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험심이 강한 더마트레는 한국 야구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습니다. 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그는 매 경기 LG 트윈스에 승리의 기회를 주는 것이 목표라고 했습니다. ⓒ민기자닷컴 |
어찌 보면 메이저리그의 기회를 뿌리치고 태평양을 건넌 선수입니다. 디트로이트 트리플A 감독은 더마트레가 한국으로 간다고 하자 깜짝 놀랐다고 하지요. 분명히 더마트레가 올해 빅리그에서 뛸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LG가 공들여 데려온 선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한국과 한국 야구에 적응하고 있는 더마트레와 야구 인생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야구, 미국야구
-나도 15년간 메이저리그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그런데 야구는 똑같은 야구인데 참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 정말 그렇다.(웃음)
-이제 한국에서 한 달반 정도 됐는데 기대했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5월 20일쯤 왔으니까 아직 두 달이 안 됐다. 같은 야구지만 많이 다르다. 나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미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같은 야구인데 정말 너무 다르다고 말을 하곤 한다. 그러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한국 타자들은 좋은 공을 파울로 만드는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 미국 타자들도 그런 시도를 하지만 좋은 공을 던지면 나가떨어지는데 한국 타자들은 아주 끝까지 공을 보면서 커트해낸다. 삼진 잡기가 정말 힘들다. 그러다보면 3회가 끝나고 전광판을 보면 이미 투구수가 70개가 되곤 한다. 내게는 분명히 학습곡선의 시기다. 매일 매일 배우고 있다.
-한국 야구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있었나.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시차도 꽤 심했다. 처음 와서는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가장 놀라웠다. 그렇다고 경기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미국에서도 시카고의 리글리필드나 그런 운동장에서 5만 명 관중 앞에서 던져본 경험이 있다. 마운드에 오르면 집중하기 때문에 별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앞서 말했지만 타자들은 많이 다르다. 계속 파울을 만들다가 실투가 나오면 곧바로 안타로 연결한다.
-미국 야구는 아무래도 파워 히터들이 많은데.
▶처음 와서는 나도 그것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와보니 한국 타자들도 대단하다. 롯데를 보라. 20개 이상 홈런을 친 타자들이 서너 명씩 된다. 한국 야구에도 파워를 지닌 타자들이 상당히 많다. 거기다가 정말 기교가 좋고 투수를 귀찮게 만드는 타자들도 아주 많다. 바깥쪽 공을 결대로 밀어치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이제 한국 야구에 많이 익숙해졌나.
▶점점 좋아지고 있다. 미국에서 함께 뛴 적이 있는 봉(중근)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내겐 행운이다. 내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봉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통역이 늘 곁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 많이 편해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떤 타자들이 인상적이었나.
▶당장 빅리그에서 뛸 수 있는 타자들도 꽤 있다고 본다. 롯데와만 3번 만났는데 49번(홍성흔)은 타석에서의 접근법이 정말 좋다. 당장 통할 것 같다. 10번(이대호)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세 팀만 상대해 다는 모르지만 최희섭도 빅리그에서 뛰던 선수 아닌가. 좋은 타자들이 참 많다.
-투수는 어떤가.
▶그건 쉽지 않은 이야기다. 나는 타자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빅리그 출신도 많고 또 빅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능력의 투수들이 상당 수 있는 것 같다.
오른손잡이면서 왼손 투수가 된 더마트레
-캘리포니아 주 케이커스필드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렇다. 거기서 태어나서 자랐고 아직도 살고 있다. 나의 가족들도 모두 베이커스필드에서 산다.
-그런데 더마트레의 정확한 발음은 무엇인가.
▶한글로 쓰여 있는 그대로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내 성을 미국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발음한다. 더마트레가 내 성의 정확한 발음이다.
-결혼은 했나.
▶결혼해서 애 둘이 있다. 2003년 10월에 결혼했다. 아들 매덕스는 만 4살이고 딸 재클린은 이제 한 살이다.
-명투수 그렉 매덕스를 좋아해서 지은 이름인가. 매덕스란 성은 있어도 이름은 드문 것 같은데.
