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
역대상 4:9-10
영어 사전에서 ‘김퍼’를 찾아보면 유능하여 의지가 되는 남자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김퍼’는 어떤 요청을 받았을 때 요청하거나 기대한 것보다 항상 조금 더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김퍼란 특별히 가구를 만들 때, 가구를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특별한 장식이나 문양을 새겨 넣어서 마감을 함으로써 그 물건의 가치를 더 나가게 하는 기능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브르스 윌킨스 목사는 야베스의 기도를 ‘김퍼’라는 말로서 설명합니다. 김퍼적인 삶을 살은 야베스는 다른 형제보다 귀중하여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입장에서 보면 유능하여 의지가 되는 조상이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역대서를 기록한 시기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야 합니다. 유대가 베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입니다.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느냐입니다. 유다 땅에 돌아온 사람들 대부분은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 4장을 보면 귀환한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위한 착공식을 하는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 솔로몬 성전을 보았기 때문에 다시 성전의 기초가 높임을 보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왜냐하면 첫 성전에 비교하면 초라하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 성전을 짓는다는 감격 때문입니다. 반면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는 기대감으로 기뻐하면서 큰 함성을 질렀습니다.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함께 뒤섞여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역대기를 기록하여 하나님 신앙의 근본을 가르치고, 올바른 국가를 재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후에 돌아와 기록한 역사서에는 열왕기서와 역대서가 있습니다. 두 권은 다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서의 관점은 “왜 우리는 망했는가?”를 질문한다면, 역대기서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열왕기서는 왜 우리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왔는가? 유대가 멸망한 이유는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긴 결과임을 밝힙니다. 반면 역대기는 우리 민족이 번성했을 때와 쇠퇴했을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밝히면서 그것을 성전에 대한 태도였다고 진단합니다. 수 많은 왕들 중에 가장 이상적인 왕은 다윗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역대상은 아담에서부터 다윗 왕가로 연결되는 족보를 설명하고, 다윗의 통치를 다룹니다. 하나님이 목동인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삼으신 것은 다윗을 통해서, 그의 후손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일생을 성전 건축하는 일에 투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대상 1-9장의 족보는 아담부터 다윗 왕까지 연결합니다. 강조점을 둡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미래의 청사진으로 제시하면서 역대기서를 기록했습니다. 역대기의 관점에서 족보에 내용은 희망적어야 합니다. 나를 팔아먹은 매국적인 행위보다는 나라를 위한 희생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들어있는 역대상 4장은 유다 족보입니다. 2장에도 유다 족보가 나옵니다. 4장에도 나옵니다. 족보를 소개하다가 개인의 성공담이 나옵니다. 야베스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건의 기승전결이 없이 야베스라는 이름과 그의 기도만 소개합니다. 중요한 족보에 개인의 성공담이 기록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윗이나 야곱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무명의 조상의 이름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족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할 때에 야베스의 성공담은 개인의 성공담이 아님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족보에 나옵니다. 유다의 조상 중에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7-50장까지 요셉 이야기입니다. 38장은 유다와 다말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가 형제 공동체를 떠납니다. 그 이유는 유다가 요셉을 팔아먹는데 있어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아버지 야곱은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경험했고, 이에 유다는 심한 자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살수 없어서 공동체를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유다는 다말을 통해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게 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됩니다. 다말의 행동은 윤리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말이 가족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었음을 깨닫고, 유다는 다말에게 “네가 나보다 옳다”라고 합니다. 이후 유다는 형제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을 감동시키고, 요셉을 감동시킵니다. 유다의 이런 태도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희생정신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가 자신에게 놓여진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나님께 간절히,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아야 할 필요성은 무엇 때문입니까? 본문에는 그 이유를 말하지는 않지만, 역대상 족보의 특성상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가진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족보 속에 남겨둔 야베스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이것은 유다 정신이고, 이것은 유다의 뿌리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야베스가 자신의 안위, 성공만을 위한 기도자였다면 유다 정신에서 벗어납니다.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족보에서 바람직한 조상의 상도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기도, 예수님처럼 자기희생적인 기도였습니다.
야베스는 고난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슬픔’이라고 부릅니다. 아들이 태어났는데, 왜 슬픔입니까? 유대인들은 보통 아버지가 이름을 짓는 것을 생각한다면 야베스는 유복자이거나 사생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출생은 어머니 조차 기뻐할 수 없는 어떤 장애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장애물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형제들을 위한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스더 10:3절을 보면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름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에스더의 일사각오로 하만의 처형당하고, 반전이 되었습니다. 민족이 살아난 것을 기념하여 부림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원의 중심에는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크게 존경을 받고, 허다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유다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가 형제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야베스는 형제 중에 귀중한 자, 존경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공동체로부터 존경받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일이란 포괄적으로 형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절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지역을 넓혀달라는 이유는 자신의 땅, 명예, 부의 확장이 아니라 형제를 위한 지역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이웃의 압박과 침약으로 땅이 좁아졌습니다. 곡식 걷을 땅이 없어졌습니다. 자유 대한 독립을 꿈꾸며 살아가는 독립투사같이 공동체의 지역이 넓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가정 공동체의 지역이 넓어지고, 사회, 민족, 교회 공동체가 넓어져야 합니다. 더 넓은 곳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 주변의 압박입니다. 저항 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려고 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사람들이 와서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고 조롱하고 훼방합니다. 느헤미아가 왕이 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온갖 모함을 다 합니다. 환난입니다.
다른 형제들의 고통은 내 고통이요, 내 아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지라고 생각이 안 듭니다. 그래서 형제의 고통이 내 근심이 되었습니다. 바울처럼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다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짐을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갑니다.
이런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허락하셨습니다. 허락이란 뜻은 오다는 뜻입니다. 오다는 하나님이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응답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허락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실 정도로 응답해 주실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 개인의 간구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100% 응답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면 되겠습니까?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기도,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즉각 응답해 주십니다.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설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소자에게 한 것인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베스처럼 내가 속한 가정, 교회, 이 민족을 위해, 더 나아가 지구촌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설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