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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13강 -1 (2011. 3. 7.)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 6. 유인물
一心頂禮 盡十方三世(진시방삼세) 一切諸佛(일체제불)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일체존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일체현성승)
我弟子等(아제자등) 講論三藏(강론삼장) 唯願三寶(유원삼보)
爲作證明(위작증명)
南無本師釋迦牟尼佛(나무본사석가모니불)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百千萬劫難遭隅(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 願解如來眞實意(원해여래진실의)
왕복서 독송 하도록 하겠습니다.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
唐 清涼山 大華嚴寺沙門 澄觀(淸涼國師)撰
(당 청량산 대화엄사사문 징관(청량국사)찬)
往復(왕복)이 無際(무제)나 動靜(동정)은 一源(일원)이라
含衆妙而有餘(함중묘이유여)하고
超言思而迥出者(초언사이형출자)는 其唯法界歟(기유법계여)며
剖裂玄微(부열현미)하고 昭廓心境(소확심경)하며
窮理盡性(궁리진성)하고 徹果該因(철과해인)하며
汪洋沖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故我世尊(고아세존)이 십신초만(十身初滿)에
正覺始成(정각시성)하사 乘 願行以彌綸(승원행이미륜)하시며
渾 虛空爲體性(혼허공위체성)하시니
富有萬德(부유만덕)이요 蕩無纖塵(탕무섬진)이로다
↑ 8강-1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皎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라칠처어법계)하시며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盡宏廓之幽宗(진굉곽지유종)하사 被難思之海會(피난사지해회)
하시니 圓音落落(원음락락)에 該十刹而頓周(해십찰이돈주)하시고
主伴重重(주반중중)하사 極十方而齊唱(극시방이제창)이로다
雖空空絶跡(수공공절적)이나 而義天之星象(이의천지성상)이
燦然(찬연)이요 湛湛亡言(담담망언)이나
而敎海之波瀾(이교해지파란)이 浩澣(호한)이로다
若乃千門潛注(약내천문잠주)라 與衆典爲洪源(여중전위홍원)이요
萬德交歸(만덕교귀)나 攝群經爲眷屬(섭군경위권속)이로다
↑ 9강-1
其爲旨也(기위지야)가 冥眞體於萬化之域(명진체어만화지역)하고
顯德相於重玄之門(현덕상어중현지문)이로다
用繁興以恒如(용번흥이항여)하고
智周鑑而常靜(지주감이상정)이로다
眞妄交徹(진망교철)이라 卽凡心而見佛心(즉범심이견불심)이요
事理雙修(사리쌍수)라 依本智而求佛智(의본지이구불지)로다
理隨事變(이수사변)이라 卽一多緣起之無邊(즉일다연기지무변)이
요 事得理融(사득이융)이라 則千差涉入而無礙(즉천차섭입이무애)
로다 故得十身歷然而相作(고득십신역연이상작)하고
六位不亂而更收(육위불난이갱수)로다
廣大卽入於無間(광대즉입어무간)이요
