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제7권 P77 – P85
- 국내 및 세계 최초
-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7권 P77 – P85 / 아래 스캔 자료 참조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장판교(長坂橋)에서 적(敵)의 간담을 서늘케 한 장비(張飛)
JangBi Frightened the Enemy at Jangpan Bridge
수상개화(樹上開花) Decorate the tree with false blossoms
- '나무 위에 꽃을 피운다'라는 뜻으로, 본래 꽃을 피울 수 없는 나무에 조화(造花)를 진짜 꽃처럼 장식하여 상대방을 속인다는 말이다. 삼십육계 가운데 29번째 계책이다.
Tying silk blossoms on a dead tree gives the illusion that the tree is healthy. Using artifice and disguise, make something worthless appear valuable and vice versa.
철수개화(鐵樹開花:쇠나무에 꽃이 피다)가 전화(轉化)한 것으로, 원래는 지극히 실현되기 어려운 일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중국의 대표적 병법의 하나인 삼십육계에서는 병전계(倂戰計:동맹 등을 맺어 함께 싸울 때의 계략)에 속하는 29번째 계책으로 사용되었다.
그 내용은 '형세에 따라 위세를 떨치면, 작은 세력이라도 큰 세력처럼 꾸밀 수 있다. 기러기가 높은 하늘을 날 때 무리를 지어 날개를 활짝 펴고 대형을 이루어 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借局布勢, 力小勢大. 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也).' 곧, 아군의 힘이 약할 때, 다른 세력이나 어떤 요인을 빌려 아군을 강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만들어 굴복시키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가 장판교(長坂橋)를 필기단마로 지키며 조조의 대군과 맞설 때 수상개화의 계책을 이용하였다. 그때 유비는 조조의 군대에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장비는 2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판교를 지키며, 병사들로 하여금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매달고 숲 속에서 이리저리 달리게 하였다.
그로 인해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 멀리서 보면 마치 대군이 몰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조조의 군대가 장판교에 이르렀을 때, 장비가 다리 앞에 홀로 서서 대적하였다. 조조는 장비의 용맹이 두렵기도 하고 복병이 있을지도 몰라 선뜻 공격하지 못하던 차에 장비가 빨리 싸우자고 내지른 벼락 같은 호통소리에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
장비(張飛 : ? ~ 221년 음력 6월) Zhang Fei
(1) 장비(중국어 정체자: 張飛, 병음: Zhāng Fēi 장페이[*], ? ~ 221년 음력 6월)는 후한(後漢) 말기 ~ 촉한(蜀漢)의 군인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탁군 사람이다. 형제 같은 유비, 관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이름을 떨쳤다. 무용이 뛰어나서 관우와 함께 만인적이라 불렸다. 특히 장판 전투, 서촉 공방전, 한중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관우 사후 그 복수를 위해 오나라로의 출진을 준비하던 도중 원한을 품은 부하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원나라 시기 무의충현영렬영혜조순왕(武義忠顯英烈靈惠助順王)으로 추존되었다.
Zhang Fei (pronunciation (help·info)) (died July or August 221 AD), courtesy name Yide, was a military general serving under the warlord Liu Bei in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and early Three Kingdoms period of China. Zhang Fei and Guan Yu, who were among the earliest to join Liu Bei, shared a brotherly relationship with their lord and accompanied him on most of his early exploits. Zhang Fei fought in various battles on Liu Bei's side, including the Red Cliffs campaign (208–209), takeover of Yi Province (212–214), and Hanzhong Campaign (217–218). He was assassinated by his subordinates in 221 after serving for only a few months in the state of Shu Han, which was founded by Liu Bei earlier that year.
Zhang Fei is one of the major characters in the 14th-century historical novel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hich dramatises and romanticises the events before an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the novel, Zhang Fei became sworn brothers with Liu Bei and Guan Yu in the fictional Oath of the Peach Garden at the start of the novel and remained faithful to their oath until his death.
