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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특이하다. 미래의 나! 지금의 나! 그러면 과거는 나는 어디로 간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철학적이다. 저자의 이름도 특별하다. ‘화탁지’인데 화씨는 귀한 성이다. 그녀는 건국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번역과 영어 강사로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다 어느 날부터 인문학 공부에 빠졌다고 한다. 운명처럼 명리학을 접하게 되었고, 다른 학문과 명리학을 접목시켜 방송을 찍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화탁지 명리심리TV〉라는 유튜브를 운영하고 인터넷 저널 〈미디어파인〉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한단다.
책은 1,2부로 나누고 1부에서는 ‘존재가 깊어지는 시간’2부에서는 ‘인식이 확장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또 1부에는 자신에 대하여, 인연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2부에는 명리학에 대하여, 에너지에 대하여, 열 가지 별에 대하여, 신비로운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제목을 붙였는데, 이도 철학적으로 들린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은 정념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닌 유별난 존재일 수 없다”라고 했는데, 흔히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으로 이성을 든다. 이상적 사고를 함으로써 인간은 짐승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감정을 100%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란 타고난 기질과 가장 연관성이 깊고, 감정을 처리하면서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감정 기운이 많고, 감정에 휘둘리는 기운이 많은 경우에는 감정으로 인해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정에 매몰되면 차후에 일어날 처치 곤란한 일이 발생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얼마 뒤에 바람처럼 사라질 감정으로 인해 일을 망쳐서는 안 된다. 참을 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 참지는 말라. 그 감정이 불러올 후폭풍을 세 번만 생각하라.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 이미 악감정은 지나가고 없어질지 모른다. -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중에서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완전함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서로 상생하는 관계라면 오래 유지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다. 상생은 좋고, 상극은 나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상극을 일반적인 충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물과 불은 상극이지만, 물이 너무 많으면 불로 말려주어야 하고, 불이 너무 많으면 물로 꺼주어야 한다. 이것은 상생 관계일 수 있다.
좋은 사랑, 나쁜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나를 발전시켜 줄 사랑이냐, 파괴시키는 사랑이냐는 것이다. 타인이 보기에는 나쁜 사랑일 수 있지만, 본인을 살리는 사랑이면 그것은 긍정적이다. 사랑은 나를 위해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뻔한 답이다. 이타심을 행하는 사랑 역시 그 행위가 나를 살리고 발전시키는 측면이라면 일방적 희생으로 보지 않아야 함은 너무나 명백하다. -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중에서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 최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운명적 사랑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나에게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배울 점이 많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람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어떤 식으로든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가치 있기 때문이다. 보완의 과정은 순조롭기도, 아귀다툼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사랑의 종류도 많고 다양하다. 진짜냐 가짜냐를 논할 이유는 없다. 진짜라고 느끼면 진짜인 것이다. 세상에는 100% 객관성을 지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이 변한다고 너무 민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끌린다는 것은 뇌가 아닌 심장의 소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왜 끌리느냐고 물어도 심장은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요동칠 뿐이다. 그러니 왜 내가 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지긋지긋한 사랑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묻지는 말라. - ‘끌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운명적 사랑이 아니다’중에서
사랑이 변한다고, 변했다고 탓하지 마라. 사람이 변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겠는가? 사랑은 물처럼 흐르고 변화하는 생물과도 같다. 결코 충족 되지 않아야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거의 다가 남녀가 만나고 결혼해 살고 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여성은 기본적으로 안으로 수렴하려는 음의 기운이 상대적으로 강한 생명체다. 물론 여성 중에도 남성보다 더 남성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 이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프라이빗 존’이란 말이 있다.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확장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의미한다. 늘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감을 높이는 지름길이다. 늘 붙어 있는 좌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시 가까워지기 위해서 멀어짐은 필수조건이 되어야 한다. 결혼과 이혼은 천륜이 아닌 인륜이다. 만나는 시기를 정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지만,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땅의 기운, 즉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의지가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르짖지만 정작 인간은 선택하는 것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편하기를 바라면서 자유의지를 부르짖는다. 그건 모순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 결정하고 싶다면, 불편해 보라. 살아 있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 ‘지나친 집착은 이별을 부른다. 이혼의 위기 운명인가 선택인가’중에서
학생들의 은어인 ‘꼰대’의 사전적 의미는 ‘늙은이’다. 늙은이는 나이가 많아 중년이 지난 사람을 말한다. 꼰대라고 하면 일단 나이가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꼰대’도 많다. 꼰대의 의미가 ‘자기주장만 옳고 타인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누구나 꼰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본인 위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생각대로, 꼴리는대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하기는 하다.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각각의 우주에 갇힌 꼰대들에게 타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수한 인제를 길러내는 것은 그다음 목표여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단행동은 본인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정당한 행동이다. 그러나 소속 단체원의 이익만 주장하는 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는 ‘좀비’와 같다. 교육이 제대로 서지 못하는 나라의 특징이 꼰대의 연령층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의 몫이다. - ‘꼰대가 진화하면 좀비가 된다’중에서
몸의 일부가 붙은 채로 태어난 쌍둥이를 ‘샴쌍둥이’라고 한다. 인격은 두 사람인데, 몸은 한 사람이다. 완전한 두 사람도 완전한 한 사람도 아닌 것이다. 행복과 불행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하나의 몸뚱이에 존재하는 것.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방향과 움직이는 모습은 같을 수밖에 없는 것. 행복의 다른 모습은 불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밤낮은 따로 존재하나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행복과 반대 선상에 있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다하면 불행이 오고 불행 속에서도 행복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둘 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행복을 원한다면 불행을 겪어라. 그 시간은 오롯이 행복을 향해 있는 길이다. - ‘행복과 불행은 샴쌍둥이’중에서
ADHD라고 있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말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엄마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말을 거역하기도, 친구에게 안하무인으로 대들기도 한다. 손자가 이런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아이들이 걱정한다. 걱정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닐 것이다. 명리에 의하면 화기운이 많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고, 약 처방을 받고 치료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타고난 기질의 영향력이란 엄청나기 마련인데 그 기질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흘린 눈물이 얼마일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화기운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단체생활에서는 눈에 띄는 학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이 자신이 느낄 외로움도 크지 않을 수 없다. 존재 자체가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아이 편에서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믿빠진 독에 물붓기 일 수도 있으나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내적인 충만함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절대로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채울 수는 없다.
