장교 후보생에 선발되어 보병 장교 소위로 임관, 유럽 전선에 배치됩니다. 그가 배치된 부대는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제 100 보병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였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에 돌입 하자 미국 내 11만명 가량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몹시 난처한 입장에 빠졌습니다. 의심과 증오의 대상이 된 이들은 졸지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중서부 오지의 수용캠프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지요.(같은 주축국 출신이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별 차별을 받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분명 인종적 편견이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용 캠프로 몰린 일본계 미국인들은 떳떳한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길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었죠. 약 2만2천명의 일본계 청년들이 미군에 지원입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곧 미군 지휘부의 고민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백인과 유색인종의 피를 따로 수혈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당시에 이 일본계 병사들을 백인과 섞어 놓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한데 묶어서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 일본군과 싸우게 하자니 이들의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해서 고심 끝에 일본계 병사들로만 구성된 ‘100대대’가 탄생하게 됩니다. 물론 간부들은 거의 백인들이었지요. 이 ‘100 대대’는 어느 사단, 어느 연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대대로 흔히 '고아 부대'(Orphan Unit)'라고 불렸죠.
그가 배속되어 와보니 장병들의 전투능력은 형편없었고, 군기도 문란했습니다. 게다가 부대의 많은 장교들은 일본계 장병들을 위해 희생하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무조건 복종을 내세우며 부하들을 사지(死地)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은 자신의 전공(戰功)에만 관심을 쏟는 장교들을 깊이 증오(憎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지 얼마 안되어 장병들은 한국계 김영옥 소위에게 '사무라이 김'이란 별명을 붙일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가 결코 자신의 위신과 영광을 위해 부하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군법회의 회부와 즉결처분의 위기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그는 '부하들을 의미 없는 죽음으로 내몰' 어리석은 명령에 극력 반대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수행해야 할 때는 독창적인 작전을 구사하여 임무 완수는 물론 부하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유럽전선에 배치된 ‘100대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기 시작했죠.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안지오 전투에서 보여준 눈부신 활약으로 로마에 입성할 때는 연합군의 최선두에서 행진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합니다. 이들의 투혼에 매료된 미 제 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100대대를 휘하에 둔 것이 자랑스럽다”며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100대대’가 피로써 증명한 충성심은 일본계 군인들에 대한 의혹을 씻어내기에 충분했고 미군은 (역시 일본계로 이루어진) 2개 대대를 증편하여 ‘제 442 연대’(442nd Regimental Combat Team)을 창설, 제 36 텍사스 사단에 배속시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부하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뛰어난 전술 때문에 얻어진 영예로운 전공이었으며, 그의 소대는 결원이 생길 때마다 다른 장병들이 앞 다투어 전입하길 희망했습니다. 심지어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의 지시대로 싸우면 '총알도 피해간다'는 미신이 생기기까지 했으며, '어차피 죽는다면 김영옥 소위 밑에서 싸우다 죽겠다'는 무한한 충성심이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싸우다 죽어라", 제 100대대의 모토였습니다.
부대의 구호 "Go for Broke!"(싸우다 죽어라 쯤으로 해석할까요?)가 상징하는 것처럼 2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442연대와 100대대는 전 미군 중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탄 단위 부대로 기록됩니다. (지난 2000년까지 최종 심사 결과 미국 최고 훈장인 의회명예훈장 21개, 수훈십자장 33개, 은성훈장 559개, 동성훈장 4,000개, 퍼플하트 9486개가 이 부대에 수여되었죠.) 용감히 싸운 만큼 희생도 엄청나서 연대를 거쳐 간 18,000명중에 9486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특히 442연대의 모체가 된 100대대는 그 별명이 ‘고아 부대’에서 ‘퍼플하트(Purple Heart, 명예 전상장 - 전투 중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수여되는 상이기장) 부대’로 바뀔 정도였죠.
김영옥 대령도 100대대의 소대장과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탈리아 전선과 프랑스 전선에서 보여준 눈부신 전공으로 미국 특별무공훈장, 프랑스 십자무공훈장,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을 받습니다. 특히 그는 프랑스 비브뤼에 전투와 비퐁텐트 지역을 해방시킨 주역으로 손꼽히고 있죠.
