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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를 읽고
차례
1. 깨달음
2.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본 싯다르타
-깨달음 또는 진리에 도달하는 길
3. 개인과 집단(구조)
4. 뒷이야기
깨달음
고교 시절에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데미안>을 읽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공부 모임을 통해서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로운 느낌과 관점으로 볼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제일 상위 계층인 브라만에 속한 사람입니다. 제사장으로 촉망받은 젊은이로 주어진 일정대로 살아가면 인도 사회에서 존경받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어진 특권적 삶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행의 길을 자처합니다. 부처가 소왕국의 왕자의 삶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왕궁을 나선 것과 비슷합니다.
사문의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행의 길에서 소문으로 듣던 살아있는 부처 고타마를 만나서 설법을 듣습니다. 그러나 고타마가 해탈한 경지는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경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갑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은,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던 도중에 당신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침참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을 통하여 얻어졌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도 없습니다. 도를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고 악을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토록 명백하고 이토록 존귀한 가르침이 빠뜨리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존께서 몸소 겼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가르침을 들었을 때 생각하였고 깨달았던 점입니다. 이 점이 바로 제가 편력의 길을 계속 가려는 이유입니다.” (싯다르타, 박병덕 옮김 55~56 쪽)
싯다르타가 추구하는 아트만은 노자의 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제1장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생략)” (도덕경 오강남풀이 19쪽)
그러면서 싯다르타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면서 생명,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인 아트만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산산히 부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적인 것의 본성과 의의는 사물들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
자신 속에 침참하면서 주변의 모든 사물 속에 신적인 것이 있음은 도덕경의 다음 구절에도 확인됩니다.
“제64장 천리길도 발 밑에서(큰 일의 작은 시작)
.....아름드리 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나오고
구층 누대도 한 줌 흙이 쌓여 올라가고, 천리길도 발 밑에서 시작됩니다. (중략)
그러므로 성인은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이 있고,
귀하다고 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많은 사람이 지나쳐 버리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온갖 것의 본래적인 자연스러움을 도와 줄 뿐,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같은 책 271쪽)
“제34장 큰 도가 이 쪽 저쪽 어디에나(도의 작음과 큼)
큰 도가 이쪽 저쪽 어디에나 넘쳐 있음이여
온갖 것 이에 의지하고 살아 가더라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일을 이루고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온갖 것 입히고도 먹이나 그 주인 노릇 하려 하지 않습니다. (생략) (같은 책 151쪽)
싯다르타는 주변의 모든 사물이 깨달음의 주체로 보는 순간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싯다르타에게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무상하고 기만적인 너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본질적인란 것은 눈에 보이는 가식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被岸)에 있다고 생각 한 싯다르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하여 무화(無化)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此岸)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같은 책 72쪽)
이런 깨달음은 기생 카말라와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이 기생을 얻기 위해서 상인이 되어서 상당한 부를 얻습니다. 이는 사문시절에 억눌렸던 관능이 다시금 눈을 뜨고 깨어났으며, 그는 부유함을 맛보았으며, 환락을 맛보았으며, 권력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이란 덫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그는 쾌락,욕구,태만에 사로잡혀 버렸으며,그리고 마침내는 그 자신이 끊임없이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경멸하고 조소해 마지않았던 악덕인 탐욕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소유물, 재산과 부에도 사로잡힌 꼴이었으니 이는 사슬과 짐이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상인과 구경삼아 보는 한 바탕의 춤, 한 마당의 희극에 불과하였습니다. 카밀나와 사이에서 아이 하나를 봅니다. 자식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번뇌하면서 핏줄의 업을 견디면서 수행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이 아니라 고뇌와 불만과 불안이 물결치는 범부들의 세속에서 미혹에서 깨어납니다. 힌두교가 다신교인 것처럼 수행하는 방법도 그 신만큼 많습니다. 그 중 사랑에 대한 여러 행위도 수행 중 하나입니다. 네팔 사원에 수많은 기둥에 이를 조각해놨습니다. 처음에는 민망했으나 그들은 이것도 수행 중 하나라 하니 그런가 하고 봤습니다.
