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 118:6~9
제목: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
● 기독교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 시118:8.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trust in man)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
8절의 신뢰하는 것은 영어 성경으로 ‘trust in’이고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뜻도 있습니다(예: trust in God).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불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도피처로 삼아서(take refuge) 도망을 간다는 뜻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KJV를 보면 그렇습니다.
KJV) It is better to trust in the LORD … NIV)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평범한 사람(8절)이나 나름 힘 있는 사람(9절)을 깊이 의지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일을 도울 만한 조력자를 전혀 믿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그건 아니고 감히 하나님‘만큼’은 믿지 말라는 겁니다. 가장 신뢰하고 가장 의지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대상의 자리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절대자로 믿고 신뢰하는 기본 신앙 아래에서, 여타 다른 사람이나 유능한 자를 사회생활로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신용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과 사람을 사회생활의 관계자로서 믿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데요. 그것은 배신의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지나치게 과하게 믿어도 하나님은 그 믿는 자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시며 배신하지도 못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느 선 이상으로 오버해서 믿으면 대개는 배신을 당합니다. 믿었던 분량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충격과 피해를 입습니다. 실례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묵상자가 치열한 직장생활을 할 때 몸은 파김치가 되고 심령은 피폐해져서 힘들 때에, 꽉 막힌 교통 체증 속에서 기독교 라디오 채널을 틀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름 깊이 있고 영혼에 활력을 주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심령이 조금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S 목사가 복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아마도 그 교회에서 직접 함께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그 목사를 더더욱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에 S 목사가 여자 전도사 등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저는 라디오 정도를 듣는 정도로 S 목사를 믿었지만 그 교회에서 직접 접촉하며 목사를 믿은 여성분들은 성범죄를 당했습니다. 목사는 사람에 불과하고 지나치게 신뢰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교회 여성분들은 성범죄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행직원들은 고객들보다 금융이나 대출업무를 더 잘 압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을 지나치게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데 담당자가 창구에서 업무를 볼 정도로 젊은 직원이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할 정도로 은행경력이 오래 됐으니까 믿어보자! 했지만 업무가 너무 서투르고 진행 절차에서 횡설수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합리적 의심과 명분을 내세우며 은행 측에 담당자 교체를 요청했습니다. 빠릿빠릿한 젊은 직원으로 교체되고 나서 바로 대출이 가능하다는 약속을 받았고 돈은 며칠 후 입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만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더 믿을 만한 사람이 있고 믿어서는 아니 될 미련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꽤 많습니다. 어렵게 벌은 돈을 부모나 형제 등 가족에게 맡겨서 다 털리는 연예인이나 주변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 사람은 너무 지나치게 믿으면 안 됩니다. 묵상자는 대학생 때 전쟁과 혁명에 관한 글, 책이나 영화를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싸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기에 성경 중에서 시편 잠언 전도서 등 지혜서들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의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전투하는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신앙에는 내려놓음, 마음 비우기, 회개하는 것 등 내면적으로 숭고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울러 신앙에는 지혜를 발휘하고 적들과 대치할 때 보안을 유지하듯이 적절한 의심을 해야 할 요소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은 다 믿으면 절대 아니 됩니다.
|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
하나님은 다 믿어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 이외의 모든 존재들은 어느 정도만 적당히 믿어야지 다 믿으면 아니 됩니다. 나치 독일이 처칠(Winston Churchill)보다 어수룩한 영국 수상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을 기만하여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믿고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요. 그가 교활한 사람을 어설프게 믿은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묵상자가 초등학교 학생일 때 강조를 받으며 들었던 6.25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산군이 일요일에 많은 장병들이 휴가를 갔을 때 남침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 대상을 어설프게나마 믿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한국 정부와 군부는 북한이 더운 초여름 일요일에는 침략해오지 않을 것이라고 어눌하게 믿었던 겁니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이전 2014년에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2014년 러시아 침공을 소재로 한 우크라이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젤렌스키 정부는 2014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러시아 침공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을 신뢰하고 힘이 더 센 다른 나라의 방백들(시118:9, 개정: 고관들, 영어: princes)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나토는 미국, 서유럽과 북유럽이 러시아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연합한 군사동맹입니다. 나름 든든한 울타리이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믿고 보유했던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겨줬고 나토 가입이 성사되어 다른 나라들이 지켜주리라고 믿었지만 그런 믿음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믿음의 결과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 세계의 판도를 변화시키며 이 혼란기에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 사람은 하나님만큼 믿을 대상이 되지 못하며 내 인생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한 존재도 아닙니다. 사람을 어설프게나마 의지하면 두려워집니다.
