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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밝혀지는 궁을(弓乙)의 터 계룡 대전
정감록(鄭鑑錄), 격암유록(格庵遺錄), 북창선생, 동학(東學)의 궁을가(弓乙歌)등의
예언서를 보면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는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그곳에 질병 없고 오곡등풍 자연이라 궁을성진 십진하니 귀리매귀망귀양 소멸이라
좌선우선 습도하니 질병우환 근심할까 우리아동 동몽들아 궁을가나 불러보자(궁을가)"
특히 예언서의 비결(祕訣)을 보면
“이재궁궁(利在弓弓) 이재을을(利在乙乙)”의 표현이 있다.
글자만 놓고 번역해 보면 “활이 있는 곳이 이롭고 을목이 있는 곳이 이롭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궁을(弓乙)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궁을(弓乙)은 하늘이 대한민국 후손에게 남긴 명당터를 말한다.
앞으로 새로운 궁궐(宮闕)터가(통일 도읍지) 지어질 장소가 궁을(弓乙)의 십승지(十勝地)라는 말이다.
궁을(弓乙)의 뜻을 파자(破字) 해석해 보면 활궁(弓)과 을목(乙木)의 형국이다.
즉 길지(吉地)의 형국이 활의 궁수(弓手)와 같고 을목(乙木)의 형세를 취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곳이 궁을(弓乙)의 길지인데
격암유록(格庵遺錄)에서는 그 장소를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天下列邦回運 槿化朝鮮鷄龍地 天縱之聖合德宮 背弓之間兩白仙
천하열방의 운기가 되돌아온다. 무궁화 강산 조선의 계룡에서 반 궁수터 틈 사이
두 백선(白仙)이 천종(天縱)의 뜻을 받아 성덕(聖德)이 합궁(合宮)하는 곳이다...
이것이 궁궁을을(弓弓乙乙)이다(격암유록)
계룡(鷄龍)이 회룡고조(回龍顧祖)임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계룡(鷄龍)은 을목(乙木)의 형상으로 반궁수의 터임도 밝힌다.
그 곳에 두 백선(白仙)이 활의 시위를 저울질 한다는 암시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비결의 제목도 궁을가(弓乙歌)인 것이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장소가 궁을(弓乙)의 길승지(吉勝地)이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새 도읍지로 계룡(鷄龍)을 선택하고 궁궐 축조 공사를 시작했다.
이성계가 애초에 조선의 도읍으로 점찍은 곳은 충청남도 계룡산 기슭에 자리한 신도안(新都內)이다.
풍수지리학자들은 계룡산을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으로 보았다.
현재 신도안에는 조선 도읍의 주초석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태조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계룡산은 존읍(尊邑=존귀한 도시)이 들어설 곳이라며
당장 계룡산을 떠나라고 엄포한다.
즉 대전의 회룡고조(回龍顧祖)터의 주인은 이성계가 아니라고 쫓아낸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하륜의 상소(上疏)가 올라온다.
“계룡산 신도안은 지역이 협소하고 물이 부족하며 국가 중심지가 아니어서 왕도로서 적합하지 않다”
고 상언하였다. 실제로 신도안은 도읍으로 하기에는 협소하고 큰 강이 없어 물의 수량이 절대 부족하다.
하륜(河崙)의 주장에 의해 이성계는 수도 건설을 계획한 지 약 1년 만에 공사를 중단하고 한양으로 옮겨 갔다.
이 이야기는 홍만종(洪萬宗)이 1678년에 지은 ‘순오지(旬五志)’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1736~ 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실려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계룡산을 토함산, 지리산, 태백산과 함께 오악 중의 하나로 꼽으면서
계룡산은 하늘을 오르는 용의 모양이라고 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에서 산의 지맥(支脈)이 뺑 돌아서 본산(本山)과 서로 마주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으로 계룡산을 들고 있다.
결론적으로 계룡은 하늘의 이치를 가진 신비의 땅으로
언젠가는 이곳이 수도가 되어 천하 36국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는 시대가 도래한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묘사하고있다.
신라 말기 도선국사는 그의 저서 도선비기에서
개성은 5백년 도읍지이고
한양은 4백년 도읍지이며
계룡산은 8백년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조선 말기의 혼란 끝에 조선이 망하고 결국 계룡산에 도읍이 들어서게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건립 이후에도 조선의 왕궁터인 경복궁 안에 청와대가 있는 셈이니
아직 조선의 수명은 다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청와대가 경복궁에서 나와야 조선의 명당 수명이 진실로 끝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성취루가 올해 임인년(2022년)에 펼쳐진다.
오성취루에 관한 예언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 몇 개월 앞서 발간된
육관도사 손석우의 "터"에서 최초 언급된 것을 기억한다.