...또 상인 카마스와미류의 인간들의 전체 세계라는 것이 사실 자기에게는 고작해야 단지 한 판의 놀이, 구경 삼아 보는 한 바탕의 춤, 한 마당의 희극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같은 책 122쪽)
중학교 때 읽었던 이광수 작품 전집(10권)-겨울방학이라 시간도 많아서 다 읽었습니다.- 중 <꿈>이란 작품이 떠오릅니다. 따뜻한 언덕빼기에 한 잠 자고 있는 동안 연모하는 여인과 살면서 아이들도 낳고 사는 꿈을 꿉니다. 일장춘몽인가요? 그런데 이 스님은 낙성 사성 중 한 명인 조신대사가 되었습니다.
<원효대사>란 소설에서도 원효가 의상과 중국 유학을 가면서 동굴에서 밤에 모르고 해골바가지에 물을 마시고 다음 날에 깨우친 점은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마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주관적 관념론일 가능성?) 달렸다는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이후 파계를 하면서까지 요석공주와 며칠 간 사랑을 합니다. 설총이란 자식을 얻습니다. 원효대사는 의상과 달리 육두품 출신입니다. 아무튼 대중불교를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모든 바라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치는 말로서,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성스런 옴이었다. 그리고 그 옴이라는 소리가 싯다르타의 귓전을 울리는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옴을 통해 그는 바라문을 알게 되었으며, 생의 불멸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든 신성을 다시 알게 되었다.(같은 책 129쪽)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어.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같은 책 140쪽)
모든 사물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해갑니다. 소박한 변증법을 논하고 도덕경을 내용을 봅시다.
”제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합니다.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빼앗으려면 일단 줘야 합니다.
이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합니다. (생략)“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의 제자가 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큰 미덕을 배웁니다.
뱃사공은 말하기를 여행객 등은 강물이 단지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강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우리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강물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 가라앉는 것,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그는 강으로부터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법, 그러니까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견해도 없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제8장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받을 일도 없습니다.“ (도덕경)
뱃사공이 싯다르타 귀에 대고 성스러운 옴을 발할수록 싯다르타의 미소는 바주데바 미소를 닮아갔다.
이는 부처님의 염화미소와 같습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말없이 한 송이 꽃을 들었을 때 많은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마하가섭만이 꽃을 든 부처님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후대에 이 제자의 미소를 염화미소라 하였으며 이는 불립문자, 이심전심, 교외불전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해,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梵)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생각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다른 모든 점에서는 세속적 인간들이 현인이 자기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며, 자기를 훨씬 능가할 때도 자주 있었다.
