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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묵상글 들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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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원수를 사랑하여라. ♣
‘1)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라는 계명입니다.
<또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마태 5,48).>
원수 같은 사람,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친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사랑이고, 미완성 상태인 사랑입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계명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이웃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본성을 누르고 덕을 쌓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또는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의지와 상관없는, 본성과 감정에 관한 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의지로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의 본성과 감정을 누르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덕을 쌓는 일이 됩니다.
4)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사탄의 악’으로 기울어지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하느님의 선’으로 ‘사탄의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계명입니다(로마 12,21).
(‘하느님의 선’과 ‘사탄의 악’은 모두 내 안에 있습니다.)
5) 원수 같은 사람이 나에게 한 짓을 용서하고,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세속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사랑 실천에 대해서 보상을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루카 6,35),
또 내가 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큰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6)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이기도 하고, 스스로 심판관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로마 12,19).
(그러나 ‘정의의 실현’을 위한 노력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를 막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선과 사랑이어야 합니다.)
7)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나 자신이 복수심과 증오심에서 해방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수심과 증오심과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워해라. 복수해라.” 라고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평화를 누리려면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상처가 너무 커서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용서하여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명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계명을 실천할 힘도 주시는 분입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박해자들을 사랑으로 회개시켜라.”입니다.
여기서 ‘원수, 미워하는 자들, 저주하는 자들, 학대하는 자들’은
‘박해자들’로 해석되는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종교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잘해 주고,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29-31).”
이 말씀은, 범죄와 악행을 묵인하거나 방관하거나, 그런 일에 동조하라는
뜻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범죄와 악행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앙갚음’이 아니라 ‘선과 자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당한 사람’의 경우,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그 강도들을 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강도들을 체포해서 처벌하는 것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열왕기 상권 21장에 나오는 왕비 이제벨의 악행과 같은 일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왕의 권력에 맞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이제벨을 처벌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카 6,32).”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사심 없이 사랑해야 ‘참 사랑’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런 참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루카 10,33-35).>
여기서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 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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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어렵다고,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깊은 신앙심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하겠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복음 말씀의 실천이 어렵다고 합니다.
성급히 단정 지어 말하자면, 원수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이가 내뱉는 몇 마디로 원수라 규정하고, 이웃의 불편한 행동 몇 가지로 ‘웬수’를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옹졸함이 상상의 원수를 매일같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막바지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결기는, 우리가 때로는 타인을 너무나 차갑게 심판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뜻이 다른 것을 두고 ‘틀렸다’ 말하고, 비판이라는 미명 아래 비난을 일삼고서,
그럼에도 나는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낯 뜨거운 언행을 밥 먹듯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위한 것이지 타인의 잘잘못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는 것, 나의 용서로 나의 삶이 사랑으로 풍요로워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애당초 원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원수는 내 마음이 만든 우상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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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일러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관습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에겐 참을성을 주고 은총의 상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 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30-31절)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고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여야 한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되갚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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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한상우 신부님.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낮아질 때
자비는 더욱
빛난다.
하느님의
자비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시간이다.
아버지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비를
간절히 원하신다.
우리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간절히 구한다.
자비가
구원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다.
원망과 원한을
치유하는
자비이다.
부족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자비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기도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
사람이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하느님께
기도하게 된다.
자비와 교만
믿음과
미움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미움과 비난은
결국 우리자신을
향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자비는
닫힌 관계의
경계와 한계를
무너뜨린다.
참된 자비는
살아있는
오늘을
만나게한다.
자비가
빠져버린
오늘은
판단과
단죄뿐이다.
자비가
사람을
살린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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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새벽을 열며.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빠다킹신부님.
학교에서 막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가 묻습니다.
“오늘 성적 나오는 날이지? 어떻게 되었어?”
그러자 아이가 “엄마! 놀라지 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엄마는 어떠했겠습니까? 놀랄 기대를 잔뜩 하게 되었지요. 그 순간 아이는 말합니다.
“글쎄, 우리 반에서 전교 1등이 나왔어. 놀랍지?”
