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향과 전장, 지리산 의신마을의 두 얼굴(理想鄕-戰場-智異山義神)
개설
의신마을은 지리산 화개동 골짜기 상류에 둥지처럼 에워싸인 아늑한 산간 분지에 터를 잡고 있는 마을이다. 행정 구역으로는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의 자연 마을에 속한다. 대성리에는 의신마을을 포함하여 단천·덕평동·기수곡·평지촌·빗점·삼점·사리암·고사암·송대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지만, 현재는 의신마을과 단천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의신’이라는 마을의 한글 이름은 이 마을에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의신사(義神寺)라는 사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처음에 절과 관련된 사하촌(寺下村)으로 형성되었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 지리산의 청정하고 수려한 자연환경을 갖춘 청학동으로 알려지고, 또 벽소령의 길목이라는 교통의 이점으로 인구가 모여들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 조건은 의신마을의 역사를 청학동의 이상향이면서도 전란의 현장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2010년 말 현재 의신마을에는 총 92세대에 237명[남 122명, 여 11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2000년에는 72세대에 209명[남 107명, 여 102명]이 살았는데, 근래에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마을 인구가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지리산지의 자연환경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 생업을 삼고 있으며, 그 중 고로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산나물, 야생차 등의 산지 작물이 주 소득원이다.
의신사와 사하촌의 역사
의신마을은 처음에 마을 터에 있었던 의신사 등과 같은 여러 암자들이 생기면서 사하촌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신사 혹은 의신암은 17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며, 1611~1680년 사이의 어느 때에 폐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신마을에는 의신사 외에도 대승암, 고대승, 상대승, 동암 등의 절이 있었다.
의신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와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혹은 「속두류록(續頭流錄)」]에 보인다. 남효온은 1487년(성종 18) 10월 1일에 의신암을 다녀갔는데, 그가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절 서쪽은 대나무 숲으로 가득하였고, 방앗간과 뒷간도 대숲 사이에 있었다. 법당에 금칠한 불상 한 구가 있었는데 승려가 의신조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한편 김일손은 1489년(성종 20) 4월 25일에 의신사를 기행했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으며, 절의 벽면에는 김언신·김미라는 이름이 쓰여 있고, 주지 법해(法海)와 30여 명의 승려가 정진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15세기 의신사의 사실을 증명하듯이 현재에도 의신마을 뒤편의 의신사로 추정되는 옛터에는 석종 모양의 높이 175㎝의 법해당(法海堂) 부도가 있다.
양대박(梁大樸)[1543~1592]도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에서 1560년(명종 15)에 의신사를 돌아보았다고 했으며, 유몽인(柳夢寅)[1559~1623]도 1611년(광해군 3) 4월 5일에 의신사를 다녀간 후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의신사 주지 옥정과 시를 읊었던 사실을 적고 있다. 한편 송광연이 1680년(숙종 6) 윤8월에 지리산을 기행하고 적은 「두류록(頭流錄)」에 의신사 옛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이미 의신사가 폐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향과 전란의 땅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
의신마을은 역사적으로 청학동의 이상향이면서도 전란의 땅이었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지리산 화개동의 청학동에 인접한 산간 마을이자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고개 길목에 입지한 지리적 요인은, 마을의 역사를 이상향임과 동시에 전란의 땅으로 만든 배경이 되었다. 의신마을 주민들 사이에 전승되는 믿음 중에 하나로 “전란의 마지막 끝맺음은 의신마을에서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정작 전란의 사상자가 나지 않은 것은 이곳이 청학동이라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청학동 이상향,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가장 유력한 청학동 비정지인 불일폭포에서 북쪽 근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증언하지만 조상들이 피난을 위해 의신으로 들어왔던 사실로 보아 입지 선택 과정에서 청학동이라는 요소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신마을에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 후기인 임진왜란 이후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이후 정치사회적인 혼란과 생활상이 피폐해지면서 민중들이 지리산을 피난처로 인식하면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18세기 이후 지리산 골짜기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 청학동이라는 장소에 대한 지리 정보와 장소 이미지는 지리산 유민(流民)들에게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도참사상이 유행하고 『정감록(鄭鑑錄)』의 비결을 신봉하는 자들의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소문은 지리산 화개동 골짜기를 명당, 길지의 승지이자 “많은 사람이 살 만하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萬人可活 三災不入]” 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하였다. 화개동 골짜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의신마을이 명당, 길지의 청학동 마을이라는 이미지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재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에게까지 유지·존속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의신마을이 청학동의 실제이고, 마을 터는 ‘선학포란(仙鶴抱卵)’의 명당, 길지라는 주민들의 믿음이다.