싯다르타의 내면에서의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적은 매 순간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 단일성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는, 그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준비상태의 능력이었다. (같은 책 187~189쪽)
단일성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는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일상의 삶에서 한 분야에 깨달음에 경지에 있음을 말하는 몇 가지 예를 말하겠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놀림이 천리에 따라 쇠가죽과 고기,살과 뼈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장자는 최고의 백정은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보아 자신의 관점과 사물의 관점을 하나로 융합합니다. 인위와 조작이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도입이다. (장자내편 양생주 포정해우)
범도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직책과 관계없이 어떤 분야에 뛰어난 사람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배우도록 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고행 시절 스승들을 불신한 이후 많은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한 아리따운 오랫동안 스승이었고, 한 부유한 상인이 스승이었고, 몇몇 주사위 노름꾼들도 스승이었습니다. 떠돌아다니는 불제자 한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뱃사공도 고타마 못지않게 필연의 이치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완성된 자이자 성자였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습니다. 나와 걸어가는 두 사람 중에는 반드시 내게 없는 장점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니 나는 그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니 내게도 그런 단점이 없는지 반성하고 경계하여야 합니다.(논어 술이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같은 책 204쪽)
그러자 고빈다는, 가면의 이런 미소, 흘러가는 그 온갖 형상들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이 단일성의 미소, 수천의 태어남과 죽음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이 동시성의 미소, 싯다르타의 이 미소야말로 자신이 수백 번이나 외경심을 품고 우러러보았던 바로 그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고 영락없이 똑같은 미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책 217쪽)
2.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본 싯다르타
-깨달음 또는 진리에 도달하는 길
이 책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차용하고 있으나 기독교 천년왕국 목적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강이 많이 등장합니다. 물이 생명을 탄생하는 원천인데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강가의 물은 인간의 죄를 씻어내고 영혼을 정화한다고 여겨지며, 이를 위해 매년 수백만 명이 강가를 찾습니다. 특히 인도의 도시 바라나시는 갠지스 강을 따라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중심지로, 죽은 후 이곳에 유골을 뿌리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갠지스 강에는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가 다량 포함되어 있어 강 물 속의 박테리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서 신성시하는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 책은 유물론과 모순의 보편성 관점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유물론은 물질이 근원적이고 일차적이며 의식은 파생적이고 이차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세계인식 가능성에 대해 인식 가능하며 인간은 자연과 사회를 효과적으로 개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본래 사물이 운동하는 것은 모든 사물이 모순을 가지고(모순의 보편성)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은 이를 증명합니다.
여기에 노랑, 여기에 파랑, 저기에 하늘, 저기에 숲 이 사실이 신성이요 의의였던 것이다. 의의와 본질은 사물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같은 책 63쪽)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식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에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의 눈으로 볼 때는 이 모든 것들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을 차안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식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같은 책 72쪽)
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의 존재라는 사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사물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그토록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야....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은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같은 책 211~212쪽)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의 존재라는 사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사물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그토록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야....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은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같은 책 211~212쪽)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같은 책 155쪽)
사물을 인식할 때 외계 사물과 접촉하는 감각의 단계는 주관적.일면적.표면적으로만 봅니다. 풍부한 감각된 자료를 정리하고 재구성하여 종합하여 사물의 본질, 사물의 전체성, 내적 관계 인식하는 이성적 인식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개념이 형성됩니다. 이 단계는 감성적 인식에 의존합니다.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입니다. 세계의 객관적 법칙성에 관한 인식에 적용하여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혁해야 합니다. 인식은 실천에서 시작되고 실천을 통해 이론적 인식에 도달하며 다시 실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리란 객관적 대상을 정확하게 반영된 인식내용을 말합니다.
어떤 목수가 책상을 만든다고 합시다. 이 목수는 선배 목수나 책 등 자료를 통해서 책상에 대해서 공부할 것입니다. 이 단계는 책상이나 도구, 나무 성질, 여러 재료들 등에 대해서 주관적이고 일면적인 인식으로 책상을 만드는 실천을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목수는 이들의 관계 등에 공부와 실천 등을 통해서 책상의 전체성,본질,내적 관계 등을 파악할 것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대목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 책에 나오는 뱃사공, 또는 포정, 범도에서 선생님이라 사람들에 해당하는 깨달음의 사람들이겠죠.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그 두 가지의 배후에는 궁극적인 참뜻이 숨어 있었다....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경시되거나 과대평가되어서는 안되었으며, 그 두 가지로부터 가장 내밀한 것의 비밀스러운 소리들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같은 책 75쪽)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지.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같은 책 204쪽)
모든 사물은 모순을 가지고 있기에 운동.변화.발전합니다. 이 모순이 양적 변화만 겪을 때는 동일성(통일성)을 유지합니다. 세계 통일성의 내용인 세계 만물의 상호연관성은 그 물질성에 의해 담보됩니다. 그러나 통일을 극복하려는 대립물의 측면이 우세해지면 새로운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새 질, 통일성 창출로 나아갑니다.
