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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뛰어내리다
심아진
라합은 집 밖에서 들리는 아비규환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는다. 대기를 가르는 비명소리, 분노와 절망의 욕지거리, 그러나 결코 뉘우침은 없는 저주의 신음들이 라합의 오두막집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린다.
라합이 살리기 원했던 그녀의 가족과 친지들은 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다. 무딘 칼날 때문에 단번에 죽지 못한 이의 눈은 서서히 빠져나가는 피와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리라. 말랑말랑한 머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둔탁한 돌이 혹독하고 무심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가운데, 채 뼈에서 떨어지지 못한 살점이 왈칵왈칵 피를 쏟아내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연주하리라.
인주가 처음 뛰어내리기를 준비한 곳은 지금만큼 높은 곳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바라볼 때 적당히 목 근육에 저항감이 느껴지는 정도의 높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초창기의 인주는 결코 뛰어내릴 때의 완충을 위한 매트리스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잘난 체하려는 젊은이나 세상을 조소하는 듯 보이는 깔끔한 인상의 인간도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부상 없이 뛰어내릴 수 있는, 일견 시시해 보일 수 있는 정도의 높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인주는 매트리스 없이는 계단 한 칸도 그냥 뛰어내리는 법이 없었다. 시작에 불과했던 매트리스는 이제 끝을 향해 가로놓여 있었다.
뛰어내리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인주의 매트리스는 점점 두꺼워졌고 점점 넓어졌다. 인주는 매트리스 없이는 뛰어내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매트리스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인주가 도전하고 있는 그런 높이에서 뛰어내릴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인주가 매트리스 없는 곳에서 산산이 분해되어 버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인주는 이제 인주를 넘어서는 초과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주는 매트리스가 자신의 신체 일부이기라도 한 듯 늘 그것을 옆에 바투 붙여 놓고 있었다. 인주가 뛰어내리기를 결심할 때, 매트리스는 이미 항상, 그 자리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영원히 아직 아닌 것으로서 인주를 기다려 주어야만 하였다. 그것은 인주의 남겨진 시간 속에서 끝까지 인주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다지 무겁게 여겨지지 않았던 인주의 뛰어내리기는 해를 거듭하며 점점 비중 있는 것으로, 고상한 위엄을 가진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인주의 이미지는 광고에 활용되었고 다양한 비유와 교훈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고작해야 곡예적인 성격을 부여할 수 있을 뿐이었던 뛰어내리기는 점차 주술적인 것으로 바뀌어 종교적인 것으로, 나아가 미학적인 것, 정치적인 것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인주의 뛰어내리기는 국내의 각종 크고 작은 행사는 물론, 외국인을 위한 자리에까지 선을 보이게 되었고, 시대의 흐름과 발을 맞추어 국제적인 위상을 획득하게도 되었다.
인주의 뛰어내리기가 유명세를 타자 유사한 다른 뛰어내리기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복제의 복제가 이루어지면서 때로는 진짜 인주가 하지 않은 뛰어내리기까지 모두 인주의 것처럼 와전되기도 하였다.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원본의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주는 자신이라는 원본이 결코 진정한 의미의 원본이 아님을 알기에 괘념치 않았다. 예민하지만 편협하지는 않아서, 인주는 아류 인주의 등장에 결코 분기충천하지도 않았다. 인주의 담담함 때문에 그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인주는 광안대교를 바라볼 수 있는 통유리창의 잠금장치를 푼다. 버튼 하나를 누르자 병풍처럼 유리가 겹쳐지며 문이 열린다. 갑자기 들어온 공기 때문에 76층 높이의 건물이 휘청 한 번, 몸을 꺾는다. 실은 아주 미약한 바람일 뿐인데 막았던 공간을 풀어헤쳐 준 탓이다. 여태 고요하게만 느껴지던 바깥에서 밀물처럼 소리들이 흘러 들어온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방송용 헬리콥터의 소음이 바다를 장막처럼 덮는다. 인주는 막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산 너머를 바라보며 가볍게 심호흡을 한다. 오래 뜸을 들일 필요는 없다. 이미 충분한 시간이 인주를 준비시켜 왔고 기다려 주었기 때문이다. 멀리 뛰기 위해 몇 발자국을 뒤로 내딛는 순간, 대형 화면을 통해 클로즈업된 인주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우웡, 하는 한숨소리가 바다와 하늘을 울린다. 언제나처럼 망설임은 없다. 인주는 주춤거리지 않고 곧장 몸을 날린다. 작은 계단을 뛰어내리듯, 키보다 조금 높은 담장을 뛰어내리듯, 그렇게 쉽게 몸을 던진다. 사람들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한 번 더 내지른 후 일시에 숨을 멈춘다. 이제 인주의 몸은 부산 수영만 매립지 마린 시티의 최고층 건물에서 2미터 남짓 떨어진 공중에 위치해 있다.
