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화해길(2)
모충사(慕忠祠)와 김만덕 기념관
1977년 제주도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세운 사당이다.
조선 후기 흉년으로 도탄에 빠진 제주도민을 구휼한 의인 김만덕과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열사들의 충성스런 마음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모충사'라고 이름하였다.
김만덕의 옛무덤 옆에 있던 묵은 비석, 동자석, 망주석,상석등 의 석물,
추사 김정희가 유배왔다가 김만덕의 이야기를 듣고 써주었다는
'은광연세'라는 글씨를 새긴 석각, 김만덕기념관 등을 만날 수 있다.
은광연세!(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이 글은 1840년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가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김만덕의 양손 김종주에게 전한 것이다.
1960년경 김만덕의 묘소 위치에 공장시설이 들어서자
1977년 1월 3일 모충사로 이묘한 것이다.
김만덕 기념관
기녀 출신의 김만덕은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기녀에서 거상으로 다시 자선사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김만덕을 기리는 기념관이 2015년에 개관하였다.
극심한 흉년에 전 재산을 내 놓아 백성들을 구한
자선사업가 김만덕의 봉사 정신과 나눔의 삶을 되새겨 본다.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조 때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사재를 털어 구휼한 것으로 유명해진
거상 김만덕은 중개상인의 딸로 태어났는데,
열 살 무렵 고아가 되었고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기생집에 의탁되어 기녀가 되었으나, 철이 들면서 당시 기녀가
천시 받는 계층임을 깨닫고 제주 목사에게 탄원하여 양인으로 환원되었다.
김만덕은 그녀의 이름, 만덕처럼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양인이 된 김만덕은 상업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그는 자기가 잘 되는 것은 모두 하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래서 풍년에는 흉년을 대비해 절약하며 살았고,
편안할 때는 궁핍함에 고생하는 이웃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며,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이며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여성과 기녀 그리고 지방의 섬이라는 한계를 이겨내고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다.
산지천(山地川)
산지천(山地川)은 제주시 건입동과 일도1동을 흐르는 하천이다.
제주 시내 번화가를 통과한다
산지천은 삼의악과 관음사 인근에서 발원 산지포구까지 10여 Km에 이르며
상류구간은 전형적인 제주하천의 형태인 건천이나
하류에 이르러 가라쿳물, 산지물, 지장샘 등의 용출수가 풍부하여
식수로도 사용되었으며 멱을 감거나 빨래를 하는 등 이 지역 주민에게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였지만 잦은 홍수로 냇물이 범람하여
많은 피해를 안겨준 하천이기도 하였다.
칠성로
제주 상권의 원조
제주 상권의 원조지로 제주의 명동이라 불리던 곳
예부터 '칠성단'이 있다하여 칠성골로 불렸다.
관덕정 앞에서 시작, 산지천 광제교까지 이어지는 거리는 패션거리(사진)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제주목관아는 조선시대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서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관아시설이다.
동헌과 내아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제주목관아지로 밝혀진 중요한 유적이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화공畫工 김남길金南吉의 손을 빌려
재임 기간 중에 있었던 중요한 순간들을 그린 화첩이다.
제주의 풍경, 지리, 국방, 풍속 등 300여 년 전 제주 사회의 생생한 모습이 담겨 있어
그간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우련당과 연못
이 우련당 앞에 연못이 하나있는데
1526년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안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하여 연꽃을 심은뒤
그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는데 제주사람들이 남을 미워할 때 빗대어 말하는
"양대수 개구리미워 하듯 한다"라는 제주의 속담이 유래되었다 한다.
'배비장전'은 배비장과 애랑의 사랑얘기를 옮긴 판소리로써
당시의 제주 기생 애랑은 인물이 여러 모로 빼어난데비해,
배비장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金卿)을 따라온 평범한 인물로서
애랑이의 미모에 반해 구애를 하는 배비장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이때의 배비장은 아마도 이곳 제주목관아 우련당에서 만나 사랑하지는 안했을까?
낭쉐
나무로 만들 소로 탐라국입춘굿의 상징물이라고 합니다.
과거 탐라국 시대부터 입춘을 맞이하면 나무로 만든 소의 쟁기를 잡고
밭갈이하는 의례를 통해서 한해의 풍년과 도민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유래합니다.
