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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인교대6회 원문보기 글쓴이: 당진농부
어제는 둘째 토요일이었고 그동안 계속되던 혹한과 내리던 눈도 멈추고 모처럼 평년의 겨울 날씨로 미루었던 일들로 거리가 어느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나도 오전에 미루었던 일들을 처리했고 오후 2시에 초등학교 동기동창의
(당진송산초교34회) 아들 혼사가있어서 혼례식에도 참석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12시에 서울에서 중학교 동기동창 모임이 예정되었는데 초대를 한 친구가 긴급한 사정이 생겨서 며칠전에 정중한 사과와 동창모임을 2월 초로 변경했기에 2시전에 인천에서 거행된 초등학교 동창의 아들혼례식에 참석하고 피로연에 참석한 초등학교 동기동창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고향 소식과 정담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야되나? 가지 말아야되나?' 혼자서 걱정하고있었다. 사실은 지난연말에 월요등산을 마친후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친구 하나가 제자들과 식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는 말로 "나도 참석해도되나?"라고 말을 했더니 " 그래, 참석하면 좋지" 라고 대답을 하여 " 그럼 참석하지..."라고 약속을 한뒤 집에와서 생각해보니 참 쓸데 없는 대답을 했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참석하는 것도 그렇고, 참석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진퇴 양난이었다. '모처럼 옛스승과 제자들의 만남의 자리에 초면의 사람이 앉아있다니...' 나로인하여 좋은 자리가 서먹서먹해질 것은 뻔한 것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가지 않으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친구와의 사이가 조금은 서먹서먹해질 것으로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런데 계사년 첫 번째 월요산행에는 친구가 개인 사정으로 산행에 불참했기에 불참의사를 표하지도 못했다. 워낙 당나귀 고집이라 한번 계획하고 약속한 것은 밀어부치는 성격이라도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궁리를 하고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집에 휴 대폰이 아닌 집 전화로 전화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거의 집전화로 본인을 찾는 사람은 바로 한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식구들은 모두 다 잘 안다.
집 전화벨이 울렸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 . '마침 잘됐다. 사정상 못가게됐으니 즐거운 시간이 되길바라네.' 라고 말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 동래청국장집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니?." 나는 "잠깐 기다려봐 휴대폰에 저장 됐는지 확인해 보고 전화해 줄께"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내 휴대폰엔 전화번호는 입력되지 않았다.잠시후 "전화번호는 저장되지 않았어."라고전화는 했지만, 불참 의사를 통보하지 못했다. 무엇이 급한지 "알았어, 6시까지 선학역 대합실로 나와!!!.라는 전화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알았어" 라고 대답하고나서야 후회를 했지만... ' '그래, 철판깔고 참석하자. 친구도 나와 같은 때에 초임지에서 열정적으로 그 어려운 조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40여년이 지났어도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옛 스승을 찾아 뵌다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을 슬쩍 보고 오면 어때!' 라고 객기를 부렸다기 보다는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친구의 옛 제자들에게 친구로서 덕담 한마디라도 하고 오고싶은 마음에 이제는 내 스타일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넥타이도 매고 아침에 면도는 했지만, 자라는 것은 키는 아니고 ....... 머리카락과 귀찮은 턱수염만 자라고, 턱 수염은 이제 고슴도치 털 같으니...... 전기면도기로 턱 수염을 자르고 방한화 대신 구두도 꺼내놓았다. ' 이제 6시까지 약속장소에 가야지, 아냐! 