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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과 오늘은 인사하고 우리가 말씀을 듣겠습니다. 어떻든 이래저래 약간의 예배를 준비함 함에 있어서 불협함이 있었는데 인사할 때 그래도 은혜 받겠습니다. 인사하고 말씀 듣겠습니다. 시작
그래도 은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우리가 읽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1절 말씀은 아주 단순하게 기록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에는 이런 문장이 아주 여러 번 등장해요. 그렇지만 1절 말씀에는 우리가 쉽게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간과하면 안 되는 내용들이 들어있어요. 첫 번째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블레셋의 지배를 받게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간이 생각보다 아주 길어요. 이스라엘의 범죄로 블레셋의 지배를 받았는데 40년 동안 긴 시간 동안 블레셋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우리가 범죄를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범죄는 하나님이 아닌 원수의 지배를 받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한다면 반대로 불순종은 우리의 원수의 지배를 받게 합니다. 순종이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둔다면 불순종은 우리를 원수의 지배 아래에 둡니다. 불순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가 되게 하고 식민지가 되게 하고 그리고 고통받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한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번째로 1절 말씀에서는 사사기의 일반적인 이야기의 형태가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이야기들은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셨고 침입을 받게 하신 거죠. 그러면 이방인들의 학대가 커지게 되겠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셨어요. 이것이 사사기 내러티브의 특징이에요. 사사기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13장 1절에서는 하나가 딱 빠져 있어요. 뭐가 빠져 있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빠져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도 들어 있고 또 이방 민족의 침입도 있고 그리고 그렇지만 사사도 등장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도 하시지만 뭐가 빠졌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부르짖음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등장하고 있지 않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합리적인 이유는 이제 사사기 13장이면 거의 사사기가 끝나갈 무렵인 거예요. 이제 사사들의 통치가 길어졌어요. 길어지면서 어떤 현상이 이스라엘에 생겼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이 와도 고통을 당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신앙이 형편없어졌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조금만 고통이 와도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이제 이게 길어진 거예요. 사사의 통치가 길어졌어요.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웬만한 어려움과 웬만한 고난이 와도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 부르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손에 있었던 기간이 무려 40년입니다. 40년 동안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어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모든 열매들은 부르짖음과 직결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부르짖음이 많은 교회에 열매가 많고 부르짖음이 많은 가정에 열매가 많고 부르짖음이 많은 사역에 열매가 많게 됩니다. 부르짖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열매가 있을 리가 없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마노아입니다. 2절인데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 아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이 마노야의 삶, 그러니까 삼손의 아버지의 삶이죠. 삶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대표하고 있어서 부르짖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니까 임신하지 못한 기간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지 않는 거예요.
블레셋의 통치가 길어졌음에도 부르짖지 않고, 그리고 임신하지 못한 기간이 길어져도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부르짖지 않았기 때문에 블레셋의 통치가 길어졌고, 그리고 부르짖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자가 등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르짖을 우리가 하나님께 날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할 우리가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교만이 있다는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걸 잊어졌을까?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교육받지 않는 세대들이 등장하게 된 거예요.
왜 부르짖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았어요?
부르짖음이 어떤 역사를 만드는지를 배우지 않아서 이 세대가 사사기에 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침공이 있었고, 식민지의 삶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이 부르짖어야 할 존재임을 망각하게 만들어요. 내가 날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을,
기도란 이 호흡이 없으면 내 영혼의 생명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교만하게 되면 모르게 돼요. 그래서 사람이 교만하면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왜 교만해질까요?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교만해지는 거예요.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참 놀라운 것은 그 가진 것이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만해진다는 거예요. 정말 사소하고 아주 작은 것, 누가 봐도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도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과오를 범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 얼마나 복인지 잘 몰라요. 내가 하나님을 부르짖을 상황에 처하고 그것 때문에 날마다 내 속에 내 삶에 기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잘 모릅니다.
부르짖음을 멈출 수 없는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생보다는 훨씬 더 낫고 훨씬 더 멋진 삶이에요. 삶의 어려움이 있어요. 교회에 어려움이 있어서 부르짖어야 해요. 근데 이거는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뼈가 녹는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생보다는 훨씬 더 낫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과오를 범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교만해진 거죠. 자신이 가진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여유나 자신의 건강과 자신의 성공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될 그리고 부르짖어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어요. 부르짖으면 명령이자 하나님의 또한 약속이기도 해요.
기도는 미신적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자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또 한편으로 보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해요. 기도가 멈춰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이유가 곧 기도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
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범죄를 저지를까요?
생각보다 그 일은 아주 단순해요. 자기가 가진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쓸모없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취급받는 것들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는 거예요. 어리석기 때문인 거죠.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은 교만하기가 어려워요.
