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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6,19-31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멀리 경남방 자매들이 12분이 오셨습니다
아마 새벽같이 먼 길을 떠나셨을 텐데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 방송을 통해서 지금 비대면 미사하고 계실 전 세계 또 우리 한국의 교회 여러분들을 평화를 빕니다.
저도 열심히 한 주일 동안 집안일 하면서 밥하고 빨래하면서 잘 살았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전 세계에서 걸인, 거지의 동상이 있는 나라가 어디인 줄 아세요?
미국,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에요. 한국의 꽃동네.
꽃동네 가면 최귀동 할아버지 동상이 있고,
그 밑에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고 적혀있죠.
이 세상에 있는 거지 중에서 동상으로 추앙받는 사람은 유일하게 최귀동 할아버지일 겁니다.
최귀동 할아버지도 오웅진 신부님 잘 만났고, 오 신부님도 최귀동 할아버지 잘 만났죠.
오 신부님이 이런 사업을 하고 싶은데 마침 할아버지를 만난 거예요.
할아버지는 약간 정신도 온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얻어 와 다른 거지를 먹이시는 거야.
그걸 보고 오 신부님이 감동한 것 아닙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이다. 이것보다 확실한 예수님 표시가 어디 있나.’ 생각하신 거죠.
꽃동네 가면 최 할아버지가 있고. 이천 년 전에는 오늘 복음 주인공인 라자로라고 하는 거지가 있었죠.
그런데 나는 이 두 사람 말고 또 한 명의 걸인이 생각나요.
내가 진천 본당에 있을 때 임씨 라는 진천의 명물 거지가 있었어요.
집도 부자고 집도 있다는 할아버지인데 집에서 안 살아요.
그리고 온종일 얻어먹으러 잔칫집, 상갓집, 가까운 집 다녀요.
그런데 이 양반이 잠잘 때만 되면 꼭 성당에 올라와서 자요.
성당 출입구에 주보 놓는 상이 있죠? 거기서 새우잠을 자는 거예요.
신자들도 몇 번 쫓아냈지만 안 돼.
나는 걱정이 뭐였느냐?
여름에는 뭐 모기한테 뜯긴다고 그래, 그런데 겨울에 얼어 죽을까 봐 걱정이었어요.
추울 때면 내가 밤에 몇 번을 나가봐요.
그리고 이불 덮어주면 덥다고 할아버지는 열이 많은지 이불을 던져요.
꽃동네에도 두어 번 보냈는데 일주일을 못살고 귀동이 할아버지 싫어서 온대요.
귀동이 할아버지가 시비 걸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제가 잘 알아요.
천성이 거지 팔자인지 갔다가는 되돌아오고 하면서, 내가 진천을 떠났지요.
떠나고 나서 가끔 궁금해서 소식을 물었더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때 그냥 억지로라도 끌고 꽃동네 정신병원에라도 가두어 놓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저는 오늘 복음을 읽으면 임씨 아저씨가 생각나요.
오늘 복음에 라자로는 앉은뱅이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여건상 앉은뱅이였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 부잣집 문 앞에 놓았겠죠?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분심 거리였을 거예요.
그냥 내버려 두면 굶어 죽을 거 같고.
온몸에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고 상처투성이야.
그것을 개들이 와서 핥아도 쫓을 힘도 없어요.
그럼,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 안 먹여서 죽었다고 소문이 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보통 이게 골칫거리가 아닌 거죠. 진천 임씨 할아버지처럼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뭐예요?
‘옳지. 부잣집 문 앞에다 놓고 부자 집에 다 맡기자.’
동네 사람들이 책임 전가한 거죠.
엄밀히 묵상해보면, 동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죠.
동네 이장이 해야 할 일이고, 반장이 해야 할 일이고, 서로 모아서 그 사람을 먹여야 해요.
그런데 부잣집한테 맡겼잖아요.
그래서 라자로는 이동을 하고 싶어도 이동할 수 없는 앉은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라자로는 달랑 들어서 부잣집 문 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지만.
아까 얘기한 임씨 할아버지는 두 다리가 멀쩡하고 강제로 데려다 놓으면 또 나오고 또 나왔죠.