볍씨를 뿌리면 벼로 되려면 상당한 기간을 보내야만 벼로 성장합니다. 양질의 전화이면서 볍씨를 부정해야만 벼로 성장합니다. 다음은 볍씨가 처음보다 수십 배 이상의 수확을 합니다. 이런 운동.변화.발전을 추동하는 법칙은 볍씨에 내재한 생명과 죽음의(모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통해서입니다. 볍씨가 벼로 변화할 가능성이 현실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이 씨앗의 건강성, 토지의 비옥도, 기후, 관개시설 등 객관적 조건이 필요하고, 볍씨의 생명에 대한 강인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볍씨가 벼가 되기 전에 양적 변화만 있으면 통일성(동일성)을 유지합니다. 이때는 통일.단결.조합.조화.세력균형.항상.평형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일시적.경과적.상대적입니다. 상호배척하는 대립투쟁은 발전.운동의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이 볍씨는 죽음보다 생명이 강하면 벼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는 통일성이 파괴됩니다. 벼에서 볍씨로 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단일성을 인식하는 단계를 깨달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에서도 싱클레어가, <싯다르타>에서도 고타마를, 뱃사공을 단일성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이는 노자의 도, 불교의 해탈의 경지입니다.
모든 사물의 모순 때문에 해결과정에서 그 단계에 따라 벼, 볍씨는 동일성(단일성)을 나타냅니다. 이 통일성은 사물의 모순으로 투쟁하여 또 다른 동일성으로 전화합니다. 볍씨→벼→볍씨...(나중의 볍씨는 앞의 부정적인 측면은 버리고 긍정적인 것만 갖습니다.) 제 사물은 모순으로 끊임없이 운동.변화.발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개인의 육체적.정신적 한계와 사회적 제약 때문에 유한하지만 대상이 되는 세계는 무한합니다.
모든 사물은 위에서 보면 순환하듯 보이지만 밑에서 보면 일직선으로 발전하듯 보입니다. 이 책에서도 사물은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물(자연과 사회)이 나선형으로 발전합니다.
이 세상의 단일성, 일체의 사건의 연관성, 일체의 크고 작은 것이 똑같은 흐름에, 똑같은 인과의 법칙에, 생성과 사멸의 법칙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한 조그만한 틈새를 통하여 이 단일성의 세계속으로, 어떤 낯선 것이, 어떤 새로운 것이....영원하고 단일한 세계법칙의 전체구조가 다시금 파괴되고 폐기되어 있는 셈입니다.(같은 책54쪽)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 (같은 책 147쪽)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책 155쪽)
고빈다가 말하였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어, 싯다르타, 그리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이 있네. 우리는 쳇바퀴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거야. 그 바퀴는 둥근 원이 아니라 나선형이고, 우리는 이미 많은 단계들을 거쳐 온 거야“ (같은 책 35쪽)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없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한 개의 돌멩이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흙이 될 것이며, 그 흙에서 식물,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 생겨나게 될 것이야....순환적인 변화를 거치는 가운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책 206~208쪽)
현실세계의 변화과정을 보면 일정한 원인은 일정한 결과를 발생시킵니다. 원인이 일면적.표면적인 감각적 인식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에 의해 사물의 총체성.내적 연관을 파악하여 (본질)사물의 존재와 발전을 규정하는 내적 측면을 파악합니다.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생각이라고 여겼으며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느낌이 인식으로 바뀌어 사라지는 일이 없이 본질적인 것이 되고 그 인식 속에 있는 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같은 책 60쪽)
...이런 환락이 죽음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가를 이 순간만큼 분명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같은 책 118쪽)
형상의 세계란 무상한 것, 덧없는 것이야. 우리의 옷차림이나 머리카락 모습이라는 것도 지극히 무상한 것이지. (같은 책 135쪽)
싯다르타는 평범한 다수의 사람이 생존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하여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산업재해가 일어나고 있는가
가장 비천한 것을 얻기 위하여, 가장 덧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관능적 쾌락을 얻기 위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하여, 부를 위하여 자기는 그 재주들 즉 단식, 사색, 기다림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같은 책 137쪽)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이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롭게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갔으며, 또다시 새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그 그리움에 사무친 소리는 변하였다. (중략)
싯다르타는 강물에 귀기울여 일체의 소리,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합해져서 이 사건의 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같은 책 196쪽)
뉴튼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은 공간을 어떤 물체가 담기는 빈 용기와 같은 것으로, 시간 또한 어떤 물질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시공간을 물질과 분리시켜 파악했습니다. 현실적인 삶에서 이런 시공간 개념이 아무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공간 개념에 대한 총체적인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어떤 물체의 운동속도가 빨라지면 그 물체의 길이가 수축하고 시간이 느려집니다. 즉 물질의 운동에 의해 공간과 시간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공간의 상대성이란 변증법적 관점이 수립되었습니다. 물리적 물체가 공간 속에 있다는 것은 뉴튼의 절대 공간이고 물리적 물체가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은 공간이 물질의 존재형식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력이 매우 강한 블랙홀은 빛을 포함한 어떤 것도 빠져나오지 못한 시공간 영역입니다.