▶아, 그렇지는 않다. 흔한 이름은 아니고 어감이 좋아서 그렇게 붙였다. 그러나 스펠링은 조금 다르다. 그렉 매덕스와는 상관없다. (웃음)
-혹시 아들도 야구를 시작했나.
▶아직 팀에서 야구를 하지는 않지만 공놀이를 아주 좋아한다. 오프 시즌이면 공원에 함께 가서 내게 공을 던지고 내가 던져주는 공을 때리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매덕스도 왼손잡이인가.
▶아, 그게 참 재미있다. 나랑 똑같으면서 정 반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모든 것을 오른손으로 하는데 야구공만 왼손으로 던진다. 밥도 오른손, 글씨도 오른손, 타석도 오른쪽에 선다. 공만 왼손으로 던진다. 그런데 매덕스는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하는데 공만 오른손으로 던진다. 공을 칠 때는 왼손으로 치는데 던지기는 오른손으로 던진다.
-신기한 일이다. 그럼 원래 왼손잡이는 아닌데 어떻게 왼손 투수가 된 건가.
▶나도 잘 모르겠다. 생활할 때는 모두 오른손으로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어려서부터 공을 주면 꼭 왼손으로 잡고 던졌다고 한다. 그게 편했던 모양이다. 오른손으로는 던지지 않는다. 아. 축구공을 찰 때나 농구공을 던질 때는 왼손으로 한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왼손 투수가 됐다.
-혹시 형제 중에도 야구 선수가 있나.
▶나는 장남이고 여동생만 셋이 있다. 그런데 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 소프트볼을 했다. 막내 제이미는 지금도 대학 소프트볼 팀 포수다. 내가 다녔던 베이커스필드 컬리지 선수다. 조만간 캘리포니아 주립대 베이커스필드로 전학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소프트볼을 꽤 잘 하는 모양이다. (웃음) (2년제 대학에서 좋은 활약을 하면 4년제 대학에 운동 장학생으로 전학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제이미와 함께 운동을 하기도 하는가. 오빠의 공을 받아주나.
▶그건 아니다. 소프트볼과는 다르니까. (웃음)
-야구는 언제 처음 시작했나.
▶티볼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5살쯤 됐을 것이다. 그 때 동네 아이들은 모두 야구를 했다. 아버지는 학교 때 풋볼을 하셨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체구가 작았다. 그래서 풋볼은 한 적이 없지만 야구는 어려서부터 계속했다.
-체구가 작았었다고?
▶고3때도 키는 178쯤 됐지만 몸무게가 60Kg 될까 말까 했었다. 성장이 더딘 편이었다. 그래도 리지뷰 고등학교 때도 야구를 계속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기억이 나나. 그래도 좋은 선수였으니까 학교 대표로 뛰었을 텐데.
▶성적은 기억이 안 난다. 평균자책점은 0.60 정도였다. 그러나 고3때도 패스트볼이 135Km 정도밖에 안 나왔다. 그래서 프로에도 드래프트되지 못했다. 그래서 2000년에 베이커스필드 컬리지에 입학했다.
2000년 레드삭스에 1라운드 드래프트된 더마트레는 2008년 피츠버그에서 빅리그 첫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 게티이미지/멀티비츠
레드삭스가 1라운드에 드래프트
-그런데 그 해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2번째로 지명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1라운드 22번이면 쉬운 말로 미국 전체에서 22번째로 뛰어난 유망주라는 뜻.)
▶대학에 가서 갑자기 몸집이 커졌다. 키도 10Cm 가까이 크고 체격이 좋아졌다. 1년 만에 구속이 151Km까지 나왔다. 대학 가서 피칭에만 집중한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고교 때는 투수 말고도 외야수와 1루수도 보는 등 많은 포지션을 뛰었다. 그러나 대학가서는 순전히 투수만 했다. 운동도 많이 하고 훈련도 정말 열심히 했다. 왼손 투수인데다 구속도 계속 빨라지니 보스턴 레드삭스에 나를 1라운드에 드래프트했다.