어리석은 사람이 교만한 거죠.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면 쉽게 교만해질 수 없어요. 지혜가 없어서 우리가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에서 시편 기자는 광풍 가운데 살아가는 뱃사공들이 뱃일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복되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새벽에 한 번 묵상했죠. 시편 107편에는 광풍 가운데 살아가는 뱃사공들 여러분 바다의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육지에서 경험할 수 없는 두려움인 거예요. 그러니까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두려움이에요. 뱃일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더 복되다는 거예요. 왜 복되다고 하냐 하면 자기의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기 때문인 거죠. 너무 큰 파도로 인해서 너무 힘듦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뱃사공들이 복된 사람이라고 시편 107편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해지고 교만함으로 인해서 부르짖어야 할 시간에 부르짖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짖어야 할 시간에 여러분을 부르짖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 시간이지만 잠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지금 부르짖지 못하고 있을까 내가 날마다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왜 소리치며 울부짖으며 기도하지 못하고 있을까 나는 과연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살 만큼 평화로운 삶을, 안전한 삶을 내가 살고 있을까 한 번쯤은 오늘 고민해 봐야 됩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기도를 부르짖음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소유가 여러분이 가진 것이 부르짖음을 기도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고 그 고난 때문에 여러분이 부르짖게 된다면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닌 거예요. 부르짖지 않을 때 고난인 거예요. 고난 때문에 부르짖으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난 때문에 부르짖지 못하면 그것은 진짜 인생의 고난이 된 거예요.
어려움 때문에 부르짖지만 부르짖게 되면 어려움은 더 이상은 어려움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 안에는 축복이 담긴 고난으로 바뀌게 돼요. 기도하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이 담긴 고난이에요. 은혜가 담긴 고난이에요. 어려움 중에 부르짖지 못하면 그냥 고난은 고난이에요.
그러나 어려움 중에 여러분과 제가 부르짖는다면 그 부르짖음에는 축복과 은혜가 담겨져 있어요. 더 이상 고난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소유가 부르짖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부르짖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회적인 지위가 부르짖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능력이 부르짖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나 건강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능력은 기도와 맞바꾸기에는 너무 사소한 거예요. 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해져서 부르짖을 시간에 부르짖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쓰러져가던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웠던 기도가 사라져버렸어요. 범죄를 하면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을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심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짖고, 고통으로 인해서 부르짖고 부르짖은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의 사사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어요. 이게 사사기의 일반적인 이야기의 형태예요. ]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일반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삶에 부르짐이 빠지고 있어요. 그래서 삼손 이후에 정말 최악의 상황들이 이스라엘에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삼손을 보내셨지만 기도는 부르짖음의 소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서 듣기 어렵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이 구원을 보내주기는 하셨어요. 부르짖음이 없어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내주긴 하셨어요. 그러나 그 이후에 엄격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그들 가운데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가장 큰 절망은 뭘까요? 예산이 적은 것 아니요 기도가 사라지는 거예요. 가정의 가장 큰 절망은 뭘까요? 자녀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 취직이 안 되는 것, 경제적인 어려움들 그게 가장 큰 절망일까요?
그 가정의 기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절망도 기도의 소리가 끊어지는 거예요. 힘들고 어려워도 고통스러워도 내 입에서 기도의 소리가 나면 그 사람은 절망은 진짜 절망이 아닌 거예요. 절망으로 포장한 축복이거나 고난으로 포장한 은혜인 거지 진짜 절망이거나 진짜 고난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참 절망을 맛보지 않으려면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해야 돼요. 정말 슬픔을 맛보지 않으려면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해야 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무엇이 방해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이 간절히 부르짖을 그때에 안일하게 살도록 만들고 있습니까?
참석자 1 19:26
인생의 진짜 절망은 절망은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지 않으면서 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많은 실패를 경험해요. 그 실패는 진짜 실패가 아니에요. 실패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짖는다면 그 실패 안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담겨 있는 실패인 거지, 그냥 망하는 실패가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절망은 실패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최고의 절망은 기도하지 않을 때 찾아와요. 기도가 멈춰졌을 때 우리 가정에 최고의 절망이 찾아오고, 기도가 멈춰졌을 때 우리 교회에 최고의 절망이 찾아와요. 기도가 멈춰졌을 때 내 인생에 최고의 절망이 찾아오는 거예요.
기도할 때 만나는 절망은 최악이 아니에요. 기도할 때 경험하는 실패도 최악이 아니고, 기도할 때 경험하는 어둠도 최악이 아니에요. 그 어둠 안에는 빛이 있고 그 실패 안에는 다시 희망이 있는 실패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인생에 문제가 있어도 기도가 끊어지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목장 교회에 와서 잘한 일이 있다면 잘 못한 일이 더 많아서 감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잘하는 일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막 기도에 먹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거예요.