塵毛包納而無外(진모포납이무외)로다
↑ 10강-1
炳然齊現(병연제현)은 猶彼芥甁(유피개병)이요
具足同時(구족동시)는 方之海滴(방지해적)이로다
一多無礙(일다무애)는 等虛室之千燈(등허실지천등)이요
隱顯俱成(은현구성)은 似秋空之片月(사추공지편월)이로다
重重交暎(중중교영)은 若帝網之垂珠(약제망지수주)요
念念圓融(염념원융)은 類夕夢之經世(류석몽지경세)로다
法門重疊(법문중첩)은 若雲起長空(약운기장공)이요
萬行芬披(만행분피)는 比華開錦上(비화개금상)이로다
↑ 11강-1
若夫高不可仰(약부고불가앙)이라 則積行菩薩(즉적행보살)도
曝鰓鱗於龍門(폭시린어용문)이요 深不可闚(심불가규)라
則上德聲聞(즉상덕성문)도 杜視聽於嘉會(두시청어가회)로다
見聞爲種(견문위종)이라 八難(팔난)에
超十地之階(초십지지계)하고 解行在躬(해행재궁)이라
一生(일생)에 圓曠劫之果(원광겁지과)로다
師子奮迅(사자분신)에 衆海頓證於林中(중해돈증어임중)이요
象王廻旋(상왕회선)에 六千(육천)이 道成於言下(도성어언하)로다
啓明東廟(계명동묘)하니 智滿不異於初心(지만불이어초심)이요
寄位南求(기위남구)하니 因圓不逾於毛孔(인원불유어모공)이로다
剖微塵之經卷 則念念果成(부미진지경권 즉염념과성)하고
盡衆生之願門 則塵塵行滿(진중생지원문 즉진진행만)이로다
↑ 12강-1
眞可謂常恒之妙說(진가위상항지묘설)이요
通方之洪規(통방지홍규)며 稱性之極談(칭성지극담)이며
一乘之要軌也(일승지요궤야)로다 尋斯玄旨(심사현지)하고
却覽餘經(각람여경)하니 其猶杲日麗天(기유고일려천)에
奪衆景之耀(탈중경지요)요 須彌橫海(수미횡해)에
落群峯之高(낙군봉지고)로다
是以菩薩 搜祕於龍宮(시이보살 수비어용궁)이요
大賢闡揚於東夏(대현천량어동하)로다
顧惟正法之代(고유정법지대)에도 尙匿淸輝(상닉청휘)어늘
幸哉(행재)라 像季之時(상계지시)에 偶斯玄化(우사현화)하고
況逢聖主(황봉성주)하며 得在靈山(득재영산)하야
竭思幽宗(갈사유종)하니 豈無慶躍(기무경약)이리요
↑ 13강-1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는
卽無盡修多羅之總名(즉무진수다라지총명)이요
世主妙嚴品第一者(세주묘엄품제일자)는
卽衆篇義類之別目(즉중편의류지별목)이니
大以曠兼無際(대이광겸무제)하고
方以正法自持(방이정법자지)하고
廣則稱體而周(광즉칭체이주)하고 佛謂覺斯玄妙(불위각사현묘)하
고 華喩功德萬行(화유공덕만행)하고
嚴謂飾法成人(엄위식법성인)하고
經乃注無竭之涌泉(경내주무갈지용천)이로다
貫玄凝之妙義(관현응지묘의)하며 攝無邊之海會(섭무변지해회)하며
作終古之常規(작종고지상규)로다 佛及諸王(불급제왕)을
並稱世主(병칭세주)오 法門依正(법문의정)을
俱曰妙嚴(구왈묘엄)이니 分義類以彰品名(분의류이창품명)할새
冠群篇而稱第一(관군편이칭제일)이니라
斯經(사경)이 有三十九品(유삼십구품)하니
此品(차품)이 建初(건초)라
故云大方廣佛華嚴經世主妙嚴品第一(고운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제일)이라하니라
왕복서 여섯 번째 유인물부터 보겠습니다.
제8門, 광대하고 깊음을 결론지어 찬탄하다[結歎宏遠(결탄굉원)]
이렇게 되었습니다.
眞可謂常恒之妙說(진가위상항지묘설)이요
通方之洪規(통방지홍규)며
稱性之極談(칭성지극담)이며
一乘之要軌也(일승지요궤야)로다
참으로 항상하는 미묘한 설법이며, 시방에 통하는 드넓은 법규며, 성품에 칭합하는 지극한 말씀이며, 일승의 요긴한 궤범이로다.