* 김영옥 대령이 100대대 부대를 이끌면서 대단한 전투 영웅으로 활약한 몇 가지 소개하자면,
■ 대위 진급을 전장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적의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령부에 김영옥은 포로생포작전을 건의했지만, 위험 때문에 승인 불가 명령이 났습니다. 하지만 김영옥은 밤에 침투한 뒤 낮에 작전을 펼치면 가능하다고 주장해서 적진에 침투합니다.
일본계 아카호시 일병과 단둘이서만 밤에 독일군 지뢰밭을 통과한 김영옥은, 동이 틀 무렵 자고 있던 독일군 병사의 입에 총구를 겨누고 포복으로 아군진지까지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김영옥의 작전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클라크 사령관은 복귀한 김영옥에게 부관의 계급장을 떼 대위 계급장을 달아 줍니다.
■ 사무라이 김
처음 일본계 미국인들은 한국계 김영옥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안 부대장은 김영옥을 전출시키려고 했지만, 김영옥이 자진해서 남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대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영옥은 철저한 부하 사랑과 능력 있는 전투력으로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중대장의 무모한 공격 명령이 부하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김영옥은 최소한의 부대원 희생 작전을 펼치면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산타마리아 전투에서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단 2개 분대원만을 이끌고 수류탄으로 폭파 시키고 포로까지 생포하는 전과를 이끌며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후부터 부대원들은 김영옥을 '불사신 영(Young)'이라 불렀고 이탈리아 주민들은 '까삐텐 김'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고도 능력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김영옥 대령의 초급 위관장교 시절은 우리에게 '부하는 왜 상관을 따르는가?'라는 군인의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합니다. 부하가 상관을 따르는 것은 계급으로 강제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분을 따르면 내가 살 수 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과 존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관은 부하에게 명령할 때마다 '내가 내리는 명령은 일신의 영달을 위함이 아니라 나라를 승리로 이끌고,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 군대라야 진정한 강군(强軍)이요 상승(常勝)할 것입니다.
1945년 휴가 중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소식을 듣고 김영옥은 펜타곤의 장기 복무 요청을 거절하고 명예 제대를 합니다. 그는 군 복무 기간 동안 모은 3,000달러를 가지고 코인란드리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합니다. 1950년대 코인란드리 사업은 대박 사업이 되었습니다. 김영옥이 최초로 LA에서 시도한 사업으로 지금도 미국에서는 스몰비지니스로는 최고의 사업 종목입니다. 돈을 벌기 시작했던 김영옥이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잘나가던 사업을 뒤로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합니다. 조국의 위기에 처하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을 떠났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치른 전쟁보다 더 어려운 한국전쟁에서도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합니다.
■ 도망치는 국군을 막아선 사나이
김영옥은 한국 전쟁에 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 발령받았습니다.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인제군 개운동 계곡에 있는 다리를 사수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보호하는 임무였습니다. 그 당시 중공군의 1차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을 중심으로 아군들이 무질서하게 퇴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퇴각하고 있는 한국군을 막아선 김영옥은 다리 앞에 탱크를 포진시키고 홀로 탱크 앞에서 공산군을 막을 준비를 했고, 그의 용감한 모습을 본 한국군도 그를 따라 다리를 방어하였습니다.
■ 유색인 최초의 대대장
김영옥은 유색인종으로는 처음 대대장에 진급한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대위로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지만, 1951년 3월 소령으로 진급하고 정식 대대장이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에 유색인종으로 단위 부대의 대대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종차별을 뛰어넘는 그의 전과와 전술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구만산 탑골 전투'에서 김영옥은 권총을 손에 들고 적의 포탄으로 공격대형이 무너지는 곳을 뛰어다니면서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겠다'라며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을 다니며 적의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금병산' 전투에서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미군이 머리를 들지도 않고 총을 쏘는 것을 보고, 총알이 빗발치는 능선을 과감하게 다니며 전투를 독려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있는 미군들에게 '나를 보라, 이렇게 총알이 날아다녀도 나는 괜찮다' 라는 말로 미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군인으로 솔선수범하고 부하를 사랑했던 그는 신임 연대장이 부하를 희생시키는 전투를 강행하자 1952년 9월 한국을 떠났습니다.
