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중세시대
에드워드 2세(1307∼1327)
죽음이라는 최후에 맞이해서도 적들에 대한 증오를 아끼지 않던 에드워드 1세의 의지와는 다르게, 후임 에드워드 2세는 국경 근처 변방 귀족들을 의식한 형식적인 원정을 시도한 후 곧바로 런던으로 돌아왔다. *1) 왕실의 재정은 이제까지의 전쟁 비용 때문에 짊어지게 된 막대한 부채로 허덕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대한 침략 전쟁을 중단한다면 불명예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지만, 이를 밀고 나가자면 재정 파탄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1세의 전제적 통치에 반감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와 특권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1세가 능력있는 사람이며, 유능한 군주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는 중세를 통틀어 대표적인 군주를 꼽는다 해도 빠른 순위 내에 이름이 나올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유능한 왕의 치세가 항상 긍정적인 부분만 남겨주지는 않는 법이다. 에드워드 1세가 자신의 모자란 아들에게 남겨준 것은 어느 곳에서도 승리에 가까운 결과를 보지 못했으며, 로버트 1세라는 강적을 남겨둔 북쪽에서의 전쟁, 그것도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이었고 내부적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신뢰부족에서 기인한 잉글랜드의 정치적 분열이었다. 이들 두 가지 급선무 ─ 정치적 안정과 전쟁은 다음 200년 동안의 공공 사업을 좌우하였고, 왕국의 사회적 - 정치적 단결력와 경제적 번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권위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면, 새 왕은 특별한 계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에드워드 2세는 계책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잘생기고 몸집이 컸지만 게으르고 술과 안일을 즐기는 왕이었다. 신앙심은 박약하고 학식이 없는 데다, 나약하고 야망 또한 없는 그는 일을 처리할 지혜가 모자랐으며 정치에 무지했고 전쟁 지도자로서는 무능하여 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말을 좋아했고, 수영과 노 젓기, 마차몰기와 도랑 파기, 지붕 잇기 따위의 일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부나 뱃사공 등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음유시인과 노닐고 아마추어 연극에 몰두하는 그는 인간적으로는 호감이 갈 만한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잉글랜드가 필요로 하는 군주의 자질은 가지지 못했다.
이 불행한 군주는 어린 시절에는 애정에 굶주렸고, 청소년기에는 부친으로부터 무시당했으며, 즉위 시에는 미해결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몇 안되는 총신들로부터 조언과 우정, 혹은 애정까지 원하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젖형제이며, 어쩌면 동성애 상대일지로 모르는 가스코뉴의 기사 피에르 가베스통(Piers Gaveston)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1세는 왕세자인 에드워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가베스통의 추방을 명령했으나, 에드워드 2세는 왕이 되자마자 그를 다시 불려들여 요직에 앉혔다. 가베스통은 따지자면 유능한 편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허풍이 심하고 탐욕스러운 위인이었다. 왕의 질녀와 결혼한 이 벼락 출세자는 왕의 출세를 이용해서 그의 친척들에게 여러 이권과 관직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무술 시합에서는 귀족들에게 도전하고 그들에게 별명을 붙여 조롱했으며 *2)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특히 귀족들을 참을 수 없게 한 것은 왕에 대한 자문을 가베스통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국왕에게 자문할 수 있는 정당한 자문관으로서 특정한 신하에 대한 왕의 편파적인 총애를 비난했다. 그들은 1308년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군주인 필리프 4세의 딸과 결혼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건너가 있는 동안에 가베스통의 파면을 요구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이에 동의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를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일 년 뒤에 다시 불러들였다.
1310년 귀족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같은 사실들과 더불어 에드워드 1세가 승인하기를 꺼렸던 양보와 개혁들을 에드워드 2세로부터 이끌어내고자 했던 대영주들의 결심으로 말미암아 상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특히 왕의 사촌인 랭커스터 백 토머스 *3) 를 필두로 한 귀족들은 무장한 가신들을 대동하고 의회에 출석하여 개혁법령(Ordinances)을 기초할 위원들을 임명했다. 성직과 속인의 귀족들 21명으로 구성된 이 법령기초위원들(Lords Ordinances)은 다시 가베스통에게 유죄를 선고하여, 이어서 일련의 법령을 입안했다.
