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릉(英陵).영릉(寧陵)신륵사 트레킹
오늘은 친구들과 경기도 여주 여행을 한다.
경기도 여주에는 두개소의 영릉이 있다. 그 하나는 영릉(英陵)으로 조선 제4대 왕인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를 모신 능이고, 다른 하나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
(봉림대군)과 인선왕후의 능 이다.
우리 일행은 지하철 경강선(서울~강원도) 이매역 에서 10:00정각에 만나 여주 가는 지하철을 타고
세종대왕역 에서 시내버스로 환승 세종 대왕능에서 하차 한다.매표소에 들려 입장권을 받아 들고
입장을 한다
세종대왕릉 정문으로 들어서니 좌우로 세종전과 재실 건물이 눈에 든다.재실 옆으로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종전 옆으로는 세종대왕의 화려한 업적 결과물들이 전시 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한글의 창제이겠지만 그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우리가 여태껏 몰랐던 발명품부터 만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와 자격루, 측우기 등 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전에도 대왕의 수고가 담긴 결과물들이 전시되어 있다.특히 세종전을 통해 세종대왕이 음악분야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종전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조용히 관람만
할 수 밖에 없다.
재실은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건물로 제관들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 하던 집이다
세종대왕이 이루어 낸 놀라운 결과물을 둘러본 후 훈민문을 통과하여 왕릉으로 향 한다.
훈민정음은 세종 25년(서기 1443)에 완성되어 3년의 시험기간을 거쳐 세종 28년(서기 1446)년에
세상에 반포되었다.세종대왕의 주도하에 창의적이로 만든 문자이고 세계 문자 역사상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이고 합리적 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기까지 우리에겐 말은 있었으나 적을 글자가 없어 한문을
빌려서 쓰고 있었는데.한문으로 적은 우리말을 전달하고자 할때 정확하게 전 할수 없어 생활 하는데
불편이 많고 또 우리문화의 발전에 큰 장애였다고 한다.
이런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연구하고 창제하여 백성들에게도 배포를
하였으나 오랜 시간 한자, 한문생활에 익숙해진 조선의 사대부 계층들은 한글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오히려 연산군때는 한글을 탄압하여 아녀자들이나 쓰는 글로 전락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훈민문을 지나자 마자 연못이 발목을 잡는다.잉어가 가득찬 연못과 소나무의 조화가 참 아름답다.
연못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이다.
홍살문 (紅箭門)은 陵(능)· 園(원)· 廟(묘)· 宮殿(궁전)· 官衙관아), 鄕校(향교), 書院서원), 旌閭閣
(정려각) 등의 정면입구(正面 入口)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으로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성역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 (下馬碑)가 세워지며 대소인원 계 하마[大小人員 皆 下馬]
란 글자가 새겨저 있으며 모든 사람은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존경의 뜻으로 걸어가야 한다.
홍살문 형태는 문門자를 형상화 하였으며 화살의 표시는 나뿐 잡귀나 무례한 귀신이나 불순한 사람이
친입할때는 활로 쏘아 버릴것이라는 상징적 의미이며 가운데 태극문양은 天道에 基礎한 陰陽의 原理를
表現한 것이며 붉은칠을 한 것은 辟邪의 意味이다 座臺는 八角인데 이는 여덟 방위를 뜻 한다
홍살문을 지나고 멋진 소나무숲과의 만남 후 왕릉으로 이어지는 길앞에 서니 세 갈래로 구분되는 길
삼도(三道)가 눈에 든다.세 갈래 길 중 중간길에 신도(神道)라는 글씨가 써 있다.
삼도삼문(三道三門)/궁궐 사당 서원 향교 등 에서 볼수 있는 삼도는 가운데 신도(神道)를 중심 으로
좌 우에 참도를 두는 것이 보편적 이다. 일반적 으로 신도는 사당에 모셔진 신이 다니는 길 이라 하여
일반은 다니지 않는 길이고 삼도 삼문이 있을 때 에는 우입 좌출(右入左出) 이다.
삼도(三道) 따라 들어 서니 정자각(丁字閣)이다.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삼도(三途)가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한글날을 전후하여 각종 행사가 열리며, 평소에도 찾는 이들이 많다.
매년 5월 15일(양력)에 세종대왕릉 정자각 일원에서 세종대왕탄신 숭모제전(崇慕祭奠;탄신일을 기념하여
올리는 제사)을 봉행하고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정자각 좌우에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한다.