예배당도 많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예배당이 많은데, 잠자리로 성당을 정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면담을 했어요.
‘할아버지, 개신교회도 많이 크고 개신교회가 천주교보다 훨씬 더 자선을 많이 베푸니까
거기 가서 주무시면 어떨까요? 여기는 주무실 곳이 없어요.’
나중에 다른 곳에 안 가는 이유가 성당에 들어오면 편하시대요.
그때 진천성당을 내가 정말 아름답게 꾸몄고, 내 이름이 그때부터 느티나무신부로 정해진 거예요.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모두 크고 아름다웠죠.
성모 동산부터 아담하고 이쁜 오래된 성당이었어요.
예배당에 가서도 주무셔봤는데 악몽만 꾸는데 성당에 오면 편하게 잘 수 있다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마음이 좀 편하지 않습니다.
자, 본격적으로 오늘 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말은 없지만, 앉은뱅이의 상처투성이 라자로를 부잣집 문 앞에다가 동네 사람들이 놓으면서 책임 전가를 합니다.
‘라자로’라고 하는 히브리어 말뜻은 ‘하느님이 도와주신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도와주신다.’에요.
이 세상에서는 인간들에게 도움 못 받았죠.
부자가 손 닦고 버린 개나 먹는 빵부스러기 먹고 살았잖아요.
하지만, 천국에 아브라함 할아버지 옆 아주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셨죠.
하느님이 도와주신 거죠.
우리 살면서 사람들 도움 못 받고 살 때 많죠.
또 나는 잘해줬는데도 그놈이 나한테 배신할 때도 있어.
사실은 사람들에게는 치유보다 상처받는 게 숫자로 따지면 훨씬 더 많아요.
그렇지만 우리들이 또 하나의 라자로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희망이 있죠.
‘하느님이 나 도와주신다. 영원한 세상에서 정말 이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될 그런 축복을 주실 것이라.’라는
희망이 있는 거예요. 아멘
아무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기력하고 비참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자, 여러분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기력하고 비참한 인간 모습 대표에는 누가 있을까요?
첫 번째 태아들이 있어요.
배 속에 있는 태아 본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엄마 탯줄을 통해서 그냥 그 안에서 열 달 동안 살려고 버둥버둥 치는 것밖에 없어.
태아들은 무력해요.
그 부모가 돌봐주지 않으면 절대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뱃속에 태아에게 소리가 들려.
가만히 들으니까 아버지 엄마가 어느 산부인과에 갈 거냐, 언제 낙태할 거냐 하는 거야.
그때부터 태아는 사는 게 아니지요. 사형선고 받은 아이죠.
내가 언제 갈가리 찢겨서 죽을까?
그렇게 죽은 아이가 얼마나 한이 많겠어요.
부모는 성사 한번 보고, 보속 같지도 않은 보속 한번 하면 해결되는 걸로 알죠.
죄는 사함 받을 겁니다. 그렇지만 죄의식은 사함 못 받아요.
낙태시킨 죄에 대한 보속이 사제가 십자가의 길 한번 하시라면 그것으로 될 것 같아요?
사람 죽인 죄가?
천만에! 죽을 때까지 보속 해야 해.
낙태한 죄에 대한 제일 큰 보속은 입양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김수환 추경님도 제일 좋은 보속은 네 자식 둘 죽였으면 둘 입양하라 그랬어요.
두 번째는 굶주리는 사람들이에요
1초에 지구촌에는 5천 명이 못 먹어서 죽어요.
내가 말하는이 순간에도 1초에 5천 명씩 죽어가요.
그리고 흙탕물을 뜨려고 20km를 걸어가요.
구정물을 떠 머리에 이고 집에 와보면 다 새서 없어요.
동생 먹이려고 떠온 흙탕물.
그리고 그 흙탕물 속에는 별의별 세균이 다 있어서 마시면 죽어버려요.
그들이 게을러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때문에, 계속된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안되고 비가 안 내려요.
라자로가 게을러서 부잣집 문 앞에 데려다 놓았을까요?