이때 엄마는 곧바로 어떤 말을 했을까요? 뻔합니다.
“너는?”
전교 1등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사회는 철저히 개인화시키려고만 합니다. “네가 전교 1등을 해야지. 다른 애가 전교 1등 한 것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라는 말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전교에 한 명만 있어서 늘 전교 1등을 하는 친구의 1등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보다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 훨씬 더 발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등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혼자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생각보다 늘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주시는 주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먼저 ‘측은히 여기시어’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사랑, 공감 능력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만을 따르려고만 할까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정반대입니다. 즉,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에서 곧장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에도 당신을 중상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따르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과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남겨 놓으셨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들 안에서는 거룩한 형상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세상을 따르는 의지를 거스를 수 있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법칙보다 주님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더 큰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더 큰 영원한 생명을 누릴 행복을 위해 지금 어떤 법칙을 따라야 할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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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말하라. 모든 음정이 치유의 힘을 갖도록(닐 도널드 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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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배출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두 집단에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한 집단에는 그날 한 일을, 다른 집단은 그날 느낀 감정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쓴 집단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지만, 감정을 쓴 집단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을 배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을 잘 표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일에 대해 기억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건강해지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자리에서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만남은 단순히 일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해야 할 일로 미사를 하고, 기도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만나야 진정한 치유가 주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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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대단합니다.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통해서 미리 다음 학년 것을 배웁니다. 학교의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아낌없이 비용을 지출하고, 아이들은 늦은 시간까지 공부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한민국 학생들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합니다. 공부를 해서 행복해야 하는데 자존감이 떨어지는 학생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목적지가 틀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이 그에 합당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며칠 전에 대한민국 교육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자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지를 교육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경쟁과 지식의 암기를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독서와 성찰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육은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능력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능력은 탐구하고 토론하면서 키워질 수 있습니다. 결과의 평등은 아니더라도 기회의 평등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지난 100년간 대한민국의 교육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목적이 변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교육목적은 황국의 신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교육의 목적은 자유의 투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일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싸워야 했고,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민주화된 시대의 교육의 목적은 인적자원을 키워내는 것이었습니다. 지하자원이 없으니 인적자원을 키우자고 하였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아의 발견, 사회적인 책임, 창조적인 능력 배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은 없었습니다.
앞으로 100년을 위한 교육은 자아의 발견, 사회적 관계 형성, 창조적 능력 배양, 행복한 삶을 향한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행해지던 것들을 고쳐야 합니다. 첫째는 입시 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제도를 없애지 않으면 과도한 경쟁과 입시 열기를 막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등록금을 없애야 합니다. 과도한 등록금은 가정경제에도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학자금 대출금을 상환해야 합니다.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야 합니다. 자아의 발견, 사회적 관계 형성, 창조적 능력 배양, 행복한 삶은 서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대학은 이런 방향으로 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국민적인 합의와 정부의 의지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교육은 어떠하셨는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자존감을 키워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 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자존감도 높여 주셨습니다. 여인들의 자존감도 높여 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자존감도 높여 주셨습니다. 병자들의 자존감도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를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자캐오의 선행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편견, 차별, 신분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적인 능력을 키워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적인 능력은 경쟁과 이기심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스스로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시키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키워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역시 경쟁과 이기심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시키면 더 큰 일을 맡겨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였고, 이것이 교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고생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시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들의 꽃을 아름답게 입혀주시고, 하늘의 새를 먹여주십니다. 여러분은 소중하니 하느님께서는 더 잘 입혀주시고, 먹여 주실 겁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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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 공동체적 관계의 방어 전술
사랑은 뜻이며 또한 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 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그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의 뜻을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것을 고백이라 하며, 그 뜻에 따라서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는 힘을 증거라 합니다.