우리가 왕복서를 강의 전에 다 같이 읽고, 각자 절에 가셔서도 읽어가지고 왕복서만 아주 폭 넓게 이해하시고, 또 깊이 있게 이해하면 사실 화엄경 전체를, 말하자면 그물을 걷는데 중심 되는 벼리를 잡는 것과 같고, 옷을 드는데 그 옷깃을 잡는 것과 같이 이 왕복서를 통해서 다 딸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두에 왕복서를 입에 익숙하고 마음에 깊이 새겨지도록 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요.
常恒之妙說(상항지묘설)이라. 항상 하는ㆍ늘 있는 미묘한 說이다.
그래서 이것을 언제 설했다. 형식적으로는, 예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한 것으로 그렇게 초점을 맞추어서 편찬이 되었습니다. 그 21일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그 깨달음의 그 어떤 내용에 도취했다고 할까? 거기에 어떤 환희심을 느낀다고 할까? 그러면서 또 그것을 낱낱이 새롭게 수 차 점검도 하시고, 그 깨달음의 궁극적 세계 속에서 그야말로 “법락을 누리는 그러한 순간을 그대로 표현해놓은 것이 화엄경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화엄경의 차원에서 보면 “언제 설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늘 설하고 있다 = 常說遍說(상설변설).” 시간적으로 “항상 설하고 있다.” 공간적으로 遍說이라. “어느 곳에서든지 늘 설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소동파가 상총스님을 만나서 “왜 자꾸 有情說法(유정설법)만 들으려고 하느냐? 無情說法(무정설법)도 듣는 귀를 가져라.” 이 말에 그만 천하의 소동파도 꽉 막혀버렸지요. 그래서 무엇이 無情說法일까? 그것이 정말 화두가 돼서 곰곰이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폭포가 떨어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눈을 뜨고 보니 참 常說遍說입니다.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저 시냇물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이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가?
그 물소리를 자아내는 이 산천초목인들 어찌 비로자나불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그야말로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하루 동안 8만 4천 게송을 설하고 있는데 이것을
他日如何擧似人(타일여하거사인)가? 다른 날 그 누구에게 이 소식을 서로 나눌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표현을 했듯이 그렇습니다.
화엄경의 도리ㆍ화엄경의 그 이치에서 볼 때는 常恒之妙說입니다.
항상 설하고 있고ㆍ부처님이전에도 설하고 있고ㆍ앞으로 수 억만 년 이후에도 설하고 있고ㆍ현재도 설하고 있고ㆍ보리수하에서만 설하는 것이 아니고ㆍ또 여기 문수경전연구회 이 자리에서만 설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지, 지옥에서도 설하고ㆍ천상에서도 설하고, 어디든지 설하지 않는 곳이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차원입니다. 이 화엄경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지요. 그리고
通方之洪規(통방지홍규)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어떤 지역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의 모든 지방.
여기 뭐라고 했지요? 시방에 통하는 드넓은 법규다. 그런 말을 했는데요. 불교에서 흔히 아~ 이 말씀이 “진리냐?ㆍ아니냐?” 이런 것을 가지고 논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무엇이 진리냐?” 이런 것을 이야기할 경우가 많은데 저는 진리와 비 진리를, 다시 말해서 “비 진리” 라고 하는 것은 불교 안에 있는 방편이지요. 그 방편과, 정말 방편과 관계없는 참다운 이치를 분별하는 방법.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ㆍ어느 지역ㆍ어느 국가ㆍ어떤 민족에게도 다 통하는 이치. 그것을 진리라고 하고, 또 만약에 어떤 출가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든지ㆍ어느 인도에서만 해당된다든지ㆍ아니면 한국에서만 해당된다든지 이런 경우. 이것은 진리가 아니고 방편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소소한 계율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서 “巳時(사시)가 넘어가면 식사를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옛날 시계가 없어가지고, 햇빛 그림자를 가지고 재었거든요. 그런데 손가락 한 마디만 넘어가면 벌써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어놓은 금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 지나가면 벌써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먼 데서 탁발해서 사찰까지 돌아오는 동안에 그 시간을 놓친다 말입니다.