먼저가서 제자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야지... ' 나는 몇년전 초임지 산정호수에서의 제자들과의 몇번 해후를 생각하며 이미 그 모습을 예측도 하고 약속장소 도착시각을 10분전 6시로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20여분이 되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의 왕국>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마침 아프리카의 촬영장소는 친구를 포함하여 몇몇 친구들이 방문했던 남아공이었기에 TV화면으로 눈이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집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간 '친구겠지...' 이번엔 내 예측이 빗나갔다. 예쁜 처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래청국장인데요. H 교장선생님께서 빨리오시래요." "H교장선생님이...???" ' 내가 정년퇴직한지 3년이 됐는데도 홍씨라 부르지않고 아직은 보통 H 교장으로 통하는데...' 아! 그렇구나!. 처자의 음성은 동래청국장집의 첫째인지 둘째 딸인지는 알 수 없지만,딸의 음성이구나!' 나는 "알겠다"라고 응답하고 서둘러 1차 약속장소인 선학역 대합실로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갔다.원래 계획은 마을 버스를 타고 인천지하철1호선을 이용할 계힉이었다. 이참에 작년 (12월)에 수령한 시니어 패스를 사용하여 주머니 돈을 절약하기로 한 계획은 다음기회로 미루게되었다. 선학역 택시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5시 4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나는 친구 제자들이 미리 도착하고 친구도 식당에 있는줄 알고 허겁지겁 식당으로 갔지만, 식당안은 저녁만찬을 준비중이고 식당 주인가족들만 보였다.선학역 택시정류장에서 계단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과연 몇명의 제자들이 나왔을까?'가 궁금하여 우리친구들이 매주 월요일 아침10시에 만나는 낯익은 장소를 응시하며 기둥뒤에 숨어서 1차 약속장소를 주시했다. '그러면 그렇지!.' 친구와 남녀 5명이 10분전 6시에 선학역 1차 만남장소에서 이야기를 하고 휴대폰으로 확인 하고있었다.' 2013년이 시작된지도 10일째되는 날이고 토요일이라 가족들과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갖는 시간이고 그 먼 여주에서 어떻게 많이 오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예측이 적중했다는 점에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또한 다른 걱정이 생겼다. ' 대 여섯 모여있는 장소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되면 어쩌지?' 지하철이 도착할때마다 친구의 제자정도의 중년의 승객들의 수를 세어보고 또한 그들의 대화도 염탐하게 되었다. 그러나,이상하게도 두 서너명이 같이 내리면서 만남의 장소에서 두리번 거리면서 사람을 찾는 중년들은 없었다. 그사이 조금전 스승과 그 제자들은 사라졌다. 나는 미행에 실패한 흥신소 말단 직원처럼 당황했고 그들이 지나갔을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역시 내 예상은 이번엔 틀리지않았다. 왜냐 하면 선학역에서 식당까지의 거리가 멀지않았고 친구가 선호하는 코스를 나는 알고 있었기때문이었다. 내가 따라갔는데도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식당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은 식당안에 들어가서 있었고 어쩌면 친구는 나를 찾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 창밖을 응시하던 친구는 나를 보고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마침 날씨가 풀어졌다해도 겨울밤 날씨라 식당안으로 들어간 나는 앞이 전혀 보이지않았다. 안경이 뿌옇게 되었기때문이다. 나는 역시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그때 친구의 평생 반려자이신 사모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한참만에 제자들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여주강천초등학교34회 졸업생중에 저런 사람은 없는데... 왠 개밥에 도토리처럼 앉아있는 저 사람은...?'이라고 말 하는 것 같고 어색 하기만했다. 그때서야 친구가 나를 소개한다. 되지도 않을 미사여구까지 넣어서... "그러니까 잘들 모셔!" '무엇으로 잘 모시는 것일까?' 강천초교34회 졸업생들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내 친구는 나와 인천에서 두 학교에서 인연을 맺고 같이 근무했다. 대학을 동문수학하고서 나는 선배님들의 권유로 포천 산정호수를 품고있는 명성산 자락의 여우고개의 산정분교(후에 산호초교)로 발령을 받았고 친구는 그 유명한 여주관내의 강천초교로 발령을 받았단다. 초임지 강천초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내눈으로 확인 하지 못했으니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인천의 두 학교에서 생활하고 S초등 학교에서는 2년을 동학년을 했으니....... 알 것은 거의 알 것도 같았다. 그 잘 들던 탁배기(소주포함)는거의 대포집에서 밴댕이회를 안주로 마셨고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퇴근후에 승용차가 귀 하던 시절에 자기집 근처로 승용차로 택배하여 마셨었다.
