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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12일 수요일
[(자)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신지, 그리고 메시아이시라면 증명할 수 있는지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루카 10,25; 11,16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 주시는 대신에 그들이 요나의 표징과 “사람의 아들”(11,30)만을 표징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요나는 주님을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스스로 물에 빠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내고 살아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나는 구원은 오로지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요나 2,10 참조). 니네베로 다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니네베로 들어간 요나는 살아 있는 구원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한 요나를 만난 니네베 사람들은 기꺼이 회개하였습니다.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구원의 표징이 된 요나를 보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배척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 구원의 표징이 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한 이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셨지만, 사실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더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이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합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
잘 나갈 때 조심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비슷한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 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히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네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앗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점심 먹고 잠시 쉬려고 하는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본당에 교적은 없고, 성당에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햇빛은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골고루 비춘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본당에 교적이 없어도, 성당에 나오지는 못했어도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효심이 고마웠습니다. 저는 병자성사 준비를 하고 형제님과 함께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92세의 어머니는 기력이 없었고, 이제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못 하지만, 어머니는 사제가 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성체를 영해 드리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며 웃었습니다. 형제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형제님의 사촌 형은 저의 신학교 선배 사제였습니다. 저는 선배 사제와 신학생 양성을 위해서 함께 고민했었습니다. 지역 교육 담당 신부로 있을 때, 지역 교육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했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청하는 것이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니가 병자성사를 받았으니, 앞으로 성당에 잘 다니겠습니다. 어머니가 저의 신앙을 위해서 마지막 가는 길에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형제님은 어머니를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도 않았는데 성당에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해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 우리의 재능, 우리의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어도, 비록 우리가 신앙생활을 게을리했어도, 비록 우리가 인색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따뜻하게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희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희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요양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이 침상 밖을 나오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습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자꾸만 침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걱정하였습니다. 어르신이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령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이유를 찾으면 10가지도 넘었습니다. 다들 안타깝게 바라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입니다. 새로 온 막내 간호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신발이 작네요.’ 보니까 할아버지의 신발이 정말 작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드렸습니다. 어르신은 힘은 들지만 신발을 신고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다녀오셨습니다. 걷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은 사람들의 눈에 할아버지는 치매 환자였고, 걸을 수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은 막내 간호사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던 요나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롭도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만 그러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빛은
빛을 요구하지 않고
비추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비출 뿐입니다
온누리 빛이도록
그리하여 빛입니다
참은
참을 요구하지 않고
참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참될 뿐입니다
온누리 참이도록
그리하여 참입니다
선은
선을 요구하지 않고
선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선할 뿐입니다
온누리 선이도록
그리하여 선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고
믿어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믿을 뿐입니다
온누리 믿음이도록
그리하여 믿음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요구하지 않고
희망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희망할 뿐입니다
온누리 희망이도록
그리하여 희망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요구하지 않고
사랑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사랑할 뿐입니다
온누리 사랑이도록
그리하여 사랑입니다
살림은
살림을 요구하지 않고
살리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살릴 뿐입니다
온누리 살림이도록
그리하여 살림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테오파네(Theophanes)
신분 : 수도승, 증거자
지역 : 시그리아나산(Mount Sigriana)
같은 이름 : 떼오파네스, 테오파네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태어난 성 테오파네는 부친을 잃고 난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의 궁중에서 성장하여 결혼하였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아내와 합의하에 아내는 수녀가 되고 자신은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시그리아나 산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6년 뒤에는 자신이 원장이 되었다.
787년 그는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 참석하여 성상 공경을 승인하는 공의회의 교령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이를 반대하던 레오 황제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는 황제의 요구를 묵살하고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사모트라키(Samothrcki, 또는 사모드라게) 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감옥에서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
그를 연대기 작가로 부르는 이유는 284년부터 813년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그의 “연대기” 때문이다.
성녀 세라피나 (Seraphina)
신분 : 소녀
활동지역 : 토스카나(Toscana)
활동연도 :1238-1253년
같은이름 : 쎄라피나 피나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 옛 마을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는 성녀 세라피나는 몰락한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그녀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착해서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적은 음식조차 반을 나누어 남을 주곤 하였다.
그는 집에서 은수자처럼 살았는데, 낮에는 수예 등으로 가사를 돕고 밤에는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녀가 아직 처녀일 때 부친이 죽었는데 그녀 역시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중병 증세가 있었고, 좋은 얼굴이 망가져서 추한 여성으로 변하였다.
그녀는 그 후 16년 동안이나 한자리에 누워서 고통을 받았지만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상처보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이 늘 공경하던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발현을 보았고, “사랑하는 딸아, 나의 축일에 하느님께서 너에게 안식을 주시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1253년 3월 12일 그녀는 환시에서 들은 바로 그날에 운명하였다.
당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의 축일은 3월 12일이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서 그녀의 높은 성덕을 증명하였다.
산 지미냐노의 농부들은 흰 오랑캐꽃을 성녀 세라피나의 꽃으로 정하고 서로 나누어 갖는다.