그런데 배는 고프고, 탁발은 해왔고, 시간은 지났고, 이것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 정말 계율근본 주의자는 안 먹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계율근본 주의자는 절대로 안 먹어요. 시간 지났기 때문에 파계다 이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우스운 이야기지요.
또 농사도 못 짓게 되어 있고ㆍ밥도 직접 지어먹지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 너무나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요. 이런 것은 “비 진리다ㆍ방편이다. 그 상황에 맞추어서 이야기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민족ㆍ어느 국가ㆍ어느 사회에서든지 다 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진리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어디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편이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방편 상 그 지역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通方之洪規.
화엄경의 도리는요? 사실은 이런저런 방편의 이야기도 없진 않습니다만,
그것은 화엄경에서는 설사 방편의 이야기가 있어도, 소승교리가 있습니다.
있어도 그것을 소승교리로 보질 않습니다. 계율 같은 것도, 저기 뒤에 넘어가면 우리가 이제 보겠지만, 여기 모인 대중은 다 청정한가? 라고 묻는 이것이 계율이냐?ㆍ예 라고 대답하는 이것이 계율이냐?ㆍ화상이 계율이냐?ㆍ아사리가 계율이냐?ㆍ삼사칠정이 계율이냐? 화엄경에서 이런 식으로 해놨습니다. 그래서 그 계율을 철저히 잘 지키되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것. 구애받지 아니하면서도 또 철저히 지킬 줄 아는 것.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정말 불교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면 그러한 이치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도 모순이 아니고 그것이야말로 정말 이치에 맞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稱性之極談(칭성지극담)이라 그랬습니다. 稱 性.
우리 본성에 칭합하는 지극한 말씀이다ㆍ성품에 칭합하는 지극한 말씀이다. 우리 마음의 이치에 어긋나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지요.
그것은 佛說(불설)일 수도 없고ㆍ불교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불교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一佛乘(일불승)의 가르침.
一乘之要軌也(일승지요궤야)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大乘(대승)ㆍ또는 一佛乘. 이것을 제가 인불사상이라고 그런 표현을 하는데요.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또는 화엄경에서 냉정하게 우리가 이야기하면 만물이 다 부처님이다ㆍ삼라만상이 다 부처님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화엄경에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一佛乘. 일승의 아주 요긴한 궤범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다음
尋斯玄旨(심사현지)하고
却覽餘經(각람여경)하니
其猶杲日麗天(기유고일려천)에
奪衆景之耀(탈중경지요)요
須彌橫海(수미횡해)에
落群峯之高(낙군봉지고)로다
이 현묘한 뜻을 찾고 나서 다시 다른 경전을 보니 마치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에서 빛남에 온갖 빛의 빛남을 다 빼앗은 것과 같고, 수미산이 바다에 가로 놓임에 온갖 봉우리의 높음도 다 떨어짐과 같도다.
이 玄旨. 아주 이 현묘한 뜻을 찾고 나서 청량스님께서 다시 다른 경전을 보니, 其猶杲日麗天(기유고일려천)에 奪衆景之耀(탈중경지요)요
마치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에서 빛남에 온갖 다른 빛의 빛남을 다 빼앗아 버린 겁니다. 태양이 밝게 비출 때 다른 빛이, 형광등이 아무리 밝고, 예를 들어서 수 만촉짜리 전기를 켰다한들, 태양 빛에 그것이 빛날 까닭이 있습니까? 불을 켰는지ㆍ안 켰는지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화엄경과 다른 경의 그 격차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청량스님 같은 분이 어찌 화엄경만 봤겠습니까? 그 화엄경현담에 인용한 서적이 여러 수 백 종류입니다. 儒敎書(유교서)ㆍ道敎書(도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불교경전만 수 백 가지를 인용을 했을 정도로 그야말로 그 인물 자체가 그대로 대장경입니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 화엄경과 餘經. 다른 경전을 비교 했을 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須彌橫海(수미횡해)에 落群峯之高(낙군봉지고)로다
예컨대 저~ 태평양 바다에 수미산이 우뚝 솟았다고 하자. 그랬을 때 다른 시시한 산봉우리 같은 것은 그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요.