이것을 춘경, 또는 입춘춘경이라고 합니다.
망경루
북두성에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을 기리는 신지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 명종 11년에 김수문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 이인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 박종주 목사가 중수하였다.
관덕정은 본래 조선 초 세종 때 목사 신숙청이
군사들의 연무장에 세운 정자였고 관덕정 편액은 안평대군의 필치이다.
신축교안 당시 이곳에서 수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
향사당
신성여학교터
향사당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처음에는 '留鄕所(유향소)'로서의 기능을 하였으나, 성종6년(1475)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鄕射堂)'이라 개칭하였다.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鄕中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고 鄕射讀法을 하며,
鄕案을 보관하고 三鄕任(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 근무하던 청사이다.
이곳에서 고을의 한량(閑良)들이 춘추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주향(酒饗)을 베풀며
그 동안의 닦은 기량을 겨루고,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였다.
1909년 프랑스 출신의 구마슬(具瑪瑟, 라크루 (Lacrouts, Marcel) 신부가
이곳에 4년제 초등과정 학교인 '제주사립신성여학교'를 세웠다.
초대 교장은 김아나다시아 수녀였으며 교사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초빙한 한국인 수녀 2명이었다.
여학교를 세웠다 하더라도 천주교 선교사들의 여성 교육관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교육의 범위를 기초 교육의 범주에 제한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국문·한문·산술·역사·지리 등의 과목을 제시하면서도
당시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생업에 유용한 청소, 세탁, 유아 교육법,
비단 짜는 일 등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10년 5월 제주 읍내에 약 40명의 학생을 모아 개교하였는데
당시 일본인 여학교의 개교로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확보하였던 인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본인 여학교 학생은 25명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평국(姜平國)을 들 수 있다.
강평국(초명 姜年國)은 이 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의 경기여고로 진학하여 그 명석함을 떨쳤으며 이름을 평국(平國)이라 고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었다.
1회 졸업생 5명 중에는 강평국 외에 최정숙(崔貞淑)과 고수선(高守善)도
이 학교에서 꿈 많은 소녀시대를 보냈고 모두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다.
제주의 근대를 이끈 여걸 3인방을 배출한 신성여학교의 존재는
제주여성사에 깊이 각인될 것이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는 비록 서울로 진학은 못했을지라도
제주사회와 가정에서 여성교육의 성과와 중요성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선교사들의 활동에도 제한을 받으면서
라크르 신부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사(校舍)를 넘겨 줄 것을 명령받았다.
이에 따라 제1회 졸업생만을 배출한 신성 여학교는 1916년 7월 15일 폐교되고 말았다.
이 때까지 1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성여학교를 폐쇄한 뒤 일본은 이 건물을 본원사라 하여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유골안치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주교좌성당
중앙성당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페네 배신부이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G. Mutel)주교가 부임(1898)하여 제주도 본당 설립이 추진되었고
이듬해 제주본당이 설립되었다. 2000년 7월 2일
'천주교 제주선교 100년 및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과거 제주시민들이 가장 발길이 잦았던 곳 중의 하나로,
옛 신성여자중. 고등학교가 자리했었다.
첫댓글 형제 님 발길 따라 성지순례 잘합니다.
편찮으시다고 하셨는데 나으셨는지요?
일반 여행 때는 성당을 잘 들리지 않은데
2016년도 갔을 때 이시돌 목장 내
성 클라라 수도원 성당 들린 적이 있었어요.
저희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께서
성 클라라 수도원 성당 신부님으로 전출 가셨는데
당시는 서울에서 피정 중이셔서 만나 뵙지는 못하고
수녀 님만 뵙고 천연 화장품 등만 사 왔어요.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님께 견진 성사를 받았답니다.
유익한 신앙 정보들이 많아서
제주교구 유튜브 구독하고 있답니다.
빨리 나으셔서 다시 성지순례 하셔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체칠리아님, 제주에 연고가 많이 있으시군요.
저는 제주를 아주 좋아하는데 자연과 역사적 현장이
많이 훼손되고 있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순례도 하고 올레길도 걷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신축화해길(2) 함께 합니다.
감사합니다.
요셉형제님, 감사합니다.
며칠 남지않은 한 해 마무리 잘하시고
다가오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