* 김영옥이 단순한 미군으로 전투를 잘했다면 그는 한국인의 영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영웅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 진정한 휴머니즘의 따뜻한 군인
한국전쟁 당시 고아들이 넘쳐났고 배고픔에 거리를 헤매던 아이들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김영옥은 이런 아이들을 위해 아예 고아원 ‘경천애인사’를 설립해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100여명을 보살폈죠. “대대차원에서 맥주와 잉여 보급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장병 가족들이 보내주는 의류로 고아들을 돌보았다”고 생전에 그는 회상하고 있습니다.
대대장 김영옥의 이런 모습을 본 대대 장병들은 자발적으로 봉급에서 몇 달러씩 모아 아이들을 도왔습니다.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김영옥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이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과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설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과 한국방송공사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습니다.
○ 행동하는 양심
노근리 양민 학살의 조사를 담당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김영옥 대령이었습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사격으로 400여 명의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사건은 너무나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었습니다. 김여옥은 노근리 양민 학살 조사를 담당하면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을 정확히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한국을 잘 알았기에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 있고 행동하는 양심이 있는 인물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 부를 버리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한국인
김영옥이라는 인물이 전쟁을 좋아하고 체질적인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입대를 하려고 했던 이유도 유색인종이라는 인종차별 때문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부하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더는 전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72년 대령으로 전역한 김영옥은 유색인의 권익 확보에 여생을 바쳤습니다. 한인 정신건강 정보센터와 한인 청소년 회관 등이 그의 리더십 아래 세워졌고, 일본계 참전 용사들이 만든 ‘고포브로크’ (Go for Broke) 교육재단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일본계 미국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해서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상정되었을 때, 고 김 대령은 100대대 출신 일본계 지도층들에게 지지서명을 이끌어냈습니다.
김영옥 대령은 한국 전쟁 때 입은 부상이 50여 년 동안 그를 괴롭혔고, 말년에는 방광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김영옥은 그해 말에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하와이주 호놀룰루 근처 펀치볼 국립묘지의 100대대 묘지 근처에 안장되었습니다.
생전에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한 김영옥 대령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면, 어쩌면 100대대와 442연대가 보여준 투혼은 민족애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그 저변에는 한국계, 일본계라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영옥 대령은 미국 MSN이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에 선정될 정도로 미국에서도 인정한 군인이었습니다.
* 김영옥 대령은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십자무공훈장' '레지옹 도뇌르(프랑스 최고의 훈장) 미국 '은성 및 동성무공훈장' 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지금 열거한 훈장들은 군인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동시에 얼마나 그가 대단한 군인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 2006년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재외동포사에 김영옥을 수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김영옥 관련 집필은 그의 일대기 《영웅 김영옥》를 쓴 한우성 뉴아메리카 미디어(NAM) 한국부장과 장태한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UC Riverside) 교수가 공동으로 집필하고 있으며, 2007년 상반기에 출간된다고 합니다. 2006년 2월에는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에 신설되는 초등학교에 김영옥의 이름을 따 "김영옥 대령 초등학교"로 개명하려는 운동이 일고 있다고 홈페이지를 통해 보도했으며, 2009년 9월 9일 LA 통합 교육구 교육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세워질 센트럴 중학교를 동포 2세 고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따 '영옥 김 아카데미'로 짓기로 했습니다. 교육위원 7명 모두 찬성표를 던져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인근에 세워지는 '영옥 김 아카데미'는 오는 9월 9일 첫 신입생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번 초등학교 개정 교과서 5학년 1학기 읽기 교과서에 수록되여 우리들의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대령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 2007년 11월 1일자 국방일보는 미국의 전설적인 한국계 전쟁 영웅 고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캘리포니아 주립대 리버사이드 캠퍼스(UC Riverside)에 설립된다고 보도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은 이 연구소가 미주 한인 동포들의 이민 역사와 생활 등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는데요, 700만 달러의 연구소 설립 비용은 학교 측이 300만 달러, 나머지는 재외 동포 재단과 미주 한인들의 성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랍니다.
* 자료 및 이미지, 문헌 발췌 : 한우성 저(영웅 김영옥), MBC 스폐셜 (영웅 김영옥 대령) KBS (한국인의 유산)
정장열 (총알도 피해간 불사조), 곰PD(김영옥 대령과 미 육군 100대대), 미주 중앙일보,
위키백과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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