| 시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현대인: 사람에 불과한 자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어느 정도 적절히 어려워해야 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그러듯이 하면 아니 됩니다. 사람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성도는 아래 말씀을 명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교회사에 영혼이 수면한다고 믿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는 칼빈 등에 의해서 반박을 받았습니다. 영혼이 육체처럼 수면한다면 영혼이 멸절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멸절설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영혼수면설을 주장하는 교파에서 파생을 하였습니다. 육체는 수면하거나 시신이 되지만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영혼이 지옥에서 멸한다는 것은 심판받은 영혼이 지옥에서 영생하며 영벌(永罰)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심판의 권세가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믿음의 장인 11장을 보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사람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신자가 참 성도입니다.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신뢰하며 전심으로 믿는 축복이 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0. 이미 여러 번 안내를 하였듯이, 위에 있는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초신자는 그것조차도 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급자 이상이나 시간이 많은 분들의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추가 댓글과 주석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1. 아래의 매튜 헨리 주석은 저와 방향이 조금 다른 점이 있지만, 전통적 해석을 잘 반영해 놓았고 그 내용이 방대하여, 시간 되시는 분들은 읽어도 좋겠습니다.
2. 제가 보기에 매튜 헨리 주석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주석을 넘어서 주관적 설교를 하는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이에 비해 호크마 주석은 객관적이고 타당한 성격이 더 강합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송축함(시편 118:1-18)
여기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보이듯이, 다윗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보인다. 그는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기를 즐겼고 그것에 관하여 말하기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위로를 갖기를 갈망했다. 우리의 마음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감동되면 될수록 완전한 복종의 자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Ⅰ. 그는 하나님의 자비 일반을 송축하며, 그것에 대한 저희들의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인정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불러 일으킨다(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은 영원한 샘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결코 시들지 않는 자비의 시냇가가 되시며, 가장 긴 영원의 선(線)까지 평형을 이루며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택된 "자비의 그릇"으로, 그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아론의 집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115:9-11). 여기에서 그들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고백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를 의지하라고 격려되고 있다(2-4절).
제사장들과 백성들,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고백해야 하며, 모두 같은 감사의 찬송을 부르는 데에 연합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게 하라. 즉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리고 저희가 항상 그것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하라. 그리고 영원히 존속할 선한것들로 인하여 그것을 신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의 찬양과 감사는 이스라엘의 집과 아론의 집의 찬양과 감사와 마찬가지로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Ⅱ. 그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롭대하신 일을 보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로부터 저희가 찬양의 노래와 믿음의 근거를 가져오게 한다. 하나님은 두 방편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다윗은 그 시대에 굉장히 큰 역경을 헤치고 나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크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주목해 보기로 하자.
1. 다윗이 처해 있었던 큰 곤경과 위험을 보자. 그는 현재 그가 처한 자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미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반성한다. 사람들이 높아지면 이전에
낮은 상황에 대해서 듣거나 말하는 것에 관심두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경우에든 그의 낮은 상태를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고통 중에"(5절) 있었고 크게 곤란을 당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를 미워하는 자들"(7절)이 많았다. 이것은 소박한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 커다란 슬픔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 안간 힘을 쓰는 자들에겐 더욱 그러했다. "열방이 나를 에워쌌다"(10절). 이스라엘에 인접한 나라들 즉 블레셋과 모압과 수리아와 암몬 족속 등이 다윗이 새로이 왕위에 올랐을 때 훼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에워싼 그의 적"들에 관해서 본문을 통해 본다. 그들은 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그를 건져 줄 모든 후원국을 단절해버리려고 생각했다. 그를 에워싼 그의 적들의 이러한 노력은 반복되었다(11절).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도다." 이것은, 그에 대적하는 그들의 사도가 적의에 찼고 맹렬하며, 오랫 동안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질서해질 때 그들이 다시 동맹을 맺어 그들의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그들이 수효가 많고 시끄럽고 귀찮게 하기 때문에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던 것 같다."