지금은 술도 거의 안마시고 담배를 끊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나는 잘 모르지만 초임지 시절 그 고집과 열정으로 제자들을 엄격하게 지도하고 철저히 잘 가르친것은 틀림 없었다. 잠시후 10명 정도의 제자가 모였을때 ' 이제 다 왔겠지!'라고 생각한 것은 큰 오해였다. 여주에서, 용인에서 , 수원에서, 경인지방에서 승용차로 같이, 혹은 퇴근후 혼자서 계속 모여들고 스승님께 뵌지 오래되었다고 절을 받지않겠다는 스승께 큰절을 올리는 제자, 비타민 선물을 들고온 제자, 과일 바구니를 들고오는 제자들과 옛스승과 사모님께 드리는 장미꽃다발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박사논문을 스승께 드리는 제자등등 나는 세상에서 이런 아름다운 스승존경과 제자 사랑의 연출없는 아름다운 드라마를 직접 볼수있었다. 이런 친구가 내 친구다. 이런 좋은 친구가있어서 그 순간 행복했다. 동래식당은 서민들이 찾는 소박하고 내놓는 음식도 토속적인 것들이다.이날의 호스트인 J교장 부부의 스타일이다.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때 돈을 쓸 줄아는 친구다. 마침 주인되는 사장도 여주강천이 고향이고 제자들과도 잘 알아서 가까운 사이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월요산행팀들이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서 하산주 일배와 점심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청국장, 토속된장국,콩되비지등이고 식사대금은 탁배가 한잔을 포함하여 6000원이다. 그리고 좁은 좌석이라 어떤때는 먼저 식사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다려야 할 때도있었다. 그런 소박한 식당에 30명여명이의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드디어 대표되는 중년의 남자가된 제자가 옛 담임선생님과 귓속말을 하더니 나는 알지도 모르는 노래를 손뼉을 치며 부른다. 옛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씩씩하게 불렀다. 제기랄, 나는 산정호수의 전교생 150여명의 산호초교의 교가를 지금은 기억을 못한다.클래식 매니아이고, 뮤지컬공연,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서초동의 예술의 전당과 오페라 하우스, 인천시향,인천시립합창단을 사랑하고 2012년 12월에도 인천시립합창단 연주회, 답동성당, 성공회 내동교회,내리감리교회의 교파를 초월한 연합합창단 연주회, 제26회 메시아 대연주회(내리교회) 에다녀왔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갔을때도 매년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비엔나의 국립가극장의 외관을 관람하고(공연일정과 여행일정이 맞지않아서 공연 관람은 못했음) 카라얀이 거주했던 집도 보고 왔을 정도로 나의 취미중 하나인 음악을 사랑하는 놈은 초임지의 교가를 까 먹었는데, 음악보다는 마당과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면서 제자들을 길러낸 친구는 강천초교 교가를 잘도불렀다. 그런 다음 그자리에 처음 나타난 문제의 사람 본인을 소개했다. 집에서 덕담을 생각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몇 마디 스승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자리에 대한 축하와 부러움을 이야기한 것 같다. 그리고 친구부부께 감사의 꽃다발을 드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농학박사학위를 받은 제자의 박사 논문 증정과 즐겁고 아름다운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다. 친구는 제자들의 이름들을 용케도 지금도 기억하고 가족들의 근황까지 묻고 근래 잘 들지않던 소주를 제자들이 상추에 싼 삼겹살에 잘 마시고 있었다.귀동냥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강천초교 34회 졸업생중에는 각 분야에서 성공한 제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스승은 그런 소식이 들려 올때마다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교직을 수행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 자랑스런 여주강천초교 34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 모임이 한 두번이 아니고 수차례 옛스승과 사모님을 모시는 아름다웠던 시간이 이어졌고 오늘은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서 한번 쏘는 날이었기에 덕분에 나도 호강을 했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집에서 나에게 상추쌈에 삼겹살을 내 입에 넣어주는 사람은 없다. 음식을 나누며 먹걸이를 잘 손질하여 상대방에게 드리고 술 한잔 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삭막한 요즘에는 밥상에 마주앉아 아무나 식사를 할 수도없다. 그런데, 처음보는 사람에게 상추쌈에 삼겹살을 소주 한잔과 함께 아무에게나 주질 않는다. 염치가 없어서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고 따라주는 소주잔이 1/3잔이 1/2잔이되고 나중엔 1/1잔이 되었나보다.나는 당진 송산초교 34회 졸업생이다.강천초교34회와 송산초교34회 졸업생이 한 자리에 앉았다. 물론 나는 그들보다는 10여년의 더 많은 사회 경험과 인생을 살아왔다.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끊임없는 스승에대한 감사의 마음도 몇년전 친구의 정년퇴임식때도 지켜보았고 친구는 제자들은 물론 제자들의 아들,딸의 결혼 주례도 계속 맡아 그 결혼의 증인으로 인생의 멘토로 활동을 하고있다. 꿔다놓은 보릿 자루도 오랜만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대화를 하면서 친구 덕분에 호강을 했다. 내가 할 수있는 것은 스마트 폰으로 친구를 중심으로 추억사진을 촬영하는 것이었다.나는 '빨리 일어나 도망을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겉옷을 챙기고서 분위기를 깨트리지않게 현장을 탈출하려고 살펴보았다. 아니, 뭐 친구들과 자주 오는 곳이기에 문만 열고 나가면 되니까. 그러나, 그놈의 술이 문제였다. 내 작전에 큰 오류가 발생한 것은 알았을때 그 계획을 포기해야만했다. 동래식당 둘째 딸에게 겉옷을 내실에 보관해 달라고 한 것이 패착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친구의 제자들이 여기저기서 나에게 집중 하고있었고 술 한잔을 주려는것 같았다. 처음부터 옷을 입고 앉아서 식사하고 약간의 소주를 마신뒤에 담배를 피운다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왔으면 ......