다 떨어짐과 같다. 이렇게까지 표현했습니다. 화엄경은 그래서 우리가 평생 불교에 귀의하고ㆍ프로인 출가 사문이 돼가지고도 사실은 화엄경과 깊은 인연을 맺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 다행히 이렇게 화엄경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개인의 어떤 관심과 노력에 따라서 정말 제가 설명하지 못한 그 드넓은 내용들ㆍ깊은 내용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그런 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다음에
제9門, 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感慶逢遇(감경봉우)]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인데요. 화엄경 만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한다.
이 뜻입니다.
1, 널리 펼치게 된 근본 이유[弘闡源由(홍천원유)]
是以로 菩薩(시이보살)이
搜祕於龍宮(수비어용궁)하시고
大賢이 闡揚於東夏(대현천량어동하)하시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비전을 용궁에서 찾아냈으며, 대현이 동하에 크게 드날렸다.
저는 정말 평생 스님들 교육에 몸담고 살았습니다만, 만년에, 아직 만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무튼 이쯤에 와서 많은 스님들 모시고 화엄경 공부를 다시 같이 할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온 힘을 여기에 다 쏟고, 정말 공을 많이 들입니다. 여기 청량스님께서 화엄경 만난 것을 너무 기뻐하는데요.
是以菩薩 搜祕於龍宮(시이보살 수비어용궁)이요. 그랬습니다.
보살이 용궁에 秘藏(비장) 되어 있는 것을 찾아왔다ㆍ찾아냈다. 그랬어요. 이것은 용수보살이 부처님열반 500년 내지 600년, 기록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있는데 한 5ㆍ600년경에 이 화엄경을 말하자면 세상에 드러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찬게도 “용수보살약찬게” 이런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佛法大海(불법대해)라고 하는 그 중심에, 龍宮이라고 하는 것은, ‘큰 바다가 있다. 바다를 주재하는 龍宮이 있다.’ 이런 어떤 전설에 의해서 ‘佛法大海라고 하는, 불법이라고 하는 큰 바다.’ 그런 표현은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 큰 바다의 어떤 중심에 총 본산이라고 할까요?
그 중앙에서 말하자면, 화엄경을 이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바다의 중심에ㆍ가장 중심에 있는 말하자면 용왕을 데려오듯이 그야말로 불법의 큰 바다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ㆍ가장 요긴하고ㆍ가장 중요한 화엄경을 찾아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大賢闡揚於東夏(대현천량어동하)로다 그랬습니다.
大賢이, 큰 현인이 東夏. 중국에다가 크게 화엄경을 드날렸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처음에 번역하신 분이 불타난타라고 각현스님이 번역을 했고ㆍ그 다음에 지엄스님ㆍ법업스님ㆍ일조삼장. 이런 분들이 화엄경을 많이 드날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는 이 80화엄은 실차난타라고, 측천무후의 명에 의해서 서역에 가서 화엄경을 완재를 가져오고, 또 이 화엄경을 제대로 번역할 그런 스님을 모셔서 번역해서, 정말 신라 때 스님들은, 원효스님이라든지, 이 80화엄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기 전에는 60화엄밖에 못 봤습니다. 후대에야 이 화엄경이 완전히, 인도에서 와가지고 이렇게 전해져서 그 후로는 모두가 우리가 공부하는 이 80화엄을 보게 되었지요. 그래 큰 현인들이 중국이나 한국에 이런 동쪽으로 화엄경을 크게 闡揚하게 되었다.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2, 만난 것을 감격함을 밝히다[正明感遇(정명감우)]
화엄경 만난 것을 너무 감격해한다. 그런 내용인데요.