사랑의 힘에는 최대한이 있고 최소한이 있습니다.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주는 상대방에게는 최대한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대하고자 하고 우리가 선택했으며 또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그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그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이나 일생을 바칠 수도 있는 정도로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렇듯이 최대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 수는 없지만,
단 둘이나 셋이라도 그래서 아주 작은 범위의 인간관계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시고 그 관계에서 모아진 뜻과 증거를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드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러한 인간관계가 이룩하는 연대와 통공의 네크워크가 결국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공의회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공동체’라 불렀으며,
교회는 이러한 인간관계들의 총합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교회를 인간 공동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반포한 최종 문서인 사목헌장의 제1부 제1장의 제목이 ‘인간의 존엄성’이고,
제2장의 제목이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 제2장의 28항에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근거가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이는 우리를 반대하고 심지어 박해하기까지 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도, 우리의 정체성인
사랑의 뜻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뜻을 최소한도로라도 발휘해야 하는 일종의 방어적 전술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폭력이나 악에 대해서 절대로 우리가 물들어서 대항폭력으로
맞서거나 또는 굴복해서 그 폭력과 악을 키우지 말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원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뜨거운 감자처럼 결코 쉽지 않는 논란이 그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 말씀을 가장 정확하고 안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처신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반대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로마 총독의
권세를 이용하고 혁명당원들과도 야합하여 군중을 선동해서 당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할 때,
구차하게 논쟁을 벌이시지 않고 침묵하시며 당신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을 저주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도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몰라서 짓는 죄이니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탄원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죽음이 사랑의 최소한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방어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순순히 우리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박해가 닥치면 일단 피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참조: 마태 10,23).
또한 더 이상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박해자들이 저지르는 악이 더 커져서
더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당방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마태 10,34)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기희생은 불가피합니다.
이렇게 후퇴하거나 저항하는 선택은 사랑의 최소한에 있어서 최소한의 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가 압제적인 정치로 기본권을 말살하고 공동선을 파괴하는 경우 국민이 봉기하는 혁명이나
자본가가 착취하거나 경영자가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 이에 대해 항의하는 파업,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저항권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헌법에 보장되게 된 배경도 이에 근거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해 주는 것이 사랑의 최대한이라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우리가 하지 않는 것도 사랑의 최소한입니다.
최대한이든 최소한이든 사랑을 증거함에 있어서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최선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황금율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는 우리도 고백이든 증거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서도 방어 전술이 달라집니다.
희생당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으며,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방어하는 선택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즉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과 선택으로
드러내게 될 것이며, 상대방의 폭력이나 악 때문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선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부도덕한 자본이나 불의한 권력도 대단한 실체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진리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사랑의
진리를 고백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가로막을 수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상이 가하려는 악한 힘이 우리네 정체성을 해칠 수는 없고, 오히려 희생이든 후퇴든 저항이든지 간에
믿음이 고백과 증거로 나타나는 방어적 선택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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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2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든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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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예닮 여정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평생 공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생 학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생 여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답은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의 공부요 사랑의 학교요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이 모두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무엇인가 행해야 하는 동사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랑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변에 널려 있는 사랑 실천의 기회들입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지혜요 삶의 의미이자 삶의 모두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근원적 처방도 사랑뿐입니다.
아주 오래전 선물받은 무성한 식물이 담겨 있는 조그만 화분에 글귀를 지금에야 확인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늘 사랑합니다.” 어제 지인과 카톡을 통해 나눈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우리 집 아파트에 희망과 축복의 무지개가 떳어요. 하늘길이 활짝 열렸어요. 주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아,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아멘, 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한마디가 빠졌네요. 사랑하는 자매님!”
“ㅎㅎ 신부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사랑은 평생 의무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 성덕의 잣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엔 일체의 변명이나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랑의 수행이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삶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설교도, 제1독서의 바오로 설교의 주제도 사랑입니다. 참 최고 최상의 강론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평생 배워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런 평생사랑의 학인의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도의 코린토 전서 13장, 사랑의 헌장을 능가하는 가르침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 사랑 공부에 평생 매진해야 할 것을 배웁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 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열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수록 자기를 알고 무지와 허무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것 역시 평생 여정입니다. 우상이란 없습니다.
태양앞에 어둠이 사라져 본 모습 그대로 드러나듯 하느님 사랑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이 걷힐 때 헛것들로
드러나는 온갖 우상들입니다.
