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광주고 앞 최초의 발포 희생자
증 언 자 : 김영찬(남)
생년월일 : 1962.(당시 나이 18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7
당시 나는 고등학생으로 정확한 시국을 판단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시내에서 계속되는 학생들의 시위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유신체제의 독재성과 과도정부의 기만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5월 16일 수업을 마친 뒤 친구들과 함께 조대생들이 플래카드와 피킷을 들고서 시내에서 데모를 할 때 그 뒤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18일에는 친구와 유동에 있는 아세아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금남로 쪽으로 올라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친구 송상희를 만났다. 그 친구의 말이 '지금 시내에서 난리가 났으니까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공수부대원들이 사람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있고, 또 칼로 쑤신다고 했다.
그날 밤, 전남대 정문 옆 평화시장 근처가 집이었던 나는 어른들로부터 학교 정문에서 공수대원들이 학생들을 두들겨패서 학생들이 실신했고 시내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쑤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19일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자, 조선대 운동장에 텐트가 쳐 있고 공수부대원이 진주해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어제 친구에게 들었던 일이 생각나 공수부대원들이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왜 그곳에 있는지 궁금하였다. 3교시 쉬는 시간에 친구 몇몇이서 공수대원에게 다가가 아저씨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의외로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에 응해 주었고 친구와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 전날에 친구와 주위 어른들에게 들었던 무섭고 살벌한 공수는 분명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으므로 나로서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옆에서 듣고 있다가 수업시간이 되자 교실로 돌아왔다.
4교시가 끝나자 담임선생님께서 오전 수업만 하기로 했다며 시내가 어수선하니까 꼭 곧장 집으로 가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수업을 하지 않으니까 좋아서 친구 세 명과 지산동에서 자취하고 있었던 친구집으로 놀러 갔다. 마침 그 친구가 없어서 다시 걸어서 옛날 청산학원 자리, 전남여고 부근까지 갔는데 거기서 학교 선생님 두 분을 만났다. 선생님들은 두 분씩 짝을 지어 다니시면서 학생들이 눈에 띄면 아이들을 달래어 귀가하도록 지도하던 중이었다. 우리에게도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전남여고 옆에 있는 하천을 따라서 정문 쪽에 있는 다리쯤까지 걸었다. 시민들과 공수들간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수부대는 전남여고 정문에서 문화방송국 방향의 큰 도로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전남여고 정문에서 MBC방송국 큰 도로 반대쪽 다리에서는 시민, 학생들이 나무나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서 대치하고 있었다. 우리들도 시민들 틈에서 돌을 집어던지며 함께 행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모자를 쓰더니만 총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공수대원과 시민의 바리케이드 거리는 불과 50미터 정도여서 우리는 겁을 먹고 하천 옆 길과 동명동 주택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나는 골목으로 달려 계림파출소가 있는 로터리까지 사람들과 함께 밀려갔는데 친구 한 명은 헤어지고 둘이서 대인시장 상가에 가방을 맡겼다. 조용해지자 다시 가방을 찾아서 농장다리로 올라가는 길 입구로 갔다. 배가 고파서 포장마차에 튀김을 팔고 있던 아주 머니한테 가방을 맡기고 튀김을 사먹었다. 대개 숫자로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하였지만 로터리에 사람들이 거의 꽉찬 상태여서 걸어다니기에 불편한 정도였다.
그때 공수인지 일반 계엄군인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한미쇼핑 옆 사거리에서 경계하고 있고 시민들은 대인시장 입구에다 옆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며 시장에서 나온 듯한 상자나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시민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산발적이었지만 구호도 외쳤던 것 같다. 전남여고 입구 쪽에서 공수부대가 총을 들고 쫓아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때문에 시민들은 숫자는 많았으나 군인들을 향해서 진격하지 않고, 공수들도 그 상태에서 더 이상 밀고 내려오지 않았다.
3시쯤 되어 군용트럭 1, 2대가 광고 쪽에서 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지나가는 군용트럭에 돌을 던지며 유리창도 깨버렸는데 별다른 반응 없이 그냥 차가 지나갔다. 조금 있으니까 청년들이 광고 쪽으로 몰려 내려갔다. 나도 그쪽으로 친구와 얼른 달려갔다.
가서 보니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중간지역에 장갑차 1대가 보였다. 청년들이 짚단 5개 정도에 불을 붙여서 장갑차 밑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 들어가지 않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장갑차 앞에 붙어 있던 밖을 내다보는 유리로 된 장갑차 눈을 깨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깨지질 않아서 옆에 있던 청년이 안 되겠다면서 짚단을 뚜껑을 열고 집어넣어야겠다며 말했고, 나와 그 청년 둘이서 짚단에 불을 붙여 뚜껑을 열려고 하다가 열리지 않자 그냥 뚜껑 위에 올려놓고 동원예식장쪽 인도로 뛰어갔다.
그때 장갑차는 동원예식장 반대편 쪽 도로에 있는 상태였는데, 장갑차 뚜껑이 빼꼼히 열리면서 총대가 보이더니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들어봤다. 무서워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옆에 어른들이 공포탄이니까 무서워 말라며 그냥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다.