顧惟正法之代(고유정법지대)에도
尙匿淸輝(상닉청휘)러니
幸哉(행재)라 像季之時(상계지시)에
偶斯玄化(우사현화)하고 況逢聖主(황봉성주)하며
得在靈山(득재영산)하야 竭思幽宗(갈사유종)하니
豈無慶躍(기무경약)이리요
돌아보니 정법 시대에도 오히려 맑은 빛이 숨었으니 어찌 경사스럽다행하여라. 상법과 계법의 시대에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으며 더욱이 성주를 만났으며 영산에 있으면서 생각이 그윽한 종지에 다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럽지 아니한가.
顧惟正法之代(고유정법지대)에도 尙匿淸輝(상닉청휘)어늘 그랬습니다.
돌아보건대 正法 시대에도 오히려 맑은 빛이 숨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용수보살이 불멸 500년 내지 600년경에 화엄경을 말하자면 이렇게 세상에 펼치게 됐으니 正法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숨어 있었다ㆍ드러나지 아니했다ㆍ이해가 안 됐다ㆍ 화엄의 도리가 제대로 이해가 안 됐다.ㆍ그래서 세상에 크게 드날리지 못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오히려 그 맑은 빛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幸哉(행재)라 像季之時(상계지시)에 ←이것은 像法ㆍ季法(상법 계법). 이렇게도 해석 하는데, 像法의 끝자락에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연대를 감안해서, 예를 들어서 500년ㆍ500년ㆍ500년ㆍ500년ㆍ500년, 금강경에 있듯이 이렇게 우리 오 500년을 칠 때, 제일 500년은 정법 시대이고ㆍ그 다음에는 상법 시대이고, 크게 세 가지로 치면 정법ㆍ상법ㆍ말법, 季法이라고도 하고요. 그 다음에 解脫堅固(해탈견고)ㆍ禪定堅固(선정견고)ㆍ多聞堅固(다문견고)ㆍ塔寺堅固(탑사견고)ㆍ鬪諍堅固(투쟁견고).
이렇게 500년씩, 500년씩 잘라서 시대를 이야기하는 그런 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시간적으로 볼 때, 상법 끝자락이라고 하는 것은 청량스님께서 서기로,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1860년경에 말하자면 이 화엄경을 만나서 이 서문을 쓰고, 주서를 쓰게 됐다. 그런 뜻에서
상법 끝자락 때에 偶斯玄化(우사현화)라.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다.
玄化라는 뜻도 또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째서 현묘한 교화냐?
지음이 없이 짓는 것ㆍ또 수행을 하되 수행을 하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성불의 법.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현묘한 교화입니다.
곧 돌아오는, 예를 들어서 망상을 없애고ㆍ번뇌를 없애고, 선한 일은 많이 쌓고ㆍ복덕을 많이 쌓아서, 그래서 그 결과로 얻어진 성불이다. 라고 하는 그것은 玄化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차원이 낮은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입장에 있어서는 무슨 참선을 해야 된다ㆍ3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ㆍ번뇌를 제거해야 된다ㆍ6도 만행을 닦아야 된다. 하는 그런 조건에 의해서 성불한다는 것이 아니고, 본래성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ㆍ그래서 玄化라고 합니다. 아주 현묘한 교화지요.
이것 참, 그래서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뭔가 하는 것이 있으면 아주 쉽지요. 번뇌를 제거하고ㆍ공덕을 닦고, 뭐 이런 것이 있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하면 쉽게 이해하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본 성불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사람만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두두 물물ㆍ삼라만상이 皆成佛(개성불)입니다. 다 불도를 이룬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물론 그런 가르침은 선종에서도 많이 이야기하지요. 선종에서도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런 입장을 드날리기 때문에 이것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차원 높은 가르침을 만나게 됐다. 이 말법시대에 우리하고 다 포함해서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말법시대에 참~~ 이런 기기묘묘한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만나게 됐다.