(2) 자는 ‘익덕(益德)’으로 《삼국지연의》에는 ‘익덕(翼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격이 호쾌하여 생각한 바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기질의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유비(劉備)와 관우(關羽)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고사가 전해지지만 이는 창작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後漢) 말 동란기에는 유비, 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자 3명은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장비는 망탕산에서 탈출하여 고성현에 세력을 구축하고 눌러앉게 된다. 이후 다시 유비와 관우를 만나 합류하여 유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간다.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공격해 오자 당양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기병 20기를 데리고 "내가 장익덕(張翼德)’이다"라고 일갈하여 추격해 오는 조조군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의 익주(益州)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장비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지나치게 부하들에게 엄격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유비에게 훈계를 자주 듣기도 하였다. 유비가 형주에서 죽음을 당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나라 동정(東征)을 명했는데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장달과 범강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3) 생애
① 유비의 고초를 따라
젊어서부터 형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유비가 평원상일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를 했다. 196년(건안 원년) 서주목 유비가 원술을 치러가면서 도겸의 옛 부하이자 하비상인 조표와 같이 하비를 지켰다. 그러나 서로 다투어서 조표가 여포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유비의 처자식을 남겨둔 채 패주했다. 198년 여포가 토벌된 후 조조가 중랑장을 주었다.
199년 유비는 동승과 조조 주살을 모의하다가 서주로 출정하여 거병하였다. 이때 장비가 진의록에게 ‘귀공의 전처를 조조가 취하지 않았냐’며 동참을 권하였다. 이에 따라오던 진의록이 이내 후회하여 돌아가려고 하자 죽였다. 200년 유비군은 조조에게 패배하여 하북의 원소에게 귀의하고 장비도 여기에 동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와중에 하후연의 열서너 살 된 조카딸이 땔감을 모을 때 만나서 양갓집 규수임을 알고는 처로 삼았다.[5] 그러나 위략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이 많고 기록상으로도 사건이 벌어진 200년에 장비는 유비를 따라 서주와 화북으로 도주하던 시기라 하후씨가 납치되었다는 고향(예주 초현)에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며, 조조의 친인척이 땔감을 모으는 잡일을 하는 등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다. 이것 때문에 날조되었거나 혹은 정략 결혼을 뒤에 왜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208년 조조가 형주로 군을 움직이면서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빠르게 추격해온 조조군을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서 20기만을 거느린 채 다리를 끊어 막았다. 눈을 부릅뜨고 모를 가로로 들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니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적벽 대전 후 마침내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의도 태수 겸 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남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② 익주 평정
익주로 가 있던 유비가 212년 유장과 전쟁을 벌이자 제갈량, 조운과 함께 형주로부터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각 군현을 점령했다. 강주(江州)에서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항복하지 않은 엄안을 꾸짖었다. 엄안이 ‘유비군이 무도하게 익주를 침탈했으니 머리가 잘릴지언정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고 답하므로 노하여 참수를 명했다. 그래도 엄안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고 하니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는 빈객으로 삼았다. 장비가 덕양(德陽)에서 장예도 물리치는 등 가는 곳마다 이기고 성도에서 유비와 합쳤다. 제갈량, 법정, 관우와 더불어 금 500근, 은 1,000근, 5,000만 전(錢), 비단 1,000필을 상으로 받고 파서태수(巴西―)를 겸하였다.
③ 한중(漢中) 공방전
215년 조조가 장로의 한중(漢中)을 손에 넣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둔 채 돌아갔다. 장합이 파서군으로 내려와 그 주민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기에 탕거현(宕渠縣)에서 서로 겨루었다. 50여 일을 대치한 끝에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와구(瓦口)를 공격하였다.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서 앞뒤가 서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합은 부하 10여 명과 같이 말을 버리고 산을 타 퇴각한 후 패잔병을 수습하여 남정(南鄭)으로 돌아갔다.