할 수 있는 것은, 앉아서 지나가며 던져주는 것을 먹는 것밖에 없었어요.
죄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또 누구 있을까요?
세 번째로는 권력으로 법을 해석하여 집행하는 자들 때문에 죄인이 되는 힘없는 자들입니다.
정의가 그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은 살아갈 길이 없어요.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말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죠?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다 풀려나고, 없는 사람은 없는 죄로 들어가요.
솔직히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죄인이겠느냐는 거예요.
정말 큰 죄인들은 다 정치적으로 나와요.
정말 죄인들은 힘만 있으면 다 빠져나갑니다.
저는 예전에 교도소 지도 신부를 하면서 교도소 안에 정말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정말 죄진 놈은 떵떵거리고 살아.
그 사람 대신에 모함받아 들어 온 사람이 너무 많아요.
내가 볼 때 40% 이상은 거기 들어갈 사람들이 아니에요. 불쌍한 라자로예요.
아무 빽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변호사 살 돈도 없으면 희생양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다시 우리 복음으로 돌아옵시다.
호사스럽게 사는 부자는 밥 먹을 때마다 고기를 먹었어요.
고기를 먹으면 손에 기름이 묻으면 기름을 빵으로 닦아 밑으로 던졌어요.
그러면 개들이 와서 먹는 그 빵조각을 모아 문 앞에 있는 라자로를 먹여 살린 거예요.
오늘 복음에 보면 참 마음이 아파요.
뭐라고 나오냐?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니까 매끼 준 것도 아니고 어쩌다 주어 그것도 못 먹는 날이 많았다는 뜻이죠.
이 부자는 분명히 길을 나설 때마다 문 앞의 라자로를 보면서 뿌듯해했겠죠.
왜? ‘저놈은 내 덕에 살아!’
성전에 가서 ‘저 선행 베풀고 삽니다. 내가 한 놈 먹여 살려요.’ 했을 겁니다.
그런데 반전이 생기죠.
라자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고 나와요.
그런데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서 천국을 보니까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딱 계신 그 옆에 누가 있어요?
자기가 손 닦고 버린 식빵 쪼가리 얻어먹던 거지가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 그가 ‘할아버지’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라자로를 시켜 손가락에 물 좀 찍어다 어디를 찍어 달라고 부탁해요?
혀. 혀가 너무 뜨거운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봐서 분명히 지옥은 불과 관계가 있겠죠.
타지도 않아요. 타서 죽지도 않아요.
한 줄 한 줄 읽으면 하나하나가 얼마나 깊은 관상 거리인지 몰라요.
이 부분을 읽으면 ‘혀 조심해야겠다.’ 생각이 들죠.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부자는 혓바닥이었어요.
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겠어요.
가장 못 된 짓 한 곳을 제일 고통을 주는데 혀가 제일 힘든 거야.
눈이 뜨거우면 눈을 적셔 달라고 했겠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뭐라고 그래요?
‘아이고 그래. 네 사정을 하는데 너랑 우리 사이에는 큰 구덩이가 있어서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네가 오고 싶어도 못 온단다.’하죠.
그러니까 ‘그러면요, 할아버지. 라자로를 우리 집으로 좀 보내주세요.
내가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나보다 더 독한 놈들입니다.’
마지막 말은 안 나왔지만, 집안 꼬라지를 보니까 뻔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하지요.
그러자 부자가 ‘그놈들 성경 보고 회개할 놈이 아니에요. 죽은 사람이 살아나야 그거 보고 회개할 놈이야.’ 하죠.
다시 아브라함이 ‘그놈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안 믿을 놈들이야.’ 하며 끝나죠.
그런데 부자가 지옥에 갔어요. 왜 지옥에 갔을까?
부자는 지나다니면서 라자로를 발로 차거나 몽둥이로 팬 적 없어요.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 갔지요. 왜?
이유는 딱 하나야 무관심, 무책임!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악행을 행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착하게만 살면 천당 간다.’ 그런 말 없어요.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만 천당 갑니다.