지리산지에서 민간인이 마을을 이루었던 청학동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이나 현지답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는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과 덕평, 세석평전 및 악양면 매계리 매계마을과 청학골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의신마을은 현재까지 가장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의 청학동 승지로 간주되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의신마을의 인구와 가구 수가 크게 증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단양 우씨(丹陽禹氏)가 제일 먼저 들어왔으나 현재 2가구 정도로 한미한 편이고,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그 다음으로 마을에 입향하여 현재 50% 정도를 차지하는 큰 성씨를 이루었다. 주민 정윤균에 의하면, 8대조 정명일(鄭明日)이 함양 교사리에서 피난을 위해 의신으로 들어왔으며, 일제 강점기 말엽 123호나 되는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경주 정씨는 하동·함양·남원을 연결하던 삼남대로 벽소령을 넘어 의신마을에 안착했으며, 그 후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들어오면서 큰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혁명과 전란의 현장
의신마을은 동학 농민 운동과 항일 의병 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은 벽소령을 통해 하동과 함양, 남원 등지로 이어지는 고개 길목에 입지했기에 전란 시에는 혁명과 의병 활동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1월 말,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항일 의병 100여 명은 의신마을에 내려갔다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틀간 저항했지만 대부분 전사하고, 일부만 벽소령을 넘어 산청으로 대피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그때 숨진 항일 투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을 산허리 양지 바른 곳에 묻고 ‘무명 항일 투사 묘지’를 조성하였다. 지금도 의신마을 주민들은 신년 초하루 아침에 앞당산에서 동제를 행한 뒤 이 묘지 앞에서 제삿밥을 올리고 그들의 정신과 넋을 기린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던 항일 투사 이야기가 실제의 사실로 뒷받침되는 문서도 발견되었다. 『조선일보』 2010년 8월 16일자에 의하면,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지리산 의신계곡에 방치된 공동 무덤의 주인이 항일 투사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서 보관 중인 일제가 작성한 「폭도에 관한 편책」이란 문건에 의하면, 1908년 2월 초순 당시 순천경찰서장이 서울의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첩보에 “하동군 화개면에서 폭도[항일 의병]와 접전을 벌여 50명을 죽였으며, 수명이 부상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당시 진주경찰서장의 보고서에는 “의신·단천마을에서 접전이 있었고, 폭도 수십 명을 죽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6·25 전쟁과 좌우 이념 대립으로 전 국토에 남은 상흔은 의신마을도 비켜 갈 수 없었다. 의신마을을 포함한 인근 지역은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과 토벌대가 격렬하게 교전한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1948년 12월 6일 지리산 화개로 패퇴하여 들어온 여수·순천 사건의 병력들이 의신마을에 나타나서 국군 및 경찰, 대한청년단 기동대원들과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 중대장이 사살되었을 뿐만 아니라 3명이 생포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신마을 위편에 있는 빗점골에서는 1953년 9월 18일에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유명하다.
인근의 대성골은 빨치산이 몰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모두 의신마을 인근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이 치열했다는 것을 증언해 준다. 현재 의신마을 입구의 옛 의신초등학교 자리[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1389번지]에는 2002년에 개관한 지리산 역사관이 있어 지리산과 주민들이 겪었던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알려 준다. 지리산 역사관에서는 지리산에서 삶터를 일구어 온 민중들의 생활상과 빨치산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의신마을 지킴이와 공동체 문화
의신마을 주민들은 수백 년 전부터 수호신으로 마을에 당산 신을 모셔 두고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빌며 동제를 올리고 있다. 의신마을에는 뒷당산과 앞당산이 있는데, 뒷당산은 마을 뒤의 산중턱에 있으며 500년 이상 된 당산목이다. 앞당산은 마을 입구의 도로 가에 있으며 솟대를 갖추었다.
앞당산의 원래 위치는 현 위치에서 조금 위편으로 마을로 들어오는 옛 길의 어귀였지만 도로가 새로 나면서 마을의 주 입구가 바뀌자 2008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솟대는 길이 5m 높이의 나무 기둥에 역시 나무로 깎은 갈매기를 앉혔으며, 풍수적인 비보(裨補)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의신마을 터는 풍수적으로 배 형국[行舟形]으로서, 배에는 돛대가 필요하다고 해서 예부터 조성하여 왔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음력 섣달 그믐날에서 새해 초하루를 넘어가는 시점에 뒷당산에 올라 동제를 올리며, 초하루 아침에는 다시 앞당산에 모여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빈다. 그리고 마을 앞당산 맞은편에 있는 의병 묘에 가서 제삿밥을 올린 후 마을 회관에 가서 마을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의신마을 주민들의 삶과 생활
의신마을은 지리산에서도 풍광이 뛰어난 지리산 화개동천의 상류 자락에 자리 잡아 청정한 먹을거리와 수려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고로쇠·산나물·야생차 등을 주 소득원으로 삼고 있는데, 특히 고로쇠는 전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로쇠 채취와 판매는 마을 주민들의 연소득에서 40% 가량을 차지할 만큼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마을에서는 영농 조합 법인을 구성하여 상품의 운영 및 관리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농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하나로마트 등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마을 인구는 1970년대 이후의 이농 현상으로 급격히 감소하다가 근래에 다시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젊은 외지인들이 이주하여 들어와서 마을에 새로운 활력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전입한 외지인들을 연령대로 보면 60대 이상이 10%,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로 전입한 외지인들의 출신지는 김해, 부산, 창원, 포항 등지나 멀리는 경기도와 충청도도 있다. 생업은 주로 펜션 같은 관광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예술인도 있고, 청정한 자연환경에서 이상적인 삶의 질을 누리고자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의신마을 주민들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적인 생업의 기반을 튼튼히 갖추고자 여러 방면에서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자녀 교육에도 마을 공동체에서 노력을 기울일 뿐 아니라, 산촌 생태 마을, 백두대간 소득 지원 사업, 참살이 마을, 녹색 농촌 체험관, 지리산 반달곰 서식지 조성 등 다방면에서 하동군의 지원을 받아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출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661781&cid=51944&categoryId=54918
첫댓글 https://m.blog.daum.net/benel/5582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