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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령 산친구들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솔바우
로타리 산장.
'로타리'는 20세기 초 1905년, 건립된 단체 이름.
경제공황으로 민심이 황폐해진 미국 시카고의 불황
청년변호사 폴 해리스가 세 사람의 친구와 상의하여
2월 23일 제1회 모임이 세계 최초 시카고 로타리 클럽.
로타리는 회원 각자 사무실에서 번갈아 돌아가며 모임
로타리 이름은 그 독특한 모임 방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클럽은 꾸준히 성장 발전하여, 2004년 11월1일 현재
166개국 35자치령에 529개지구 32,098개 클럽에 회원수
1,211,538명으로 늘어나 국제 로타리 클럽이 구성되었다.
그 로타리클럽이 건립을 지원한 민간인 관리산장.
최초로 민간단체에 의해 세워진 것에 의의가 있다.
부산 경남 일본 미국 대만 로타리 클럽 회원들 헌금.
산장 건립을 도운 이들은 한국 산악회 부산지부 김재문,
대륙 산악회 이원세, 산청군 조명환, 산장지기는 조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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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산장 일박후 새벽 여명 등지고 천왕봉 오르는 길.
연화선경의 실루엣이 환상이고 천왕봉 일출이 아름답다.
로타리산장을 찾아가려면 중산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늘을 찌를 듯 두개 바위가 칼처럼 우뚝 솟아 오른 '칼바위'.
그곳을 분기점으로 '법계사 쪽과 장터목 쪽' 갈림길이 나온다.
칼바위를 지나면 등산로와 100 m 떨어진 곳에 법천폭포가 있다.
법천골은 물줄기 흐름과 관계 없이 법계사 가까이 있어 붙은 이름.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등산로와 동떨어진 법천골을 무심히 지나친다.
'한 물줄기 계곡을 두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계사 위치에서 천왕봉 위용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법계사를 기준으로 위 쪽은 통신골이고 아래 쪽은 법천골이다.
법계사 바로 아래에 서 있는 '로타리의 집'(로타리 산장)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의 3분의 2 지점.
1977년 7월에 기공하여 78년 10월 26일에 완공한 26평 규모
해발 1,400m 매점 숙박비 5,000원 60명 <055-973-1400>
법계사.
한반도 불교전파 후 가장 높은 위치의 사찰 중 하나.
해발 1600m의 깍아지른 절벽 위에 걸쳐 있는 법계사.
2.1km 뒤에 천왕봉이 솟아있고 그 앞에는 로타리산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백담사에서 5시간 남짓 내설악을 올라가면 봉정암.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1,708m) 소청봉 북서쪽
해발 1,244m 봉정암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법계사.
'하필이면 이 높은 곳에 사찰을 건립했을까?'
우리나라의 사찰들은 대부분 깊은 산속에 있다.
지금부터 산 속에 사찰이 있는 이유도 알아보자
불교가 대규모 사찰을 짓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시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
그 댓가로 승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런 행위가 너무 심해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
한편 지방 호족 세력이 득세하며 새 불교 종파들이 성장
9세기 신라는 골품제의 모순을 드러내며 봉건 체제가 붕괴.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게 된다.
이때 등장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으로 정착한다.
또한 평등주의 입장인 선종은 민중의 호응을 받는다.
하지만, 선종 또한 착취자인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호족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게 되자 유랑생활
마침내, 그 착취자인 호족들에 대항해 맞서게 된다.
하여, 선종도 민중 기대에 부응 못하고 산간에 은둔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잡는 선종.'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른 9세기.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극단적인 민중 봉기
미륵 신앙과 도참사상이 민중들에게서 호응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서 민중 속에 파고들기 쉬웠다.
삼국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계층의 주도 하에서 전개
차츰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고, 구제하는 신앙으로 정착.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으로 불교문화를 선도
오늘날까지 사찰은 깊은 산속에서 중생을 선도하게 된다.
법계사가 천왕봉 중턱 위에 건립된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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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동이 트면 가장 먼저 햇볕 맞이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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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석 위에 세워진 3층석탑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
신라 진흥왕 9년(548) 연기선사에 의해 설립된 사찰.
연기선사는 같은 해 법계사 동북쪽에 대원사를 설립.
4년 전 진흥왕 5년(544)에 구례 화엄사와 연곡사 창건.
신라가 가야국을 합병후 지리산까지 영토를 확장한 시기.
신라는 이 시기에 지리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하고
불교 문화 진흥의 근거지로 중요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백제와 남원의 여원재 등지에서는 쉴새없이 전투
그 와중에도 반야봉 북쪽 달궁에 황령정사란 사찰을 설립.
지리산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사찰은 가락국의 칠불사.
칠불사는 한반도 불교전파 최초의 사찰로도 알려져있다.
신라는 칠불사 대신에 법계사를 성역화 하려 했던 것일까?
신라 사찰로 지리산 2호로 기록되어 있는 법계사
불교문화 의미도 깊지만 한반도 수난역사의 현장.
법계사는 일본과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어 온 사찰.
최초의 수난은 고려 우왕 6년(1380) 9월에 불에 탔다..
남원 황산전투에서 이성계 장군에게 패한 왜구들의 방화.
그후 이조시대에 재건되어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
1908년 지리산이 항일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수난.
박동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후 항전,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두번째 화마에 휩싸이는 수난을 겪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후 지리산은 반란군 근거지.
토벌군에 의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세번째 수난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법계사가 망하면 일본이 일어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전해 내려오는 말.
지리산 실상사에도 같은 말이 전해온다.
2005년 10월 3일은 법계사 인근 쇠말뚝 뽑은 날.
(지리산 법계사 인근 옥녀봉 아래 박혔던 혈침)
한배달 민족정기 선양위원회 회원들이 제거했다.
이번 쇠말뚝은 지난 6월에 발견한 것과 비슷.
직경 12㎝ . 길이 1.2m, 무게80㎏ 정도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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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의 유두류록에 법계사에 관해 적혀있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 법계사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 서쪽으로는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이라 한다..는 대목.
