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89) 미뤄서 드린 예배 역대하 30: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막힌 담들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은 물론이고,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신자들 간의 모든 관계가 화평하길 원하시고, 그 화평을 통해서 생명의 복음이 증거되고 나타나길 원하십니다.
갑자기 목사님 왜 예수님으로 거창하게 시작을 하실까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지요? 네, 본문의 히스기야의 모습 때문에 그러합니다.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대한 화해와 하나됨을 실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해와 하나됨을 위해 행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 지금까지 히스기야가 한 일을 먼저 복습해볼까요?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마자 선왕들의 악행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성전을 고치고 비우는 모습, 그리고 성전을 채우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전을 고치고 비우는 모습에서 저희가 확인해본 히스기야의 모습은 ‘바야쉬켐’입니다. 일찍이 사람들을 재초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공유, 공명하면서 백성들과 함께 이 일을 감당해 내었지요? 그리고 성전을 채워내는 모습에서 저희가 확인해본 백성들의 모습은 ‘쉬므하’입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으로 예배를 즐거움으로 드리고 있었던 모습입니다. 그러한 예배, 왕과 백성이 자원하며 드렸고, 레위인들이 성결하게 하여 온백성의 제사를 감당할 때, 누구만? 네, 제사장들만 자신을 성결하는 일에 뒤쳐졌습니다. 건물성전은 준비되었는데, 인생성전이 준비가 되질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레위인들이 제사장들의 몫까지 헌신하고 수고했던 것을 살펴보셨습니다. 그래요. 우리 건물성전, 인생성전, 고치고 비우고 채워내야합니다. 비명같은 기도소리와 멈추지 않는 찬송소리가 가득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건물성전보다 준비가 늦는 인생성전이어서는 안된다. 결국 그런 사람들 중에 소외되고 비방하는 미갈이 생겨난다는 것, 그리고 즐거운 잔치에 늦게라도 들어가면 다행인데, 너무 늦어지면 그 잔치가 끝나버린다는 것, 잔치의 문이 닫힌다는 것, 오늘도 깨어서 기름등불을 준비하는 신부들이 되시자는 말씀드렸습니다. 다 생각나시지요? 자, 여기까지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신 남유다의 성전봉헌예배였습니다. 성전제사를 재개함을 알리는 축제의 예배였습니다. 자, 그때였지요? 오늘 히스기야는 남유다에 성전이 회복되었음을 알리며, 온 이스라엘과 온 유다에 사람을 보냅니다. 지금까지 지켜지지 못했던 유월절 제사를 가나안땅에 사는 모든 하나님 백성들과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 그동안 허물어졌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막힌 담을 허물어내고자 했던 것이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화해를 위한, 풍전등화와 같이 외세의 침략과 노략에 무너져가고 있는 삶의 회복을 위한, 성경적인 해답을 위해 유월절 제사를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대하30:1)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위해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냅니다. 특별히 저 므낫세와 에브라임에는 편지를 써서 보내어 유월절 축제에 초청했던 것이지요. 아시는대로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통해 먼저 저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유월절 제사에 부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여로보암의 죄, 아합의 죄로 허물어져가던 10지파, 저 신흥제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가있던 저 북이스라엘에 마지막 손길을 보내셨던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살기 때문에? 네, 하나님 앞에 와야, 예배드려야 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도 백부장을 살펴보시면서, 살리려면 누구 앞으로? 네, 단 한 분 예수님 앞으로 와야한다는 말씀드렸습니다. 헤메지 말고 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방법을 길을 예정하여 주셨노라고요.
그래요. 예배입니다. 예배에 힘이 있습니다. 수백 년의 갈등과 분열, 싸움을 이기게 하는 힘이 바로 예배에 있습니다. 모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면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교회에 오셨으면 목사를 성도를 보고 가지 마시고, 하나님을 만나 뵙고 가시길 축복합니다. 목사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전까지 와서 기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가면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래요. 모두가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마음 쓰는 것이 다르면 결국 싸우게 되고 그 싸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서로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마음을 따르고자 한다면, 화해할 수 있습니다. 안될 것 같지만 됩니다. 화평할 수 있습니다. 오래토록 고되고 피곤한 내 삶과 그의 삶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옵니다. 고린도교회 바울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게바파 분열되어 있던 그들에게 사도바울이 했던 권면만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9-10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9-10)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야 살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예배만이 화목할 수 있는 길인 것도 알았던 것이지요? 한분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여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내렸던 결정이 무엇이지요? 2-3절입니다.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이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그 정한 때에 지킬수 없었음이라”(대하30:2-3)
“올해는 이래저래 못할 것 같으니 내년에나 잘 지킵시다” 이게 아니었습니다. 유월절은 첫째달에 지켜야하는데, 오늘 왕과 방백들과 회중들이 상의해서 유월절을 한 달 연기하기로 합니다. 성결한 제사장들도 부족했고, 백성들이 모일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예배와 절기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간절했지요? 온 이스라엘이 늦어지더라도 다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잘 준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절기를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지요? 다른 때같았으면 진노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바야쉬켐’ 열심을 보셨고, 백성들의 ‘쉬므하’ 자원함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북이스라엘을 소외시키지 않고, 준비되지 못했던 제사장들을 다 준비시켜서 함께 예배드리고자 했던 마음, 형제들을 향한 사랑과 배려를 하고, 제대로 준비해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기쁘게 보셨고 이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요. 누누이 말씀드리고 확인시켜 드리는 중에 있습니다만, 율법의 완성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 뿐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생명이 복음이 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도토리들끼리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못나고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긍휼히 여기며 더욱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을수록, 신앙연수가 길어질수록, 원수가 많아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면 참을 수 있고, 사랑하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저에게 여러분에게 풍성히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5절 읽어보겠습니다.
