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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등 당시 활동했던 의원들의 후손으로 구성된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홍현(김만철 특경대원 손녀), 김진원(김옥주 의원 아들), 김정륙(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김옥자(김웅진 의원 딸), 노시수(노일환 의원 조카), 이영국(이봉식 조사관 아들)씨등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2024년6월6일 현충일, 이 날은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민족의 전도 양양한 발전을 꿈꾸던 때,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만행을 저지른 날이다. 1949년 6월6일 중부경찰서 경찰병력을 동원 적반하장의 행위를 자행하고 강제해산 시킨 것이다. 그 한달 전 이승만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찾아와 김상덕위원장을 만나 ‘살살 해주면 장관 준다.’는 회유를 하고 거부하자 친일과 미국의 지시를 받는 반민족 경찰 그룹을 사주하여 일어난 일이다.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을 겸직하고 있던 당시 검찰총장 권승렬도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압수당했다.
이 날을 맞아 오후 2시 반민특위 본부 터(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현 스탠포드호텔 앞 집결) - 나석주 의거 터 - 조선 귀족회관 터 - 이재명의거 터 - 이완용 집터(조중응 집터) - 명동 가톨릭회관으로 가서 오후3시 부터 ‘반민특위 강제 해산 75년 기억행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4시30분경 전 중부경찰서 정문에서 ‘반민특위 강제해산 사죄 촉구 기자회견’을 하였다.
주최는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 후원민족문제연구소,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우사김규식선생기념사업회, 시민모임 독립, 청년백범등이다.
주최측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제헌국회 법률 3호로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근거로 전 민족의 성원 속에 1948년 9월 출범했다. 하지만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1949년 6월 6일 경찰 을 동원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한 데 이어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백범 김구 암살 등을 통해 결국 반민특위가 강제해산되면서 친일청산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동안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국가 차원의 기념사업은 전혀 없었다. 제22대 국회 출범에 즈음하여 반민특위의 시대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했다. 뜻있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라고 하였다.
반민족행위에 대한 처벌은 시한이 없다. 지난 75년은 1만년 민족사에 있어 짧은 기간이다. 그 반민족의 죄악의 발본색원만이 덥이다 사진 노태구
제헌헌법 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새롭게 탄생할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 같은 헌법적 근거를 토대로 1948년 8월 5일 제40차 국회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긴급동의안으로 내놓았다. 일부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표결에서 재적 155명 중 가 105, 부 16의 압도적인 지지로 이 긴급동의안은 통과되었다. 긴급동의안 통과 직후 국회는 입법 제안자인 김웅진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고 28명의 의원이 참여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6월6일을 아는가? 1949년 6월6일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무장한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강제해산시킨 날이다. 그리고 1년 뒤 민족상잔과 1956년 대통령령에 의한 현충기념일이 하필 6월6일이다. 1956년 그날이 바로 망종(芒種)이기는 하지만, 반민특위 해산을 덮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현충일은 69주년이다.
예로부터 보리를 수확하고 모내기를 시작하는 망종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좋은 날 중 하나로, 나라를 지킨 이들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6월 6일에 병사들의 유해를 안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는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해 진정한 자주와 독립의 나라로
거듭나야 할 때이고 특히 현충일에 욱일기를 거는 정신나간 종자가 있으니 진정 그 매국 매족의 뿌리는 깊고도 크다. 이제 또 일본에 의한 민족적 비극이 재현되려는 시점에서 반민족,비민주,몰민생의 독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민족적 비극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 사회를 본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7대 김원기 의장, 20대 문희상 의장에게 반민특위 명예회복 요청 공문을 발송했지만 무응답이었고 21대 국회에서는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 법인 등록 신청이 반려됐다”며 "22대 국회에 포괄적인 명예회복 조처를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모두의 배후에는 강대국의 이익에 동조하거나 굴복한 세력의 영향력이 존재한다.
따라서 민족존영의 길은 반민특위의 부활과 특별볍제정을 통한 원점에서 부터 다시 시작하는 물리적,벌률적,역사적 해석과 판단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댓가 지불만이 그나마 원천적 접근 방식이다.
2019년6월6일 처음으로 반민특위 해체의 하수인 중부경찰서를 둘러싸고 사과를 요구하는 행사를 하는 광복회 중심의 단체들 사진 권오철
‘진실과 화해’라느니 이런 모호한 이야기로 어물거리며 국고만 축내는 행위는 결국 어줍은 면죄부만 줄 뿐이다. ‘반민특위 부활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100년이 지나도 그 문제는 풀어야 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기필코 그에 상응하는 깨달음을 참교육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오년전 중부경찰서를 광복회등 관련 단체들이 둘러싸고 회견을 하고 했지만 그 당시 어리버리 길가에서 주운 권력을 즐기던 文정권도 그저 그런 정도로 마무리 하고 말았다는 교훈을 통열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 권오철 기자)
친일 청산은 과거의 위협이 아니리 현재형이다. 현충일에 욱일기가 걸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 대한 사적인 보복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미 그 만족이 대한 韓流는 시작되었다. 지구촌 시대에 무슨 민족이며 그 민족도 조작된 이데올로기며 그런 궤변으로 덮을 사안이 아니다. 코리아의 민족주의는 대범하고 중도이며 휴머니즘적이다. 일본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다고 해도 이 땅에서는 이상하게 생각지도 않고 차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서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저차원적 이지메로 멸시한다는 차이이다. 그래서 한 번은 일본은 참교육을 해줘야. 귀축미영하다가 맥아더를 신으로 추앙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얼빠진 사고방식의 그들에게 맞는 댓가 지불과 앞으로 후손에 떳떳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진 권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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