이윽고 고요함.
누군가 미동만 하여도 오두막 속의 공기는 기다렸다는 듯 터질 태세다. 정적이 지속되는 동안 라합의 가족과 친지들은 서서히 문 밖의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라합의 집에 가보자는 권유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친지의 또 다른 가족들……. 오지 않은 사람들은 실은 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꼬마 때부터 봐온 라합에게 화대를 주고 몸을 샀거나 돌을 던진 자들이었다.
라합의 집에 온 일부 친척들은 라합을 비난하기는 하였지만 긴히 의논할 것이 있다는 라합의 초대에 응하지 못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창녀 라합이 이제 겨우 자신들의 아이들의 나이보다 조금 많을 뿐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그러한 수치심은 자신들을 향해야만 할 것이지만 그들은 오만과 지혜를 총동원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라합의 집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라합이 아닌 자신들이 치욕스럽고 부끄럽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세계의 모든 궁극적 패자들처럼 있지도 않은 명분을 억지로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었다.
오두막 밖의 고요로 인해, 그들은 이제 구체적인 처참함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어제 함께 빵을 나누었던 누군가, 며칠 전 성벽 수리를 같이 했던 누군가, 그리고 또 언제인가 새로 만든 옷을 입고 뽐내기도 했던 누군가가 저기 오두막 밖에 쓰러져 있다.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을 위에 저장한 채로, 바로 오늘 아침 정성스레 머리를 감고 연인을 기다리던 채로, 그렇게 일상이 이어지던 지점에서 갑자기 중지를 당한 사람들이 마지막 신음을 토해 내고 있다.
채 가슴이 솟지 않은 인주가 뛰어내리기를 위해 처음 올랐던 곳은 시골 할머니의 집 담장이었다. 인주는 할아버지도 계신데 어른들이 왜 모두 할머니 집이라고 얘기하는지 의아해하며 흙이 많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비질 자국이 선명한 황토마당은 단정하고 품위 있어 보였다. 하늘이 너무 파랬다. 도도한 주황빛 감들이 인주를 곁눈질하는 사이, 인주는 야아, 외치며 뛰어내렸다. 예상치 않게 무릎이 까지고 의도하지 않았던 비명이 터져 나오자, 방에 있던 어른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인주의 어머니는 상처를 소독하면서 인주를 때리다, 울다 했다. 어쩌면 할머니 집에 오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어머니는 그날로 인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주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인주가 두 번째로 뛰어내린 곳은 고등학교 건물의 2층이었다. 얼굴도 네모지고, 몸도 네모져서 아,네모네라 불리는 수학 선생의 시간이었다. 백설기처럼 두툼하고 땅딸한 선생이 산술평균, 기하평균에 대한 설명을 막 마친 참이었다. 한 송이 눈이 인주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친구들 중 누구도 아직 눈이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인주는 코시-슈바르츠의 부등식을 설명하기 위해 선생이 칠판을 향해 돌아선 사이 조용히 창문으로 걸어갔다. 첫 번째 눈송이가 땅에 닿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인주도 땅에 닿았다. 아이들이 창문으로 몰려와 비명을 질렀지만 인주는 솜털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인주는 친구들이 눈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것인지 자신을 보고 그러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왜 그랬느냐는 담임의 질타에 인주는 부등식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눈이 와서요. 인주는 증오에 찬 선생의 시선을 외면하였다.
인주는 점점 자주 뛰어내리게 되었다. 고양이를 잡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올라간 김에 뛰어내리기도 했고, 건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외로워 보이는 가로등 위에서, 차가운 청동상 위에서, 그리고 철거되기 직전인 아파트의 낡은 베란다에서 인주는 뛰어내리기를 시도했다. 인주는 ‘뛰어내리는 자’가 되었다.