217년 마초, 오란, 뇌동과 하변(下辯)에 주둔하니 조홍이 맞서 왔다. 218년 유비가 직접 한중으로 나아갔다. 3월(음력) 장비는 오란과 따로 기동하며 조홍군의 뒤를 끊는 척 시위하였다. 조홍이 조휴의 진언으로 이것이 허장성세임을 간파하고 바로 오란을 습격하여 격파하자[8] 장비는 유비의 본진이 있는 양평관(陽平關)으로 물러났다.
④ 관우의 죽음을 따라
219년(건안 24년) 비로소 유비가 한중을 정복하고 한중왕에 올라 우장군 가절(假節)을 주었다. 221년(장무 원년) 유비는 제위에 오르고 장비는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가 되고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이전에 관우가 죽은 것 때문에 유비가 오나라 정벌에 나서자 낭중(閬中)으로부터 만 명을 인솔하여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비의 폭력을 당했던 부하 범강,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후사는 차남 장소가 이었다. 260년(경요 3년) 관우, 마초, 방통, 황충과 함께 시호를 받아 환후(桓侯)라 하였다.
⑤ 성품
유비, 관우와의 우애가 끈끈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유비가 탁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형처럼 여긴 관우와 함께 유비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한방에서 같이 잤고 그 정은 형제 같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 서서 윗사람처럼 모셨으며 고난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어디든 따라다녔다. 나날이 친밀해지는 제갈량과 유비 사이를 관우와 같이 질투하기도 하였다.
군자는 경애했던 데 반해 소인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유비는 이를 염려하여 언제나 주의를 주고 ‘좌우에 사형이나 편형(鞭刑)을 너무 지나치게 부과하고 있다. 이는 화를 초래하는 길이다.’라 하였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이로 인해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외의 성격이나 술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4) 평가
① 당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장비를 관우와 세트로 묶어서 만인지적(萬人之敵), 즉 혼자서 많은 적과 대항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갖춘 호걸이라 하였다. 구체적 평은 다음과 같다.
진수 :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이라 불린 당대의 호랑이 같은 신하였다. ... 장비는 엄안을 풀어줬으니 국사(國士), 즉 나라의 뛰어난 선비였다. ... 다만 난폭하고 인정이 없는 단점으로 인해 몰락하고 말았다.”
유비 : “충의는 소호(召虎)와 같고 명성은 사해에 떨쳤다.”- 221년 황제에 오르고 장비의 품계를 높이는 책서에서
부간 : “장비와 관우는 용감하고 의가 있으면서도 만인지적이니 장수로 삼을 만한 인걸입니다.” - 212년 조조 진영에서 유비의 익주 평정에 대해 논할 때 그 성공을 장담하며[13]
정욱 : “관우와 장비는 만인적입니다.” - 208년 손권이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이라 예측하며
곽가 : “장비와 관우는 만인지적이면서도 사력을 다해 유비를 위합니다.” - 여포에게 무너지고 조조에게 귀순한 유비를 평하며
유엽 : “관우와 장비는 전군을 뒤덮을 정도로 용맹합니다.” - 215년 한중을 정복한 조조에게 이대로 유비까지 치라고 진언하며
양희 : “관우와 장비는 호랑이 같이 웅장하고 세찼으며 세상을 바로잡는 데 헌신했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번개처럼 날며 유비를 곁에서 지켜 그의 한조 부흥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람을 무례하게 대했다.”
주유 : " 관우와 장비는 곰이나 호랑이 같은 장수입니다." - 남군 전투 후 주유가 유비를 경계하며[
② 후대
이후로도 용맹한 장수나 훌륭한 장수를 일컬을 때마다 "관우와 장비 같다"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이후 중국에서는 관우와 장비를 용맹한 장수의 아이콘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보아 관우와 장비의 용맹과 장수로서의 능력이 당시는 물론 후세까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5) 삼국지연의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술과 고기를 팔았었고 과격하며 거친 성격에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주무기는 장팔사모다. 유비, 관우와 도원결의를 맺은 후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황건적 등무, 고승을 베는 등 활약하는 한편 십상시와 동탁의 전횡에 분노한다. 감찰온 부패한 독우(督郵)도 직접 팬다. 호뢰관 전투에서 유비, 관우와 함께 여포와 일기토를 벌이는데 승부가 나지 않는다.
