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2004. 5. 23. 본오동 세례자 성 요한 성당 주보 성인 영성 교육을 위해 작성했던 글의 일부입니다. - 주임신부 글
* 세례자 요한의 영성 요점 - 광암 이벽 (세례자 요한)과의 연관성.
1. 법대로 살면서, 기도하는 정신, 항구하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아나뷤(anawim) 정신.
세례자 요한의 부모이신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자녀가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대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며, 주님의 율법을 봉행하는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이다. 의롭고 착하게 살아온 이 부부에게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마지막에 커다란 축복을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도 한 때 일이 잘 안 풀린다거나,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고 할 때 포기하거나 쉽게 불평하지 말고, 항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하겠다.
구약의 가난한 사제였던 즈가리야는 대표적인 구약의 가난한 백성 ‘아나뷤’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나뷤’은 세속적으로 부와 권력이 없고 달리 힘이 없으므로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갔던 많은 구약의 백성들을 말한다. 이를 일컬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벽 성조와의 연관성)
조선 후기 사회는 많은 기록에서 나타나고 역사 사회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백성들이 매우 궁핍한 형편이었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사회였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은 당파싸움과 가문의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의식있는 사람들의 등용을 막고 꺼렸다. 이벽은 자신의 형이 당쟁의 과정에서 장살(丈殺)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보거나 관료로 출세할 마음을 접었다. 오로지 바른 도리로서 희망이 없는 당시 사회에 빛을 비출것만을 희구하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접한 서학(西學) 즉 천주학(天主學)의 도리는 그에게는 참으로 큰 빛이었고, 자신의 모든 삶을 걸만한 진리의 학문이었다. 이벽은 이 학문을 공부하면서 참으로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벽에게는 하느님(天主님)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고, 당시 도탄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종교이며 진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적(先驅者的) 정신
- 마르꼬 1장,1-8절. 마태 3장,1-12절. 루가 3장,1-20절.
요한은 온전히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 주님이 오실 것을 백성들에게 예고하고 준비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백성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이해하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려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끌어주었다. 세례자 요한의 빛나는 점은 단지 귀중한 몫을 예수님께 양보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회개시키고 준비시키고, 각성시킴으로써 얼마 후에 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데 있다. 이것이 ‘주의 길을 넓히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그의 사명(使命) 또는 소명(召命)에 충실히 응답한 내용인 것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속의 권력자인 왕(王)에게까지 그 비리를 정확하고 엄정하게 고발함으로써 사회전체에 대한 도덕적 각성을 외치고,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각성(覺醒)하고 회개(悔改)하여야 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벽성조와의 연관성)
이벽 선생이 천주학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우리 전통안에 내려오던 유학(儒學)으로 수양이 되어 있었고 기본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전통 안에 내려온 유학 특히 성리학(性理學)은 가장 올바른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고 그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도록 선비들을 이끌었다. 그러한 진리 탐구와 한번 체득한 진리를 끝까지 옹호하고 지키려는 정신이 이른바 ‘선비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성리학을 한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고 수호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올바른 학문을 한 사람들은 이 진리 탐구 정신과 진리 수호정신이 충만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이벽은 유학 특히 성리학의 올바르고 좋은 점들을 잘 공부하여 익히었지만,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와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구원과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문제는 성리학만을 가지고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나아가 백성 전체와 사회전체의 구원 차원에서는 기존의 학문으로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가 온전히 구원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성리학의 진리에서 나아가 명백하고 확실한 천주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신분차별을 없애며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하느님 앞에 서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생각이고 사고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커다란 혁명(革命)과도 같은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처음 부르짖고, 자신의 삶 안에서 실천해 나간 이벽선조와 그의 동료들은 당연히 기존 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마침내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자신들의 진리를 증거해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벽선조와 같은 선각자적인 혜안(慧眼)과 안목을 가지고,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 선각자가 있기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이고 현재도 그러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의 덕분으로 우리가 좀 더 편안한 신앙생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벽 선조와 동료학자들의 선각자적인 수행은 그리스도의 길을 먼저 닦고 그 길을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의 삶과 정신을 우리 민족과 교회 안에서 가장 훌륭하게 보여 준 삶이라 하겠다.
3. 온전히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겸손과 무화(無化)의 정신.
세례자 요한의 빛나는 점은 그가 인기 절정의 자리에 가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권위와 힘을 느끼고 구세주로 모시려할 때, 자신의 비천함과 무가치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오실 구세주 그리스도와 자신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간혹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깨닫고 우리의 봉사와 희생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만한 자격이 없다.”. .마르 1, 7; 마태 3,11.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 . .요한 3, 22-30.
제자들을 기꺼이 그분에게 양도하고 인도함. . . 요한 1, 35-42.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그의 <영적 담화>에서 참된 겸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참된 겸손은 다음의 다섯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나 자신의 비천함과 무지함 무가치함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비천함과 무지함을 아는 것에서 나아가 참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무가치함과 비천함을 알아보았을 때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비난과 멸시를 인정할 뿐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부터 좋아하는 것이다. 일부러 그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무엇을 꾸미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째 겸손의 최후 단계는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이를 인정하고, 다른 이로부터 멸시당하는 것을 인정하고 즐거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통하여 그것을 원하고 받으려고 찾아 나서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것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의 사람에 불과하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영적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세례자 요한은 가장 깊은 겸손의 단계에 도달해있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비우고 오직 하느님의 것을 채우고 그분의 뜻을 실행한 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비난과 멸시 그리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 그리고 그분이 이루시려고 하는 의지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벽 성조와의 연관성)
이벽 성조는 천주학을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오직 한 방향으로 한 가지의 삶을 살았으니, 그것은 진리를 찾고 진리를 위해 온전히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 진리가 처음에는 유학 안 있는 것으로 알았으나, 천주학을 알고부터는 천주에 관한 가르침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있고 거룩한 성교회(聖敎會) 안에 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어떤 흔들림 없이 이 가르침을 신봉하고 이를 봉행(奉行)하며 이웃에 선교(宣敎)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는 자신 안에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함이었고, 나의 사욕(邪慾)과 개인적인 욕심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天主)의 뜻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삶 안에서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욕심(선교를 하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까지도) 포기하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이벽선조는 생명까지 포기하면서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한 거의 완벽한 겸손의 길을 가신 분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응용)
분별된 선- 하느님의 뜻을 향하여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 뜻에 자신을 낮춤 복종함. . . 사목위원들에 맞추고, 청년들에게도 최대한 맞추어준.. .. 신발 정리, 기안 작성 등.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