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수(聖水)란 말 그대로 거룩한 물이란 뜻인데 거룩
하다고 하는 이유는 사제의 축복 예식을 통해서 거룩하
게 된 물이기 때문입니다.
1. 물의 상징
우선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물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우선 물은 생명과 풍요를 상징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물이 부족하
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
게 하는 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이라고 말씀하십니
다(요한 3,10-14).
물은 반대로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7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대표적이지요.
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뒤쫓아 오던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 빠져 전멸했다는 이야기도 마찬
가집니다.
물은 또한 정화(淨化)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
가 깨끗해지리이다"(51,9)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슬초라는 풀로 채를 만들어 물에 적셨다가 뿌리는 것
인데, 정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선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우슬초란 말 대신에 정
화수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사 중 성찬전례에서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예물로 바
칠 준비기도를 한 후에 손을 씻으면서 "제 허물을 말끔
히 씻어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하고 기
도합니다. 정화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지요.
2. 성수의 종류
성수에는 일반 성수와 세례수가 있습니다.
같은 성수이지만 세례수는 세례식 때 영세자들에게 사
용하기 위해 축복한다는 점에서 일반 성수와 구별됩니
다.
세례수는 부활성야 예식 중에 축복했다가 세례 때에 사
용하며, 세례성사 직전에 축복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일반 성수는 미사 중에 또는 미사 때가 아니더
라도 별도 축복 예식을 통해 축복해서 사용합니다.
물론 세례수 역시 성수이기에 일반 성수로도 사용됩니
다.
세례수(또는 성수)로 사용하는 물은 자연 그대로의 깨
끗한 물이어야 합니다.
생수, 수돗물, 샘물, 냇물, 강물, 우물물 등은 성수로 사
용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이나 빗물, 눈 녹은 물 등도 성수로 사용할 수 있
지요. 그러나 술이나 침, 우유, 주스, 커피 같은 것은 사
용할 수 없습니다.
정결함, 순수함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예전에는 성수로 사용할 물에는 소금을 약간 넣어서 축
복했습니다. 상하지 않고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지
요. 하지만 이제는 소금을 넣지 않은 채 축복해서 성수
나 세례수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예식에 사용되는 성수
앞에서 말씀드린 물의 상징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식
이 세례성사입니다. 세례성사에서 가장 핵심은 집전자
가 영세자의 이마에 물(세례수)을 세번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
를 줍니다" 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이마에 물을 붓는
것은 옛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죽음과 정화) 하느님
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생명)을 의미하지요. 이는 또
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을 뜻합니다.
또 신자들은 성당에 들어갈 때 입구에 놓은 성수반(성
수를 담아 놓은 그릇)에서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그
으며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
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이때 성수를 찍어 이마에 바르는 것은 주님 집에 깨끗
한 상태로 들어가도록 정화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당을 나올 때는 다시 성수를 찍어 기도할 필
요가 없겠지요.
성수는 이 밖에도 사람이나 사물을 축복할 때도 사용합
니다. 상가에서 고인의 영정에 성수를 뿌리며 기도하
는 것은 고인의 모든 잘못을 깨끗이 씻어 달라는 청원
이 담겨 있습니다.
요즘에는 장엄미사 때나 간혹 볼 수 있습니다만 예전에
는 주일 교중미사 때면 사제가 입당 후 신자들에게 성
수를 뿌리는 성수예식이 있었습니다. 이 예식은 참회예
절을 대신했지요. 정화의 의미와 함께 신자들에게 죄
에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일깨워
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밖에 집이나 자동차, 성물 등을 축복할 때도 성수를
사용하지요.
이때는 정화와 축복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고 할 수 있
습니다.
( 평화신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