유비가 서주목이 된 후 의탁해온 여포와 다툼을 벌인다. 유비가 우이(盱眙)로 원술 토벌에 나서면서 장비에게 술마시지 않을 것과 군사를 때리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서주 방어를 맡긴다. 그러나 만취한 장비가 조표에게 술을 강요하며 구타한다. 조표는 여포를 불러들이고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패주한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여포와 화해하고 소패에서 웅거하는데 장비가 여포의 군마를 탈취하는 바람에 공격당하고 조조에게로 도망간다.
유비가 다시 원술을 토벌할 때 장비가 기령을 벤다.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자 유대 등이 선봉으로 오는데 도통 싸움을 걸지 않는다. 이에 장비가 일부러 술에 취한 척 부하를 팬다. 그 부하가 유대에게 장비의 야습이 있을 것이라 거짓정보를 흘리고는 다른쪽에서 기습하여 생포한다. 그러나 조조의 본대에 패배하여 관우, 장비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장비는 망탕산에서 무사히 탈출해 고성현령을 쫓아내고 그 곳에 독자 세력을 구축해 눌러앉았다. 이 무렵 장비는 나무를 하러 간 어떤 아낙 한 명을 강제로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하후패의 여동생인 하후씨이다. 이윽고 조조 밑을 떠난 관우가 만나러오자 장비는 배신자라고 말하며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관우는 자기를 추격해온 채양(蔡陽)을 토벌한 것으로, 겨우 장비를 납득시켰다.
그 후 형주의 유표 밑에서 몸을 의지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만나게 되는데,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에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조조는 이를 추격해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장판교에서 장비는 다리 위에서 말 위에 홀로 우뚝 버티고 서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이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하고 호령했다. 호통소리에 말이 놀라서 하후패 혹은 하후걸(夏侯傑)이라는 가공의 장수가 낙마한다. 장비는 강 근처 숲에 말 20마리를 묶어놓은 후 말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서 먼지가 많이 일어나게 하여 복병이 많은 것으로 위장했다. 조조가 두려워했던 것은 장비 개인이 아니라 장비가 숨겨놓았다고 추측되는 복병들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장비가 장판교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비는 복병을 숨겨놓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유비를 추격하게 된다. 이는 경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판교의 금강역사’라는 유명한 장면이다.
방통이 뇌양현령에 임명되고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장비가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복한다. 유비가 장로(張魯) 토벌을 위해 익주로 들어갔을 때 손권(孫權)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선(劉禪)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때 장비가 조운(趙雲)과 함께 유선을 다시 데려왔다. 유장을 구원하러 장로가 파견한 마초와 필마단기로 싸우는데 3일 밤낮을 겨루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고 마초의 거짓 퇴각을 눈치채고 거짓 퇴각으로 맞받아쳤다.
파서에서 장합과 대치했을 때, 장비가 또다시 술에 빠지게 되자 유비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것을 책략으로 간파하고 진중 위문품으로 맛 좋은 술을 보냈다. 장비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기다리다 지쳐 오금이 저린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 아무도 없었으며, 이 틈에 장비는 장합의 세 성채를 탈취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
1.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2. 도서 구입 안내 : 각권 정가 15,000원 / 택배비 무료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3) 도서 구입 전화 : 1599-9039(파우스트 칼리지)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24801-04-350812(예금주 (주)파우스트 칼리지)
(4)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5)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6)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http://cafe.naver.com/ceta2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7)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8) 판매처 :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
------------------------------------------------
[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
[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개요
슬리피 할로의 전설(슬리피 할로의 傳說, 영어: The Legend of Sleepy Hollow)은 1820년 워싱턴 어빙의 《신사 제프리 크레용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단편 소설이다.
18세기 뉴욕 북부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목 없는 귀신의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미국 영화로도 소개되었다.