인터넷으로 시공간이 압축 내지 무화는 되지만 시간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 미국에 주식을 투자하며 시공간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적 간격을 초월하여 강이 동시에 존재하는 동시성은 동시성의 상대성으로 바뀝니다. 기차에 탄 사람과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이 보는 빛의 도달 순서 차이가 있습니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같은 책 155쪽)
그는 이 모든 형상들과 얼굴들이 각각 서로서로 도우면서,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서로 미워하면서, 서로서로 파멸시키면서, 서로서로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시키면서 서로간에 수천 가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형상들과 얼굴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 일종의 죽음에에 의지였으며, 덧없음에 대한 심히 고통스러운 고백이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는 단지 모습을 바꾸고 있었을 뿐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났으며, 그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의 얼굴과 다른 얼굴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가로놓여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은 책 216~217쪽)
교직생활을 시작할 때는 학습지도안을 세세히 정리해서 내고 이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교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고, 학생은 백지상태에서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지도안을 낼 수 없다고 반항했다가 교장을 포함해서 여러 선배 선생님들한테 불려가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화했음에도 수능과 학교 시험 형태가 기본적으로 암기주입식 교육입니다. 학교에서부터 복종하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양성합니다.
저도 이런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지식이나 세상살이를 배우는데 조금이나 도움이나 되려고 매우 심하게 이를 제한하고 있는 학교현장에서 나름 도우미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도 조선인에게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을 미리 차단한 것이죠.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는 교사에게 교과서 선택권(교과서 편집권 포함), 평가권을 자주적으로 줍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바로 이런 사실을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따끔씩 예감했으며, 이 때문에 내가 그 스승들 곁을 떠났던 것야. (같은 책 204쪽)
3. 개인과 집단(구조)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폐지되었지만 결혼이나 직업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카스트란 신분제도에 최상위층인 브라만입니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수드라(노예)나 불가촉천민(찬달라) 더 나아가 바이샤(평민)은 여전히 생존을 고군분투하는 이런 상황을 위에서 보듯이 깨달음을 닦는데 하찮고 비천한 상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들의 삶을 개선하기보다는 단일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보듯이 싯다르타는 자본주의 중요한 이념인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자아발견 측면에서 단일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어떻게 탄생했고 집단주의(집산주의)와 관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바라문의 아름다운 아들이자 젊은 매인 싯다르타는 역시 바라문의 아들인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마음속에는, 가르치는 것을 잘 깨우치고 지식욕에 불타는 아들에 대한 기쁨이 치솟아올랐으니, 그는 아들이 위대한 현인이자 사제로, 바라문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책 13~14쪽)
싯다르타는 자기 존재의 내면속에 삼라만상과 하나이자 불멸의 존재인 아트만(참된 자아)이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책 14쪽)
싯다라타는 새로운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더너 것ㄱ이다! 나는 아트만을, 바라문을 추구하였으며,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 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 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같은 책 61쪽)
귀족치고 귀족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직공치고 다른 직공과 어울려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피난처를 찾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바리문도 바라문의 무리에 속하여 더불어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그가 입은 것과 같은 옷을 걸쳐고, 그의 믿음과 같은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졌으며,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같은 언어로 말하였다. (같은 책 65쪽)
이처럼 외부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같은 책 75쪽)
싯다르타는 쾌락, 욕구, 태만에 사로잡혔으며, 소유물,재산과 부에도 사로잡힌 꼴이었다.