김일성 사망을 맞춘 손석우옹의 소설 터가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이 있다.
손석우 옹의 예언에 의하면 오성취류가 되면 그 빛이 “백 년 이상 대한민국을 비추어 번영케 한다”고 하였다.
올해 오성취류가 시작이 되는 첫 해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 배합이 잘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오성취루가 되어야 통일한반도가 이루어지고 그럴려면 계룡산 신도읍지로 수도이전이 해결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전으로 이전하는 새 수도지가 역사적 자료에 의해 새롭게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선대사에 의하면 한양(漢陽) 다음이 계룡(鷄龍)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
계룡산에 도읍이 들어서는 시기는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무넘이고개로
물이 넘어가 초포(草浦, 현 노성현 하류)에 배가 드나들 때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1990년 금강 하구 뚝 제방 공사가 완공되자 강물이 불어 초포(草浦)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 내용은 정감록에도 나와 있다.
『정감록』에서는 계룡산의 돌이 희게 되고(鷄龍石白) 초포에 나룻배가 다니면(草浦舟行)
계룡 도읍이 될 때가 다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초포(草浦)는 현(縣) 서쪽 20리에 있고 계룡산에서 발원해 사진(私津)에 흘러 들어간다(연산 산천조)고 기록하였다.
鷄龍石白草浦舟行大小中華偕矣 漢陽李氏三百年之地在於天數若有小遺則四百年 以後至七甲子以後申年可知也
계룡의 돌이 희어지면 초포에 크고 작은 배가 다닐 것이다. 중국과 함께 한양이씨(漢陽李氏)의 천수(天數)가 300백년은 될 것이다.
만약 더 남아 있다면 약 400백년 후에 갑자(甲子)가 7번을 더 흐른 후에 신년(申年)에 이르면 (계룡도읍)을 가히 알 수가 있다(정감록)
우리에게 도인으로 많이 알려진 류성룡(柳成龍)의 형, 류운룡(柳雲龍)은
일찍이 계룡사부설(鷄龍四府說)을 주장했다.
계룡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눠 할당한다는 주장이였다. 그래서
(1)동유의정부(東有議政府)-대전정부청사 및 세종시
(2)서유군부(西有軍府)-육군본부가 들어선 계룡대
(3)남유계룡부(南有鷄龍府)-계룡시
(4)중유궁내부(中有 宮內府)를 말하였다.-아직 확정이 안된 곳이다.
동유의정부(東有議政府)는 동쪽에는 의정부인 행정부가 입주해야 한다는 말인데
현재 동쪽에는 세종,대전정부종합청사가 들어가 있다.
세종정부청사는 엄밀히 보아 북쪽에 가깝다.
그러므로 앞으로 대전정부청사와 그 자리를 서로 바꿔야 할 것이다.
또 서유군부(西有軍府)는 서쪽에는 군부가 자리잡아야 하는데
현재 육군본부 계룡대가 들어간 자리이다.
남유계룡부(南有鷄龍府)남쪽에는 이미 계룡시가 만들어졌다.
그의 예언은 모두 적중하였다.
남아 있는 예언은 중유궁내부(中有 宮內府)이다.
"중앙에는 새 세상의 궁궐이 세워진다"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그 중앙이 궁을가(弓乙歌)에서 말한 궁을터가 되는 셈이다.
이곳이 청와대가 들어설 궁궁을을(弓弓乙乙)이다.
청와대가 입주하면 좋은 입지터로 예상이 대는 곳은 현재 국군대전 병원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지역풍수를 대충 살펴 본다면
계룡산(846m)에서 이어진 혈맥이 갑하산(468m)을 통해 내려오면서
금병산(365m)을 병풍처럼 휘둘러 감싸고 있다.
주산은 금병산(365m)이 되고 좌청룡은 적오산(258m)이 되고 우백호는 박산(273m)이 된다.
매봉산(144m)이 안산인 조산이다.
주산(365)과 좌우청백(258&273)의 폭과 높이가 병풍처럼 조화가 되고
특히 조산(매봉산144)이 낮아 주산(365)을 넘보지 않는다.
이것은 문무백관이 학자들이 많아서 예의바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대청호가 생기므로 좌청룡의 수맥이 왕기가 생기게 되었다.
과거 원효대사가 대청의 구룡을 보고
"1000년 후에 아홉 용이 물을 만나면 이곳에 왕기가 서리리라"
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대청호가 생기자 청남대가 들어선 것이다.
근래에 대청호수가 생겨나므로 부족한 수기가 풍족해지니
계룡의 1000년 도읍지가 대청호의 건설로 인해 마침내 완성이 된 것이다.