거기에다가 청량스님 자신의 시대를 이야기하는데,
況逢聖主(황봉성주). 하물며 성주를 만났다 그랬어요.
聖主라고 하면 아주 聲明(성명)한. 성스럽고 밝은 천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측천무후도 포함됩니다. 물론 그 분, 한 분만이 아니라 나라의 천자가ㆍ천자가 불교를 좋아하고ㆍ불교를 이해하고 수행할 사람들을 이렇게 뒷받침 해줘야, 출가를 해서 도를 닦을 사람들이 정말 마음 놓고 수행하고ㆍ전법하고ㆍ포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량스님당시는 그런 정치적 환경ㆍ사회적 환경이 불교공부 하기에 너무 좋았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왜냐? 천자가 불교를 아주 좋아했고,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에요.
거기에다가 또 청량스님이 어디 계셨는가? 得在靈山(득재영산)이라. 이것 영축산이 아닙니다. 청량산을 말하는 겁니다. 오대산. 여러분 중국 오대산 많이 가보셨지요? 우리나라도 물론 오대산이 있습니다만, 중국 오대산에 가면 그 중심 되는 사찰에, 중심 되는 법당에 7처9회의 현액이 쭉~ 붙어있습니다.
저는 그것 보고 참, 너무 감동했는데요. 중심 되는 법당에 화엄경 7처9회의 명칭이 문 마다 쭉~ 붙어있습니다. ‘아~ 참! 여기가 청량국사가 화엄경소초를 집필하던, 그래서 이 오대산으로부터 화엄경이 만 천하에 알려지게 된 그런 도량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 여기 신령스런 산이라고 하는 것은 청량산, 오대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산이, 다섯 봉우리가 우리나라 오대산하고 유사한데가 있어서, 우리나라 오대산도 그 이름을 땄지요. 그리고 거기는 문수보살이 사시는데 아닙니까?
“문수도량” 이라고 그러지요? 중국 청량산도 그렇고, 우리나라 청량산도 그렇고요. 산을 가지고 비교하면 사실 우리나라 오대산이 훨씬 수려하고 좋아요. 정말 덕산이고요. 나무도 많고요. 개울물도 훨씬 맑고 좋고요. 뭐 산 형태를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청량국사는 자신이 그 좋은 신령스러운 산, 청량산에서 화엄경을 공부 하고 화엄경소초를 집필하게 됐다.
나는 너무 다행한 일이다. 거기다가 竭思幽宗(갈사유종)이라.
말하자면 그윽한 宗旨(종지)를, 그 생각을 거기다 다 할 수 있었다.
생각이 그 그윽한 宗旨에 다 가서, 다른 생각 안 하고 이 화엄경의 깊은 도리에 내 생각을 다 바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豈無慶躍(기무경약)가? 그랬습니다. 어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지요. 이 청량국사가 이 豈無慶躍가? 하는 이 대목을 스스로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疏(소)에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 너무나도 감동스러워서 이것을 한 번 스님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내 생각을 그윽한 종지에 다 바치고 이럴 수 있으니 얼마나 내가 복이 많고 다행한 사람이냐? 그리고 정치적으로ㆍ사회적으로 불교를 펴기ㆍ화엄경공부 하기 너무 좋고ㆍ그리고 내가 있는 이 도량도 너무 좋다.
그런 의미가 여기에 다 포함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 이 세상에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화엄경은, 화엄경은 비로자나부처님의 근본저택이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근본저택이 바로 이 화엄경이다. 화엄경 안에 들어가면 비로자나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뜻입니다. 근본저택이다. 또 보현보살의 심장이다. 이 화엄경이 보현보살의 심장이다. 그랬습니다.
또 이 화엄경은 일체 제불이 증득한 것이다. 모든 깨달은 분들이 다 그 깨달음의 내용은 화엄경의 도리다. 그리고 일체보살이 수지한다.