1489년 4월 22일,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록.
중산리, 칼바위 거쳐 천왕봉 오르던 김일손
철쭉꽃 하나 꺾어 머리에 꽂고 일행에게도..
...우람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다.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5리쯤 더 가니 법계사가 나왔다. 절엔 중 한 사람
나뭇잎이 널찍널찍 자라나고 산죽은 곱게곱게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다. 잠깐 쉬고 곧 올라가니 돌이 있는데
배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목.
이들 문헌에서 나오는 세존암은 지금의 망바위를 지칭.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천불암과 암법주굴에 대한 견해.
천불암 터는 법계사에서 20∼30분 가량 오르면 있는 암굴.
길이 10 여m, 높이 1.5m가량 비박하기에 적절한 장소이다.
일부 산악인은 이 굴(천불암터)을 암법주굴이라 주장.
암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 천연 수도처로 본다.
그러나 암법주굴과 천불암은 문헌상 따로 표기되고 있다.
하여 문헌상 천불암과 암법주굴은 각각 다른 곳에 위치.
하지만, 암법주굴의 위치는 최근까지도 베일 속 수수께끼.
지리산 제일의 토굴 기도처로 알려진 암법주굴
이성계가 이조 건국하기 전 기도를 드렸다는 곳.
일명 '이성계굴'은 옛 문헌을 통해 전해 왔을 뿐.
최근 '유두류록'의 기록따라 답사하는 지리산행 열풍.
지금까지 베일 속에 가려진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졌다.
('지리산 아흔아홉골'의 답사여행을 통해 밝혀진 것임)
현재, 법계사는 천왕봉에서 남동 방향에 위치해 있다.
전망 좋은 천왕봉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은 남동쪽이다.
천왕봉 남동쪽 아래 암법주굴이 있다면 그 아래 천불암.
즉, 암법주굴 위치는 천왕봉과 광덕사지 사이 토굴.
광덕사골에 있으며 광덕사지의 위쪽에 있는 암법주굴.
거대한 바위가 초가 지붕처럼 튀어나와 지붕을 만들고
그 바위 뒤로도 숲에 가려져 있는 어마어마한 병풍바위
'양지바른 마당 건너 석벽이 담을 친 천혜의 토굴.'
법계사에서 천왕봉 가는 등산로 바로 옆에 있는 석굴.
일부에서 암법주굴이라 하지만 천불암일 가능성이 높다.
암법주굴의 남쪽 아래 있다는 천불암이 곧 '광덕사지' 터.
............ ........암법주굴 찾아가는 길...................
2006년 6월 4일 광덕사지 암법주굴 법계사 답사 산행.
동학혁명 당시 천주교도들 은신처였다는 광덕사지 인근.
광덕사지에는 기도처가 두 곳 있었으며 취나물이 즐비했다.
인적 끊긴 광덕사골따라 오르다 보면 폭포가 수려한 쉼터.
그곳에서 20분 가량 더 오르면, 암법주굴을 만날 수 있다.
암법주굴에서 인적 드문 오솔길따라 나오면 법계사와 만난다.
순두류 자연학습원 위령비 삼거리 금줄을 넘어-신선너덜
-황금능선 늦은목이 안부 - 장단골 지계곡 상단 -
써래봉 삼거리 - 중봉골 - 광덕사지 - 암법주굴-
천왕봉 골 - 움막 - 옥녀봉 - 법계사 - 중산리
.............'와룡산 사랑' 100회 산행......................
법계사는 선조들의 기행문 어사 박문수의 설화도 있다.
박문수는 어머니가 법계사에서 천일기도를 올려 얻었다.
주목껍질을 벗겨 즙을 짜서 밥을 지어 먹고 즙으로 목욕
그 정성이 지극해 부처의 어머니 문수보살이 아들을 점지.
하여 문수란 이름도 문수보살을 의미해서 지은 이름이란다.
법계사는 고려 말 왜구에 의해 불탄 뒤 이조 벽계선사가 재건
하여, 벽계사로 부르게 되었고 그곳의 3층 석탑이 눈길을 끈다.
보물 473호로 지정돼 있는데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산리에서 6km로 천왕봉에서 3분의 2지점에 있는 법계사.
지금은 절 아래 로터리 산장이 있어 등반객이 스쳐 가는 곳.
산장이 없던 시절에 천왕봉을 찾는 등산객이 꼭 들렀던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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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서 천년을 지켜온 왕건태조의 어머니 석상
신라 말 한 부인이 지리산 산신에게 빌어 낳은 아들.
훗날 난세의 후삼국을 통일하니 그가 고려태조 왕건.
그가 어머니 위숙황후의 석상을 만들어 모신 성모사
성모석상은 천년간 지리산을 상징한 신으로 존재했다.
고려 때 성모사당을 지키는 신관을 당지기라고 불렀다.
당지기가 남원 곡성 구례 하동 함양 산청 진주를 순찰하면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륙 일행이 천왕봉 성모사에서 날씨의 쾌청을 기원
그 대상이 바로 이 왕건태조의 어머니 사당인 것이다.
당시 성모사당은 3간 판옥인데 지붕 너와에는 큰 쇠못
성모석상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여 눈길을 끌었다는 대목.
성모석상은 지리산의 흔한 화강암이 아닌 약간 검은 빛 돌.
석상은 쪽진 머리에 얼굴이 둥글고 코가 우뚝한 40대 연령
신라시대 소박한 어머니들의 인상 같아서 친근감이 들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법계사와 성모사는 밀접한 관계.
고려 때 성모사를 찾는 이들이 법계사에 머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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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 동쪽 중턱에 있는 사찰.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544년(신라 진흥왕 5)
조사 연기가 창건 후, 1405년(조선 태종 5) 선사 정심(正心)이 중창
6·25 때 불탄 뒤 토굴 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법당이 준공되었다.
보물 473호 삼층석탑이 있고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찰.
법계사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 보물 제473호.
법계사 아래에는 1978년 10월에 준공된, 60명 수용규모........ 로터리 산장.
법계사에서 천왕봉까지 4㎞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2시간 거리.