‘무관심’이라는 것은 ‘나도 너 관여 안 하니 너도 내 일에 관여하지 마.’하는 것입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나 죄 안 짓고 살아요.’ 그렇지만 선행도 안 베푸는 거예요
부자는 악행을 행한 적은 없지만 무관심하게, 무책임하게 살았잖아.
예수님이 여러 번 화를 내셨는데, 의노라 부른다 했죠. 의로운 분노.
하느님의 나라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이나 제도나 모든 법 앞에서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어마어마하게 진노를 보이셨어요.
성전에서도 그랬고, 율법 학자들한테도 ‘이 독사의 족속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하셨고,
서슬이 퍼런 권력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까딱 안 하고 덤볐어요.
예수님의 첫 번째 의노의 대상은 무관심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성사 보실 때 고백소에서 주님이 정말 듣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주일 몇 번
빠졌느냐는 것도 물론 죄지만, 정말 더 듣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너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살았느냐,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살았느냐?’
네가 본당에서 오만 좋은 일을 하고 높은 직책에 있어도
너의 부모님과 고생하고 있는 피붙이에게 조금도 신경을 안 썼다면,
아프리카에 자선 헌금은 많이 보내도 정말이 피붙이가 힘들어 할 때 한 푼도 도와준 적이 없다면,
그건 지옥에 갈 만큼 큰 죄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무관심의 죄는 지옥에 가면 큰 죄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부자를 통해서 나타나지요.
여러분들 부모님에게 잘하십시오. 또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우리는 효도할 방법이 있죠.
정기적으로 기일에만 미사 드리지 마세요.
아직도 우리 부모님이 연옥에 계실지 몰라요.
연옥에선 자기 힘으로 못 나가요.
성인들의 통공, 그리고 후손들이 바치는 기도 미사 등으로 연옥에 머무는 시간이 단축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 연옥에 있는 것도 모르고 죽고 한 달 미사하고 딱 끝이야.
기일이 지나는데 미사도 안 해주고 연도도 이제 안 해.
얼굴을 보니 찔리는 분들이 많구먼. 다 찔리죠?
우리 신자들은 부모님 돌아가셔도 효도할 길은 많아요.
하느님에게 무관심하지 맙시다.
무관심의 죄는 예수님의 의노 대상 1번이라는 거 명심하세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오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준비해 들어가요
혹시 불편한 게 없을까 하나하나 살펴봐요.
화장실 청소도 하고, 수건도 새것으로 걸고, 식당도 청소 해놓아요.
이런 것이 사랑이죠.
무관심은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누구한테 무관심하면 안 될까요?
본당 신부님에게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본당 신부님이 하는 거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지요.
그래도 기도하셔야 해요.
지금은 시대가 환난의 시대라 사제들이 점점 살기가 힘들어요.
아무튼 내 가족들에게 무관심하면 안 되고, 부부끼리 무관심하면 안 되고,
신자들끼리, 대부 대자 사이, 대모 대녀 사이에 무관심하면 안 되고,
교회에 무관심은 안 되죠.
이렇게 해야 우리는 자동으로 하느님에게 무관심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하느님에게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제단의 예물 드릴 때 너랑 원수진 사람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내 앞으로 나와라.
인간관계가 끊어지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끊어지는 거예요.
남편이랑 진탕 싸웠는데 미사 가서 성체 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못 영해요.
두 번째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은 위선자들이죠.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이방인들 앞에서 행실을 단정히 하라 그랬어요
또 본당에서 큰 직책 맡고 있으면서 성당 안에서 회개한다고 가슴을 치면서
밖에 나가면 세상 사람 같은 마인드로 사는 위선자들.
대표적인 사람들이 2000년 전에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었지 않습니까?
이 위선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유대인들은 무덤은 회를 발라요.
아주 럭셔리해요. 햇빛이 닿으면 반짝반짝 빛나요.
회칠한 무덤은 반짝반짝 빛나는데 속은 시체가 구더기 파먹고 있어요.
화려하게 치장해도 네 속을 내가 아는데, 네 속이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거짓으로 뭉쳐 있는지 아는데, 위선 떨지 말라는 거예요.