바닷가치고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바람이 없다. 물론 최대한 그런 날을 선택한 탓이기도 하다. 인주는 몸의 힘을 뺀다. 건물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너무 가까이 붙지도 않은 채 낙하하고 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 우연히 부는 강한 바람은 그야말로 우연으로서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주가 쓰고 있는 커다란 헬멧은 충격완충용 특수복을 입은 인주의 몸을 마치 성냥개비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한다. 하지만 헬멧은 사실상 그다지 쓸모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용과 상관없는 형식으로서, 인주가 아닌 인주를 보는 사람들을 위한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정 거리 이상 접근이 금지된 헬기에서 기자들이 안달을 하며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촬영하고 있다. 그들은 최대한 성능이 좋은 카메라로 인주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착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헬멧에 가려 인주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고, 검은 성냥개비 같은 몸이 곧게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인주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와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뛰어내리기 전부터 내내 바라보고 있던 대교라 시야가 흐려진 지금도 기다란 다리만은 눈에 선명하다. 아직 다리가 놓이지 않았던 시절, 인주는 망망히 펼쳐진 바다를 보며 코를 훌쩍이곤 했었다. 그때는 그랬다. 무한으로 가득 찬 바다 앞에서 인주는 늘 충만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은 언제나 코를 맹맹하게 만들었다. 지금 바라보는 바다는 광안대교 때문에 전혀 그때의 바다와 닮지 않았다. 가득 차 있다기보다는 비어 보이고, 충만하다기보다는 외로워 보인다. 단지 낙조로 인해 눈이 부신 탓이라고, 인주는 그렇게만 생각한다. 아무것도 발에 닿지 않는 쾌적한 공포감으로 인해 인주는 이내 하얗게 질린다. 하지만 그 공포가 언제나 자신을 지탱해 온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라합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이스라엘의 신이 한 일들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라합은 저항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살리고 싶었지만, 그들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녀인 라합의 말에 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비루함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결코 라합의 집에 오지 않았다. 라합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서 그들의 기습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라합은 동족으로부터 버려진 자였다. 정탐꾼들은 필요에 의해 라합을 택하였으나 선의로 그렇게 하는 척 생색을 냈다. 하지만 영리한 라합은 괘념치 않았다. 그들의 이마에 드러난 모멸감은 라합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내용일 뿐이었다. 라합에게 중요한 것은 내용을 초월하는 형식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거보다 인주의 뛰어내리기에 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통제되거나 통제되지 않은 언론 모두가 연일 인주의 낙하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그간 인주가 뛰어내리기로 예정되어 있는 빌딩 주변의 상가 시세가 급등하였고, 성공 여부를 놓고 조직적인 도박을 이끈 일당이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몇 년 전 인주의 뛰어내리기가 주었던 추억에 사로잡혀 설레는 가슴을 안고 오후를 기다렸다. 꽤 긴 시간의 휴지 이후에 있는 뛰어내리기라, 기대감이 장막처럼 나라 전체를 에워쌌다.
정작 대통령 선거에는 별다른 관심이 모아지지 않았지만 대통령 후보들도 그런 것에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인주가 그 어떤 홍보 행사에도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쉽기는 하였지만, 모든 후보에게 공평하게 그러하였으므로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 골몰하였다.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유리하게 접목시킬 수만 있다면 선거는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모두 건물 가까이에서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될 건설사 사장 역시 비서진들과 함께 인주의 낙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장은 경쟁적 관계에 있는 다른 건설사에 비해 분양률이 떨어지는 아파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오던 터였다. 인주가 회사의 제안을 수락해 준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인주가 아무 제안이나 덥석 수용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소문 때문에 사장은 더욱 의기양양해 있었다. 경영진은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위해 초호화판 슈퍼 펜트하우스의 개조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자랑하고 싶었던 투명 욕조와 거창한 와인 바 등을 기꺼이 치우고, 인주가 요구하는 심플한 공간을 만들었다.