하느님은 한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우리 삶의 존재이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사랑에 정통한 바오로는 음식문제에 대해 분분한 의견들을 사랑으로 단칼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모두에, 특히 약한 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바오로의 깊고 섬세한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예수님의 전무후무한 사랑에 대한 설교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의 설교를 능가할 설교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 사랑은 무사한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웃 형제들 모두가 잘되길 바라는 존중과 배려, 연민의 사랑이요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밑빠진 독에 물붓듯 하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 물은 다 새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바로 아가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눈에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서서히 영적으로 성장 성숙시키는 사랑입니다.
세상 모두에 차별없이 쏟아지는 햇빛같은 사랑이요 단비같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좋고 싫음의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모두에게 선사되는 무사無私한 사랑입니다.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사랑입니다. 몰라서, 무지로 인한 원수요 미움이요 저주요 학대입니다.
이런 악순환을 단, 끊어버리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최고의 보복이 사랑이요, 악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의 잘해 줌, 사랑의 축복, 사랑의 기도로 응답할 때 무지의 악순환은 끝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랑은 모두 일방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체의 군말 없이 대가를 기대함 없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라 합니다. 완전히 무사한 사랑, 무아의 사랑입니다.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사랑, 바로 황금률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랑벆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만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처방의 특효약입니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편협한 사랑, 갑질의 행위, 다 어리석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몰라서 무지로 인해 심판이요 단죄요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알면 알수록 겸손과 지혜요, “그럴 수도 있지”, 또는 “그게 현실이지” 하며 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아가페 사랑 실천에 항구할 때 우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 결핍으로 인한 내 문제요 내 탓입니다. 아무도, 하느님도 탓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사랑의 힘을 키우는 노력이요 이런 은총을 청하는 것뿐입니다.
무지와 허무와의 싸움은 사랑이 아니곤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작은 하나의 촛불의 빛이 방의 어둠을 밝히듯,
밤의 어둠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동녘의 태양처럼 사랑의 빛 앞에 저절로 흔적없이 사라지는 무지와 허무의 어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평생학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다음 한마디 복음 말씀이 오늘 강론의 결론이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평생과제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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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를, 예수님을 닮으라는 촉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빙 둘러서 말씀하실 것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사랑을 감정의 범주로만 생각한다면 사랑은 명령이 될 수 없지만, 의지와 지향의 일이라면 영 불가능하지 않지요.
그래서 오늘의 사랑 명령은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하며 다정하고 유익을 주는 이들을 대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은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어도, 극악무도한 죄인이어도 누구나 가능한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사랑은 아직 온전히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본능적 교류나 순반응, 주고받는 교환의 사랑, 미완의 사랑, 반쪽의 사랑입니다.
원래 사랑의 범주 안에는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학대하는 자들, 뺨을 때려 모욕하고 빼앗고 갚지 않는 자들, 은혜를 모르는 악한 자들에 대한 사랑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야 완전하신 아버지처럼, 자비하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람 사이에서 당한 일들은 제 아무리 힘써 용서하려고 애써도 어딘가 자국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파편처럼 삶의 구석구석에 박힌 상처와 아픔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고통이 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머리나 자기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이 약한 형제, 양심이 불안정한 형제들을 배려해 행동하라고 이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1코린 8,11)
사도는 믿음이 깊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충만한 이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자칫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좋지 않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과 양심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약한 형제들과 더불어, 본능적으로 우리 호의의 대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원수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적용할 수 있는 권고일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셨다면, 그 역시 우리 사랑의 대상인 형제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1코린 8,3)
하느님에게서 받은 믿음과 사랑을 자유로이 한껏 발휘하며 살기에도 모자랄 것 같은데, 믿음이 약한 이들까지 고려해서 조심조심 눈치보며 사는 건 따분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나를 힘들게 하는 이에게 나만 줄곧 참아주고, 웃어주고, 손해 보며 사랑한들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항변하고 싶을 수도 있지요.
