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부활의 방식/ 서연정
잎사귀 꽃더미에 기울인 마음 거둔다
사무치던 날들이 하나하나 시들고
눈부신 모든 순간도 아득히 사라진다
바람으로 가득한 텅 빈 숲에서
깡마른 나뭇가지가 오보에처럼 운다
슬픔은 소용돌이칠 때 너무 환히 빛난다
다시 몸부림치는 연둣빛 잎사귀다
갓 태어난 것들은 성스럽게 위태롭게
죽은 듯 뿌리에 서린 그리움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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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럼 피는 저녁/ 임성규
시간의 등을 긁으며 녹슨 초침이 흐른다
기억 속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여전히 붉게 번지는
내 안의 두드러기
아무리 물 부으며 손 뻗어도 닦지 못할
견딜 수 없는 가려움이 밤새 나를 가두던
등짝에 검은 이파리
두 장이 박혀 있다
내가 아닌 것들이 내 속을 긁어대고
무릎 꿇고 빌어보면 눈앞이 깜깜해
몇 사람 사라지는 일이
마른 잎 지는 것 같아
그물맥 같은 소문을 숲에서 듣던 날
몸속을 휘저으며 떠도는 젖은 날개
거기서 미친 꽃처럼
부스럼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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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너에게/ 정혜숙
산다화 붉은 꽃잎에 살얼음이 얹혔다
풍문이 난무하는 거리를 뒤로하고
걸었다, 멀리 더 멀리
고요에 닿기 위해
침묵하라, 침묵하라 시나브로 쌓이는 눈
오목눈이 가족은 행방이 묘연하고
모서리 모두 지워졌다
지난 일은 덮겠다
허술한 내 맬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
부서져 흩어진다, 유랑하는 민족처럼...
집 근처 목백합나무가
오랜 나의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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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호>
벌 받듯 꽃을 받듯/ 정수자
이삿짐 풀다 말고 다리 뻗고 울고만 싶던
놓다 집다 버린 책에 가위눌린 날도 가고
벌 받듯 책을 또 꽂는 셋방에도 봄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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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초저녁/ 우은숙
느닷없이 날아든 전쟁 소식 접어들고
환절기 등뼈마다 몸살 앓는 꽃잎들
온 세상 경계에 서서
눈치로 서성인다
마음을 구겨 넣고 온종일 떠돌고도
마른침 독을 키워 혓바늘에 꽂았는지
큰 한숨 지구 밖으로
외면하듯 밀어낸다
지구는 금이 가고 눈물마저 식은 채
나의 가장 나약한 초저녁이 깊어진다
내 몸을 작게 만들어
기도로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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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 밖/ 김원화
꽃이 핀다는 건 제 울음을 삼킨다는 것
꽃이 진다는 건 제 고요를 만난다는 것
한 뼘 밖
사태 진 자리에
없는 당신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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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참 그렇다/ 박정호
힘든 고비 넘을 때마다 하늘은 왜 눈부신가
망연해서 찔끔 울다 돌변하여 덤덤하게
친구를 떠나보내고 쌀 한 포대 사 왔다
순하디순한 이웃들과 몸 낮추어 부대끼다
만나는 일보다 보내는 일이 익숙해져
갈수록 끌쓸한 날이 오고 잇음을 알겠다
만성이 된 병인가 통증 없는 슬픔이라니,
강개하여 주먹 쥐고 앞장서지 못했어도
순응의 물가에 앉아 다독이는 가쁜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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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소금/ 옥영숙
두 개의 대륙판이 지각변동 일으켜
바다를 본 적 없어 바다를 모르지만
협곡은 바닷물 솟아
소금 우물 생겼다
벼랑을 깎아 만든 계단식 소금밭에
등짐 진 소금물은 힘에 부쳐 힘들고
그을린 피부색만큼 붉은 소금 꽃 핀다
구름의 무게와 바람의 맛으로
흐르다 여기 머문
매달린 소금 고드름
날마다 조금씩 자란
복사꽃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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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의 품격/ 박희정
기억은 사실을 잊고 막무가내 자랐다
썼다가 지우지 못한 이름의 빈 곳간에
어설픈 후회가 자라 공백이 길어졌다
희미한 문장 속에 거칠게 남아 있는
각인과 날인 사이 밀물 같은 너의 흔적
어제의 돋을새김은 위험한 각이었을까
마지막 인증으로 불신은 사라졌다
서로에게 약속이란 붉은 노을 같은 것
페이지 넘길 때마다 품격이 올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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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김미정
빌딩 숲 가장자리 가장 낮은 발끝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돌고 또 돌아가는
등교 전 아침을 재촉하는 흙발들의 숨소리
외계로 손을 뻗은 외래어 아파트는
투명한 햇살 뚫고 뿔을 맞대어 오르고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그림자는 내린다
한때는 너무 넓게 믿었던 운동장을
돌면서 둥글어지는 생각에 쟁여두고
높이도 넓이도 아닌 시작은 늘 바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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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
아닐 수도 있는/ 김수환
시작이 아닐 수도 있는 시작이 시작된다
무대가 아닐 수도 있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아닐 수도 있는 배우가 연기를 하고
연기가 아닐 수도 있는 연기를 보다가
아닐 수도 있는 다행 속에 다행으로 빠져든
객석은 기립박수와 브라보를 외친다
아닐 수 있는 시절 아닐 수도 있는 극장에서
아닐 수 있는 것으로 연극은 막을 내리고
오기를 참 잘했다고 당신이 참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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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나를 모래바람에 씻기고- 신지 명사십리(明沙十里)/ 박현덕
울음통이 해송 숲 가지 끝에 걸려 있다
나무 밑 지날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
바람결 사방으로 가 바다에 떠다닌다
바람이 깃을 펴고 모래를 옮기는 소리
흩어진 발자국들 조금씩 덮어가고
다녀간 흔적 비워져 한 몸으로 만난다
간혹 생의 그리움이 물뱀처럼 지나가
햇빛에 살 베이는 것처럼 아려오면
바다에 뱉어진 슬픔은 저녁놀로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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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았다/ 이토록
나무가 부러졌다
삶이 늘 망연하다
나는 그날 한 슬픔을, 뭉턱뭉턱 베어냈다
홀연히 제 몸을 던져
심장을 쿵 울린 이여
마침내
텅 빈 저쪽, 허공을 얻은 이여
높고 쓸쓸한 정신의 우듬지가
푸르게 일렁거리는
큰 등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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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에 오염되다/ 이은주
화장품을 만드는 백여 가지 원료들
검체 통에 덜어서 빽빽이 꽂아두면
향내가 왜 나는 걸까 무취의 재료에서
덮친 건지 홀린 건지 향기에 오염되어
쓸모가 없어졌다 고유성을 놓쳤으니
코끝에 달리는 잔향이 힘없는 묵 맛이다
탈취제에 늘 쫓기는 악취의 부류부터
화려하게 포장되어 대우받는 향수까지
냄새로 계급을 매기다가 제풀에 포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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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문학지 속의 한 편
표지 가히/ 봄부터 겨울까지/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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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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