인주를 구경하는 모든 사람은 긴장하고 기대하며 뛰어내리는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인주의 작은 동작 하나, 의미 없는 숨소리 하나까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인주를, 인주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쉴 날 없는 로마의 사제였던 플라멘 디알리스는 직무를 나타내는 모자 없이 외출할 수 없었고, 담쟁이덩굴이나 콩을 만지지 못하였으며, 날고기와 누룩이 섞인 밀가루를 먹는 것도 삼가야만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염원을 대행하는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규칙에 의해 통제된 삶과 화장실을 쓰는 것에까지 의미가 부여되는 생활을 견디는 사제에 대해, 사람들은 결코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옷가지에 있는 매듭 하나, 단추 하나에 대해서 세밀한 주의를 기울일 뿐이었다. 사제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대가로 영원히 유배되어 ‘거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였다. 인주 역시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뛰어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들은 플라멘 디알리스의 고뇌 따위에 결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인주가 신념이 없는 상태에서 신념이 있는 사람처럼 산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결코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주는 이제 76층 높이의 주상복합 건물 꼭대기로부터 스무 층쯤 내려와 있다. 뛰어내리는 자의 몸은 지는 해의 기다란 빛과 건물의 반사 유리로 인한 빛 사이에서 또 하나의 해처럼 불타오르고 있다. 인주는 자신의 내장이 죄다 쏟아져 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껍데기만 남은 가볍고 질긴 몸의 유영. 이율배반적인 위안과 여전히 서투른 흥분 사이에서, 인주는 입을 앙다물고 있다. 손가락 하나라도 꺾여서는 안 된다. 지구의 중심이 기를 쓰고 끌어당기는 힘과 싸우는 시간은 채 1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주는 그 짧은 시간이 철저히 작은 단위로 분해되어 피부를 찌르고 심장을 죄면서 인주의 삶을 길게 늘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주는 파편화되어 시간의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인주를 보기 위해 근처 빌딩에 빼곡히 몰려든 사람들이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보다 더 많은 얼굴들이, 뛰어내리는 중간 곳곳에서 위협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도로에서, 다리에서, 자동차에서, 배 위에서 핏발 선 눈들이 인주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너나없이 열망이 가득한 얼굴이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척’해 주기를 바라는, 혹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고 있는 ‘척’해 주기를 바라는 열렬한 시선들이 인주를 향해 웃는다. 정작 인주는 지는 해의 붉은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데다 낙하하는 속도 때문에 아무것도 뚜렷이 볼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어도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주는 알고 있다.
인주는 며칠 전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인주를 떠올린다. 그 인주는 약하고 무능한 것임에 틀림없을 터인데, 이상하리만치 단단하게 웃고 있다. 인주는 보지 않아도 그 미소를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인주는 징조를 찾아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라합이 부모의 강요와 회유에 못 이겨 창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을 때 친척들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라합을 동정하지 않았다. 라합은 늑대처럼 심오한 회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 남정네들은 라합을 먼저 안을수록 자신이 더 순수해질 수 있기라도 한 듯 다투어 욕정을 채웠으며 여인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라합의 부모는 라합이 편히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친척 집으로 가고서는, 보는 눈을 의식해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들은 차라리 자신의 살이라도 갈아서 아이들을 먹였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울었다. 그녀의 부모는 가릴 수도 없는 자신들의 죄를 가려 보겠다고 오히려 라합을 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조금이나마 미안해했던 처음의 순간을 빠른 속도로 잊어버렸고, 라합이 벌어오는 돈을 당연하다는 듯 챙겨 넣었다. 하지만 라합은 부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난리가 일어나기 전 갖은 핑계로 부모를 불러들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것은 부모를 위한 일이 아니라 라합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 한 일이었다. 라합은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그리하여 라합은 창녀의 몸이었으나 더 이상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 시간 속에 던져졌다. 그녀가 한 배신은 신의 민족을 구원하였으며 또 다른 중요한 역사의 잉여물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라합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여리고 사람들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라합의 집임을 표시했던 붉은 줄은 영원한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인주’라는 한국 이름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인주의 뛰어내리기가 원래부터 그러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믿기에 이르렀다. 만만하게 올라갈 수 있는 시골 담장에서 뛰어내린 처음이 인주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적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믿고 싶은 것만을 믿었다.
― 그 뛰어내리기 봤어?
― 응, 텔레비전으로 봤어.
― 그건 본 게 아니야.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번에는 정말 꼭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 올림픽대로가 그대로 주차장이 되었어. 정말 순간이었지. 내 생애 그렇게 장엄한 광경은 처음이었어.
사람들은 인주의 뛰어내리기를 직접 보는 것에 대해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다. 뛰어내리는 바로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하는 것의 가치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도 매체를 통해서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통한 ‘간접 목격’은 스스로가 쓸모없고 한심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건물이든 멀리 떨어진 건물이든, 산에서든 바다에서든 인주를 직접 본다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로 평가되었다. 사람들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주의 몸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것을 육안으로 보고, 이후에 매체를 통해 클로즈업된 장면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을 선호하였다. 뛰어내리기가 있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었으며 어떻게 보았는지 혹은 보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만큼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뛰어내리기를 본 사람들은 모두 평생에 잊지 못할 감동을 받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인주는 자신의 뛰어내리기가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이루어져야만 그 주목성을 놓치지 않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가장 적절한 때, 가장 화려한 순간에 인주의 뛰어내리기가 있었다.