“왕과 온 회중이 이 일을 좋게 여기고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대하30:4-5)
보십시오. 분열왕국 역사에 단 한 번도 내려지지 않았던 명령이 브엘세바에서 단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에 내려집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손에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기에, 오히려 그래서 저 보발꾼들이 국경을 넘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나님이 아닌 송아지와 우상을 섬겨온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히스기야의 명령을 들을 것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지요? 형편을 봐서 말씀을 전하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풍세를 보며 씨앗을 뿌리려면 씨앗을 뿌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하라고 하시는 것이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들을 귀 있는 자가 듣는다고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6절입니다.
“보발꾼들이 왕과 방백들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왕의 명령을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돌아오시리라”(대하30:6)
그래요. 형편을 따라 선포되는 말씀은 형편을 따라 믿는 믿음을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늘 생명의 향기를 내고 전하는 주의 종들이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각에 좀 부담스럽고 거칠고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가감하지 말고 혼잡하게 하지 말고 순전하게 받은대로 말씀을 전하는 보발꾼의 삶, 사모해보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참된 예배자요, 하나님의 보발꾼인 저와 여러분은 보내시는 곳이 어디이든, 누구에게 보내시든 더욱 힘껏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하는 충성스런 종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어물쩍 안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충성되이 행하시고 담대하게 행하십시오. 역사하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고 힘껏 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보내주신 그 기회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 저 북이스라엘에게는 마지막 초청이었다는 것,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전하는 보발꾼들의 발걸음과 입술은 감사하게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함께 읽으셨지만, 북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와 함께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힘껏 전합니다(6~9절). 예배의 회복, 감사와 즐거움의 회복, 하나님께서 예비하시어 이 모든 질서의 회복과 성전 정화를 갑작스럽게 다 이루시는 것을 경험한 백성들은, 그야말로 강력한 증인들이 되었고, 너나할 것 없이 선지자가 되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이 더욱 저들을 가득 채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 속상하고 안타깝지요? 이들의 마음이 잘 전해지질 못했습니다. 보발꾼들은 목숨 걸고 생명 다해서 감격과 기쁨 속에 유월절 제사에 관한 소식을 화평을 전하며 증거했건만, 역시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대하30:10)
안그러길 바랬지만 보발꾼들이 온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전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려도 결실하는 밭이 적은 것 같이, 낙심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지요. 들을 귀 있는 자를, 옥토와 같은 밭이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모두가 길가요, 돌짝밭이요, 가시덤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은 이 보발꾼들의 초청을 듣고 히스기야의 초청을 듣고, 움직였던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 몇 사람이, 그래요 많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오늘 그래도 몇 사람이지만 순종하고 자신들의 경내를 떠나서 예배드리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대하30:11)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가 아무쪼록 기회가 있을 때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에는 예비하신 영혼들이 꼭 있습니다. 그것이 많지 않아 한두 사람일지라도 말이지요.
그래요. 많지 않을 수 있지만 바로 그 밭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30배로, 60배로, 100배로 말이지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 왔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소수들로 말미암아서 말이지요. 그렇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수백 년만에 드디어 남북통합 유월절이 지켜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둘째 달에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려 하여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니 매우 큰 모임이라”(대하30:12-13)
사랑하는 성도님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혹시 교회 안에 오랫동안 화평하지 못하고 다투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결단을 보시고, 용기를 낸 보발꾼의 진심어린 초청에,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오십시오. 피하지 말고 숨지 말고 오십시오. 내가 오지 않으면 싸움이 길어지고 많은 사람이 고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와야 싸움이 끝나고, 다윗이 가야 싸움이 끝납니다. 내가 하눈이 아니고 다윗이라면, 내가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면,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더욱 오십시오. 하눈이어도 오시고, 에서여도 오십시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려고 열어주신 이 예배의 자리에 더욱 힘껏 오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해하게 하시고, 함께 예배하게 하시는 은혜가, 하일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온 성도와 온 이웃이 경험하는 복된 은혜를 우리 모두가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