그들은 그에게 날아왔고 그에게 떼지어 날아와서 그를 독소 있는 침으로 쏘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대로, 침을 쏘면 그벌은 죽어버리듯 오히려 저희 자신의 파멸이 되었다. Animamgue in vulnere ponit - 즉 그 상처에서 자기 생명을 잃게 된다.
"여호와여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증가하여 어찌 그리 많은지요!" 다윗은 두 가지 방법으로 고통 중에 빠지게 되었다.
(1) 사람들이 그에게 행한 손상으로 말미암아서다(13절). "네가"(아, 대적자야!) 집요한 공격으로 "나를 밀쳐" 죄와 파멸로 "넘어뜨리려 하는 도다." 사탄은 유혹으로써 우리를 밀쳐 넘어뜨리려는 가장 큰 대적이다. 우리의 장점을 아래로 떨구어 버리고, 우리를 우리 하나님과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위로에서 멀리 끊어 버리려 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총으로 지켜 주시기 않는다면 사탄의 밀침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고난에 의해서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다"(18절). 사람들은 그를 파멸시키려고 그를 밀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버지의 사랑과 인자로써 그를 경책하셨다.
사람들은 대적자의 적개심으로 그를 던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부(聖父)의 사랑과 인자로써 그를 경책하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획적으로 주신 고난,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하기" 위해 마련한 바로 그 고난을 말하는 것 같다(히 12:10, 11). 그렇지만 그 고난의 도구 노릇을 한 인간들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파괴하며 멸절하려는 것뿐이었다"(사 10:7). 인간들은 가장 큰 불행을 꾀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가장 큰 선을 계획하신다. 누구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말하기는 쉽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서 고통을 씻어 주시며, 그가 경책하신 것과 같이 그가 계획하시는 선하심으로 고치신다. 그리고 그는 대적자들의 던짐과 같은 고통에 대해서도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들이 꾀하는 사악으로부터 그들을 건져내시며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다윗이 받은 고통은 우리 주 예수에게 매우 적합하다. "그를 미워하는" 많은 자들이 있었고, 이유없이 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를 에워쌌다."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를 둘러쌌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그를 심하게 밀쳤다." 악마도 그를 시험할 때 그렇게 행했다. 그를 박해하는 자들도 그에게 욕설을 퍼부울 때 그렇게 행했다. 아니 여호와께도 "그를 심히 경책하셨고,"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리로 하여금 "그의 채찍 맞음으로 우리가 낫게 하려 하심이라.
2.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 중에서 그에게 내려 주신 은총을 보자.
(1)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5절). 그는 크게 "나를 응답하셨다." 그는 나에게 내가 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게 행하셨다. 그는 기도 중에 나의 마음을 크게 여시고, 내가 간구했던 것보다 더 크게 주셨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할한 곳에 세우셨도다"(우리는 이같이 읽고 있다). 그 광활한 곳에서 나는 내가 활동할 자리를 가지며 만족할 수 있는 여지와 번창할 수 있는 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광활한 곳은 그가 고통 중에서 거기까지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더욱 평온한 것이다(시 4:1).
(2) 하나님은 그에게 대적하는 적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저희가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다"(12절). 그것은 잠시 동안 맹렬하게 타오르고 큰 소리와 커다란 불꽃을 일으키지만
곧 사라지며 위협을 주었던 불행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다윗의 적들의 격렬함이 그와 같았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같다"(전 7:6). 그것은 마치 우매자의 분노와 같아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저희가 그를 격렬하게 밀쳤지만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셨다"(13절). 그를 도우사 그의 발을 지키시며 그의 근거를 보전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영적인 적들은 오래 전에 우리를 파멸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죽음의 일보 직전에 있을 때 지키신다(18절). 그가 "나를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왜냐하면 그가 나로 하여금 내 적대자들의 뜻에 굴복치 않게 하려하기 때문이다. 성 바울은 고린도 후서 6장 9절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히 경책 받을 때 즉시 절망에 빠져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때로 나타나셔서 "인간을 파멸로 이끄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돌아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살라" 하신다.