그녀는 피나(Fina)로도 불린다.
성 루이지 오리오네(Luigi Orione)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872-1940년
같은이름 : 알로이시오, 알로이시우스
성 루이지 오리오네는 1872년 6월 23일 이탈리아의 토르토나(Tortona) 교구에 속한 폰테쿠로네(Pontecurone)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다음날 세례성사를 받았다. 13살의 나이에 그는 보게라(Voghera)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나와야만 했다.
1886년부터 1889년까지 토리노(Torino)의 발도코(Valdocco)에 있는 성 요한 보스코 청소년 센터의 학생으로 살던 그는 1889년 10월 16일 토르토나의 교구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생으로서 그는 상호 부조를 위한 성 마르지아노회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이 되어 다른 이들을 돕는데 헌신하였다.
1892년 7월 3일 오리오네 신학생은 토르토나의 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인 훈련을 제공하는 첫 번째 경당을 열었고, 다음해인 1893년 10월 15일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의 토지에서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시작하였다.
1895년 4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짧은 시간 동안 파비아(Pavia)의 모르니코 로사나(Mornico Losana)와 시칠리아(Sicilia)의 노토(Noto) 그리고 산레모(San Remo)와 로마(Roma) 등지에 새로운 기숙학교들을 개교하였다. 이 학교들을 중심으로 젊은 설립자 주위에서 신학생들과 천주 섭리의 작은 사업회(The Little Work of Divine Providence)의 첫 핵심 그룹이 된 사제들이 양성되었고, 1899년에는 천주 섭리의 은수자회(The Hermits of Divine Providence)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3년 3월 21일 토르토나 교구의 주교로부터 천주 섭리의 작은 사업회의 남성 모임으로 사제 · 평수사 · 은수자들이 속한 천주 섭리의 아들 수도회(The Sons of Divine Providence)에 대한 교회법적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944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1954년 최종 승인을 얻었다.
천주 섭리의 아들 수도회의 목적은 자선 활동을 통해 미소하고 가난한 이 그리고 모든 이들을 교회와 교황에로 인도하는데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황에 대한 충성이라는 특별한 네 번째 서원을 발한다.
1904년에는 갈라진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활동이 목적의 하나로 추가되었다. 교회와 영혼 구원을 위한 심오한 사랑에 영감을 받은 그는 그 시대에 제기된 새로운 문제들, 즉 자유 · 교회 일치 · 로마의 권위에 대한 의심 · 현대주의 · 사회주의 · 산업 노동자에 대한 복음화에 대해 의욕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또한 1908년 레기오(Reggio)와 메시나(Messina) 그리고 1915년 마르시카(Marsica)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래서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3년 동안 그를 메시나 교구의 총대리로 임명하였다.
1915년 6월 29일 오리오네 신부는 같은 카리스마를 따르는 애덕의 작은 선교 수녀회(The Congregation of the Little Missionary Sisters of Charity)를 추가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맹인 자매회(Blind Sisters)와 성체 흠숭회(Adorers of the Blessed Sacrament), 십자가에 희생되신 예수의 관상 수녀회(The Contemplative Sisters of Jesus Crucified)를 계속 설립하였다.
그는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천주 섭리의 여성회, 전직 학생회, 후원회 등의 조직을 구성했고, 이어서 오리오네 재속회와 오리오네 평신도 운동 단체 또한 조직하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여러 학교 · 기숙사 · 농업학교 · 자선과 복지 사업이 증가했는데, 가장 진취적이고 독창적인 사업은 고통 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작은 코톨렌고’(Little Cottolengos)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주로 대도시의 변두리 지역에 설립되었으며, 신앙과 문명의 참된 등대인 그리스도와 교회를 선포하는 새로운 설교단으로서 활동하였다.
오리오네 신부의 선교사적 열정은 브라질에 첫 선교단을 파견한 1913년에 이미 명백히 드러났으며, 계속해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1921년), 팔레스티나(1921년), 폴란드(1923년), 로도스 섬(1925년), 미국(1934년), 영국(1935년), 알바니아(1936년) 등지로 확대되어 나갔다.
1921년부터 1922년 그리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우루과이 · 칠레로 두 번의 선교 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교황과 교황청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아 교회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고 여러 문제를 처리하는 비밀스런 임무를 위임받아 수행하였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요 증거자였으며 지칠 줄 모르는 조직가였다. 오리오네 신부는 성모님을 사랑하며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토르토나에 안전한 보호자이신 성모 성당과 푸모(Fumo)에 카라바조(Caravaggio)의 성모 성당을 건립하였다.
1940년 겨울 그는 심장과 폐에 이상이 생겨 치료를 위해 산레모의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12일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사랑스런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예수님! 예수님! 제가 갑니다.”라는 말을 나지막하게 남기고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토르토나에 그가 건립한 안전한 보호자이신 성모 성당 지하에 모셔졌고, 1965년 첫 발굴 때에도 부패하지 않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1980년 10월 2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4년 5월 16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갖고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성 알로이시우스 오리오네(Aloysius Orione)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