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마가 대중화됐다고들 하나 정작 대중은 한국의 경마 역사나 실체를 잘 모르는 듯하다. 자칫 `얼뜨기` 경마팬을 양산하기 십상이다. 3.1절을 맞아 한국 경마 80년의 뒤안길과 과제에 대해 고찰해 보자.
한국 경마는 1922년 일본인에 의해 발족된 `경마구락부(클럽)`로 시작됐다. 일본이 한국에 경마를 도입한 것은 식민지 민심 무마와 만주.동남아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한국 경마는 태동에서부터 지지 기반이 취약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한국 경마는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 회명(會名)도 한국마사회로 바꾸고 새 출발을 꾀했으나 6.25 전란으로 경주 자체가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휴전 직후인 1954년 실의에 빠진 국민의 애환을 달래주고 전쟁의 상처를 위무하기 위해 뚝섬에서 다시 일어선 한국 경마는 4.19 혁명, 5.16 쿠데타, 유신헌법 공포 등 시대와 더불어 부침을 거듭하던 중 1980년 이후 국력의 비약적인 신장과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1980년 아시아경마회의(ARC)를 개최해 경마 발전의 기틀을 다진 데 이어 1989년 과천 경마장 시대를 열면서 한국 경마는 연 1800여만명의 경마인구와 5조원을 상회하는 매출액 등 국내 최대 규모의 레저산업로 우뚝 섰다. 그 바람에 레저세, 축산발전기금, 농어민자녀장학금, 각종 기부금 등 경마 수익금의 사회 환원을 통해 경마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서울경마공원을 필두로 부산경남경마공원(2005년 4월 개장 예정), 제주경마공원, 원당종마목장, 제주경주마육성목장, 장수경주마육성목장(2006년 개장 예정) 등 경마문화 인프라 확충을 통해 경마의 전국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국내산 경주마 자급률도 75%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2004년에는 GRADE 경주 시행으로 한국 경마가 PARTⅢ 국가로 국제경마연맹(IFAH)으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제1회 대통령배 대상경주를 개최해 대중 레저스포츠로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한국 경마의 화려한 이면에도 그늘은 있다. 올해 해방 60주년을 맞았지만 경마 곳곳에 왜색적(倭色的)인 부분이 남아 있다. 먼저 재결(裁決) 발주(發走) 등 경마용어부터 우리말로 순화하고, 일본 경마를 답습하고 있는 경주체제도 순차적으로 우리 실정에 맞춰 독자적으로 구축해 `경마문화 해방`을 더 늦기 전에 달성해야 한다.
경주의 질 역시 괄목상대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 동안 한국 경마는 베팅 위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출액이나 입장객 등 규모는 세계적이지만 경주마 수준은 아시아권에서도 정상권에 못 미친다. 다행히 최근에 30억원을 호가하는 씨말을 도입하는 등 경마 관계자들의 인식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경주 수준을 PARTⅢ에서 점진적으로 PARTⅡ, PARTⅠ으로 계속 발전시켜 한국 경마가 레저는 물론 관광산업의 한 축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한국 경마는 주5일근무제 정착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주5일근무제에 따라 레저시장의 확대는 명약관화하다. 앞서 지적한 두 가지 과제만 해결하면 한국 경마는 가족 놀이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연인들이 도시락을 싸와 경주를 함께 즐기는 데이트 문화도 정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끝으로 오는 5월 아시아경마회의(ARC)가 두 번째로 한국에서 열린다. 회의 명칭만 아시아경마회의일 뿐 참가국 면면을 보면 `경마올림픽`이나 진배 없는 세계 경마인의 축제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마필 생산, 수의, 경주 시행 등 경마 각 분야의 선진기술을 전수받아 한국 경마의 선진화를 위한 디딤돌을 놓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