목사가 잘했다는데 아멘도 안 해주시고 이러시면 안 돼요. 어제 심방 갔더니 저보고 자꾸 웃으래요. 아니 여러분이 아멘을 해줘야 내가 웃지 아멘도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웃겠냐고요. 할렐루야
제가 못할 일이 많아요. 여러분 알다시피 성격도 썩 좋은 건 아니고 일에 막 막 몰입하면 또 사람도 잘 안 보여요. 그리고 가끔 성질도 내고 그래도 굳이 제가 잘한 일이 있다고 하나님께 뭘 말해보라고 하면 그래도 에 기도하자고 하는 이 권면을 멈추지 않은 거예요. 할렐루야
왜냐하면 제가 부족해도 기도가 우리 교회의 전부이고 기도가 제 목회의 전부라는 정도는 제가 알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할 수 있으면 그 힘듦에서 여러분이 벗어날 줄 알아서 제가 기도를 강조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이 힘든 걸 도와줄 수 없어요. 가정마다 아픔이 있어요. 제가 어떻게 도와요? 뭐 하러 도와요? 일단 돈은 여러분보다 더 적어요. 다 아시죠? 못 도와요. 그런 사회적인 직위도 이제 목사라는 거 외에는 번번한 게 남은 게 없어요. 사회적인 지위로도 여러분을 도울 수도 없어요. 재능과 달란트도 그냥 오직 교회를 위해서 집중되어 있어서 여러분을 더 도울 수도 없어요.
오직 유일하게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여러분을 기도하게 하는 거예요. 기도의 자리에 앉혀놓는 것. 기도를 못하고 졸고 가도 기도의 자리에 앉혀놓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 여겨서 지금까지 부임하고 계속해서 기도를 강조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한 기도 설교를 가지고 제가 책을 만들었잖아요. 한 번 공부 같이 했죠. 그 이후로도 10번 더 했더라고요. 이제는 한 35가 되는 기도 책자를 만들 수 있어요. 조금만 더 하면 저도 한 50가지 되는 기도 책자를 만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해요. 부족한 제 입에서 기도의 강조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한편으로는 저에게 큰 감사예요. 제가 잘못 어디 꽂혀서 이상계 꽂혔으면 여러분에게 기도를 강조하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부르짖지 않음이 당연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르짖어야 하는 상황인데 부르짖어야 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사랑이 많으셔서 때로는 우리가 부르짖지 않아도 은혜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부르짖지 않아도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그러나 부르짖음이 없다는 그 자체는 그 자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입니다. 내가 부르짖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어요 은혜죠. 그러나 부르짖지 않는 그 자체는 엄청난 절망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기도가 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일의 기도를 또 시작합니다. 이번의 주제는 회개예요. 교회와 가정과 여러분의 우리 개인의 잘못을 두고 100일간 하나님께 회개하려고 합니다. 이게 습관성의 기도이든 형식적인 기도이든 의무적인 기도이든 간에 기도하고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인 걸 알기에 다시 기도를 강조하고 특별히 이번에는 모두가 꺼려하는 회개의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회개는 새로운 시작을 선물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회개는 우리의 믿음을 출발하게 하는 힘이 회개에 있어요. 한국교회가 회개할 때 교회와 많은 목회자들이 새 출발을 했어요. 자녀들이 새 출발을 하고 그리고 가지면 안 되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새 출발하는 역사가 회개 기도할 때 있었어요. 그래서 회개는 새 출발의 힘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멋진 시작을 선물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
회개할 때 영원히 만족하게 되는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다는 거예요. 반대로 회개하지 않으면 진노가 쌓여요.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의 삶 앞에 직로를 쌓고, 반대로 회개하는 백성들에게는 영원히 만족케 되는 일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100일의 기도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존 웨슬레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알 수 있는 한 많은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이게 웨슬레의 말이에요. 하나님은 회개할 때 기도할 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고, 회개할 때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에요. 여러분 회개 없이 영혼의 돌아옴은 없습니다. 눈물로 뉘우치고 돌이힘 없이 영혼의 돌아옴은 없어요. 여러분과 제가 눈물 흘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길거리에 있는 그 어떤 영혼들도 이 공간으로 이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요. 우리가 눈물로 기도해야 되고, 그들 또한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게 할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회개를 통해서 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진 것 때문에 교만하게 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부르짖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 목장 교회에 부르짖음이 언제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새벽도 많이 오셨어요. 부르짖음이 긴 시간 동안 이어졌어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물론 저는 조금 일찍 일어나서 낙엽을 쓰느라고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어떻든 많은 성도들이 부르짐이 끊어지지 않은채 긴 시간 기도하는 건 정말 목회자로서는 영광이고 즐거움이에요.
만약에 이게 30분으로 이어지고 이게 1시간으로 이어지면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떨까요? 우리 교회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가정 안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우리가 기도하고 기도하십시다. 할렐루야 교회 못 오시면 집에서 하세요. 함께하면 되잖아요. 조만간 성도들을 좀 여론을 잘 봐서 옛날에 했던 것처럼 저희가 영상으로 새벽 기도를 밴드로 좀 송출해볼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멀리 있어도 못 오는 분들이 종종 있으시니까 어떻든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