법계사와 천왕봉 중간 지점에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개선문,
<천왕봉 아래 500m 지점에 천왕샘> <중산리―천왕봉간 총 5~6시간 소요.>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법계사 1박 후.........., 새벽산행이 바람직.
<법천골 코스> : 중산리 ←2.0km→ 법계교 ←2.0km→ 칼바위 ←1.0km→
법천폭포 ←2.5km→ 홈바위 ←0.5km→ 유암폭포 ←3.0km→ 장터목산장
통신골.
천왕봉의 정상 아래 중산리 방향으로 패인 골짜기.
신(神)과 통(通)한다는 골짜기에서 유래된., 통신골.
천왕성모가 천신의 정기를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철에는 빙벽등반을 즐기는 산악인들 즐겨 찾는 곳.
그 안간 힘, 오름 짓을 거칠게 밀어내며 거부하는 통신골.
천왕봉 일출 인파로 폐허가 된 만큼, 해마다 좁아지는 빙폭.
장마철엔 통신골 폭포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중산리를 할퀸다.
천왕성모의 분노가 하늘의 비구름을 불러모아 재앙을 내리 듯.
통신골은 천왕봉 정상을 떠받쳐주는 버팀목과 같은 역활을 한다.
만약, 이곳 통신골이 무너지면, 지리산의 천왕봉이 무너지게 된다.
천왕봉 관문인 통천문과 이곳 주변은 1945년 8.15 해방 직전 붕괴.
당시 중산리 주민들은 우리나라가 독립을 찾게될 조짐으로 여겼다.
남명 조식 -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오히려 울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천왕봉의 붕괴로 그렇게 생각 했음직도 하다는 중론.
그후 이곳은 여러 차례 무너져 중산리 계곡을 너덜지대로 만들었다.
단순한 자연적 변화라기보다는 인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듯 하다.
로타리 산장 관리인은 통신골 일대 불법 수석채취가 원인이라 주장.
당시 온갖 기계를 동원한 암석채취가 단속을 피해 성행했다고 한다.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이곳 암석 지지층은 언제 무너질지 불안하다.
'<통신골> 폭포는 이곳 주민들에게 신의 계시.'
중산리 주민들에게 법천골의 물골은 생사 여탈권.
법천골이 넘치면 재앙이고 마르면 근심인.. 주민들.
하여, 옛부터 천왕성모를 신앙의 대상으로 떠받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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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정상으로부터 발원한 통신골 물줄기는 법천골을 빚어내고
법천골 발원지 층암절벽 아래 지리산신을 모셔왔던 향적사(香積寺).
- '李陸의 '유 지리산록', 金馹孫의 '두류기행록' 문헌 기록.' -
'천왕봉에서 남서쪽 층암절벽 위에 있었다는 향적사.'
천왕성모 香火를 위해 세운 절이고 법천골 발원지이다.
산희샘에서 천왕봉 쪽 15분거리 장터목 산장에서 가깝다.
현재 터만 남아 천왕봉을 우러러보며 법천골을 내려다 본다.
'통신골 = 천왕성모가 천신의 정기를 받는 곳.'
유암폭포 = 천신 정기를 받은 이후 산후 징후.
통신골 + 유암폭포 = 천왕성모 토속신앙의 성역.
그것이 한 계곡을 둘로 쪼개 '법천골'로 부르는 이유.
중산리를 출발해 새벽 여명을 등지고 오르는 천왕봉.
3 대에 거쳐 선행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
천왕봉 일출과 천왕성모 민간 신앙은 중산리에서 비롯.
중산리는 장터목으로 가는 단순 들머리 만은 아닌 것 같다.
천왕성모는 옛부터 중산리 주민 생사여탈권을 좌우한 존재.
거대한 고인돌 형태의 천왕봉 정상은 천왕성모의 상징이다.
통신골에서 쏟아져 유암폭포로 모인 급류가 법천골을 덮치면, 천재지변.
그것은 곧 천왕성모의 노여움을 뜻하는 것이기에 거역할 수 없는 토속신앙.
삶의 터전이 그곳이고 장터목 물물교환이 생계인 그들에게 천왕성모는 신앙.
천왕성모는 천신(天神)의 정기를 받은 '신의 여자'로 믿고 의지했다.
그것은 구, 신석기시대부터 내려온, 지리산 일대의 뿌리 깊은 토속신앙.
한반도에서도 지리산 주변에 유난히 밀집된 분포도를 갖고 있는 고인돌.
'고인돌은 전세계에 약 7만 개 中 한반도에만 3만 개.'
구석기시대에 바이칼호에서 한반도로 민족 대이동이 있었던걸까?
바이칼호 일대는 구석기시대부터 6세기까지 동서양 문화교류 중심.
환웅족은 바이칼호 주변에서 남진해왔고 석관 돌매장 풍습이 있다.
즉,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반도는 구석기시대 문명의 발상지 아닐까?
천왕성모는 한반도뿐 아니라 서해 저지대 민족들의 토속신앙 아닐까?
빙하가 녹아 서해가 잠길 무렵 지리산은 노아의 방주 역활을 했던 곳.
단군이 아사달로 도읍을 옮긴 후 3달 동안 대홍수.
단군은 아사달(평양) 인근 묘향산으로 대피한 기록.
그당시 한반도의 평야 대부분은 물 속으로 잠겼을 듯.
'지리산은 한반도 천재지변 대홍수로부터의 피난처.'
고인돌은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장사를 지내는 풍습.
한반도는 선사시대부터 동아시아의 고래잡이 중심지였던 곳.
고인돌을 축조, 운반기술은 고래잡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고래 한마리 = 황소 10 마리 = 고인돌) 무계.'
선사시대 고래잡이 운반기술이 고인돌 풍습을 가능하게 한듯.
석관 돌매장 풍습은 선사시대 한반도 조상인 아리안족의 풍습.
한반도에서도 지리산 일대에는 유난히 고인돌 군락의 밀집지역.
'큰돌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사회 믿음.'
즉, 큰돌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한다는 숭배 의식.