몇 년 전 63빌딩에서 뛰어내린 것을 끝으로 사람들은 이제 인주가 그 정점을 찍었으며 은퇴를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인주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도곡동에서, 목동에서, 송도에서, 인주는 다시 뛰어내렸고, 사람들은 여전히 숨을 죽이며 환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인주는 부산의 최고 전망이라는 수영만 마린 시티에서 뛰어내리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가뭄을 몰고 온다는 빨간 태양이 수평선에 바투 붙어 있다. 일몰의 완벽한 조명 속에서 인주는 이제 건물의 가운데쯤을 통과하고 있다.
― 사랑해!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목청껏 그렇게 외친다. 인주가 뛰어내리는 아파트와 가까운 다른 아파트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잠시 침묵했던 사람들이 요란스레 입을 연다. 인주의 뛰어내리기가 끝나기 전에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얘기해야만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말들을 쏟아낸다. 누군가는 외치다가 목이 쉴 것이고 누군가는 부르짖다가 기절하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의 열정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결코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주를 향해 절규한다. 뛰어내리는 자에게 투사된 것들은 오로지 뛰어내리는 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인주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사랑이라는 말을 비웃고, 그 밖에 알아들을 수 없는 모든 말을 비웃는다. 남발된 단어와 해체된 이미지가 부산 앞바다 상공을 떠돈다. 인주는 의미를 조합해 보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곧게 낙하하고 있다. 갈 곳 없는 단어들은 영원히 허공을 떠돌 것이다.
인주는 자신에게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카라바조의 명화를 떠올린다. 목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의 그림인데, 골리앗의 얼굴은 화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다. 고뇌에 찬 얼굴이 극심한 명암대비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키아로스쿠로, 선명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잘린 두상에서 떨어져 나온 여러 개의 코와 눈과 입들이 뚜렷한 명암을 만들며 소리 지르고 있다. 태초부터 유영하고 있었을 그 진부한 조각들이 각자의 끝을 향해 아우성을 치는 통에, 인주는 귀가 먹먹하다.
잠깐 사이, 다시 대여섯 층을 더 낙하한 인주는 실눈을 뜨고 바다 너머를 바라본다. 구름 비슷한 것, 산 비슷한 것, 생명 비슷한 것들이 인주의 눈을 아프게 찌른다. 눈물이 흐른다. 이름이 같은 인주 때문일 것이다. 인주를 꼭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서서 찾아왔다는 그 인주는 기억도 까마득한 옛날,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라며 인주를 떠났던 사람이다. 인주는 이름이 같은 인주를 다시 만난 것 자체가 정말, 징후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린 라합은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을 돌보느라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없었다. 동생들을 겨우 따돌리고 나갔다 온 날에 라합은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았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매 맞을 각오를 하고 나온 라합을 친구들이 밀어내었다. 작은 폭군들은 성내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라합의 부모님을 들먹이며 그녀를 무리에 끼워 주지 않았다. 라합은 여리고성 내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지는 해로부터 떨어진 붉은 살들이 등을 찔러댔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녀 라합은 만만해 보이는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다. 나무는 지나치게 높지도 시시하게 낮지도 않은, 딱 마음에 드는 키를 유지하고 있다. 라합은 까끌까끌한 무화과 잎이 맨살을 아리게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그녀는 아직 충분히 익지 않은 무화과 하나를 따 억지로 반을 가른다. 빨갛지도 않은 속살을 맛있다는 듯 베어 문다. 거의 아무 맛도 나지 않는데 라합은 마치 엄청 달콤하고 부드럽다는 듯, 야아, 감탄사를 내뱉는다. 라합은 무화과에서 흘러내린 하얀 진액이 온몸에 떨어지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과일을 딴다. 먹는 둥 마는 둥 입만 대고 버리고, 다시 과일을 딴다. 입술이 퉁퉁 붓고 손이며 피부가 따끔거릴 때까지 라합은 오래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라합은 익지 않은 무화과를 먹으며,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을 맛본다.
어느 날 라합은 무화과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노는 다른 친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국적인 얼굴을 한 아이도 있었고, 피부색이 지나치게 검거나 흰 아이도 있었다. 몇 번인가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동양의 아이가 라합 바로 옆에 있었다. 라합은 인주라는 이름의 그 아이와 즐겁게 뛰어내렸다.
― 뛰어내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 불길한 생각이요.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공기 중으로 흩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요.
