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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할리 데이비슨의 역사가 성공으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오토바이시장 점유율 75%로 독점하다시피 했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일본의 혼다·스즈끼·야마하 등에게 밀리면서 시장 점유율이 20%대까지 추락했다. 1981년에는 창립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70년대 초반 일본 오토바이가 소형위주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안이하게 대처한데다, 일본회사들이 값싸고 좋은 대형 제품까지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당시 최고경영자(CEO)였던 본 빌즈(Vaughn Beals)는 미국 정부로부터 일본 제품에 대한 관세부과조치를 얻어내 일단 한 숨을 돌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새로운 생산 및 경영전략을 수립했다. 특히 새로운 개념의 판촉활동으로 ‘할리 오너스 그룹(Harley Owners Group)’을 탄생시켰다.
영어 첫자를 딴 ‘호그(HOG)’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단체는 할리 데이비슨이 망할 위기에 처하자 할리 데이비슨을 아끼는 소유자(오너)들이 스스로 결성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회사 판촉활동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어용(御用)단체로 시작했다. 그렇지만 미 대륙의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을 가로지르는 호그족(族)들의 랠리(HOG Rally)가 이어지면서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7000여개 지부에 65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자발적인 동호인 모임이 됐다.
미국에서 호그 랠리가 있는 날이면 록그룹의 공연, 멋진 오토바이 선발대회, 핫도그 파티 등이 열리면서 부근 호텔에 빈 방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년전부터 매년 수백명이 모여 호그 랠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할리 데이비슨의 CEO를 비롯한 임직원들이 호그를 결성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직접 호그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요란한 장식이 달린 검은 가죽옷에다 머리 수건을 동여맨 수백·수천명의 호그족들과 랠리를 함께 했다. 그러면서 임직원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곧 바로 신제품에 반영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호그족 중에는 양쪽 어깨에 문신을 새긴 험악한 인상의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깨달았다.
이에 따라 할리 데이비슨은 제품생산은 물론 경영 및 광고 전략도 계속 수정해 갔다. CEO가 함께 달리며 호흡하는 오토바이. 현장의 목소리가 담긴 오토바이. 오토바이족이라면 그런 오토바이를 타고 싶을 터. 그래서 ‘한번 호그는 영원한 호그’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처럼 할리 데이비슨을 한번 소유하면 그 다음 오토바이를 바꿀 때도 역시 할리 데이비슨이라는 것이다. 제품에 대한 고객의 충성도를 따질 때면 할리 데이비슨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할리 데이비슨은 시장점유율을 회복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미국 시장에서 점유율 60%대로 1위를 달리고 있다. 1위에서 파산위기까지 갔다가 다시 1위로 올라선 회사가 몇이나 될까.
발로 뛰는 CEO는 그 자신이 가장 큰 광고효과를 가지고 있다. CEO가 “광고는 광고부나 홍보부와 같은 해당 부서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최대의 광고효과를 노릴 수 없다. 할리 데이비슨이 광고를 못해서 파산 위기에 처했겠는가. 물론 좋은 제품이 최우선이지만 그렇다고 CEO가 그저 광고 카피나 광고방송에 얼굴만 내민다고 될 일도 아니다. CEO를 비롯한 모든 임직원들이 고객과 함께 뛰고 호흡하는 회사의 제품이 그렇지 못한 회사의 제품을 이길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광고 또한 그럴 것이다.
미국 포드자동차의 창립자 헨리 포드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에 목숨까지 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38세이던 1901년 한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해 최고 시속 72km로 달려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시속 72km면 무모할 정도로 엄청난 속력이었다. 이후 포드는 1903년(할리 데이비슨과 우연히도 같은 해)에 포드자동차를 설립했다. 포드차의 실질적인 성공까지는 5년여가 더 걸렸지만 포드 자신이 목숨을 걸고 만든 자동차라는 명성과 광고효과가 성공의 가장 큰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 출 처 : 조선일보 e- mail 서비스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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