세 번째 의노의 대상은 자기가 만든 법이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중심적인 잣대 가지고 하느님을 재고 사람을 재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온갖 착취하는 사람들입니다.
만물은 만인의 행복을 위해 창조된 겁니다.
‘네가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할 때 그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 것을 훔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신학자들도 있어요.
‘내가 볼펜이 두 개인데 나는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런데 저 사람은 볼펜이 하나도 없어.
그러면 저 사람 것 하나 훔친 거야.’
무슨 소리세요, 내가 번 돈으로 두 개 샀는데요.
그러면 하느님이 소리치시죠.
‘이놈아, 네 돈으로 산 건 내가 생명을 주고, 너를 움직일 수 있게 하고, 일할 수 있게 한 거야. 어디서 건방지게 까불어.’
내 것을 내놓을 때 그것은 희사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어요.
내 것을 내놓는 것이 뭐라고요? 밥 먹고 나면 다 까먹을 거죠?
나중에 한 번 사용하려 해도 생각이 안 나네.
그래도 괜찮아요. 이것이 다 녹음이 되니 얼마든지 노트에 적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요점정리도 할 수 있잖아요.
또 제 강론 특징이 정리잖아요?
정리 얘기가 나와서 나온 김에 미사 후 여러분에게 사제관을 다 구경시켜드릴 거예요.
제 속옷 옷장까지요.
보여주는 이유는 뭐냐? 정리 때문입니다.
제게 정리는 이벤트가 아니에요.
뒤돌아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정리했어요
그런 습관이 사제가 되어 어느 본당에 가도 규모만 커졌을 뿐 다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정리하려면 중요한 것은 뭐냐? 교통정리 잘 해야 해요.
여기 있어야 할 애를 엉뚱한 곳으로 정리하려면 오히려 분심만 들어요.
그런데 정리를 잘하는 사람에게 유혹이 뭔지 압니까?
남에게 강요하게 돼요.
저는 어느 본당을 가든지 신자들을 괴롭힌 적 없어요. 그냥 제가 알아서 해요.
그러면 신자들이 지켜보면서 할 수 있으면 따라오는 거예요.
또 성지에 있으면서 직원들에게 스트레스 준 적, 돈 이야기한 적 없어요.
좋은 일 하려 한다면 주라 해요.
그러면 은인들이 와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이는 거죠.
만명천사가 그렇잖아요?
감곡도 그렇고 배티도 그렇고 서운동도 그랬죠.
제가 오늘 정리하는 것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도 정리하는 마음 먹으시라고요.
저는 주변이 정리되면 마음이 정리돼요.
그런데 어지럽혀 있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그리고 우리 마음속도 정리해야지요.
무관심의 죄, 위선의 죄, 자기에게 얽매여 살아가는 죄,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착취했던 죄,
이런 것들을 정리해야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성사 볼 것은 성사 보고 정리해야지요.
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살날이 적어지는데, 그분 앞에 갈 날이지 가까워지는데,
인간관계에서부터 하느님의 관계에서부터 정리할 것을 사방에 늘어놓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이 부자를 다른 말로 정리 못 하다가 지옥에 간 사람으로 봐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죠? 자기 주변 정리를 못 한 거예요.
이 사람한테는 베풀어야 하는 게 정리예요,
그걸 못하고 자기 위주로 나만큼 베푸는 사람 없다고 생각했죠.
무관심하면서도 무관심한지 모르고 살았고요.
위선적으로 살면서도 위선자인지 모르고 살았고요.
자기 잣대가 최고라고만 알고 살았고요,
아랫사람한테 착취했어요. 시간의 착취 물질의 착취.
그걸 모르고 살았던 거죠.
실제 파악을 못 하니까 정리가 될 수 없죠.
하느님께 오늘 여러분들 분명히 불러 주셨으니까 오신 분들이에요.
불러 주셨으니까 분명히 오늘 사제를 통해서 하실 말씀하셨고, 앞으로도 하실 거예요.
그리고 분명히 주실 것 주실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로 불러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아멘
♣2022년 연중 제26주일 (9/2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감사합니다 ~❤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