아주 오래전 인주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였다. 기자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인주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긍정적인 생각을 일부러 퍼 안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때의 인주는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끝과 절망을 밀어내지 않았으며, 그저 자유롭게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기는 언제나 전부를 걸고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어설픈 희망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인주가 그렇게 자유롭게 뛰어내리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다. 사람들 역시 ‘자유롭게’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하지만 인주 자신은 알고 있다. 매트리스를 놓고 뛰어내리기 시작하면서 인주의 뛰어내리기는 더 이상 순수하게 불길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혹은 모른 척해도, 인주 자신은 모를 수가 없었다. 인주는 스스로가 결코 완벽하게 절망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름이 같은 인주는 멋있고 곱게 나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름이 같은 인주는 예전의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지 않은 채 인주를 거의 경멸한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 매트리스를 치우고 뛰어내려.
이름이 같은 인주는 자신이 한때 인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이런 말이나마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인주는 그 말이, 인주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사랑함으로써 더 이상 인주를 사랑할 수만은 없노라며 떠나갔던 사람이 하기에는 다소 뻔뻔한 말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주는 이름이 같은 인주를 완전히 이해했던 시기를 조금이라도 떠올려 보기 위해 노력했고, 떠올리는 것만으로 다시 충만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인주가 아름다운 시절, 보물이 있는 상태에서 보물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던 시절을 상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의 뛰어내리기가 그러했던가? 나약하고 자주 아프며, 배신을 즐겨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뛰어내렸던 순간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언제 올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미래에 대해 초연한 적이 있었던가?
너무 아득했다. 마치 손이 닿지 않는 몸의 어딘가에 간지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불편함이 계속되고 근질근질한 느낌이 신경을 거스르지만 결코 손이 닿지 않는 어떤 곳, 천수를 가진 힌두교의 신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어떤 부위가 인주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인주는 그곳을 피가 나도록 긁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졌다. 이름이 같은 인주는 갑자기 나타나서 던지고 떠나기에는 과히 적절하지 않은 말 한 마디를 남겨 놓고 떠났다.
― 도망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코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미로에 숨지는 않아. 너는 결국 네 손에 죽기 위해 적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을 뿐이야.
누구나 무언가를 위해 뛰어내릴 수 있다. 자기 자신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오직 열정의 대상만 좇아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인주도 그렇게 출발했고, 이름이 같은 인주 또한 그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였다. 치졸하지 않은 사랑을 위해, 양지와 음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정의를 위해, 왜곡되어야만 하는 평화를 위해, 또는 사마귀나 딸기를 위해, 비통이나 모반을 위해…….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뛰어내리기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내용의 가장 깊은 곳이 변형되면서 형식에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형식의 변화를 단지 형식의 변화라고만 느꼈지만, 인주는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본질의 변화와 닿아 있다는 것을.
인주는 이름이 같은 인주가 떠난 후 아주 조금 울었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하지만 기회의 시간을 떠올리지 못한 채 연대기적 시간 안에서만 우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주상복합 아파트의 상가 간판이 보인다. 소인지 조인지 글자가 흐려서 보이지 않지만, 초록의 형광 빛인 것은 알겠다. 지면이 가까워져 가도 붉은 태양은 인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일점일획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인주를 따라 흐른다. 인주는 그간 자신이 뛰어내렸던 이러저러한 높이의 건물들을 떠올린다. 공간과 시간을 정지시킨 채 무한으로 떨어져 내렸던 순간들이다. 그것들은 인주에게, 이미 항상 완성된 것으로 들어와 있었지만 동시에 아직 아닌, 너무나 요원한 시간들이기도 하였다. 인주는 완성과 미완성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틈의 틈으로, 경계의 경계로 격리당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미 항상, 아직 아닌 시간들이 인주를 비틀어 쥐어짜기 시작했다. 마치 물기 많은 걸레처럼 인주는 허리가 꼬이고 손이 말리고 발이 꺾였다. 인주는 낙하하고 있는 어느 지점에서 튕겨져 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진실로 그러기를 바랐다. 뛰어내리기를 통해 더 이상 시간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아, 인주는 지금까지 그렇게 수도 없이 뛰어내린 것인지 몰랐다. 인주는 언제부터인가 완고한 시간을 상대하는 것에 지쳐 있었다. 한때 의미로 가득했던 남겨진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축복이 되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간이 부지불식간 사라져 버렸다. 도도한 미래만이 끊임없이 현재를 침식하는 가운데 인주는 어설픈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인주는 양팔로 세게 몸을 끌어안고 착지를 준비한다. 작게 보이던 매트리스는 언제나처럼 갑자기 커져 있다. 이제 정말, 몇 초 남지 않았다.