(사실 나는 담배를 피지않음) 결국 탈출 시도는 무산되었고 친구부부와 같이 2차로 노래방까지 끌려가서 <흙에 살리라>와 나의 대학 학번인 7140번을 신청하여Cliff Richard의 <The young ones> 부르고 난뒤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누구나 바쁜 일상생활에서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의 생활은 가장 소중한 추억이고 초등학교동창회는 비교적 잘 운영되는 것은 같은 고향과 씨족사회와 농경사회에서 제한된 인구의 이동으로 가족들의 뿌리가 고향에있고 특히, 고향을 지키는 선후배들과 동기동창들이 있기대문이며 우리인간들도 회귀본능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도 고향에 있으면서 인천으로 돌아오면서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여전히 가고싶은 곳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고통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도시에서의 초등학교 동창회 혹은 반창회가 잘 되는 것은 요즘 거의 볼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교육현장에있는 분들이 업무의 폭주와 교권의 추락으로 교사의 令이 서지않는 어려운 교육환경에서 더 많은 사랑을 나누어주고 제자들을 감화 감동 시킬 의욕마져 없어진 가운데서 공교육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지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고 하루바삐 교사들이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할수있는 교육여건이 개선되어 교육현장에서 고생하는 후배들이 제자들을 사랑으로 훈육하며 보람을 찾을 날이 돌아오길 기대해본다.
'정만구친구와 강천초교 34회제자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적절한 안주와 더불어 내 스타일로 유쾌하게 술잔을 기우렸고 친구와 술 한잔씩을 나눈 것도 좋았고, 간단한 식사도했으니까 집에 도착하여 컴 앞에 앉아서 오늘 내가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망각하기전에 써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술 한잔을 더 마시고 싶은 충동을 문득 느꼈다.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가 아니고 정만구친구의 제자들의 스승존경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좋은 제자들을 둔 부러움과 정만구친구를 다시 생각하며 내 주위에 저런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잘 가꾸어야 가을에 흡족한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을 나는 당진 농부로서 실제로 흙의 정직함을 느끼고 봄부터 가을 까지 피부로 느끼고있다. 그리고 내가 재배하는 농작물과도 대화를 하며 어떤때는 식물들에게 클래삭음악을 들려주고 나도 즐긴다.
Time Machine을 타고 1969년 3월 1일로 갈 수만 있다면, 나도 더 잘 가르치고, 더 사랑해주고... 더 꿈을 심어주고 ,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달리도록 응원할 것을...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나도 산골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하여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을 4년8개월동안 그들에게 1인 3역(3복식 수업도했음)을 하며 친구가 되어주었고 늦게까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던가?
산골에서의 4년 8개월의 생활을 다 어떻게 종이 한장에 쓸 수있겠는가?
지금도 산정호수는 영원한 나의 '첫 사랑'이고 지금은 폐교가된 산호 초교 , 나의 교직생활 41년의 출발지, 새로운 교육기관이 서있는 그 자리에 나의교육에 대한 순정,땀과 사랑, 22세 총각시절의 좌절과 눈물, 고독등을 알고있는 상록수는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정만구친구의 열정에는 내가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참으로 학교 교육의 달인이고 체육지도(육상,핸드볼,야구등)의 전설이다.
옛 담임선생님을 그리워하고 그렇게 존경하고 지금도 옛스승을 따름은 내가 알 수 없는 땀과 눈물과 진정한 사도의 길을 걸었고 그 사랑을 먹고 제자들이 잘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초등학교 동창회와 반창회는 사실 곳곳에서 많이 열릴 것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는다.
단지 내 주위에서만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동창회가 앞으로 많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친구 정만구 교장 부부 가정과 강천초교 34회 동창회에 영광과
그 아름다운 모임이 계속되길 응원하고 기원해본다.(2013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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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대 6회친구 모두가 교육의 달인이며 40여성상을 제자들을 위하여
오로지 한길을 걸어온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습니다.
위에 쓴 글은 바로 6회 동기동창들의 이야기이며
그대가 더 진한 감동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은 낙도에서,벽지에서 ,접적지에서, 낯선 초임지에서 이렇게 1969년
햇병아리 교사로 출발했지요.
인천교대 6회친구님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Steve,Hong 당진농부
정만구교장을 비롯한 인천교육대학교 6회 인천지회회원
2012년 송년회사진
(2012년12월3일.인천 송현동 명가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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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1월 12일 토요일 18시30분
장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동래청국장집
참석자: 정만구 교장부부와 제자 30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