수복방(守僕房)은 들어가며 우측에 있는 건물로 제기를 보관 하거나 수릉관(守陵官/능지기)
또는 청소를 하는 일을 맡아 보던 일종의 관노가 거쳐 하던 곳 이다.
세종대왕릉은 원래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
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답니다.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역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 때에 건조되었다고 한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 라고 세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
하고 있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합장릉 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
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 4대왕으로 3대왕인 태조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1397년에 태어 났습니다.
위로 2명의 형님을 두고 있었지만, 총명하여 세종대왕이 왕이 되었습니다. 1418년 세자로 책봉 된 뒤,
그래 8월 1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 재위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6진 개척,
쓰시마 섬 정벌, 측우기 제작 등 정치, 경제, 문화 전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우리 일행은 영능(英陵)을 돌아 나와 정문쪽 에서 영릉(寧陵)인 조선 제17대 효종(봉림대군)과
인선왕후의 능으로 향한다.
경기 여주 영릉(寧陵)트레킹
세종대왕릉에서 머지않은 곳에 효종대왕릉이 자리하고 있다.세종대왕릉을 둘러본 후 다시 정문을 나와
효종대왕릉으로 이동을 한다.멀리 기와집이 눈에 든다.매표소를 지나니 재실 이다.
영릉 재실은 현존하는 조선조 왕릉 재실 중에서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조선왕릉 재실 중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겨져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생하며,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일 뿐만 아니라
1673년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과 오래도록 함께한 역사성이 큰 나무이다.
또한 재실 안에 심어진 수령 300년의 회양목은 키가 크고 나무의 모양이 양호한 노거수로 평가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재실을 지나니 세종대왕릉에서도 보았었던 홍살문과 삼도 정자각 그리고 좌우로 부속건물들이
나타나고 효종대왕 비문 이다.
정자각을 지나 능 옆으로 위치한 비각 이다."조선국 효종 대왕"이라는 비문은 크게 쓰여 있다.
영릉(寧陵)은 조선조 제17대 효종대왕(재위 1649년~1659년)과 인선왕후 장씨(1618년~1674년)의
쌍릉으로 원래 구리(九里) 건원릉(建元陵) 부근에서 1673년(현종 14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정자각을 지나며 저 멀리 언덕위로 두 개의 능이 보인다.앞쪽의 능이 인선왕후의 능이고 뒤쪽의 능이
효종대왕릉이다.효종대왕이 아내인 인선왕후를 내려다보는 형태 이다.
혼유석을 중심으로 장명등 문인석(文人石) 석양(石羊) 석호(石虎)석마(石馬)등 웅장한 석물 들은
차이가 없지만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담)이 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 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릉이 나란히 있지 않고 앞뒤로 있는 것은 풍수지리설 때문 이란다.
여기서 효종대왕에 대해서 알아 보자.
효종 대왕은 16대 임금인 인조의 둘째 아들로 맏이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세자로 책봉 되어
1649년 즉위했다. 1636년 병자 호란이 일어나자 남한 산성으로 피신 했던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릅을 꿇고 머리를 세번 찧는 굴욕을 당 하였다.당시 봉림대군 이었던 효종 대왕은
병자호란 패배 후 볼모로 청나라 선양에서 8년을 머물다 1649년 즉위했다.
청에 대한 원한이 깊어 반청 서인세력을 중요하면서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군비를 강화했다.
또한 경제기반을 강화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 대동법을 3남지방으로 확대했고,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즉위 10년만에 요절하면서 북벌의 뜻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우리 일행은 효종대왕 능을 탐방 하고 정문에서 콜택시를 불러 신륵사로 이동 한다.
경기 여주 신륵사(神勒寺)
신록사(神勒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
(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
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
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
(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사찰은 산속에 자리 잡는데 남한강 기슭의 아름다운 신록사는 내려앉은 평지에 자리 잡은 절로 강 따라
가는 노인들의 나들이 장소로 유명 하다.
우리 일행은 신륵사 경내를 돌아 보고 남한강변 따라 황포 돗대 선착장 옆길 따라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는 두 개, 자전거와 보행자만 건너는 연인교와 차량이 다니는 여주대교를 거너니 다리 끝부분
에는 영월공원 안의 영월루(迎月樓)를 비롯한 충혼탑 등 시설물들이 보인다.
우리 일행은 여주역 방향으로 이동 하다가 곰탕 식당에 들려 점심 식사겸 소주 한잔을 하고 귀가길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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