라합은 이리저리 돌려 가며 말하는 부모의 부탁을 끝내 거부할 수도 있었다. 아직 자신은 어리다고,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항변할 수도 있었다. 부모에게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지 따지고 물으며 죽음으로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합은 그렇게 하는 대신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설익은 무화과를 따 먹었다. 아린 맛이 나는 무화과에서는 뽀얀 즙이 한없이 흘렀다. 나무 위에서 보는 세상의 경계는 끝이 없었다. 성벽 밖으로 무한히 이어진 사막과 암석들을 보면서 라합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결코 전부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열매 속에 꽃을 품은 무화과처럼 라합은 결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소중한 것을 품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즐겁게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기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라합은 성 안 곳곳에 올라갔다 뛰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친구네 집 담장에서, 아직 보수 공사를 마치지 못한 성벽 위에서, 또 나무 위에서 라합은 뛰어내리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착지하는 순간 날리는 수북한 먼지를 가리개 삼아, 라합은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잘 아는 친척을 손님으로 받거나 친구의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쯤은 울 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 뛰며 좋아했던 동네 청년이 아무렇지 않게 라합의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라합은 제 입술을 세게 물었다. 청년은 하얗게 질린 라합의 얼굴에도 피가 나는 입술에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라합은 그렇게 얇게 와해되고 무뎌지면서 단단해져 갔다.
그랬던 때가 있기는 했다. 자신이 위하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딸이든지 원수이든지, 오래 굶은 자이든지 폐쇄된 자이든지,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인주는 스스로의 이름을 잊었다.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도 모두 잊었으며 스스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철저히 기각시켜 버리는 절명의 부름 앞에서 인주는 결코 인주 자신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서 있었다. 그랬던 때가 분명, 분명히 있었다. 완벽한 어떤 것이 자신을 종일토록 휘어잡고 있는 상태 속에서 인주는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주가 관통했던 그러한 시간들은 원래부터 경계가 없는 곳에 있어서 휩쓸리기 쉬운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동정이나 관용, 인내와 경륜 등의 이물질과 구분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섞여서 원래의 것이 희석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이었다. 인주는 두 개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다른 무언가가 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이쪽저쪽에 아리송하게 오염된 채 이도 저도 아닌 꼴로 있게 되었다. 과거는 더 이상 인주의 현재에 응축하여 녹아 있지 못했다. 인주는 금방이라도 먼지처럼 날아 없어질 스스로의 시간이 두려워 어리석은 경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매트리스가 두려움의 징표처럼 인주를 기다리게 되었다.
뛰어내리기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뛰어내리면서 얻은 격려와 칭찬이 두려워 인주는 매트리스를 옮겨 가며 뛰어내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인주는 아무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매트리스를 옮겨 가며 뛰어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뛰어내리는 것도, 매트리스도 당연한 것이라고만 여기게 되었다. 당위에 대한 것은 점차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아니, 잊은 척하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서서히 단계를 올려 가며 연습해 온 인주에게는 사실 그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인주는 아찔한 순간이 별반 위태롭게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 순간을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껍데기 속의 알맹이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멀리서 손수건만 하게 보였던 매트리스가 거대하게 다가와 있다. 웬만한 외제 차 한 대 값이라는 그것은 우주선에나 사용된다는 충격 흡수용 소재를 썼다고 한다. 매트리스의 네모난 경계, 인주는 그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인 것에 완벽하게 속해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이 아닌 것에도 온전히 속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이름이 같은 인주는 아마 두 영역 모두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어떤 ‘틈의 틈’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주를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주는 자신이 ‘자신을 버린, 이름이 같은 그 인주’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인주는 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자신이 말할 수 없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주는 투덕투덕 제 길을 만들며 올라오는 주체적인 절망감에 심하게 동요한다. 인주는 해독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주를 저주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다. 매트리스를 치우면 이름이 같은 인주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결코 매트리스를 치우지는 않을 것이다. 매트리스는 이제 정말 코앞이다.