하느님께서 알아주십니다! 그분이 다 아십니다. 그리고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요. 처음에 발동을 걸기가 어려울 뿐, 한번 시작되면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날개 달아 올려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화답송)
시편 저자는 용기를 다해 사랑하는 우리의 숨은 희생과 눈물, 인내와 겸손을 주님께서 잘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앎이 곧 사랑이지요. 우리의 부서질듯 약하고 뒤집어질듯 아슬아슬한 미완의 사랑을 주님은 이미 사랑의 완성태로 보고 계십니다.
내게 어려움을 주는 이들을 사랑하기 어렵다면 처음은 보상적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심판받지 않으려면, 내가 단죄받지 않으려면, 내가 용서받으려면 내가 먼저 그리 하면 된다고요.
그렇게 하다보면 사랑에도 구력이 붙고 가속도도 생깁니다. 보상적 동기는 사랑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굳이 기억도 나지 않게 되지요.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보려 애쓰면서 사랑이 되고, 자비하신 그분을 닮아보려 애쓰면서 자비가 되어갑니다. 이 과정이 어느새 우리를 사랑이 되게 할 겁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사랑은 사랑하면서 배우고, 그 과정에서 완성됩니다. 본성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까지 신앙으로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존재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이 그를 통해 드러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형제로, 이웃으로 두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벗님 여러분이 제게, 우리는 서로에게 이미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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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창조시기 10일째-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하느님의 자비!'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인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과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慈悲)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육화(肉化)와 땀과,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죄인의 회개를 바라면서 죄인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당신을 저주하고, 뺨을 때리고, 십자나무에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 이토록 자비하시니,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그렇다보니 너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너로부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단죄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1코린8,1-2)
너와 원수 관계를 만들고, 너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힘은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식의 힘', 곧 '교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그 자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결코 너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6,38)
하느님의 자비가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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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1코린토 8,1ㄷ-7.11-13
루카 6,27-38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어제 4가지 행복·불행 선언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목표치가 너무 까마득해 보이고 불가능해 보여,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시키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루카 복음 6장 27~29절)
원수 사랑을 주제로 한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들으시고,
‘해도 해도 너무하신 예수님’이라는 생각과 함께 실망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한테만은 절대로 불가능한 목표라고 여기고 아예 포기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원수’란 단어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으로 내리누르고 있는 로마 군대요, 로마 황제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혐오하던 이방인들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작고하신 최인호 베드로 선생님의 해설이 명품입니다.
아래 글은 작가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때, 형님·동생하며 막역하게 지냈던 명배우 안성기 사도 요한 선생님께서 하셨던 조사(弔辭) 가운데 일부입니다.
⟪최 베드로, 인호 형님이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아우야,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 줄 알겠냐?”
그 당연하고도 쉬운 질문에 저는 무슨 다른 뜻이 있을까,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지요. “
그야 말로 원수를, 적을, 나쁜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일까?
아냐, 그런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어. 안 보면 그만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야.
그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자식, 자기 부모들이지.
이들을 열심히 사랑하라는 말이지.”⟫
(최인호 유고집 ‘눈물’, 여백 참조)
예수님의 당부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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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1코린토 8,1ㄷ-7.11-13
루카 6,27-38
무엇이 원수를 만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이미 원수가 되었다면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미 사랑한다면 원수가 아니란 소립니다.
다시 말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원수가 생기지 않게 하라는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누군가와 원수가 되었다면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무척 힘이 듭니다.
원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가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나와 원수가 되는 사람들은 90% 이상 나와 알았던 지인들입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성당 교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원수가 될까요?
내가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배신당한 것입니다.
믿어서 돈도 꾸어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상대는 나를 이용한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한다면 대부분 큰 것이 못 됩니다.