이태조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팔도명산 기도 중 비단 병풍을 갖추고 치성하라는 현몽에
이곳이 바로 비단 병풍 같은 지라 금병산(錦屛山)이라 이름하고 산천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수운 최제우가 이 곳에서 천도를 대각하니 이가 곧 동학이며 무량대도을 개창한 곳이 금병산이다.
길지중의 길지임에 틀림이 없다.
매봉산주변에 대덕연구단지와 충남대학교, 카이스트 본원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곳은 학술의 터인 셈이다.
이곳에 청와대가 입주하게 되면 문무백관들은 학자 출신이 기용이 될 확률이 많겠다.
잠시 이곳 주변의 수맥 움직임을 설명하자면
국군대전 병원에서 빠지는 탄동천의 물줄기가 매봉산을 거쳐 갑천을 만나 합류한다
정부대전청사 앞부근에서 대전천과 합류한 뒤에 북대전 IC를 감싸 돌다가 대청호의 물줄기와 만나는데
이 강이 바로 반궁수터인 금강이다.
기본적으로 수맥의 합류가 많고 강줄기가 금병산(365m) 터를 감싸 완만히 돌기 때문에
북대전 IC 쪽으로 생기가 몰리게 된다.
그런데 금병산 혈터의 문제점도 있다.
적오산과 금병산을 이어주는 곳이 급격히 낮아 구릉지를 만들었다
이곳은 경복궁의 자하문고개와 비슷해서 대청호의 수기(水氣)를 품은 골짜기 바람이 몰려올 수가 있다.
비보책으로 낮은 구릉지에 7층 이상의 건물을 토성처럼 지어서 수풍(水風)을 막아줘야 한다.
그곳에는 안보,경호시설이 세워지면 좋을 것 같다.
아니라면 현재 국군대전병원터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금병산과 적오산을 잇는 낮은 구릉지에 고풍하게 성벽을 만들어 연결하면 비보풍수가 된다.
외침에 방어하기 좋은 천연의 요새가 되면서 주변의 풍광도 살린다.
이러한 것을 비보(裨補)풍수라고 한다.
금병산의 정산은 마치 솥두껑의 손잡이를 닮았다.
시루를 삶을때 솥두껑을 덮은 모양새이다.
두껑을 덮었으니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잘 익을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풍년을 기약하는 터이다.
훌륭한 인재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곳이 정감록에서 말로 전해오던 전쟁도 피해가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의 길승지임을 밝히고 있다.
위 글은 여러 동서고금의 풍수자료들을 찾아 보고 내린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자료참고 인터넷 자료 참고
금병산(錦屛山)은 수운교 도솔천궁을 품고 있는 산이다.
산의 높이가 400m도 되지 않지만 수평선처럼 뻗어있는 능선이 이채롭고 아기자기한 산길을 걷는 산행의 맛이 뛰어나다.
수운교는 우리나라에서 수운천사(최제우)께서 천도를 대각하시니 이가 곧 동학이며 유불선합일의 무량대도이고
도솔천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분류되는 하늘의 하나로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천상의 정토이다.
도솔천궁은 금병산 주릉이 병풍처럼 둘러쳐있고 좌청룡 우백호 산세에다 늘씬한 조선 소나무에 둘러싸인 길지 중의 길지이다.
언제 찾아도 깨끗한 느낌을 주는 금병산은 신라시대에는 금평산, 고려시대는 만인산으로 불리다가
이태조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팔도명산 기도 중 비단 병풍을 갖추고 치성하라는 현몽에
이곳이 바로 비단 병풍 같은 지라 금병산이라 이름하고 산천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추목동에서 충남 연기군 금남면에 걸쳐 12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동쪽으로부터 옥련봉, 일광봉, 공덕봉, 도덕봉, 옥당봉, 연화봉, 운수봉, 출세봉, 감찰봉, 현덕봉, 대법봉, 창덕봉이
수평선처럼 길게 뻗어있다.(자료제공 다음)
첫댓글 금병산 터가 1차 예상지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른 지역도 있을 수 있으니까 계속 찾아봅니다
최고의 진실입니다.
저곳에 곧 성스러운 집이 들어섭니다..
@태초의빛 建爲天(건위천) 괘의 2효....
"現龍在田 현용재전" 여기서 말하는 "田"
바로 천황봉 상제봉이 있어 하늘의 기운을 직접 내려 받는
계룡산이 있는 大田이 지요.(본래명칭은 太田, 일본놈들이 조작하여 글자를 조작)
이 계룡산 산자락이 뻗쳐나가 음양이 합덕하여 생명을 잉태하는 아버지산 "회문산"과
어머니산 "모악산"을 이루었지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