-곧바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2003년에 트레이드가 됐다. 시즌 끝나고 팀을 옮겼나.
▶시즌 중반이었다. 트레이드 데드라인 하루 전이었던 것 같다. 7월 30일에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됐다. 다른 선수 한 명과 함께 레즈의 스캇 윌리엄슨이라는 메이저리그 구원 투수와 2대1 트레이드됐다.
-트레이드 되리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당시 하이 싱글A에서 꽤 잘 던지고 있었다.(7승5패 3.02) 그날은 다음날 등판이라 관중석에서 기록을 하는 순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감독님이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더블A로 가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부르더니 트레이드가 됐다고 말했다. 루키 때부터 같이 성장한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가장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팀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어려웠다.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별 문제없이 적응했다. 한국에 와서도 처음엔 마찬가지였다. 봉(중근)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모든 게 생소했는데 빨리 적응하고 있다.
-그 때 봉중근을 만난건가.
▶아마 2006년이었던 것 같다. 메이저리그 캠프에서 처음 만났고, 트리플A에서 함께 뛰었다. 똑같이 왼손 투수였고 늘 함께 캐치볼을 하곤 했다. 친구로 잘 지냈다.
-인생은 참 묘하다. 이렇게 한국 프로야구에서 다시 동료로 만나다니.
▶정말 그렇지 않은가. 1주일 전쯤인가 인터넷으로 예전에 신시내티에서 함께 뛰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한국에 갔는데 혹시 봉(중근)을 만났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 한 팀에서 뛰고 있다고 했더니 너무 놀라면서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신시내티 이적 후에도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2004년은 기록이 없다.
▶후반기 7경기에 선발로 나가 4승1패인가 기록했다. 그러자 신시내티는 나를 40인 로스터에 포함시켰다. 다음 해 스프링 캠프가 끝나고 더블A를 건너뛰고 트리플A로 배속 받았다. 그런데 첫 등판을 이틀인가 앞두고 갑자기 굽혔던 왼팔을 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뼛조각이 근육을 파고들어 팔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어진 부상의 악몽과 MLB 첫 승리
-그래서 어떻게 됐나.
▶이틀 정도 쉬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아 신시내티 팀 닥터에게 검사를 받았다. MRI를 찍으니 인대가 파열됐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고 2004년에는 전혀 뛰지 못했다. 재활에만 몰두했다.
-희한하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하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게 갑자기 팔이 굳어지다니.
▶의사말로는 이미 2,3년 동안 인대 손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전혀 몰랐다. 통증도 없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팔이 마비되고 말았다. 인대가 찢어진 동안에도 계속 던졌던 거다.
-그리고 2005년에는 다시 던졌던데 회복이 빨랐나보다.(투수는 재활에 보통 1년 반 정도는 걸립니다.)
▶2004년 4월에 토미존 수술을 하고 2005년 스프링 캠프를 정상적으로 뛰었으니까 11개월 만에 회복됐다. 재활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구속도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다만 리그에서 꼽을 정도로 정말 뛰어난 커브볼을 던졌었는데 커브의 감은 좀 떨어졌었다. 슬라이더, 체인지업도 모두 문제가 없었는데 커브는 잘 안됐다. 그래서 한 동안 커브를 안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빅리그 데뷔가 찾아온다.
▶2007년 8월이었다. 2005년 더블A에서 4승12패였지만 ERA는 3.12였다. 진짜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2006년에 트리플A로 올라갔고 2007년에 신시내티에서 결국 메이저리그 승격됐다.
-그런데 2008년에는 피츠버그에서 뛰었다.
▶2007년 빅리그에 갔을 때 영 시원치 않았다. (6게임 선발에 4패) 시즌이 끝나자 레즈는 나를 40인 로스터에서 제외했는데 웨이버 공시되자 피츠버그가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빅리그 첫 승리를 기록하게 된다.
▶스프링 캠프에서 상당히 잘 던져 개막전 로스터에 들어갔다. 처음엔 주로 롱 릴리버로 뛰었다. 이미 선발 로테이션은 확정돼 있었다. 그런데 맷 모리스가 계속 부진하자 방출하고 나를 선발로 투입했다. 그리고 2008년 5월 7일 샌프란시스코의 배리 지토를 상대로 빅리그 첫 승리를 거뒀다.