애당초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원수가 생겨납니다. 사람을 믿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도 어디로 튈 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왜 믿을까요? 나를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으니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있겠다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를 믿게 되었을까요? 나의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욕심이 많아지면 그 욕심을 채우려 나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욕심이 나게 하는 것이 나이기에 그 욕심을 선택했다면 나를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바닥부터 시작하여 수천억 대의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도 처음엔 사기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는 부모를 모시고 아이들도 키워가며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3달러짜리 청바지에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트럭으로 아침마다 마켓에서 팔 과일을 사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넥타이를 맬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삼보컴퓨터의 최대주주였던 e머신즈는
저가 PC 판매로 미국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회사로 한국 기업 사상 두 번째로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돼 관심을 모았습니다.
e머신즈 대표는 김승호 씨에게 만 달러어치 주식을 살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별다른 인연이 없는 자신에게 그런 특권을 주는 사람을 의심할 눈이 그때는 없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큰돈이었음에도 그는 주식을 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장은 폐지되고 주식은 휴짓조각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끝내야 했지만, 욕심과 무지가 그를 또 눈이 멀게 했습니다.
e머신즈 대표는 이번에 실시간 주식차트 거래가 미국에서 막 인기를 얻고 있으니 이런 거래회사를 만들어 수수료를 벌자고 제안했습니다.
솔깃한 아이디어에 휴지가 된 주식을 소개한 죄도 묻지 못하고, 채소 도매상이 아닌 사무실로 출근한다는 생각에 또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증명된 이익이 아무것도 없는데 증권거래 사무실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한 달 만에 모든 손님이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사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방에 크게 벌자’며 주식 옵션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옵션거래의 완벽한 이해가 없던 그는 또 자신 있어 하는 그 사람의 말을 따랐고 결국 모든 자산을 날렸습니다.
좌절과 실망에 주저앉은 그에게 ‘외환 거래는 불과 몇백 달러로도 투자할 수 있다’며 재기를 부추겼습니다.
이미 바닥까지 가버린 그로서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민 생활 10년의 노력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고 빚까지 얻고 끝을 맺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속아 다 털리고 만 것입니다.
처음엔 e머신즈 대표도 이 일로 딱히 이익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선한 의도로 그랬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어설프게 믿어서 가족까지 다 길거리로 내몰리게 했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몇 년 동안의 공부 끝에 e머신즈 대표가 자신을 이용해 경험을 쌓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속은 것입니다.
속았던 이유는 믿었기 때문이고, 믿은 이유는 자신의 무지함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믿기까지 해버리니 사기를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무지와 욕심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무지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 욕심에 눈이 먼 사람이라면 자신도 믿고 이웃도 믿어서 사기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도 믿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비’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원수는 나의 욕심 때문에 만들어지니, 그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라고 하시는 것은 속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라고 하시는 말도 속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면 다른 사람들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비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는 바로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욕심은 자신을 믿게 하고 이웃을 믿게 만듭니다.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손실을 봅니다.
그렇게 원수가 생깁니다.
오히려 자비로운 사람들은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이웃도 부족할 것을 압니다.
그래서 돈을 꾸어줄 때 되받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꼭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되받지 않아도 될 양만큼만 꾸어주게 되어 큰 손해를 보지 않게 됩니다.
내가 부족함을 알아야 다른 사람들도 부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비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생기기 전부터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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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이영근 신부님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내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그들이 한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하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상책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해줍니다.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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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연중 제 23 주간 목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와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자비로운 자 되라.' 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한다. 하느님 한 분이 계시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고백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 주십니다. ...
우리에게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코린8,1-7.11-12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흐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27-38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바오로 사도는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 말합니다. 우상과 그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그 지식이 치워집니다. 우상과 그 가치를 따르는 사람의 양심이, 그 법이 혼탁해집니다. 그가 지식을 쌓았다 하여도 그 지식의 샘물이 고갈됩니다. 우상과 그 가치를 따라사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우상을 벗어나십시오. 그 왜곡된 가치에서 탈출하십시오. 왜곡된 가치는 돈, 명예, 육의 탐욕, 본능 물질 사랑하는 것 등.
하느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 말씀에 따라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며, 용서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그 자비를 베푸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게 하느님을 멀리하고 그분을 외면하는 우상과 그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내 양심에 그늘진 곳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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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0일 목요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_김완수 페르펙토 신부 집전
https://youtu.be/XJnxx0RDxrQ (30:43)
•2020. 9. 10.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완수 페르펙토 신부 (서울대교구 방학동 본당 보좌) 집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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