이는 다음과 같다. ①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 ② 상서청, 회계청, 의상실 등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는 관리들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해야 한다. ③ 왕은 법령기초위원들의 동의 없이 선물(gifts)를 급여해서는 안 된다. ④ 에드워드 1세가 부과한 양모와 모직물에 대한 무거운 과세는 금지된다. ⑤ 의상실이 회계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세금을 징수하지는 못한다. ⑥ 의회는 최소 연 1회 열려야 한다. *4)
그러나 규정이 정해진다 하여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이다. 실행에 옮겨질 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는데다 에드워드 2세 역시 강요된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다. 1312년 그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자문관을 임명했고, 가베스통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에 몇몇 백작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고, 로버트 드 윈첼시(Winchelsea) 대주교는 가베스통을 파문에 처했다. 5월 법령기초위원들은 가베스통을 체포하여 의회에서 심판하려고 했으나, 위원 중 한명이었던 워리크 백 기 보샹(Guy Beauchamp)는 그를 자신의 성에 끌고 가 거짓 재판을 벌여 처형 해 버렸다.
에드워드 2세는 부친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했지만, 부친의 완고함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제 자신의 친구인 가베스통이 살해당하는것을 본 그의 완고한 성격은 자기 친구를 살해한 자들에 의하여 좌우당하지 않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2년 뒤 벌어진, 잉글랜드의 적들에게 있어 서사적인 승리는 에드워드 2세의 입지를 대단히 약화시켰다. 1314년 스코틀랜드의 영웅왕 로버트 1세는 베넉번 전투(Battle of Bannockburn)는 4배나 되는 적대자들을 상대로 *5) 위대한 승리를 일구어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자유를 자신들의 손으로 얻어냈으며, 그들의 독립은 보장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법령기초위원들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희극적이게도 무능한 군주를 대신한 귀족들은 자신들이 왕과 가베스통 못지 않게 통치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입증시켰다. 의회는 랭커스터 백에게 최고 자문관의 권한을 부여했고 그는 새로운 관리들을 임명하는 동시에 국왕 측근들의 영지를 몰수했지만, 의욕이 없어졌던 그는 개혁 정치의 실현에 소극적이 되었다. 또한 1314년과 1316년은 연속하여 흉작이 일어나고 가축병이 만연하여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났으며, 빵 값은 크게 오른데다 세금까지 무거웠다. 귀족들은 사적인 대립으로 분열되어 정부는 마비되었고, 웨일즈 변경지방과 브리스틀에서는 계층 간의 싸움까지 기승을 부렸다. 영국의 적대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영웅왕은 아일랜드에 침입하였고, 프랑스인들은 가스코뉴를 석권했다.
혼란을 수습한 것은 애인과 눈이 맞아 남편을 버린 랭커스터 백의 처 앨리스 레이시(Alice Lacy)의 주변 인물들과 랭커스터 백의 권력을 시기한 다른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일부 관리 및 궁정인들과 손을 잡았고, 왕의 혈족인 헤리퍼드(Hereford)와 몇몇 변경 영주들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들의 중심인물은 펨부르크 백 에이머 드 발랑스(Aymer de Valence)였는데, 그의 주도 아래 한동안 온건한 정책이 추진되었다. 상설된 자문회의가 왕의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 왕실을 숙정했으며, 스코틀랜드와 화의하고 상인들과의 화합을 통해 모직물 교역의 재조직을 시도했다.
그나마 성과가 보이는 듯 했을때 문제는 또다시 고개를 치켜 들었다. 말썽꾼은 왕의 새로운 총신 휴 데스펜서(Hugh Despenser)와 동명인 그의 아버지였다. 데스펜서는 여론의 힘을 잘 알고 있는 노련한 정치꾼인 동시에, 가베스통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펨브루크 정부하에서 왕의 시종으로 임명된 그는 곧 나약한 에드워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래지 않아 실권을 쥐게 된 그는 모든 관직 임명에 간여하였으며, 사기 수법과 무력으로 웨일즈에서 소유지를 넒혀 남부 웨일즈에 하나의 왕국을 세울 정도였다. 이 같은 그의 농간과 야망은 반국왕 세력의 결집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웨일즈 변경 영주들과 랭커스터 백 토머스를 따르는 북방 영주들 사이에 많은 적을 만들고 말았다. 그중에서 특히 헤리퍼드와 로저 모티머(Mortimer)의 반감이 컸다.
1321년은 혁명의 해가 되었다. 왕의 실정에 넌덜머리가 난 귀족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변경 영주들이 봉기하고 반대자들의 우두머리인 랭커스터 백이 북쪽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의회는 데스펜서 부자를 추방했다.
그러나 이 대결에서 승자는 놀랍게도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다. 그는 1322년 3월 북쪽으로 진군하여 요크셔의 버러브리지(Boroughbridge)에서 랭커스터 백을 붙잡아 처형했다. 해리퍼드는 전사했고 모티머는 항복하여 런던탑에 갇혔다. 5월에 열린 요크의 회의에서 왕은 1311년 정해진 일련의 왕령들을 폐기했고, 그는 데스펜서 부자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로 인해 왕의 적대자들은 모조리 일소되었으며, 에드워드는 즉위 이래 가장 완벽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위치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였다. 모든 이를 데스펜서에게 의존하게 된 것이다.