출시일 : 1999년
감독 : 팀 버튼
원작 :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각본 : 앤드류 케빈 워커
출연 : 조니 뎁, 크리스티나 리치
상영 시간 : 104분
제작 : 래리 프랑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제작사 : 패러마운트픽처스
1999년 패러마운트픽처스(Paramount Pictures)가 제작하였다. 《가위손 Edward Scissorhands》(1990) 《크리스마스의 악몽 Nightmare Before Christmas》(1993) 등으로 잘 알려진 팀 버튼 감독의 작품이다. 조니 뎁(Johnny Depp)과 크리스티나 리치(Christina Ricci)가 주연을 맡았다.
상연 시간은 104분이다.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의 18세기 고전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이 원작으로 이미 19차례나 TV 혹은 영화로 소개된 바 있다. 18세기 뉴욕 북쪽의 슬리피 할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목 없는 귀신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무섭고도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1799년 뉴욕 북쪽의 작은 마을 슬리피 할로우에서 목 잘린 시체가 잇달아 발견된다. 평소 과학적인 수사를 주장하던 젊은 수사관 크레인(조니 뎁)이 현장에 파견된다. 크레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국 독립전쟁 당시 악명 높던 독일인 용병이 목이 잘린 채 마을 근처에 묻혀 있다가 호스맨(Horse Man)이라는 목 없는 귀신으로 되살아나 사람들의 목을 베어간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는다.
크레인은 끈질긴 수사 끝에, 사건이 슬리피 할로우의 지주였던 밴 개럿의 비밀결혼과 유산문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크레인은 유력한 법정 상속인인 밴 타셀을 의심하지만 그의 딸 카트리나(크리스티나 리치)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크레인은 눈 앞에서 호스맨(크리스토퍼 워큰)이 사람의 목을 잘라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기절하고, 범인으로 지목된 밴 타셀마저 호스맨에게 살해당하자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진다.
영국에서 진행된 촬영은 대부분 세트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영화의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최첨단의 특수 효과와 특수 분장이 동원되었다. 잘려나간 머리는 석고와 실리콘으로 모형을 떠서 정교하게 색을 입혔는데, 머리 한 개당 평균 5주가 걸렸다. 2000년 제72회 아카데미영상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2) The Legend of Sleepy Hollow is a gothic story by American author Washington Irving, contained in his collection of 34 essays and short stories titled The Sketch Book of Geoffrey Crayon, Gent. Written while Irving was living abroad in Birmingham, England, "The Legend of Sleepy Hollow" was first published in 1819. Along with Irving's companion piece Rip Van Winkle, The Legend of Sleepy Hollow is among the earliest examples of American fiction with enduring popularity, especially during Halloween because of a character known as the Headless Horseman believed to be a Hessian soldier who was decapitated by a cannonball in battle. In 1949, the second film adaptation was produced by Walt Disney as one of two segments in the package film The Adventures of Ichabod and Mr. Toad.
------------------------------------------------------------------------------
2. 도서 구입 안내 : 각권 정가 15,000원 / 택배비 무료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3) 도서 구입 전화 : 1599-9039(파우스트 칼리지)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24801-04-350812(예금주 (주)파우스트 칼리지)
(4)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5)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6)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http://cafe.naver.com/ceta2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7)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8) 판매처 :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
3. 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세계 최초 / 국내 최초[영어 만화 세계 문학 + 상세한 작품 해설]
완벽한 논술 구술 대비 / 완벽한 AP 영문학 대비 / 해외 유학 대비 !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교 내신 및 필독서 시리즈 !
모든 가족이 한글 또는 영어로 함께 읽을 수 있는 가족용 세계 문학 시리즈입니다.
아래의 모든 만화 작품은 소년조선일보, 매일경제, 에너지데일리신문, 아시아일보, 용산신문, The Korea Times, The Korea JoongAng Daily 등에 100% 연재된 도서들입니다.
3.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 총 20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모비 딕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7. 10주 완성 영어 회화(1권 -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8. 위 도서 관련 내용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제공
도서구입 전화 : 1599-9039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1@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http://cafe.naver.com/ceta2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