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3월26일(화)비
조식 먹고, 외출하려고 나오니 비바람 친다. 택시 타고 太秦廣隆寺(태진광륭사, 흔히 코류지)로 가다. 비가 오다 말다 하니까 관광객이 몇몇만 보일 뿐 한적하다. 고적하고 은은한 분위기에 흠뻑 젖는다.
벚꽃은 아직 피어날 조짐이 없지만 마취목(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몽련보살에게 물으니 ‘마취목’이라 한다)만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졌구나.
신영보전新靈寶殿에 들어가니 미륵반가사유상(일본 국보 제1호)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로 호법신장들이 도열해 계신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장차 사바세계 남섬부주로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보리심의 서원을 사유하면서 미소를 띠고 반가부좌로 앉아 계신다. 그 자비심이 부드러운 곡선과 온화한 미소, 유려한 자태에서 고요히 빛난다. 존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 드리고 보리심의 서원을 되새긴다.
雨中叅道一向心, 우중참도일향심
已降此界現尊相; 이강차계현존상
禮敬三拜頓忘存, 예경삼배돈망존
下山堂堂進世中. 하산당당진세중
비들 뚫고 산문에 드는 까닭은
도를 향한 오직 한 마음이라
미륵님은 벌서 세상에 내려오셨나?
지금 여기 그 모습 드러내셨네
세 번 절하며 예배 드리는 사이
문득 ‘있음’을 잊어버렸네!
하산하며 당당히 세상으로 나아가노라!
반가사유상 옆으로 도열한 호법신중의 이름과 형상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예경하다. 밖으로 나오니 처마에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져 바람에 흩날린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경내를 벗어나며 구글 맵으로 다음 행선지인 龍安寺(료안지)를 검색하니 경로와 경유시간이 나온다. 1시간 가량 걸으면 도착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여 ‘요것쯤은’ 하면서 걸어가기로 했다. 호흡에 맞춰서 잰 걸음으로 걷는데 굵어진 빗줄기에 바람까지 세차게 분다. 바지 밑단이 젖으면서 신발까지 눅눅 해졌다.
골목을 지나다가 대문 옆에 일본공산당의 선전 포스터가 붙어있어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었다. 일본은 공산당이 합법화되어 있다. <군비확대와 세금증대를 반대>한다고 써 있다.
몰아치는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질까 손잡이 방향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걷다. 등에서 땀이 배고 골반과 허리를 연결하는 부위가 아파 오는 걸 보니 평소에 걷지 않았던 생활습관이 반성 된다. 이리저리 굽어 돌고, 비실비실, 삐뚤 빼뚤 허위적 대며 지쳐 떨어질 때쯤 용안사 산문이 눈에 잡힌다. 저기가 거기다! 마음만 먹으면 일은 이루어지고, 마음 가는 대로 몸이 따라간다. 에스빠냐 Espana 말을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몰려오는데 단체여행을 왔나 보다. 비에 젖은 신발을 벗어 비닐 봉지에 넣고 방장으로 직입直入하다.
료안지 석정
석정石庭은 방장 앞 마당이다. 선승들이 방선放禪 시간에 선정에 들었던 몸을 풀고 잠시 쉬면서 차를 마시고 안전眼前에 펼쳐진 자연을 관조하는 여유 공간이다. 텅 빈 마당에 하얀 모래를 평탄하게 깔아 놓았다. 일망무제의 바다이다. 그 가운데 열 네 개나 열 다섯 개의 모양이 서로 다른, 그러나 같은 범주의 돌들을 배치해 놓았다. 돌 주위에는 동심원의 무늬를 그려놓고 물결지는 느낌을 주려 한다. 잔잔한 바다에 점점이 박힌 섬들! 紫羅帳裏撒眞珠자라장리살진주다. 황금빛 비단 위에 진주가 뿌려진 격이니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본래무일물인 텅 빈 공간에 인연 따라 섬이 생기고 물결이 일어난다. 불변과 수연, 공성과 연기, 이법계와 사법계가 중첩되어 펼치는 화엄일승 법계연기 만다라이다!
웅성 거리는 닭의 무리 가운데 깃을 접고 내려 앉은 한 마리의 푸른 학처럼 고요히 묵조에 잠긴다.
飛來靑鶴座石庭, 비래청학좌석정
煙雨点潤枯山水; 연우점윤고산수
龍安審處都不見, 용안심처도불견
正午鐘聲露啣珠. 정오종성로함주
푸른 학이 날아와 돌정원에 앉으니
안개비에 마른 산수가 점점이 젖는구나
용은 어디에 있길래 전혀 보이질 않는데
정오에 울리는 범종소리에 여의주가 드러났구나!
점심 요기를 하려고 구글 맵에 용안사 근처 맛집을 검색하니 하나마끼花卷 소바집이 뜬다. 찾아가니 가게 앞 나무 벤치에 손님들이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닭고기 국물에 메밀사리가 담긴 것을 시켰는데 국물이 짜서 입맛에 맞지 않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죽집에 들어가 단팥죽과 말차가 섞인 카스텔라를 시켰다. 역시 별 맛이 없다.
택시 불러 금각사로 가다. 金閣鹿苑寺(킨가쿠로쿠온지, 흔히 금각사, 골든템플이라 한다)이다. 교토 관광 제1번지라 할 수 있는 명소라, 역시 우중인데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밀물 지어 다닌다. 금박을 입힌 3층 누각이 鏡湖池경호지 수면에 비치면 금각의 실물과 금각의 그림자가 서로 공명하면서 존재의 즉색즉공即色即空(연기된 색과 무자성의 공성이 同時다!)을 실연實演하고 있다. 그런데 금각은 해가 빛나는 날에 봐야 제 격인데 우중충한 안개 비속에 보니 때깔이 나지 않고 오히려 금색 기모노를 걸친 퇴기退妓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교토 관광의 백미라,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촘촘히 널어 서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사진 촬영할 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려운 만큼 겨우 한 두 컷 스냅샷을 건지고는 금방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러나 뜻한 바의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정원을 한바퀴 돌아 나오니, 비는 아직도 그치질 않고, 바람은 불고, 갈 길은 멀다. 택시 타고 숙소로 돌아오다. 저녁에 길 거리 패밀리 마트에서 빵과 음료 사서 요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