화기운은 따뜻한 인간미와 열정, 예술적 기질까지 갖출 수 있는 것이고 장기의 기운은 심장에 해당한다. 봄에 성장하고 여름에 변화 발전하면서 가을에 수렴하고 겨울에 그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처럼 여름이 가장 화려하고 무성한 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젊음이 그저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언제나 따스함을 비출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 ‘화기운 밝고 열정적이나 조증과 ADHD의 위험성’중에서
이 책에 따르면 토기운은 신뢰 가는 중재자 역할을 잘 하지만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꼭 내 성격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토기운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것이 많은 사람은 의견충돌이 생기면 중립적 위치에서 중재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잘 들어주는 마음과 귀를 갖고 있으나,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일단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에서 장점도 단점도 있다.
옛말에 구두쇠를 노랭이라고 했는데, 토를 상징하는 색이 노란색이다. 쉽게 돈을 잘 안 쓴다는 말이다. 쓸데 없는데 돈을 안 쓴다는 뜻이기는 해도 토는 중앙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계절적 특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봄의 토는 목기운이 강하고, 여름의 토는 화의 기운이 강하며, 가을의 토는 금 성분이, 겨울의 토는 수기운이 강하다. 토기운을 가진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일단 잘 들어주며 생각이 많아서 고민도 많다. 모든 걸 쌓아놓은 것이 기본특성이라 그럴 것이다.
근원을 모르고 증상만을 치료한다면 뿌리를 뽑지 않은 잡초처럼 다시 자랄 가능성이 높다. 겉모습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면이 초라할 수 있다는 것과 외면이 강한 사람이 내면도 상대적으로 부드러울 수 있다는 생각은 음양오행 사고에서는 맞다. 상대성원리는 물리학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순전히 저자의 생각이다) - ‘토기운, 신뢰 가는 중재자, 하지만 고민 덩어리’중에서
단풍에 열광하다가 그 잎이 떨어지면 우울해지는 수가 많은 사람들 중에 가을이 이렇게 잔인한 계절이며 그래서 슬픔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 역시 음양오행의 영향을 받은 생명체에 불과하다. 금은 칼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죄를 단죄하고 집행하는 역할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긍정이 있으면 부정도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확 뒤집어 버리는 성격이 금기운의 특성이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나누어도 5가지 사람이 있다.
목기운은 일단 아무 말이나 뱉고 보는 스타일
화기운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타입
토기운은 묵묵히 듣고 있는 타입
금기운은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스타일
수기운은 주변의 반응에 편승하는 타입
그러나 혈액형으로 분류하는 것처럼 단순함 만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두드러진 특징만을 나타낸 것으로써 음양오행이 골고루 섞여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복합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 ‘금, 혁명의 기운’중에서
욕망은 필요악이다. 무언가 욕망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있어야 살고 싶은 의지가 생기고 그 의지가 에너지가 되어 힘을 준다. 에너지가 없거나 적을 경우 무력함과 우울증에 빠진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다. 버릴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은 없을까? 우선은 적절하면서도 건전한 욕망의 대상을 찾는 것부터 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분수에 맞지 않은 명품백을 사는 것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또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나은 상대를 고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덜어내고 부족하다 싶으면 보태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쉽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다. 욕망이 낮아 생의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도 있다. 사람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스스로 보람을 찾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자신을 위해 성취한 것이 없는 인생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그렇다면 작은 것에 만족한 뒤에는 목표를 바꿔보면 어떨까?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것이다. 처음에 작은 집에 살다가 큰 집으로 이사하면 행복하지 않던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욕망이라는 이름의 필요악’중에서
‘사랑에 무슨 계산이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거나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가만히 주위를 보면 -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나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우위에 있는 사람, 즉 상대는 나의 어떤 점을 보고 사랑하겠는가? 자신의 가치를 대치할만한 무언가를 주어야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랑은 나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여야 상대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고통의 열매’라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 가치는 외적인 것뿐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 동반되어야 진정한 것이라는 것도 함께! - ‘사랑 그 관계의 역학’중에서
인생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삶에 부딪히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것이 영혼이 육체를 빌려 세상에 온 이유가 아닐까.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결국 실수의 결과로 나타나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데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수동적 결과물이다.
한 번쯤 궤도에서 이탈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수하는 것도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분명 새로운 에너지를 접할 것이고 시야는 더 넓어질 것이다. 당신이 실수했다고 우주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 ‘가끔을 실수해도 괜찮다’중에서
우주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존재로서 우주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하물며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우주의 에너지는 절대로 전체로 읽어낼 수 없다. 음양오행 역시 매순간 변화한다. 대략적으로는 몰라도 세부 디테일을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우주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 그것이 명리이고 성숙한 인간의 길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흥망성쇠만을 논하는 자들은 명리학을 논할 자격이 없다. - ‘끝내는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