전부 화엄경을 수지한다ㆍ모든 보살들은 전부 화엄경을 수지한다. 그리고 이 화엄경의 도리는 성품, 우리의 본성과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 우리 본성과 현상을 다 남김없이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화엄경은 세상의 이치, 세상의 이치와 인생의 이치. 그 이치를 꿰뚫는 지혜. 이치와 지혜. 이것은 다르지요. 그 이치가 나의 인격이 됐을 때 그것은 지혜입니다.
그것이 이 화엄경에서 圓融(원융)하게 다 무르녹아 있다. 그래서 아무나ㆍ아무 손에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아무 손에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그러잖아요. 우리가 강원을 나왔다한들, 저도 어릴 때 화엄경 끝까지 다 봤습니다. 어릴 때만 해도요. 뒤에는 현담만 본다든지ㆍ나중에는 입법계품만 본다든지, 그것마저도 안 하고 그냥 화엄경 구경도 안 하고 졸업한다든지ㆍ등등, 설사 끝까지 다 봤다한들 그것 뭐 얼마나 이해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다행으로 이것은 청량스님 말씀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이끌어다 생각해도 이것이 무슨 행운으로 우리가 이렇게 받들어 지니고, 또 비록 서툴지만 이렇게 강의를 듣고 공부할 수 있게 됐는가? 이것은 너무 다행이다 이겁니다. 저~ 서문에도 있었습니다. 積行菩薩(적행보살)도 曝鰓鱗於龍門(폭시린어룡문)이요. 그런 표현이 있었지요? ←(12강-1) 수행을 상당히 쌓았다 하는 보살도 화엄경의 도리는 僞言(위언)했어요. 다 알지를 못했습니다.
또 上德聲聞(상덕성문)도 杜視聽於嘉會(두시청어가회). 이런 말도 있었지요? ←(12강-1) 부처님의 10대 제자 같은 그런 아주 덕이 높은 성문들도 화엄경법회가 있다는 소문만 들었지, 그런 근사한 법회가 이 세상에 있단다 하는 소문만 들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봉사와 같았고ㆍ귀머거리와 같았다. 이런 표현 아닙니까? 서문에서 우리 읽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무슨 행운으로, 청량스님이 그래요. 나는 도대체 무슨 행운으로 이 그윽한 그 깊은 지취를 찾게 되었는가?
그러면서 제가 정말 감동한 내용입니다. 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 사실은 제가 이 이야기 한 마디 전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 그랬습니다. 나는 화엄경에 목숨 바쳐도 좋다ㆍ나는 화엄경 공부하다가 죽겠다. 그래서 이 화엄경에 대한 청량스님의 연구서 제일 많습니다. 제일 많아요. 아~! 얼마나 이 화엄경에 감동 했으면 得其死所(득기사소) 그랬어요. 得其死所라. 그 죽을 곳을 내가 얻었다.
‘내가 어디서 죽을까?ㆍ어디서 죽을까?’ 그 동안 수십 년 생각하다가 화엄경보고, 바로 화엄경에서 죽어야 되겠다. 得其死所라. 화엄경을 보고, 내가 죽을 곳을 내가 얻었다. 기꺼이 이 목숨 바쳐 내가 여기서, 화엄경에서 죽겠다. 얼마나 근사한 표현입니까? 그 속에는 모든 의미가 다 포함 되어 있습니다.
우리 고려 때 보조 지눌스님, 보조 지눌스님도 이 화엄경을 송광사에서 머리에 이고, 지눌스님이 華嚴合論(화엄합론)을 요약한 책이 세 권 있어요. 지눌스님을 우리는 “보조선사ㆍ보조국사” 이러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화엄학자” 라고 합니다. 왜냐? 화엄경에 대한 연구서가 양적으로 제일 많아요. 보조스님은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그런 역사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