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가 틀을 잡은 후 통치를 위한 지도가 어떤 형태로든지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식적인 추론이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지도는 언제 것일까?
현재 전하는 원본 지도로는 조선방역도(朝鮮方域圖, 국보 248호, 1557년)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도 지도는 분명히 있었을 터,
원본은 전해지지 않더라도 지도가 있었다는 간접 증거쯤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종류의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나는 후배에게 전화를 친다.
그이는 마당발이다.
본디 박식한 사람이란, 머리에 많이 담고 있다기보다 어디 가면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를 꿰고 있는 사람이다.
"이봐라, 삼국시대에도 지도는 있었겠지? 그지?"
"그랬겠죠."
"증거 없을까? 남아 있는 거나, 혹은 확실한 문헌같은 거."
"잘 모르겠어요."
어떡한다?
나의 무지 때문에, 지도의 편년을 몇백 년씩 까먹을 수는 없다.
이럴 때, 조금 비겁하기는 하지만, 비켜가기 방법이 있다.
두리뭉실 애매하게 써내는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전화가 되돌아왔다.
"형, 형, 찾았어요."
"뭘?"
"그게, 우연히 주간 신문을 뒤적이는데, 신라 때의 고지도가 발견되었대요.
우리나라가 아니고 이스탄불의 슐레이만왕궁 도서관에 있는 거래요.
지도에는 경주가 계림으로 표기되어 있다는데요."
부지런한 후배 덕분에 짐을 덜었다.
고려를 뛰어넘어 막바로 조선으로 들어가도 지도의 역사에 누를 끼치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디선가 "고구려 때 사신과 함께 중국에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을 얻어들은 적이 있다.
곰곰 생각해봤더니, 이상태의 '한국 지도사'라는 글이었다.
기고문을 찾아 보았더니 이상태는 사학자였다.
그러자 다시 궁금증이 머리를 들었다.
'지도의 역사'는 사학과 소관인가, 아니면 지리학과 소관인가?
어쨌거나 아래에 적은 몇 가지 사실들은 그이의 글에서 따 온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원본지도가 조선방역도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150년 빠른,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리우는 당대 동양 최고(最高)의 지도를 볼 필요가 있다.
(조선방역도(朝鮮方域圖) :
조선 전기 명종 12년(1557년)경에 제용감의 이이 등이 제작한 우리나라 전도.
세조 9년(1463년)에 정척과 양성지가 만들었다는 동국지도의 형태와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채색필사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1930년대에 되찾아왔다.
국보 248호로 국사편찬위원회가 간수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 세계지도인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1402년)라는 다소 지루한 이름을 가졌다.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
조선 태종 2년(1402년)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가 이희와 더불어 만든 세계지도.
가로 164cm, 세로 171.8cm의 채색필사본으로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일 뿐 아니라
당대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일본 류코쿠(龍谷)대학이 사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1992년 미국의 컬럼버스 500주년 기념전에 나가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만들었고, 빨강, 파랑, 초록의 색을 쓴 컬러지도다.
유일한 흠이라면 그것을 일본의 류코쿠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지도가-다소 비과학적이라고 점수는 깎일 망정-
축척을 무시한 채 우리나라를 아주 크게 그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게다가 잘 보면 정맥, 대간에 해당하는 산줄기들이 그려져 있다.
산경개념이 신라에서 조선까지, 백두대간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길이 164센티미터에 너비 171.8센티미터인 혼일강리도는 현존 동양 최고(最古), 당대 세계 최고(最高)의 지도였다.
실제로 <서양고지도와 한국>이라는 책을 보면 그림다운 그림의 서양 고지도(古地圖)는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것이다.
자세한 지도제작 기법까지 비교할 능력은 없지만, 사진으로만 보아도 1402년에 혼일강리도만한 지도는 없었다.
지도는 한 나라의 학문이나 국력의 신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렇다면 건국 초의 조선은 당대 최고의 지도를 그릴 만큼 국력이 탄탄했고 기세 등등했다는 말이 된다.
조선땅을 유난히 크게 그렸다는 사실이 그러한 진취적인 사고방식의 한 반영이다.
혼일강리도는 1992년 미국에서 열렸던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전에 출품되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고려청자를 압도하며 관중들이 연일 장사진을 쳤다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90년을 앞서는 연대로만 보아도 충분히 관심을 끌 자격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소장자인 일본의 태도였다.
주최측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마지못해 혼일강리도를 내놓기는 했지만, 끝까지 출품을 꺼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