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환 세상으로 들어섰습니다. 이번 겨울은 참으로 길어서 봄이 언제 오려나 했는데 어제오늘 풀무질을, 한 듯 벚꽃이 만개했습니다. 어수선하던 계절이 갑자기 눈부시게 빛납니다. 건듯 부는 바람에 성급하게도 벌써 머리 위로 땅 위로 하얗게 흩날리는 꽃비는, 그러나 더욱 황홀경입니다. 내일쯤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가 있어 혹여 벚꽃을 놓칠까 서둘러 나선 길입니다.
벚꽃들이 눈 맞춤을 하자며 살랑댑니다. 그 모양이 하얀 블라우스에 장식된 레이스처럼 앙증스럽고, 샤넬라인 스커트 밑단을 치장하여 화려함을 더하는 레이스처럼 곱습니다. 봄은 여성들의 옷에서도 온다고 합니다. 두꺼운 겨울옷을 벗은 화사한 봄 차림이 계절을 앞당기는 꽃처럼 보이는 걸까요. 오랜만에 치마를 입고 나서면 하이힐 소리조차 또각또각 경쾌하게 화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봄을 여자의 계절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치마 차림이 가장 돋보이는 때도 봄입니다. 그러고 보니 치마는 봄바람과 참으로 궁합이 잘 맞는 옷입니다. 몸에 척척 감기는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나 쓸쓸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쳐 가는 가을바람이나 매서운 겨울바람보다는, 봄바람이 치맛자락에서 살랑바람이 될 때 치마의 멋은 한층 살아나니까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첫 구절이 시작되는 가요가 있듯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치마는 누구의 눈에도 사랑스럽지 않을까요.
치마 아래로 드러난 희고 매끈한 다리에 가는 발목이라면 치마 맵시는 더욱 매력적입니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바람에 들춰지는, 치맛자락을 황급히 손으로 잡는 포즈는 사랑스러움과 관능미로 세계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그 사진은 그녀의 이름과 함께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졌지요, 치마는 가녀린 여성미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옷이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부드러운 힘을 품어내기도 합니다.
어렴풋이, 봄바람 저쪽에 나부끼는 색색의 내 치마들이 보입니다. 겨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엄마에게 치마를 입혀 달라고 졸랐던 유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추위에 어찌 그리 치마가 입고 싶던지요. 설날이면 엄마가 만든 노랑 저고리와 빨강 치마를 입는다는 기대에 또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인두로 솔기를 꺾어 다려 가며 내 머리맡에서 밤새워 손바느질한 치마저고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부어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언제나 내 편으로 존재했던 한 분의 곡진한 정성과 사랑이었습니다.
여고 시절, 하얀 블라우스에 까만 교복 치마는 가슴속 깊이 간직된 순수입니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가졌던 우리 반 63명의, 말괄량이들과 함께,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달콤새콤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보입니다. 국어 시간 시작 벨 소리가 울리면 난데없이 ‘너거 신랑 온다’고 외치던 한 친구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지요. 그런 나를 애태우듯 교실은 여름 한 철 때 만난 매미들처럼 목청을 뽑아 대는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했습니다. 그 반짝이던 눈동자들만큼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도 빛을 내던 까만 교복 치마의 소녀들, 이제는 시간의, 두께만큼 허리 굵은 여인들이 되어 버렸겠지요, 다시는 입을 수 없는 옷이어서 더욱 그리워지는 교복 치마는 내 생에 초록의 시간입니다.
날마다 가슴속에 봄바람이 들락거리던 때에 유행했던 미니스커트는 푸른 나이만큼이나 산뜻했습니다. 무릎 위 한 뼘이나 올라간 치마로,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으면 손수건이나 가방으로 무릎을 덮어야 하는 수고가 늘 따랐지만, 불편으로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 시절 경제는 어려웠어도 우울증이니 자살이니 하는 뉴스를 지금처럼 흔하게 들어 본 기억도 없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몰랐습니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자나가면 ‘참 좋을 때다’ 라는 소리들이 귓가를 스치던 시절, 그 의미를 미처 알기도 전에 통과해 버린 꽃잎 같은 한 때였습니다.
다소곳에 보이면서 세련된 멋을 내는 무릎선 길이의 샤넬라인 치마는 지금까지도 곁에서 나를 지켜 주는 옷입니다. 몸가짐이 조신해 지며 무람없이 날뛰던 마음도 수그러들어 조심스런 걸음을 내딛게 합니다. 치마 끝단에 레이스를 달아 무릎이 살풋 덮이는 길이로 입으면, 세월이 나를 더 지나간 다음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아끼는 마음입니다. 가끔 신산한 삶이 쿡쿡 가슴을 찔러 올 때, 예쁜 레이스가 달린 샤넬라인 치마를 차려입고 나서면 번잡한 일상이 시치미를 때며 한 발짝 물러서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요즘 유행어로 ‘샤방샤방’ 한 셔링 치마는 한번씩 부는 마음의 봄바람 같습니다. 잔잔하게 주름 잡힌 얇은 치맛자락이 걸을 때마다 사뿐거려 가라앉았던 기분까지 날려 줍니다. 이제 와 연한 풀잎 같은 치마 하나로 예전으로의 희귀를 꿈꾸는 건 아니지만, 샤방샤방한 ‘옷 날개’로 봄 마중하는 작은 설렘은 마다하지 않으렵니다.
모두, 나와 함께 봄을 보내며 해마다 조금씩 늙어 온 내 애틋한 치마들입니다. 치마 입기를 본능적으로 좋아했던 한 여자 한 여자아이가. 청춘기를 지나 어쩌다가 중년이 되고, 속절없이 노년의 길에 들게 되겠지만, 색감 고운 치마 속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자이고 싶은 여인들의 봄바람이 숨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그리운 치마 중의 치마는, 어머니의 긴 무명 치마입니다.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다니다 치마폭에 숨기도 하고, 친구와 싸움질을 하고 들어와 울음을 터뜨리던 내 얼굴을 닦아 주기도 했던 치마랍니다. 어머니의 치마는 마냥 여리고 가냘픈 멋의 치마는 아닙니다. 내 아픈 마음과 몸을 다독여 품어 주고 덮어 주며 모자람도 감싸 안은, 넉넉하고 포근한 치마였습니다. 애간장이 말라붙은 자리에서도 지긋한 끈기로 가정을 가꾸었고, 녹음 드리우던 시절이 어느덧 저문 즈음엔 또 다른 사랑을 품어내던 알뜰한 생의 표상! 꽃 진 자리의 잎마저 청정한 나무처럼, 어머니의 치마가 눈물 나게 빛나는 이유입니다.
한차례 부는 꽃바람에 사람들의 탄성이 새어 나옵니다.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내 샤넬라인 치마 위에도 벚꽃 비가 흩날리며 내려앉습니다. 꿈길인가 싶습니다. 지천으로 피는 꽃들이, 투명한 새잎이, 서럽도록 아름다운 날입니다. 구슬픈 것도, 아름답게 빛나는 계절입니다. 불현듯 나이도 버리고 세월도, 다 비우고 싶어지는 것은, 요놈의 봄바람 탓이겠지요.
첫댓글 여고 시절! 아마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추억일 겁니다. 좋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