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수 23장 1-8절
설교제목 : 여호수아의 추신
기다리는 이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대림절 둘째주를 맞이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자주 질문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기대함도,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도 퇴색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외부로 향하던 기대와 갈망을 내부로 방향을 수정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기다리는 그대에게”라는 시에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또 다른 기다림을 노래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마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 굽이굽이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안도현(1991) : 《그대에게 가고 싶다》, 도서풀판 푸른숲]
시인은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가슴에 불이 타고 있다면 길고 찬 밤을 기다릴 수 있고, 더 나아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랑하는 그 대상을 찾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신가요? 기다리기 전에 가슴에 먼저 불을 지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슴에 불이 없는 자는 길고 찬 밤을 버틸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후,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을 만납니다. 나이 지긋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외적으로 로마의 압제 속에 있던 피정복민의 설움과 고통 속에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내적으로 설움의 눈물과 비탄의 한숨 속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의 위로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평생 하늘의 위로를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기 때문입니다(눅 2:22-38). 그 가슴에 거룩한 불꽃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불꽃이 타고 있는 자는 길고 어둡고 답답한 시간을 지나. 그토록 기다리는 분 혹은 기다리는 것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땅에 정착하여 안식을 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호수아도 나이가 많이 들었고, 늙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장로들과 우두머리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제 생을 마감하기 전에 고별인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마치 유언처럼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그가 먼저 꺼낸 말은 “나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이렇게 늙었습니다(2)”입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인생에게 거부할 수 없고, 가야만 하고 너무나 확실한 길 앞에서 서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경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생의 끝에 이르렀음을 사람들 앞에 공포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너무나 확실한 것, 거부할 수 없는 것은 늙음이며, 죽음일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삶과 죽음의 두 대극에 낀 존재입니다. 두 대극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삶의 대극인 죽음에게 말을 걸 때 비로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것에 삶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과 제약성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적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조차도 이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한계 앞에 놓여있음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유한함과 한계를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수아의 추신
여호수아는 23-24장에서 죽음의 문턱 앞에서 자신의 인생의 고별인사, 마지막 추신을 남기고 있습니다. 인생에 걸출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추신은 대게 묘비에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찬카스키의 묘비에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고 쓰여 있습니다. 전통과 인습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춤추던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가치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런 추신 중에 제가 가장 마음에 새기는 것은 C.G. 융의 수제자였던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의 비문입니다. “흐르는 물은 바위를 관통한다.” 단단한 바위조차도 끊임없이 흐르는 물은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지도자들을 향하여 추신을 분명하게 당부합니다.
첫 번째 추신은 “기억하십시오”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고 일러줍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편이 되어 싸우셨음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3, 10).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하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하나님께서 너희 편이 되시어 싸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편이 되시어 싸우셨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삶의 여건 속에서도 든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고,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은 내 편이 되시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닉담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약속하신 유산을 주셨고 주실 것음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4-5절에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요단 강으로부터 해지는 지중해까지, 아직 남아 있는 모든 나라와 이미 정복한 모든 나라를 나는 당신들의 각 지파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친히 당신 앞에서 그들까지 마저 쫓아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몰아내실 터인데, 그때에 당신들은 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유산을 각 지파에서 주셨고, 아직 남겨진 땅조차도 주실 것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분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이제 온 세상 사람이 가는 길로 갈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주 하나님이 약속하는 모든 선한 말씀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당신들 모두의 마음과 모두의 양심 속에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말씀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살아가야 할 시간 앞에서, 인생의 수많은 과제 앞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추신이 우리 가슴에도 잘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추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아주 담대하게 지키고 행하십시오. 그것을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십시오(6)” 이 추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고 흔들리지 말고 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에서 유언을 남기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남기는 문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문명은 자아가 기준점이 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아의 왕국에 살다보니 인간의 삶의 수많은 행태들이 무의식성에 사로잡혀 혼란과 무질서, 자아 이기주의와 나르스시스즘이 더해가는 인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가 된 세상은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그 속에서 멀미와 불안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자아는 아르키메데스 점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귀속된 객관적인 절대점일 것입니다. 아르키메데스 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둘 수 있다면, 그 말씀은 자아를 반성적으로 객관화하는 거울처럼 작용하여 균형점을 제공할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기준 삼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준 삼을 것인가? 물음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아르키메데스 점처럼 우리의 기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추신은 “하나님만 가까이하십시오(8)”입니다. 여호수아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오직 지금까지 해 온 해로 하나님만 가까이 해달라고 당부합니다. 가까이하라는 의미를 더욱 분명히 11절에서 말씀합니다.
“삼가 조심하여 주 여러분의 하나님을 사랑하시오”
이 추신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뼈 때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까이하며 살고 있나요? 우리가 섬기며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수아의 추신은 이 물음 앞에 서게 합니다. 열흘 전에 저의 꿈에 큰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께서 연구원의 이원장님께 자신의 오빠가 50세쯤에 의대에 들어갔다고 했고, 함께 길을 가면서 내가 의대에 들어가면 수능도 봐야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텐데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꿈이 깨었습니다. 스위에서 계신 저의 분석가 선생님은 저에게 권력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저에게 하셨습니다. 보다 유명한 평판을 가진 의사로서의 삶에 대한 목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들려지고 있음을 직시하였습니다. 오늘 모든 사람은 더 많은 돈과 더 가까이 하고 싶고, 더 높은 권력과 가까이하고 싶고, 더 좋은 명예로 드높여지길 갈망하며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유혹해오는 이 신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추신은 다른 신을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대림절, 이 기다림의 절기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는 이 추신을 가슴에 새기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