한반도 조상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옛 조상이 신과 통하는 정신세계는 언제 시작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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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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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후기에 동물의 뼈, 뿔 등을 이용한 조각들
공주 석장리, 단양 수양개에서 발굴된 고래 물고기 조각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 후기(기원전 1만5천 년~1만 년) 동굴벽화
사냥하는 인물, 동물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묘사
구석기시대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
그들 최대 관심사는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찾는 일.
야생동물과 생사가 엇갈리는 긴장의 연속인 수렵생활
동물의 숨가쁜 호흡과 비명과 선혈이 튀는 그런 현장
당시 표현은 선명하고 사실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미술.
마침내 그들은 정교한 공감주술을 고안해냈는데,
즉 원하는 결과를 모방하면 현실이 된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으로 동굴 벽에 사냥 장면을 그렸다.
예술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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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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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인간은 수렵 채취의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농경과 목축의 생활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듯 보인다.
야생동물과 싸우고 도전하는 삶의 형태에서 탈피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유희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일정한 곳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삶의 형식이 조직화
기능적인 주술 대신에 싹튼., 종교적인 의식.
미술은 이제 단순히 대상의 재현 차원을 넘어
기억의 재현뿐만 아니라 상상의 표현을 더했다.
신석기시대 토기무늬나 장식은 추상적 기하무늬
각양 각색의 곡선이나 직선, 원,
물결, 소용돌이 무늬, 톱날무늬.
<울주 천전리 암각화>
기하무늬가 발생하게 된 원인과 기원은
인류역사에서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 표현, 획일적인 반복
고정된 기호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나타나기 시작
미술은 실제적인 대상의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표현
주술적인 의미가 강렬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줄문 토기발>
원시 미술에서 평행한 사선은 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토기에 그려진 물고기는 중요한 식량
농경 시작후 직선 무늬는 곡선적인 것으로 발전
선을 꺾어 돌리는 번개무늬도 나타나게 되었다.
번개 무늬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천둥을 상징.
조개껍데기 가면, 짐승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이들 조각품은 악귀의 축출을 비는 종교적 의미.
이렇듯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미술은 생활과 직결
청동기시대에 와서부터 중국과 다른 문화를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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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철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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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농기구 사용으로 농사가 발달하면서
평등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사유 재산이 축적
계급이 발생, 사회 경제가 급격히 발전된 시기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등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 그림 등
잔무늬 거울<논산>
인간의 불합리적인 갈등의 내용들이 미술에 등장.
청동기시대 미술은 미적(美的) 충동에 의한 것보다
인간의 신앙세계와 내면세계와 연관된 미술이 등장.
즉 원시적 도덕관념과 신앙형태의 종합적 현상.
청동기시대는 신석기 시대 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문화현상 들이 폭발적으로 등장.
놀라운 예술성과 다산성의 청동기시대 문화 현상이 꽃핀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많은 예술품
청동검과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독특한 것들이 발견
특히 부장품으로 청동검은 지금도 무당들이 무구메 具
청동거울, 방울 역시 오늘날 무당들이 무구로 사용한다.
청동제 말 조각
새나 말의 조각, 혹은 쌍방울을 단 칼자루끝 장식,
말 범의 모양을 한 띠고리, 8방울을 단 의기(儀器)
지배층 무덤인 돌널무덤등에서 출토된 청동제 의기들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 등을 사실적으로 조각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된듯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토우 역시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
<울주 천전리 암각화>
이 시대 미술품으로 학계의 주목을 끄는 암각화(岩刻畵).
울산의 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 동물
사냥과 물고기 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염원
고령의 바위 그림에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기하학 무늬
동심원은 농경사회에서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를 비는 의미.
고인돌.
.............강루리 고인돌..................
산청군 동남부에 있는., 단성면[丹城面]
면소재지 성내리, 북서쪽에 웅석봉(1,099m)
경호강이 동쪽 면계를 흐르다가 남강을 이루며,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면 서남부를 흐른다.
평야는 이들 하천 유역을 따라 길게 분포.
특산물로 매실 밤 인초 특히, 고령토 생산이 많다.
사월리는 문익점 목화 재배지 및 면화 시험 재배지
피서지 백운동계곡, 단속사지(斷俗寺址) 등 유적지.
성내(城內) 강루(江樓) 방목(放牧) 청계(淸溪) 운(雲)
입석(立石) 남사(南沙) 사월(沙月) 묵곡(默谷) 소남(召南)
관정(官亭) 창촌(倉村) 길(吉) 호(虎) 당산(堂山) 백운(白雲)
자양(紫陽) 등 17개 동리, 면적 108.62㎢, 인구 6,424(2000) 명.
산청 강루리 고인돌(山淸 江樓里 支石墓)
낙동강의 한 지류인 경호강 유역 충적대지상에 위치
6기 모두 덮개돌 만 보이는., 개석식(無支石式)고인돌
축조할 때 냇돌(川石) 또는 판돌(板石)을 혼합 사용.
고인돌 1 ~ 3호는 매장주체부로 돌널(石棺)이 있으나
4 ~ 6호 고인돌은 돌널 구조가 없는 형태 고인돌이다.
강루리 3호 고인돌은 지름 17-23㎝ 냇돌을 깔았다.
2호 고인돌의 덮개돌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놓였다.
6호 덮개돌은 2.1×1.05×0.42m이며 남-북 방향이다.
6호 고인돌에서 동북쪽으로 0.8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가로, 세로 2.6×0.5m 석벽이 북쪽으로 면을 맞추었다.
45㎝ 아래에서 구멍무늬토기편(孔列土器片) 1점이 출토.
1·2·4·6호 고인돌에서는 출토유물이 없었으며,
3호 고인돌에서는 붉은간토기편, 빗살무늬토기 1점,
5호에서는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붉은간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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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지금보다 훨씬 면적이 넓었던 한반도.
삼면 바닷가 대부분 육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한반도 일본이 대륙으로 이어졌을 듯 싶다.
'저지대 민족으로부터 유래된 고인돌 풍습.'