-그것이 피츠버그 이적 후 첫 번째 선발 등판 경기였나.
▶아니 두 번째였다. 첫 선발 경기는 워싱턴 내셔널스와 원정이었다. 그 경기도 초반에 잘 던졌다. 그런데 혹시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경기에서 4회인가 갑자기 운동장의 전기가 나가버렸다, 우리가 6-1인가 이기고 있었는데. 한 시간 가까이 지연됐다가 속개됐는데 내가 계속 마운드에 올랐지만 2점인가를 주고 결국 5회를 못 채웠다. 그래서 첫 승리는 무산됐고, 두 번째 등판에서 승리 투수가 됐다.
-첫 승리의 느낌이 어땠는지 기억나나.
▶물론이다. 피츠버그 홈 경기였고 상대 투수는 지토였다. 5.2이닝 무실점인가 그랬다. 어려서부터 꿈이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고 승리 투수가 됐다는 것,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사실 더 달콤한 승리는 두 번째 후 등판인 신시내티전이었다. 신시내티 원정 경기였는데 7이닝 2안타 9삼진 1실점으로 승리했었다. 내가 뛰었던 팀이고 내게 기회를 주었지만 살리지 못했던 그 팀을 상대로 원정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후로도 신시내티만 만나면 이상하게 잘 던졌다.
-그런데 2008년 후반기 성적은 안 좋았다.
▶3승3패에 3점대 중반의 ERA로 가다가 갑자기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참고 던졌다. 그렇지만 3,4경기를 참고 던지는 동안 계속 나빠졌고 성적도 엉망이 돼 결국 팀에 이야기를 했다. 어깨 수술을 받아야 했고 시즌은 8월에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2009년 중반에 다시 복귀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어깨 수술이 비교적 경미한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재활이 힘들었다. 몇 차례 통증이 다시 찾아오고 해서 복귀에 시간이 좀 걸렸다. 결국 후반기에 복귀했지만 구원으로만 15경기에 나섰는데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 (0승2패 6.92)
-그리고 올 시즌은 디트로이트에서 시작했다.
▶피츠버그는 나를 로스터에서 제외하고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디트로이트에서 마이너 계약을 하면 메이저 스프링 캠프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디트로이트와 계약했고, 일단 시즌은 트리플A에서 시작했는데 4승1패 3.16으로 괜찮았다.
팔꿈치와 어깨 수술을 딛고 일어선 더마트레는 30대 후반까지 야구를 하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라고 했습니다. LG 트윈스의 포스트 시즌 진출 가능성에 대해서도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민기자닷컴
모험심에 불타는 한국행
-처음 LG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이나 경력 등을 보고 약간 놀랐다. 빅리그 복귀 기회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보였는데 어떻게 한국행을 결정한 것인지.
▶일단 나는 40인 로스터에 들지 못했고, 로스터에 든 몇몇 선수들은 나보다 성적이 떨어졌지만 이미 빅리그에 호출됐다. 야구라는 비즈니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젠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 오래전부터 외국 리그에서 뛰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다. 2006년인가도 한국에서 영입 제의가 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야구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런 기회를 갖는 선수가 얼마나 되겠나. 빅리그에서 다시 뛰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지만 난 아직 젊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인디아나 폴리스 원정인가에서 LG 스카우트인 대니가 그런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에이전트랑 이야기를 해서 결국 한국행을 결정하게 됐다.
-한국이나 동양에 와 본 적은 있나.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첫 경험이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든다. 문화와 야구와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한다는 것이 아주 재미있다.
-모험심이 강한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던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되겠나.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걱정은 안 됐나. 한국 야구에서의 시작도 쉽지 않았는데.