그는 손해를 보게 되면 침착함을 잃어버렸으며,...장사에서는 더 지독해지고 더 인색해졌으며, 밤에는 이따끔씩 돈 꿈을 꾸는 일마저 있었다. (같은 책 116쪽)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같은 책 206쪽)
개인주의 탄생
근대사회가 되면서 개인 발견이란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자본의 이윤추구하는데 유용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발전된 공산주의가 되면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 만개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등가교환의 원리는 모든 개인을 사적으로, 즉 자유롭고 상호평등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화폐 상품소유자인 자본가와 노동력 소유자인 노동력이 사적으로 자유롭게 시장에서 만나려면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로서 임노동자가 필요합니다. 노동자는 봉건적 신분질서로 부터 해방이 되지만, 생산수단(토지)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전자만 말하고, 자본주의 탄생을 말하지 않습니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해야 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효율성과 우월한 개별적 경제인의 이익만을 우선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이 일반적입니다. 그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매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이나 정육점 주인의 착한 마음씨 덕분이 아니다. 그의 이기심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류경제학에서 개인은 원자화된 합리적 개인입니다. 시장 내의 인간이라는 것은 파편화된 합리적인 인간이면서 몰역사적.비계급적 세계 시민적 인간입니다. 주류경제학의 경우에는 인간과 인간 간의 문제(생산관계)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관계, 계급적 관계 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장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인간, 늘 합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간의 관계는 제외되고 오직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만이 문제 삼기에 생산력이 중요합니다.
라이프니츠의 실체인 단자(單子.monad)는 단순한 것이고 분할되지 않으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고 힘과 생명을 지닌 것입니다. 수많은 단자들은 각자 서로 다르고 구별되어 독립적인 것입니다. 단자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두 자기 속에 자기의 활동 원리를 지니고 있고 그 원리에 따라 활동합니다. 우주 만물은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각자가 전 우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자는 소우주이고, 이 단자들로 구성된 세계는 대우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소우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단자인 인간의 내부에는 독립된 개인성을 보장하는 내적 원칙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집단주의 강조하고 각 분야에서 조직화 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개인주의에 의해서 만연한 문제점을 일정하게 극복이 가능합니다.
집산주의(집체주의, 집단주의)
개인의 파편화를 반대하고 사회적 결속력을 강조하는 문화적 관점이나 사상(이데올로기) 등을 의미한다. 대체로 한국에서는 집산주의라고 번역하지만 중국, 북한 등에서는 집체주의(集體主義)라고도 번역합니다. 집산주의(集産主義)는 주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보는 정치 이론입니다. 대부분의 주류 사회주의 운동은 집산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노예제 이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발생하여 집단주의는 빛을 잃었고, 개인의 자유가 사회생활에서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확립된 후에는 개인주의가 압도적인 세력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계급사회에도 있어서 집단주의는 민중 사이에 다소나마 있었는데, 자본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창출하면서 소생했습니다. 그 기초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본성이 깔려 있는데, 대공장에서 다수의 노동자가 공동 작업하게 된 점이 프롤레타리아 집단주의를 낳게 한 것입니다. (다음에서 인용)
집단주의는 사회주의에서도 나타나는데, 생산수단의 사유가 폐지되어 사회적 소유로 되고, 착취가 소멸하여 모든 인간이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는 자본주의 근본모순인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과 모순 해결이 집단주의(집산주의)입니다. 공동생산하여 균등하게 분배합니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는 생산력이 낮아서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집산주의는 공동이익과 사적 이익의 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표어가 ”전체는 하나을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입니다.