현재 바다 속에 잠긴 저지대는 광활한 대륙.
지구온난화로 인해 급속히 녹아 흘러내린 빙하.
해수면이 급상승하자 살 길을 찾아 민족 대이동.
하루가 다르게 바다 속으로 사라져가는 저지대.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목격하며 고지대로 피난.
고지대는 물론 어지간한 산까지 삼켜버린 대홍수.
수많은 저지대 민족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 듯.
한반도로 이주 후 원주민들과 치열한 영역다툼.
청동기에 이어 철기 무기로 무장한 저지대 민족.
원래부터 한반도에 살던 원주민을 정복하고 노예화.
'고인돌은 저지대 민족들 고유의 장례풍습.'
중국 진나라에서의 산사람을 매장하는 순장풍습.
한반도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존재한 순장풍습.
석기시대부터 저지대 민족의 전통풍습으로 추정된다.
저지대 민족들이 점령한 민족들을 노예화한듯.
순장풍습은 당시 계급사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배층이 죽으면 그 노예도 함께 생매장하는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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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뚜껑 덮개돌과 여러 굄돌이 받치고 있는 형태.
무덤 용도로 꾸민 고인돌은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
돌멘(dolmen)이라고 불리우는 말의 뿌리는 켈트어로 추정.
한국 만주 일본 유럽 영국, 북아프리카에 분포되어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전북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
바둑판식 고인돌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 등등.
강화 고인돌은 사적 제137호(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데, 선사시대 고인돌 중 가장 크다.
중국 산동반도와 랴오닝 지역 남부 저장성 부근에도 더러 있다.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에 무려 3만기 고인돌.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있고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
골짜기 강 해안선 따라서 있어 바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고인돌은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자연을 향한 여러 의식을 거행한 듯 보이는 제단 고인돌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전형)은 4개의 돌을 세운 네모꼴
땅위에 네모꼴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이 놓였다.
덮개돌 하중을 받는 긴 벽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나들이 문 역할을 한 짧은 벽 쪽은 대부분 파손.
황해도 평안도 서북지역에 많이 발견되어 북방식.
전남 나주, 경남 거창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바둑판 고인돌(남방식 기반식)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형태.
땅 속 무덤방은 구덩이 돌널 돌덧널 등 여러가지 형태.
구덩이식 고인돌(무지석식·개석식)은 덮개돌만 있다.
전북 고창 지방에 있는 것은 덮개돌은 무려 170t 무계.
고인돌은 상당히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옛 기록으로는 BC 78년 〈전한서 前漢書〉에 처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1200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기록.
금마군(지금 익산군)의 고인돌이 기록상으로는 최초 고인돌.
제천 황석리와 양평리,
달성 진천동 고인돌에서
사람의 뼈가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토기가 있는데
간혹 늦은 시기 고인돌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석기는 대부분 간돌검[磨製石劍]·돌촉[石鏃] 등.
가끔 청동 유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최근 여천 적량동유적에서 비파형동검
드물게, 곱은옥[曲玉] 대롱옥[管玉]이 나오고
사슴이나 소, 동물, 돼지 등 짐승뼈가 발견된다.
이는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에 대한 믿음
고인돌 시대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X'자가 새겨진 자갈돌
옥천 안터 유적과 화순 대전 유적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
양평 양수리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는 3,900±200 BP
안터 고인돌에서는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담양 문학리, 충주 하천리, 제천 함암리 고인돌은 철기시대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나라 고인돌은 늦은 신석기시대부터
조금씩 만들어지다가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른 철기 시대에도 지역에 따라 가끔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언제 어디서부터 유래되었을까?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의 전파설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아직까지 어느 쪽이 맞는 학설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커다란 덮개돌을 옮겨 고인돌을 만드는 기술과 인력.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
발굴한 유적으로 분석해보면 고인돌은 주민 공동체의식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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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 고창, 강화의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알려져왔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덮개돌 무계만 80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중의 하나이다.
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족장 또는 지도자.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와 달리 대부분 농사를 지어 식량조달.
식량관리 및 부족을 통솔하는 족장이 나타난 시기.
족장은 농사가 잘되길 하늘에 기원하는 일도 맡았다.
때로는 식량을 약탈하려는 타부족과 전쟁도 벌렸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강력한 지도자와 세력이 필요했다.
고인돌은 그 부족의 강한 세력을 나타내 보이려는 수단.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 황제의 거대한 무덤.'
그당시 조상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신에게 간다고 생각.
그리고, 그 영혼이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던 듯.
하여, 족장은 자신의 권력에 걸맞은 거대한 무덤을 세웠다.
무덤 속엔 지배자만이 가졌던 청동검 청동방울 등도 묻었다.
고인돌은 족장의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써 만들어진 무덤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지배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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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정상을 받치고 있는 통신골 일대
천왕봉 정상은 거대한 형태의 고인돌 같다.
바다속으로 변한 저지대에서부터 탈출한 민족들.
저지대 민족에게 천왕봉 정상은 신과도 같은 존재.
하여, 천왕봉은 신석기 시대부터 '민간신앙의 성역'.
...............고인돌이 발견된 지역.................
BC 4000∼3000년 프랑스·남부스웨덴·포르투갈·
덴마크·네덜란드·영국 유럽은 물론 지중해 연안
불가리아·에티오피아·수단 등등의 아프리카 지역
아시아에서는 팔레스타인·이란·
파키스탄, 티베트 남부지역, 인도.
인도네시아·보르네오·말레이시아
'한반도에서는 전역에 고루게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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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북방식은 4개의 판석을 세운 직사각형 석실 위에 뚜껑돌
유해가 매장된 석실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한강 이북인, 평안남도, 황해도 대동강,·재령강,·황주천 일대
한반도에서 고인돌 밀집지대는 황해도와 전라도 일대.
한곳에만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락을 이룬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전북 고창의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
한강을 경계선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이 형성.
지리산 일대는 한반도 한강 이남 문화권 중심.
황해도 평안도는 한반도 한강 이북 문화권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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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한강 이남에 분포.