여리고가 이스라엘에게 넘어간 후 라합이 살렸던 라합의 부모는 마치 목숨을 건지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없이 치욕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하고, 그것이 모두 라합 탓이라는 듯이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녀 덕분에 죽음을 면한 친지들도 라합을 경원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끝내 라합의 집으로 오기를 거부하다 죽어간 가족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분노의 마음을 라합에게로 돌렸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라합의 도움을 칭찬하는 소수의 사람들 뒤로 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녀의 배신을 비난하였다. 동족을 버린 여자, 못난 여리고 사람들 중 가장 저속하고 더러운 여자라는 험담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라합은 이미 강해져 있었다. 그녀는 구부정하게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고, 내리깔았던 시선을 당당히 들어 올린 채 마을을 활보했다. 그녀는 틈의 틈에 홀로 남는 쪽을 택했기에 주변의 시선을 달게 받았다. ‘이미 항상’ 도래하여 있으나 ‘아직 아닌’ 시간 속에 현재로 머무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변증법적 지양의 시간을 잘 견뎌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라합은 부정을 뛰어넘는, 부정 속 긍정의 힘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라합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라합은 가끔 무화과나무나 허물어진 성벽 위로 올라가 가뿐히 뛰어내렸는데, 더 이상 먼지 구름에 얼굴을 가리고 울지 않았다.
어느 날 또 다른 남겨진 자 살몬이 강하고 아름다운 이방의 여인 라합을 아내로 맞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그리하여 창녀였던 라합은 신의 가계도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주의 몸은 뒤섞여버리기로 모의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품은 듯한 매트리스 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간다. 사람들은 인주가 제 목을 잘라내고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이기라도 한 듯 감동의 함성을 질러댄다. 목을 자르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목 잘린 그림을 그리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어마어마한 차이는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자신들이 뛰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하게, 열광적으로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인주는 끝내, 제 얼굴에 동족의 피를 흩뿌림으로써 영속성을 획득한 라합이 되지 못한다. 인주는 결코 영원한 시간 속에 남겨진 용감한 창녀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인주가 향하는 곳은 궁극의 끝이 아니라 단지 구질구질한 매트리스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주는 빛 뒤에서 어둠을 핥고, 남겨진 시간 앞에서 천박하게 가슴을 드러낸 시시한 창녀처럼 거대한 동반자를 향해 떨어졌을 뿐이다.
인주는 분명 제대로 매트리스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극심한 통증이 등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손이 닿지 않아 근질거리던 부위의 불쾌감은 사라졌지만, 난생처음 진정한 공포감을 맛본다. 목이 부러진 것 같기도 하고 등뼈 어디쯤이 꺾인 것 같기도 하다. 일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짧은 순간에 일어나고 만다. 그런데 인주는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생 전체를 떠올린다. 지난했고, 불편했고, 무엇보다 지리멸렬했다.
***
병실에 누워 있는 인주에게 수많은 편지와 꽃이 배달되어 온다. 당분간은 진심을 담아 인주의 자리를 지켜줄 간병인이 지치지도 않고 편지의 내용을 읽어 준다.
당신을 통해 저는 영원히 날 수 있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일어나 또 한 번 뛰어내려야 합니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남겨진 영원한 시간을 우리가 함께할 것입니다.
파이팅, 싸우고, 파이팅, 힘내셔요!
인주는 귀를 막는 사소한 동작도 할 수 없는 팔, ‘그만’이라는 간단한 단어도 발음할 수 없는 입, 영원한 침묵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몸을 저주하며 꼼짝 않고 누워 있다.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이 저속카메라 속 대상들처럼 비현실적으로 움직인다. 인주는 미약한 반응도 할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지각하고 있다. 인주에게는 이제 새로운 것이 도래하였다. 이미 와 있는 죽음 앞에서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새로운 새로움이다.
인주는 자신의 또 다른 뛰어내리기가 시작되었음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해를 향해 뛰어내리던 멋있는 낙하는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주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중지의 동작’ 속에서 함축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떠올리려고 그렇게도 노력했으나 결코 떠올릴 수 없었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아른거린다. 어쩌면 아무런 제스처도 없고, 매트리스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은, 그저 순백일 뿐인 뛰어내리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인주는 기대한다.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시작해 완벽한 것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주에게서 완전히 소외당한 상태로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른다. 그 눈물은 결코 인주의 남겨진 시간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인주의 의지와 상관없는, 그저 한 방울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인주는 남겨진 시간 속에 간단없이 존재하고, 또한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이미 항상, 아직 아닌, 또 다른 기회의 시간 속에서 인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순수한 뛰어내리기를 예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으고 응축하고 관통하는 시간 후에, 인주는 어쩌면 사람들이 이제껏 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뛰어내리기를 다시 한 번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봄날의 아련함이 스며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