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본당 성모송1,000송이를 바치는 성령기도회가 있는 날,
토요일 의정부교구청 황사영알렉시오성인묘 소를 순례하고, 남종삼 요한 성인묘를 순례코자 지도를 검색하여 무려2.5km 를 찾아 찾아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슨 뜻을 가지셨을까요.
산의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묘소....안내도 없이 의정부성당 리본 하나 달랑 달려있지 않았겠 는가요.!?&
이미 다리는 풀려 내려갈 수 없는 상태,
간신히 묘소 한기를 발견했지요.
어쩌면 좋아요.
성지로 지정된 묘지는 단순히 아무 것도 새겨 놓지도 않은 한기의 묘소.
이길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름없는 무명인의 묘소. 주인께서는 선친 묘소인데 "내이름을 새기지 말라" 상석하나 달랑놓고 이름도 그 무엇도 남기지 않고 자연 흙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아들, 쌍둥이 자매의 부부를 만나게 하시곤. 집으로 귀가 한다 했건만 나를
이 부부들은 어느새 남종삼 요한 성인 묘소에 내려놓고는 오던 길을 되돌아 멀찍이 멀어지고 있지않겠습니까?
햋살은 어느듯 뉘엇 뉘엇 석양에 걸려 있었고
서둘러 남종삼 성인 묘소를 찾아 또다시 꼭대기를 향해 걸을 수밖에.....
참배후 내려오는데 부서지기 시작한 마사토 (왕모래)가 발을 밀어 넘어뜨리려 하지않는가.
간신히 몸을 가누며 넘어짐은 면할 수 있었다.
손잡아 주시는 주님께 다시 감사를 드리며
내닷기 시작하였다. 한발 한발 내딛으며
십자가의 길을 서두러 담고 내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도장을 받으려 송추성당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온 몸은 나른하다. 시골길들은 찾는 이들은 관심이 없나보다.
내만 알아보면 되니까.(분명 성당표지는 있는데 방향은 없다)
의정부교구성지순례를 끝내지는 못했지만
이름조차 남기기를 거부하신 분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냈을까? 아직도 내 머리를 맴돌고 떠나지를 않는구나.
그길로 버스타고 본당에 도착 특전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월요일 묵주기도 성모송1000 송이 기도하며 졸며 기도회 시간이 끝났다.
우하하 성지순례단 축복장을 받고 제작한 순례 CD를 선물로 받는 기적을 체험토록 주님께서 예비하셨으니
이번 성지순례는 주님, 예비하신 성지순례로
기적의 성지순례2라 명합니다.
아멘. (기적의 성지순례1...57년만의 만남 대전중학교1학년5반 같은반 친구 송평순 조우...2012년부터50여성지순례를 했다는군요)
이 모든 것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아멘
조세연Thomas
goodnews 에서
황사영묘소성지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습니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어렵게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묘를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토시)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면서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는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박해 상황을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은 붓으로 명주 천에 적었는데,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가 발각되어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성 남종삼묘소
남상교, 성 남종삼, 남규희 3대 순교자들의 안식처
소속교구 의정부교구
주 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의령 남씨 가족묘)
전화번호 (031)836-1980
홈페이지
http://www.ujbhome.or.kr
[사진/그림] [자료실]
성지소개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습니다. 남종삼은 103위 한국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부친 남상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천주교 교리를 알고 입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승지까지 오른 남종삼은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관리들의 시기와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이 양립할 수 없자 관리직을 내놓고 부친이 은거하던 묘재로 내려갔습니다.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었고, 당시 수시로 러시아가 침범해 통상을 요구하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묘재로 가서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듣고,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성사를 받은 후 한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습니다. 의금부로 압송된 남종삼은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습니다. 2004년 12월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인 묘역을 성역화하기 위해 묘역 안내 표지석을 설치했고, 2010년 의정부교구는 성인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본받기 위한 ‘순교자의 길’ 순례길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성인묘소앞 북한산 (송추방향)
우하하 성지순례 완주CD (축복장 )
기적의 성지순례1 (중1같은반 송평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