4. 뒷이야기
고교시절에 읽었던 책이라 결론 대신에 이것으로 대체합니다.
중 2년 시절 중학교 학생 몇 명씩 군교육청에서 실시한 독서대회에 참가한 것이 본격적인? 독서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읽었던 책들은 논어, 소크라테스 변명, 그리스로마신화, 파브르 곤충기로 책다운 책을 처음 맛보았습니다.
고교시절에는 교과보다는 국내외 명작 단.중.장편소설을(대하소설은 대학,교직생활하면서 접했습니다.) 무진장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진리를 탐구한다든가 문학소년이 되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무작정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야 교양서적 뿐만 아니라 수많은 책들이 범람하지만(예전에 금서였던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햇빛을 보지 못한 책들도 많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책들도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내에서 문고판을 사서 보거나(지금 저의 책방에 노란빛을 발하면서 어딘가 박혀있습니다.) 친구들한테 빌려서 봤습니다. 이후에 여러 분야의 책들을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당시 여중- 놀랜 것은 도서관도 없고, 학급에 조그만한 궤에 오래된 책 몇권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당연히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히려 교실을 차지하는 물건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학급회의에서 각자 책 한 권씩 기증-책은 저가 추천했습니다. 저도 여러 권 기증했습니다-해서 70권 정도 학급문고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저의 학교는 연합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명문중인데 학생들이 이런 책들을 좋아하고, 참교육한다고-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책이야기, 토론수업 등으로-주입암기식 수업을 멀리하니 학교에서 결국은 다음 해 담임 도중에 쫓아냈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담임하고는 거리를 두었습니다.담임 그만두라고 학부모 20명 동원하고, 학생들이 연판장을 돌렸다는데 이것은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부터는 투명인간 내지 바이러스 정도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소위 빨갱이로. 요즈음 말로 왕따, 진따였죠. 오늘날은 담임 배제는 특혜이지만 당시에는 따 하였습니다. 수시로 이이제이 수법으로 동료나 학생들로 괴롭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견딜 것이냐 그만둘 것인가 선택을 강요당했죠. 저가 숨쉬는 모든 시공간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직을 그만둘까 자주 고민하였습니다. 이 책도 다음 해에 교육청에서 교실마다 교양서적을 사주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인문계고교에 가니 교육청에서 독서마라톤 대회가 있는데 일년에 가장 많은 학생이 300여 권이어서 깜짝 놀랬습니다. 저는 중.고교 시절 다 해봐야 기껏해서 100권도 채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 많이 읽은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단지 이 때는 10여년을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하거나 지인의 자녀거나 바람직한 독특한 일을 하면 격려 의미로 책을 구입해서 줬습니다. 일년에 각각 30~60여권 까지 기증했고, 이후 중학교 5년간 매년 20권 정도는 줬던 것 같습니다. 학교 분위기나 입시위주의 상황이긴 하지만 교과 수업을 할 때 관련된 책을 보라고 유도는 하였지만 학생들이 읽고 와서 녹아내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중고교시절에 읽었던 책들을 지금 다시 반추해서 간간히 서평 등을 참고합니다. 이 싯다르타처럼. 그러면 당시 읽었을 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래도 그 때 책을 읽었기에 그 책을 다시 검토할 기회를 갖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