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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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로서 처음의 스모의 기록은 일본서기의 황극천황 원년(642년)의 기록에 보면 백제에서 온 사자를
접대하기 위하여 '건아'(전국에서 뽑아 온 병사)들에게 스모를 시켰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
그리고 3세기에서 6세기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고분에서 리키시 모습을 한 인형 두 개가 스모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한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스모가 오곡풍양을 신에게 비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자의 신을 진정시키는 것과도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대>
나라시대에는 천황이 궁중에서 스모를 관람했던 것을 '스모 축제'로 7월 7일로 정하여 개최 하였다. 그러나
시대를 내려 갈수록 개최일은 일정하지 않았다.
헤이안 시대에는 조정의 연중해사로 제도화되어 매년 성대하게 치뤄졌다. 이 시대에 스모의 기본 룰의 원형이
보여진다. 이후로 300여년 동안 이어져 오다가 무사들이 대두되어 조정의 힘이 약해져 스모 축제는 중단되고 마침내 헤이안 4년에 행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중세>
중세에 들어서면 스모는 무사의 사이에서 심신단련과 전투로 이용되어 많이 행해졌음이 카마쿠라 시대레 편찬한'오첩경'에
자주 보여지고, 무로마찌 시대에서는 스모의 신사를 행했음이 알려진다. 무사의 스모와는 다르게,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대 이래의 전통을 이어 받아
신에게 바치는 봉납스모가 번창했다. 그 모습은 오늘날 각지에서 전하는 행사와 자료에 의해서 알 수 있다?시가현의 어느 신사에 전해지고 있는
목조의 스모 인형은 두 명의 리키시와 교지가 세트로 되어 있어 가을 축제 때, 이 인형을 신전에 봉납 함으로 해서 신사 스모가 행해진다. 또 그
인형의 복장과 머리모양은 스모 축제 풍속에서 많이 닮았다. 오이타현(大分縣)의 신사에서는 신들을 조각한 인형으로 스모 인형극을 하는 행사가
전해지고 있다. 또, 이시카와현(石川縣) 지방에서는 훈도시를 졸라맨 목조 리키시상이 전해지고 있다. 가장 많은 것이 풍작을 신에게 기원 또는
감사하기 위한 봉납스모이다 이것이 바로 신사로서의 스모이다. 전국시대에는 스모를 좋아하는 다이묘가 많아 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스모를 직업으로 하는 집단이 등장한다.
<에도시대>
이 시기에는 인기 리키시가 등장하여 스모의 황금시대를 맞는다. 관정 3년(1791)에는 성내에서 스모를 행하여
스모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다. 인기 리키시나 강한 리키시들은 다이묘(大名)에게 고용되어 무사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생활은 안정되있었다.
에도시대의 스모순위는 오오세키, 세키와키? 코무스비, 마에가시라의 순이었다. 에도시대부터 명치기에 걸쳐 역사의
최고 지위는 오오세키였다. 요코즈나의 명칭은 에도 시대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요코즈나의 면허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요코즈나를 전부해서 도효
수입이 허가되었다고 하는 의미로 아직 역사 최고의 지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이지 23년(1890년) 요코즈나가 등장하여 메이지
42년(1909년) 대관보다 상위의 최고 지위라고 협회의 규칙에 명문화되었다. 스모는 에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스모 그림은
역사화, 미인화와 더불어 그 수가 많고 실제로 잘 팔리어 풍속화를 색도 인쇄한 목판화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또 카부키도 스모를 주제로 한
것이 많다.
<근대의 스모>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여 스모계는 심한 시련에 서게 되었다. 막번체제의 붕괴와 함께 大名들은 리키시를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리키시들은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쌓았다.
명치 5년에 비로소 여성의 스모 구경을 인정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외에 명치 17년에 잔디로 된 정원관에서 스모가 주최되었던 일도 있고,
스모를 둘러싼 환경은 점점 호전되었다. 명치 22년(1889) 도쿄의 스모 흥행의 스모회소는 에도 시대 이래의 명칭을 개정 도쿄 대각협회로
개칭했다. 메이지 42년(1909년)에는 많은 개혁이 행해졌다. 제 일인자가 대관보다 위에 최고위의 리키시로 하는 것을 협회규정에 명문화한 것도
그 해이다. 리키시도 사회적으로 신사에 있을 만한 것을 강조해서 일상생활의 예절을 중시했다. 명치40년(1907)에 미국에 건너갔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알현해서 미국각지에서 스모를 공표했다.
<현대의 스모>
전후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있던 스모는 일본스모협회의 노력으로 활기를 되찾고 일본의 스포츠 중에 가장 인기 있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 했다. 1년 중 스모가 열리는 것은 모두보름간 여섯 차례이다. 스모는 1년에 6차례 행해지는데 하츠바쇼(初場所:
1월), 나츠바쇼(夏場所: 6월), 아키바쇼(秋場所: 9월)는 도쿄의 신국기관(新國技館)에서, 하루바쇼(春張所: 3월)는 오사카, 나고야바쇼(名古
場所: 7월)는 나고야, 큐우슈우바쇼(九州場所: 11월)는 후쿠오카(福岡)에서 행한다. 1, 5, 9월은 도쿄에서, 3월은 오사카에서 치뤄지며,
마지막으로 11월에는 후쿠오카에서 행해진다. 그리고 열리는 곳도 각각 정해져 있다. 설립 70주년을 맞은 일본 스모 협회는 95년부터 대개혁을
단행했다. 도효의 설치뿐 아니라 입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환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지방팬들에게도 혼바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그
설비와 배려에 충실을 기하고 있다.
리키시가 되기 위해서는 의무교육을 마친 자로 신장 173cm, 체중 75kg 이상이 되어야 한다. 리키시는
항상 머리를 올리고 경기장에 들어설 때는 마와시를 맨다. 레슬링이나 복싱처럼 체중 제한이었으므로 마른 리키시와 우람한 체격의 리키시가 대전하는
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