갑자기 아스팔트에서 불이 '파바박' 튀면서 나도 모르게 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발을 옮기려는데 이상하게 하체에 힘이 푹 꺼지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총을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니까 무서움이 들어 밑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아무런 아픔도 못 느끼고 피도 안 났던 것 같은데, 골목 쪽에서 친구가 나를 부르며 빨리 오라는 말을 듣고서 "그래 가마" 하고 달리려는 순간에 쓰러졌다. 주위 사람들과 친구가 나를 업고 계림파출소 옆으로 나 있는 길 건너편에 있던 병원으로 옮 겼다. 희미한 의식만 있는 상태였다.
병원 문을 잠그고 3층으로 올라가 뉘어졌고, 옆에서 가위로 바지를 잘라서 벗겨냈다. 그런데 갑자기 현관 문이 덜컹거리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고, 그 뚫어진 창살을 통해서 최루탄이 터졌다. 아마 총에 맞은 나를 주위 사람들이 옮기니까 공수부대원이 쫓아오다 최루탄을 던진 것 같았다. 매캐한 최루탄 가스냄새를 맡은 기억이 난다. 그 후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혼수상태가 계속되다가 눈을 떴을 때는 21일 전남대병원이었다. 후에 듣기로는 군의관 출신의 남자가 자가용으로 옮겨주었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신원은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다.
눈을 뜨고 나서 병실임을 알았고 코가 너무 답답하여 잡아채 버렸는데 그것이 수술도구나 치료를 위한 장치였으므로 간호원들이 와서는 다시 끼웠다. 그때 총알이 복부 오른쪽을 관통하여 좌측 엉덩이뼈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장출혈이 심했고 2미터 정도의 장을 잘라내어 생명이 위급한 상태였다. 수술 자국에서는 계속 피가 나오고 다시 수술을 하기 위해 복부를 절단했을 때 갑자기 피가 솟아서 의사들의 옷까지 피로 범벅이 되었다.
의사진단은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어머니께서 형을 시켜 집에 있는 옷가지 등을 가져다가 죽으면 입히시겠다고 했다. 사실 의사들은 그때까지 만해도 총상환자 치료는 거의 해보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치료가 더욱 미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 강경숙이라는 간호원이 형제들에게 수혈을 권했으나 이왕 죽은 자식은 죽은 자식이고 살아 있는 자식이나 성해야 된다며 거부했다.
누님이 계림교회에 다니셨고 작은형은 아세아자동차회사에 근무중이었는데 누님과 형의 호소로 교회와 자동차회사 직원들이 20여 명이 수혈을 해주었다. 물론 그전에 형과 누나의 피를 3봉지 수혈받은 결과, 생기가 돌아오며 뻣뻣했던 사지가 온기를 찾게 되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어 계속적인 수혈을 시작한 것이다.
입원했을 당시에 5번의 수술을 받았는데 마지막 수술은 배가 아물지 않아서 마취 없이 친구들이 사지를 잡고, 형이 입을 틀어막고 기절할 정도의 고통을 받으며 수술을 했다. 마지막으로 수술자국을 아물게 하기 위해서 철사로 꿰맸다.
1980년 12월 24일에 퇴원했다가 집에서 요양중에 관통 부위에서 농이 나오고 병이 악화되어 1981년 1월에 재입원 후 약 한 달간 치료를 받았다.
첫번 입원시엔 합동수사본부 사람들이 나와서 군인은 그날(19일) 발포한 적이 없는데 혹시 시민들이 발포한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분명히 장갑차 뚜껑에서 나왔던 총대로 인해서 부상당했다."
그러자 군인은 재차 내게 책임질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또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길래 "억울하다 보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뒤에 첫 입원시 강제퇴원이 있었는데 거동이 수상하다고 생각된 사람은 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나는 중상이었으므로 계속 치료받을 수 있었다.
나는 2등실 3인이 쓸 수 있는 병실에서 한참을 혼자서 지내다가 얼마 후에 30대 총상환자(남)가 들어왔다. 그 사람은 광주 근교에 살고 있는 농부였는데, 5·18 얼마 전에 매형이 맹장으로 전남대병원에 입원해서 병실에 문병오던 중에 무등경기장 앞을 경운기로 지나가려 하는데, 트럭에 타고 있던 시민군들이 몽둥이를 들고 차에 타라고 해서 경운기는 무등경기장에 그대로 놔두고 트럭에 함께 타고서 시내로 들어오던 중, 가톨릭센터(내지는 못 미처 유동쯤)에 이르렀을 때 헬기에서 총을 쏘아 척추관통이 되었다고 했다. 그 뒤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정확한 사건의 시일이나 시간은 모르겠다. 나와 같은 조선대부고 학생인 박성룡은 3학년인데 밤에 광주경찰서 앞에서 허벅지를 관통당했고, 박철옥은 2학년으로 부상당했다. (조사.정리 정명자)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 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