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중도 (越中圖)
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07년 12월 31일 지정)
원본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의
영월(寧越)에 남겨진 단종(端宗, 1441∼1457)의 유배지 자취와 당시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으로 꾸민 화첩.
개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월중도』는 선풍엽 형태로 장황되었으며, 표지는 두꺼운 종이에 격자식 능화판 문양이 있는 황색지를 붙인 상태이다. 표지에는 백색 비단에 ‘월중도(越中圖)’라 묵서로 써서 제첨하였다.
단종에 대한 복위는 숙종연간부터 진행되었고, 유배지였던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자취를 찾고 복원하기 시작한 것은 영·정조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정조대 단종을 추숭하기 위해 영월에 있는 단종 및 충신들과 관련한 주요 사적을 복원·정비하고 이를 기록화로 남긴 것이 바로 『월중도』이다.
내용
『월중도』는 「장릉도(莊陵圖)」, 「청령포도(淸泠浦圖)」, 「관풍헌도(觀風軒圖)」, 「자규루도(子規樓圖)」, 「창절사도(彰節祠圖)」, 「낙화암도(落花巖圖)」, 「부치도(府治圖)」, 「영월도(寧越圖)」 등 총 8폭으로 그리고, 각 화면의 우측 상단에 관련 지지(地誌)를 기록하였다.
제1폭 「장릉도」는 장릉의 형세를 산도 형식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온 뒤 머물렀던 청령포, 단종의 거처였던 관풍헌과 자규루, 사육신의 사당인 창절사가 있으며, 아래쪽에 단종의 시종들이 단종을 따라 순절한 낙화암을 간략하게 그려 넣었다.
제2폭 「청령포도」는 단종이 1456년(세조 2)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오게 된 유배지인 청령포의 실경을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도산(刀山)을 배경으로 곡수(曲水)가 감싸고 있는 중앙에는 1763년(영조 39) 비각과 함께 세운 것이며, 1791년(정조 15) 영월부사 박기정이 정조의 지시에 따라 단종이 거처하였던 터에 2층 기단을 쌓아 보존하였던 곳도 화면에 나타난다.
제3폭 「관풍헌도」는 단종이 1456년 이후 거처하다 이듬해 사약을 받고 숨진 관풍헌의 건축 도면이다. 관풍헌은 객관인 나성관(奈城館)의 우측에 있으며, 1791년(정조 15) 영월 부사에 의해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졌다.
제4폭 「자규루도」는 관풍헌의 동남쪽에 있는 누각인 자규루를 그린 것이다. 자규루는 1605년(선조 38) 홍수에 의해 무너져 유실되었으나, 1791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매몰된 자규루의 터를 찾아 중건하였다.
제5폭 「창절사도」는 단종에 절의를 지킨 사육신 등을 배향한 사당인 창절사를 그린 것이며, 제6폭 「낙화암도」는 영월의 동쪽 금강 변에 위치한 낙화암을 비롯하여 민충사와 금강정을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낙화암은 단종이 죽자 시종들이 금강으로 떨어져 순절한 곳이다.
제7폭 「부치도」는 관아와 창절사, 관풍헌, 자규루를 중심으로 한 영월부의 치소(治所)를 그린 회화식지도이다. 제8폭 「영월도」는 영월부의 치소를 중심으로 영월 경내의 지리적 형세를 그린 지도이다. 해당 화면의 지지에는 민호(民戶)는 2,635호로 남자는 4,387명이고, 여자는 4,563명으로 기록하였다.
『월중도』는 그림의 내용과 회화적 수준을 고려할 때, 어람용으로 제작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는 정조연간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창덕궁 봉모당의 서목을 1910년에 작성한 『봉모당후고봉장서목(奉謨堂後庫奉藏書目)』에 『월중도』가 포함되어 있었던 점에서도 뒷받침 된다.
제작 시기는 제1폭의 장릉 배식단, 제2폭의 청령포의 금표비, 제4폭 자규루의 건립 연대가 1791년임을 감안할 때, 제작 시기는 적어도 1791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규장각에 소장된 목판본 『장릉사보(莊陵史補)』는 1796년(정조 20)에 정조의 명으로 단종에 관한 모든 사적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월중도』에는 없는 단종의 영월 유배 후 정순왕후의 거처인 「정업원도(淨業院圖)」와 능묘인 「사릉도(思陵圖)」를 포함하고 있는 점이 차이를 보인다. 『장릉사보』는 목판으로 제작되었지만, 대부분은 『월중도』의 양식적 묘사와 매우 유사하다.
양식적 분류를 통해 19세기 초반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월중도』의 정확한 제작 시기는 사료를 통해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1791년 장릉 배식에 관한 제도를 정하고 사관을 보내 실록을 상고하게 하여 자세한 당시의 사실을 얻었다고 기록하여 능지 편찬과 관련한 기본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후 1796년 이서구 등을 통해 이에 대한 추가 자료를 수집, 수정하여 『장릉사보』가 완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1791년 당시 정조에게 장릉에 대한 보고를 위해 어람용으로 제작한 것이 『월중도』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결국 『월중도』의 제작 시기는 영월의 장릉 일대 단종 관련 사적을 정비한 1791년 경 정조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796년 『장릉사보』는 『월중도』에 포함되지 못한 정순왕후 관련 사적을 추가하여 보충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징
『월중도』는 채색면에서 전체적으로 청록 채색을 위주로 그린 청록산수화풍의 기록화이다. 실경산수화 형식, 건물 도면 형식, 회화식 지도 형식 등 세 가지 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먼저 「장릉도」, 「부치도」, 「영월도」는 산도와 전도 형식의 회화식 지도이며, 「관풍헌도」, 「자규루도」, 「창절사도」는 정면과 사방으로 건물을 눕힌 전통적인 건축도면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와 달리 실경산수화풍으로 묘사된 「청령포도」, 「낙화암도」 중 「낙화암도」의 민충사는 평행투시도법으로 제작된 점이 차이를 보인다. 제7폭 「부치도」는 「관풍헌도」, 「자규루도」, 「창절사도」의 도면 속 등장하는 건물을 사방에서 산이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영월의 건축 관련 도면을 종합하여 그려 넣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월중도』는 숙종연간 단종의 복위에 이어 영조 및 정조 연간 지속된 영월의 단종 관련 사적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18세기 후반 정조연간 회화식 지도, 건축 도면, 실경산수화 등 다양한 회화 양식을 동원하여 어람용으로 도화서 화원의 솜씨를 반영한 수준 높은 회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홍재전서(弘齋全書)』권184
『월중도』(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편, 2006)
「추모의 정치성과 재현 -정조의 단종사적 정비와 『월중도(越中圖)』」(유재빈,『 미술사와 시각문화』 7, 2008)
「18세기 단종 유적의 정비와 「越中圖」」(김문식, 『장서각』29, 2013)
「19세기 특정한 지역을 그린 고지도와 회화」(이예성,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민속원, 2005)
[인용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