1322년 프랑스의 카를 4세(Charles IV)는 에드워드에게 신서를 요구하며 충돌의 여지를 만들었고, 프랑스인들은 가스코뉴에 침입하여 영국인들을 해안으로 몰아붙혔다. 그때, 런던탑에서 탈출에 성공한 모티머는 재빨리 프랑스에 도망쳐 왕과 데스펜서에 대한 반항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모티머 못지 않게 왕에 대하여 부정적이던 왕비 이사벨이 1325년 프랑스에 파견되는 일이 있었다. 영국은 샤를 4세와 더불어 가스코뉴 문제를 교섭할 필요가 있었고, 이왕이면 프랑스 왕의 누나가 되는 그녀가 대화하는 편이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의 왕비는 왕을 극렬히 증오하고 있었다.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원만하지 못했으나 점차 더 악화되었으며, 마침내 왕은 아무 거리낌 없이 왕비를 살해할 수 있다고 을러대며, 이를 위해 바지에 칼을 감추고 있을 정도였다. *6)
프랑스에서 모티머를 만난 왕비는 곧 그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12살의 왕세자 에드워드는 왕비를 따랐으며, 최소한 그 행동을 묵인하였다. 프랑스 왕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것 같지 않자 모티머와 왕비는 홀란드와 젤란드의 백작으로부터 수백 명의 군대와 선박을 얻어 다시 영국으로 귀환했고, 1326년 왕의 형제들을 포함한 왕국의 유력자들 거의 모두는 이에 가담하였다. 왕은 서쪽으로 도망쳤다.
휴 데스펜서는 절망에 빠져 브리스틀 시에 지지를 호소했으나, 시민들은 시큰둥 했다. 마침내 휴는 귀족들에게 붙들려 교수형에 처해졌고, 곧 체포된 왕 역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왕비와 모티머, 그리고 많은 백작들과 주교들은 에드워드의 퇴위 말고는 그 어떠한 타협한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합법성을 갖추기 위해서 왕비는 귀족들에 의해 왕국의 수호자로 선언된 왕세자와 제휴했다.
1327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가능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에드워드에게 돌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어다. 도시의 관리들은 왕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군중들은 왕비의 편에 가담했고, 해리퍼드의 주교와 윈체스터의 주교 역시 왕의 퇴위를 설교했다. 왕국의 각 신분 대표자들은 이사벨과 왕세자에 대한 지지를 서약했으며, 뒤이어 켄터베리의 대주교는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 모두가 에드워드의 퇴위에 동의한다고 선언했다. 백작, 주교, 남작, 그리고 기사들의 대표는 왕을 찾아가 퇴위를 강요했다.
세상 모두에게 버림을 받은 에드워드는 위협 받고, 공포에 질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양위를 강요받다가 왕위가 아들에게 계승된다는 조건으로 왕관을 내놓았다. 폐위된 에드워드는 브리스틀 북쪽의 버클리 성에 감금당했다. 왕을 가둔 사람들은 납골당 위의 어두운 방에 갇힌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처우 속에서도 살아남을 왕를 탈출시키려는 기도가 있자, 모티머는 왕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감옥에서 경호군사들의 폭행으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에드워드 2세는, *7) 심지어 더 끔찍한 최후에 대한 전승도 남기게 되었다. 붉게 단 쇠꼬챙이를 항문에서 창자로 꽂아 넣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8)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전대미문의 행위였다. 노르만 정복 이후 어떤 정복왕의 후손도 왕위에서 폐위를 당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국왕의 살해는 그 당시 기준으로서는 끔찍한 불법행위였으며, 끔찍하기는 지금에 와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잉글랜드 사회는 왕들 역시 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점을 어느정도나마 각인시키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단편적인 위협을 넘어 확고하게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1)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57
*2) 랭커스터 백에게는 '연극배우', 펨브루크에게는 '유대인 조지프', 성질 사나운 워리크(Warwick)에게는 '아르든의 검은 개' 라고 불렀다. ─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166
*3) 에드워드 1세의 동생인 '굽은 등의 에드먼드(Edmumd Crouchback)'의 아들인 토머스는 다섯 백작령에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지닌 거물로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 ibid pp. 166
*4) Ibid pp. 166 ~ 167
*5)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기원 pp.190
*6)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170
*7)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60
*8) 이는 남색자에 대한 처벌로 여겨졌다. ─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