이것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시고 그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다." 그는 그의 적들이 갖고 있는 걱정의 불을 껐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불태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를 파멸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약속을 통해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같이 그를 무덤에 두지 않기 위해서, 또한 그가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를 죽음에 굴복하지 않게 하였다. "죽음이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
3. 그가 이러한 은총으로 얻은 진보를 보자.
(1)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더욱 큰 힘을 주었다. 인간에게 신뢰를 두는 것보다 - 그 신뢰가 방백에게 두는 것일지라도 - "여호와께 피함이 낫다(8, 9절). 그것이 더 현명하고 평안하고 더 안전하다. 그것이 훨씬 더 나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인자하심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갖고서 하나님의 인도와 지배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모든 왕들과 땅의 방백들이 그를 보호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그를 편하게 해 주는 좋은 평안을 가질 것이다.
(2)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신뢰 가운데서 승리하도록 해 주었다.
[1]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와의 관계에서, 그를 의지함으로써 승리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6절).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나의 정당한 소송을 지지해 주며 그것을 변호해 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그는 우리 편에 계신다. 우리가 그를 향해 서 있고 그와 함께 있다면 그는 우리를 향해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향해 서 계시며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7절). 그는 나를 돕는 자들 가운데 계시며, 그는 사람들과 내게 있어서 전부가 되시며, 그가 없으면 나는 무력해지며 세상에 있는 어떠한 친구들도 나를 도울 수 없다. 이와 같아,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라"(14절). 나는 그를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없으면 나는 약하고 슬픔을 당한다. 그러나 그에게 나는 나의 능력을 두며, 행함에 있어서나 고난에 있어서나 나는 그에게서 나의 기쁨을 표현하며 나의 슬픔을 달랠 수 있는 나의 노래로서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대하고 있으며, 그가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은총으로 내 마음에 힘주시며, 위로로써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라면 그는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면 그는 우리로부터 모든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가 저희의 노래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의 백성의 능력이 되신다. 저희가 영적인 기쁨이 결핍되었을 때 영적인 원조를 공급받는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양면을 채워 주신다면 우리는 그를 기뻐해야 할 풍성한 이유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우리의 찬송이 되신다면 그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능력되심이 구원에 이르는 우리의 보증이 된다. 그가 우리의 찬송되심은 구원의 징표이며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 된다.
[2] 그는 그의 적들에게서 승리한다. 이제 그의 머리는 그들 위로 높이 올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저희가 자기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 그러므로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6절). 그는 그들을 모두 무시할 수 있으며 저희의 어떠한 시도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시지 않는 한 내게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진정한 상을 입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련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유익을 위해 행하실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높은 권세에 종속되며, 의존적인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人子)를 두려워하느냐?"(사 51:12) 사도는 이 구절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면서 인용한다(히 13:6). 그들은 다윗 자신이 담대했던 것같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둘째, 그는 마침내 그들에게 심한 어려움이 임할 것을 확신하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절).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항하는 계략으로 패배하는 것을 보리로다. 아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10-12절).
나는 그들을 멸망하게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며, 그의 힘을 의지하여 그로부터 권능을 받고서 그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내게 신뢰를 두거나 복수심을 스스로 갖지 아니하고 그들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그의 이름을 신뢰하리라." 이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삼상 17:45)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다. 다윗은,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시며 멸하고, "저희를 온전히 부끄럽게 만드신"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후략)
출처: <매튜 헨리 주석: 시편>
@장코뱅 묵상 본문이나 위 주석이나 신앙의 당연한 중요성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장코뱅 대강 훑어 보았는데요. 내용이 많이 충실합니다.
<호크마 주석: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예화 리'(* )로서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니'(The Lord is with me, NIV)란 뜻이다. 56:9에는 이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칼빈(Calvin)은 이를 '나는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우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가장 든든한 확신을 갖게 한다.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창 3:10). 요컨대 두려움이란 것은 죄의 결과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을 멀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 원문은 '마 야아세 리 아담'(* - )으로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란 뜻인데, LB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무능함을 강조하기 위해 '보잘것없는 인간이...'(...mere man...)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으며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27:1)라고 외친 것처럼 담대할 수 있다.