일본 규슈(九州)지방 고인돌은 죠몽시대 말 ~ 야요이 초기.
한반도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우리나라에서 건너갔음을 암시.
한반도 남방식은 <바둑판식>판석 개울돌을 사용,
지하에 석실이 있고 뚜껑돌을 받친 받침돌은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전라도 경상도 고인돌.
주로 한강 이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고창군 죽림리, 상갑리 일대 2천 여기 밀집 지역.
고인돌에서 돌검과 화살촉이 주로 출토되었고,
충북 제천시 황석리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묘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만 축조가 가능했을 고인돌
고대국가 이전에 혈연 중심의 족장사회 공동묘지.
세습 신분 사회까지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고인돌은 지렛대와 밧줄·수로를 이용, 운반한 듯.
뚜껑돌은 받침돌을 세우고 봉분 흙을 쌓아 올린 듯.
경사면을 만들어 끌어올린 후 봉토를 제거하는 방법.
한강 이북에 퍼져있는 북방식 고인돌
시베리아 카라스크 거석 문화의 영향
한강 이남에 퍼져있는 남방식 고인돌
세골장(洗骨葬)과 함께 동남아시아 식.
남방식 고인돌이 북방식보다 훨씬 많다.
'고인돌은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을까?'
3면이 수심이 낮은 바다로 애워쌓인 한반도.
한반도 3면의 바다 밑에 펼쳐진 광활한 대륙붕.
지구 온난화 이전까지는 저지대 육지였던 곳이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던 제 4빙하기 말.
3~4도 기온 상승으로 지구 해수면은 140m 급상승.
지구상에서 거의 대부분 바다속으로 사라진 저지대.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분포된 수많은 섬들.'
당시 저지대 산들이 오늘날에는 정상만 남은 흔적.
저지대에 살던 많은 인류는 살길 찾아 민족 대이동.
당시 대홍수 천재지변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민족들.
육지까지 탈출 못해 서해와 남해 섬에 갇힌 민족들.
농토를 지키기 위해 섬 둘레에 제방을 쌓아올린 흔적.
그당시부터 공동의 생존을 위한 공동체 문화가 발전한듯.
저지대 민족을 육지까지 무사하게 인도한 지도자들.
최초의 고인돌은 그 지도자들의 돌무덤으로 추정된다.
종족 목숨을 구해낸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고인돌 축조.
'그 민족들이 남긴 돌 무덤들이 고인돌인듯.'
대범람, 대홍수에서 겨우 생존한 저지대 민족.
천재지변을 일으킨 하늘을 신처럼 두려워했을듯.
인류에게 하늘을 경배하는 민간 신앙이 싹텄을듯.
지리산은 수많은 남방식 고인돌 분포지역의 중심.
고인돌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 지석묘(支石墓)의 총칭.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한다.
이외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
고인돌 축조시기는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일본에서는 죠오몽(繩文) 만기(晩期)시대.
서유럽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초기,
동남아시아는 선사시대 거석(巨石) 숭배사상.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에 대한 다양한 별칭들.
땅에 묻혀있는 것에서 독배기, 바우배기 독바우.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은 괸바우, 암닭바우,
상석 형태에 따라 거북바우·두꺼비바우·개구리바우.
민간신앙과 연관시켜 고인돌의 배치 상에서의 이름
칠성바우, 장군이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의 장군바우.
하여, 고인돌은 불교 이전 청동기시대의 민간신앙.
고인돌 민간신앙이 발전한 것이 천왕봉의 천왕성모.
불교는 천왕성모 민간신앙을 업고 천왕봉에서 출발.
그 예가 천왕봉에 모셨던 천왕성모와 마야부인 석상.
그후, 불교는 천왕성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발전된 듯.
불교 창시자 석가모니는 언제 태어난 인물일까?
(BC 463∼BC 383년 또는 BC 563∼BC 483년 설).
석가모니의 생모 마야부인은 천왕성모 이후의 인물.
천왕성모는 마야부인보다는 훨씬 전 민속신앙의 대상.
즉, 천왕성모는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한 민속신앙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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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해뜨는 동쪽으로 이주한 민족.
동방의 해뜨는 나라, '아리랑.'
아리랑 뜻 = 해 돋는 밝은 고개.
고인돌은 수메르 인이 남긴 유적
BC 2천년경 조선을 건국한 아리안
남방계에게 밀린 황하유역 아리안족.
한반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체세력.
하여, 수메르와 아리아는 우리말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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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문화 직전 청동기 연장을 만들어 사용했던 시대.
교하리 유적, 청동기시대 움집터, 경기 파주시 교하리
그리스에서는 BC 3000년 이전, 중국은 BC 1800년경 시작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도시화를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
BC 3000년 무렵 구리는 중동지방에서 널리 사용하기 시작.
서쪽으로는 지중해지역까지 퍼져나갔고 유럽에도 전파된다.
BC 2000년대 영국 콘월의 주석광 개발로 청동기 사용이 급증.
'BC 1000년경부터 철기시대에 돌입하며 청동기시대는 마감.'
한반도에서 민무늬토기를 사용한 예맥문화권 고조선 시대
청동기문화의 시작에 대해 BC 2000~600년에 걸쳐 여러 견해
청동기시대 집터는 대부분 낮은 구릉지의 밭농사 경작지 주변.
부여 소산리, 번곡리, 광주 궁뜰, 산청 강루리 토기의 볍씨자국.
집터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 팠던 기둥구멍과 화덕자리, 배수구.
화덕은 집터에서 발견되고, 돌을 돌려 만들거나 흙으로 쌓은 것.
집터 바닥은 찰흙을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것이 많고,
남경 유적지에서는 갈대를 엮어 깔았던 집터 흔적도 발견되었다.
'한반도의 온돌방 및 일본의 다다미 유래 아닐까?'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크게 석기, 토기, 청동기로 나누어진다.
석기는 공구용(돌도끼, 홈자귀), 농경용(반달 돌칼), 사냥용.