▶걱정은 전혀 없었다. 새로운 것은 늘 도전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나. 한국 와서 첫 경기는 엉망이었지만 두 번째 경기는 괜찮았는데 고비에서 좀 많은 점수를 줬고, 그 다음은 더 좋아졌다. (그는 자신의 기록뿐 아니라 경기 내용까지 상세히 설명하며 어떻게 적응해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안 좋았지만 그날은 투수의 날이 아니었다. (16명의 투수가 동원된 지난 3일 롯데와의 난타전) 지금은 내 ERA가 안 좋지만 첫 등판에서 10점이나 내줬으니 좋을 리는 없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적응하면서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많이 편안해진건가.
▶엉망인 첫 등판을 마치고 동료들이 정말 힘을 실어줬다. 내가 한 팀의 동료라는 것을 확실히 심어주었다. 아직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지만 통역과 그리고 봉이 늘 도와준다. 한국 야구도 점점 파악하고 있다. 적응할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초청장을 보냈으니 곧 가족들도 한국에 온다. 그럼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한국 음식은 어떤가.
▶맛있는 것도 있고 아직 힘든 것들도 있다. 김치같이 매운 것에는 내가 좀 약하다. (웃음) 다행히 서울에는 미국 식당이 아주 많다. 그리고 한국의 닭요리나 생선 요리 등은 아주 맛있다.
-올해의 목표는 무엇인가.
▶계속 배우고 그리고 향상되면서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승리도 좋지만 나의 임무는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최상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매 경기 팀이 일찍 리드를 당하지 않고 적어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꾸준히 오래 던지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리고 우린 포스트시즌에 갈 기회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팀에서 뛰든, 어떤 리그에서 뛰든 목표는 팀의 우승이고, 나와 우리 팀의 목표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외국 선수든 한국 선수든 상관없이 우리는 운동장에 나가면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매번 등판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팀의 승리를 돕는 것이 내 목표다.
-장기적인 목표도 있을 텐데. 메이저리그 복귀의 꿈도 있지 않나.
▶인생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한국에서 오래 뛸 수도 있고, 일본이나 미국에서 뛸 수도 있겠지만 내 목표는 적어도 30대 중후반까지 야구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 오니 갑자기 서른이 됐지만 나는 아직 만 29세다. (웃음) 앞으로 6~7년 이상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던지는 것이 목표다.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던질 것이다.
-필 더마트레에게 야구란 어떤 의미인가.
▶야구는 내가 아는 전부이다. 사람들이 야구를 못하게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전혀 답이 없다. 두 번 수술을 받았을 때도 야구를 그만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야구는 나의 직업이고 나의 열정이고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유일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선수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야구는 게임이지만 동시에 나의 삶이고, 정말 야구를 사랑한다.
-긴 인터뷰 고맙다. 잘 적응해 LG 팬에게 즐거움을 주기 바란다. 트윈스가 포스트 시즌을 노리려면 역할이 클 것 같다.
▶점점 자신감도 생기고 갈수록 편안해지고 있다. LG 팬은 정말 최고다. 한국 팬은 늘 긍정적이다. 때론 잘 못 던진 날도 잘 했다고 격려를 해주면 미안한 마음까지 생긴다. 그런 고마운 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팀이 포스트 시즌에 갈 수 있도록 남은 시즌 정말 열심히 던져보겠다. 나도 즐거운 인터뷰였다, 감사한다.
투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두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진 투수 더마트레. 그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믿음이 소록소록 솟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선발 투수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확실하게 알고 있고, 그리고 그 누구에 뒤지지 않게 야구를 사랑하는, 모험심으로 가득 찬 선수였습니다.
불펜이 취약한 LG가 4강 싸움을 벌이는 데는 선발 투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수 있습니다. 봉중근 하나로는 너무 힘겹고 박명환이나 더마트레의 역할이 후반기에 그만큼 더 중요합니다.
아직 확실히 한국 야구에 적응했다고 하기인 이릅니다. 그러나 더마트레가 선발의 한 축을 확실히 맡아준다면 LG의 후반기가 상당히 밝아질 수 있습니다. 아직 세 팀만 상대해봤을 정도로 적응기를 거치고 있지만 그의 자신감과 소신은 LG 팬들이 기대를 걸만 하다는 신뢰를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