=====118: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란 말은, 앞 구절과 같은 '예화 리'이다. '돕는 자 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오제라'(* )인데 한글 개역 성경은 '베'(* )를 '...중'(among)로 해석하여 전치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엄 복수가 뒤따를 경우에 쓰이는 강세형 '베트'(* )로 보는 것이 더 좋겠다. 그리고 다음 어구의 '나를 미워하는 자'(my enemies)가 복수형으로 쓰여 '베손아'(* )로 표기된 것과 운율을 맞추기 위하여 '베오제라'는 복수형으로 쓰였지만 의미상 단수인 장엄 복수인 것이다. 따라서 NIV는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며 그는 나의 돕는 자시라'라고 번역하며(The Lord is with me;he is my helper), RSV는 '여호와께서 나를 돕기 위해 내 곁에 계시도다'라고 번역하고 있다(The Lord is on my side to help me).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 '내가 보리로다'에 해당하는 '에르에'(* )는 6절의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이라'(* )와 음가가 비슷한 언어 유희적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소네아'(* )로서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사네'(* )에서 파생된 말로서 '나의 원수들'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my enemies, NIV).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는 것에 비례하여 축소되지만,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의 도움에 의지할 때 그 의지하는 것에 비례하여 더 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겠다.
=====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 본절과 9절은 마치 잠언과 같은 형식인데 시인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에 근거하여 일반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흔들림 없이 확실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 곁이란 뜻이다. 참 신앙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나 지상의 권력, 즉 일시적인 권력 수단을 추종하는 것을 중단하면서부터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 도움에 연연해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살아있는 힘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Weiser). 한편, '피함'에 해당하는 '라하소트'(* )는 '피신처를 찾다'란 뜻을 가진 '하사'(* )의 부정사형인데 사 14:32에는 하나님의 백성 중 곤고한 자들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시온에 피난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잠 14:32에는 의인은 죽음 가운데서 피신처를 찾을 수 있다는 용례가 나오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소망이 있느니라'라고 번역했다. 또한 칼빈(Calvin)은 이를 하나님으로 만족을 누리고, 땅에서 어떠한 도움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살 소망을 가진다는 의미로 주해하였다.
=====118: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 '방백들'은 원어로 '네디빔'(* )인데 8절의 '사람'과 대구를 이루는 말이다.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이 내용이 바벨론 포로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감행했던 성전 재건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이 경험하게 된 것으로 설명하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한편, 바이저(Weiser)는 이 다음에 이어지는 10-18절에서 8절과 본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된다고 보았다.
즉, 10-14절에서는 엄청난 위험과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우심,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위협과 하나님의 구원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언급되어 있고, 15, 16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내용이 그리고 17, 18절에서는 구원받은 자의 희망찬 삶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장코뱅 칼빈이 좋은 설명을 했고요. 깊은 해석을 못해도 오늘 성경본문은 읽는 그 자체로 용기와 소망이 됩니다.
섣불리 사람을 믿고 낭패를 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리석게 뭔가를 잡으려는 어줍잖은 믿음은 사기꾼의 맛있는 밥이 될 뿐이지요. 하나님 외에 믿을 분이 없구나! 다시 다짐하게 하는 좋은 묵상입니다.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좋은 묵상입니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사회생활로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신용하는 것 정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신자들에게 유익하네요.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했다가 낭패를 보고 배신 당하는 사례는 인간사에서 항상 반복되고 있군요.
사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정도가 너무 과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신앙이 분명하고 좋을수록 사람에 대한 신뢰는 적정선에서만 유지해서 불필요한 배신이나 실패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매일같이 속고 속이며 살아들 가고 있다는 것이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히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들의 믿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요약도 잘 해주신 것 같아요.
좋은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하나님 만을 하나님으로 믿고, 사람은 믿을 만 한 사람을 조금 더 성실한 사람 정도로 믿고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옳습니다.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