이 시기에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돌깐무덤이 있으며,
늦은 시기가 되면 토기로 만든 독무덤 및 나무로 만든 널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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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무덤에는 조개를 깔고 그 주변에 돌무더기.
고대 국가 권력자의 무덤이 피라미트 처럼 거대해진다.
중국에서도 이 시기에 순장 무덤 습속에 따라 큰 무덤
'안양 무관촌(武官村) 은나라 순장 무덤이 대표적.'
이 풍습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급격히 쇠퇴했다.
일본 경우는 고대사회 초기에 성행하다가 사라졌다.
따라서, 일본은 아직 순장무덤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경우 고조선 초기 100여 명이 넘는 순장무덤.
고구려는 동천왕이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신라에서는 502년(지증왕 3)에 법으로 금지했다는 기록.
'그 전까지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
창녕 계성리 고분, 고령 지산동 32·34·44·45호분,
고령 본관동 고분군, 동래 복천동 11호분 등 순장무덤.
초기 가야 연맹국 등등에서 성행했던 순장무덤 유적들.
지배층은 사후에도 생전의 영화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
지배층에게 생살여탈권을 장악 당한 다수의 피지배층
피지배층 지위가 향상되면서 순장무덤은 사라져간 듯.
'특히, 불교 영향으로 죽음에 대한 관념의 변화.'
신라 경주를 중심으로 철기시대 초기까지의 순장무덤.
6세기 이후 불교문화 영향으로 순장 무덤은 사라져간다.
화장 또는 문무왕 수중릉처럼 물 속에 묻는 양식도 등장.
고려시대 무덤은 풍수지리설 영향으로 방위개념이 중요시
이조시대에는 유교사상 영향으로 널무덤에 흙을 덮은 봉분.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묻는 부부 합장 무덤이 성행.
임자도.
옛부터 높은 산을 성지로 믿어온 우리 민족.
전세계 7만 고인돌 중 3만이 있는 우리나라.
옛 조상은 왜 높은 산을 성지로 여겼던걸까?
대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돌무덤.
그래서, 거대한 고인돌 무덤을 만든듯.
거대한 돌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 흔적.
통신골에서 보면, 고인돌 같은 천왕봉.
고인돌은 선사시대 저지대 민족의 무덤.
바다속에서 민족을 이끌어 살려낸 족장.
그 저지대민족 족장 무덤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왜 고인돌 무덤을 만들었을까?
제4빙하기 후 갑자기 찾아온 지구온난화.
지구를 뒤덮었던 빙하가 녹아내리기 시작.
해수면은 하루가 다르게 솟아오르며, 대홍수
빙하가 녹아 차가워진 바다물이 한류.
적도의 난류와 뒤섞이며 비구름 형성.
몇달간 계속된 장마비에 저지대 침수.
'노아의 홍수'도 이 무렵일듯..'
동아시아 불교권 저지대는 모두 침수.
저지대에 살던 민족들은 고지대로 이동.
바다물은 저지대를 쉴사이 없이 삼켜갔다.
하루가 다르게 바다로 변해간., 삶터.
탈출하는 동안 수많은 떼죽음도 목격.
대홍수 망망대해에서 우뚝 솟아오른 천왕봉
저지대민족에게 탈출할 방향을 알려준 희망봉.
높은 산으로 가야만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 뿐.
당시, 저지대민족에게 높은 산은 신앙의 대상.
하여, 천왕봉 인근 순천 고창은 고인돌 군락지
저지대에서 무사히 탈출한 민족이 남겨놓은 흔적.
하여, 신성하게 여긴., 천왕봉의 일출.
결국, 그들을 저지대에서부터 살려낸 천왕봉.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이자 꿈의 성지인 희망봉.
지긋지긋한 장마비를 멈추게 해주던 동쪽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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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민족은 언제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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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여년 전 신안군 부근은 바다가 아니었다.
서해(황해) 일대는 물이 비워진 거대한 대륙.
지금의 중국과 한반도,일본 열도는 모두 연결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야생동물들이 살던 곳.
빙하기 해수면은 지금보다 140m나 낮은 곳에 위치
1만년전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며 빙하가 녹기 시작
빙하가 녹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해수면이 상승하자 산과 들이 물속으로 잠겼다.
서해에 살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대홍수를 목격.
노아의 방주 같은 홍수 신화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대홍수가 삼키고 남겨놓은 것들은 높은 봉우리 뿐.
산들이 정상 인근만 수면 위에 내민 것들이 현재 섬
임자도는 그렇게 탄생되었고 처음부터 섬은 아니었다.
임자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섬.
바닷물은 솟아오를 당시 제방을 쌓았다.
수천년 동안 바닷물과 싸워 만들어진 섬.
여섯개 섬을 하나로 이어 만든 임자도.
임자도 대기리 삼막동의 구석기시대 유물들.
마제 돌대패날,돌끌,숫돌도 함께 발굴되었다.
B.C 6000년 이전 태양신의 변심을 목격한 인류.
'하루밤 사이에 수십리씩 물에 잠기는 육지.'
물에 쫓겨 중국, 한반도, 일본 고지대로 흩어졌다.
한편, 갈증을 해소할 눈 얼음이 곳곳에 있던 빙하기.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자 사정이 급변했다.
'히말라야 일대 인류 거구지도 비슷한 현상.'
식수 제공원, 눈 얼음이 모두 녹아 저지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을 구하려 하천 따라 내려왔다.
그곳엔 먼저 온 사람도 있었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다.
서로 경계하며 강가에 움집을 짓고 함께 살게되었다.
소수집단의 이동생활이 대규모 집단 정착생활로 대체.
수만년 동안 막대기 돌멩이 정도만 사용해오던 사람들
집단생활을 하며 언어가 발달되고 토기가 만들어졌다.
수렵 채취 만으로는 좁은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없었다.
새로운 생산방식이 모색되어졌으며 농경과 목축이 등장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종교도 등장했다.
태양신이 숭배되었으나 그 권위는 점차 약해져 갔다.
씨족 집단 별로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민간신앙이 성행.
마제석기에 이어 청동기 문화가 일어나며 생활이 급변.
청동기로 만든 검과 방패의 파괴력은 가공할만한 파괴력.
목검이나 돌칼 구석기인들은 청동검 신석기인들에게 참패.
청동거울 모양의 번쩍이는 방패와 청동방울 소리.
태양신이나 조상신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려나갔다.
청동기인들이 서남 해안육지로부터 섬으로 들어왔다.
임자도 청동기인들은 영광 쪽으로부터 건너와
장포만 일대에 거주한 흔적이 지석묘(고인돌).
지석묘군은 임자도 내 4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패총은 구산 염동 마을 뒷산 야산 기슭에 있다.
청동기 시대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사용된 패총.
고인돌은 지배계층 또는 가족 묘지나 공동 묘지.
B.C 300-400년 전 구산리 염동 패총의 발견으로
임자도에 처음 거주한 청동기인은 구산일대 거주
청동기시대 이후 특징으로는 국가 정치권력의 등장
기원 전후로 한반도 남쪽에는 수십 수백개 소국들
개울가 저지대 평야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민족 대이동.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기록............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또 군신 칭호도 없었다. 아도간,여도간,차도간,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명.
산과 들에 모여 살았으며 우물을 파고 밭을 갈아 먹었다.
..........................................................
당시의 생활상을 정감있고 단아하게 표현한 글이다.
위 글은 신석기시대 무리의 규모에 대해 대변해준다.
1백호가 7만5000명이었다는 말은 1戶 씨족이 약 750명
10간이 1백호란 1간이 10호 씨족을 지배했다는 뜻.
간은 부족장에 해당하며 1개의 부족은 약 7500명.
이것이 단군신화 이전 한반도 남단 신석기시대 모습
한반도 남단에 더 큰 부족 연맹체가 있었다는 증거.
이중 주목할 만한 경기, 충청, 전라지역 마한.
마한은 여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것이 충청도 지역에 있던 목지국
마한 소국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 제사장인 천군
그리고 신성지역으로 소도(蘇塗)란 별읍을 두었다.
마한 소국의 일반민들은 초가지붕 반움집이나 귀틀집
괭이 낫 도끼 가래 자귀 등 목제 농기구를 이용
벼 오이 참외 박 호두 살구 등 밭농사를 지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마찰을 이용해 불을 피웠다.
가죽 신발을 신었고 해마다 5월 수릿날과
수확기인 10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
이 날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며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흥겨웁게 놀았다.
이 때 급격한 상황변화가 발생한다.
소국 중 하나가 팽창해 소국들을 접수
그 주역은 한강 유역에 자리잡았던 백제.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마한의 소국들은 백제의 팽창앞에 역부족이었다.
청동검 백제에 쫓겨 내려간 마한 마제석검 유민들.
뒤늦게 청동기를 수입하고 힘을 키워 나갔으나
백제는 이미 철기문명까지 이룩한 놀라운 성장
결국, 마한은 백제의 철기문명 앞에 패하고 만다.
.....'임자도에서 발굴된 철기시대 유적들.'.......
반남면 일대 신미제국은 마한과 동일한 생활양식
삼두리와 대기리 패총 옹관묘 조각이 이를 뒷받침
그물을 사용한,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유적.
.....................................................
백제는 마한 영역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설치.
마한 서편 섬 지방도 백제의 통치권 내로 편입.
백제는 임자도 주위 섬들을 한 행정단위로 개편.
현(縣)이라 칭하는 말단 행정단위
이름은 고록지현(古祿只縣)이었다.
백제는 오늘날 신안군 지역에 고록지현 뿐만 아니라
아로현, 아차산현, 거지산현이라는 현도 설치하였다.
이러한 행정구역 기본 골격은 백제말까지 지속되었다.
신안군은 백제시대 내내 백제 영역으로 정착.
백제의 개방적인 성풍속을 대변해주는.. 서동요.
백제는 국제무역이 성행했던 동아시아 해상왕국.
당시 백제 성풍속은 활발했던 국제 교류에서 비롯.
.......................서동요................
"善化公主隱(선화공주는) 他(남다를 타) 密(빽빽할 밀)
只(성기) 嫁良置(가랑이) 古薯(마서) 乙薯房乙(샛 서방을)
密(몰래) 隱他置古薯(숨겨두고서) 主(날마다) 夜矣(밤마다)
卯乙(아흐) 抱遣去如( 포개지어 성행위를 한다."는 내용의 노래.
.................................................................
여자 성기에 털이 많을수록 남자를 밝힌다는 속설
샛서방을 남몰래 감추어 두고 밤마다 큰 신음소리
신라 진평왕은 서동요 소문의 여주인공 딸을 추방.
임자도 해협은 삼국시대 말기 멸망의 기로에 선 백제
일본 원정군이 오고 망국 백제유민들이 일본으로 피난
패망 백제왕실과 유민들이 통한의 눈물을 뿌렸던 해협.
당은 10만 군사를 동원해 서해안 기습 상륙작전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 배후 교란 카드로 활용
백제 멸망 무렵 임자도 해협은 피난과 구국의 통로
백제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던 663년
임자도 해협은 일본이 빠져나간, 산도.
신라는 백제의 옛땅에 자신들의 통치기구를 설치.
오늘의 전남 광주 땅에 통치 중심지인 무주를 두고
나주땅에는 미다부리정이라는 군사 중심지를 설치.
전남 서해지방 섬들만을 모아 독립된 군을 설치.
이 도서 군이 압해군이며 지금의 신안군의 전신.
섬의 이름과 나라의 지배자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섬의 소유도 주민들의 손에서 떠나갔다.
섬은 신라 재상들 소유지로 목장을 설치
300-400호 주민들이 말들과 함께 살았다.
그 무렵 '장보고'라 불리는 한 명의 영웅이 출현.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서 출생
생활고로 당 강소성 금산현 서주로 이주.
이정기 토벌을 위한 당나라의 관군에 입대.
당 현종은 이정기 토벌을 위해 신라에도 파병을 요청
신라 장군 김웅원이 파당군 삼만을 이끌고 당에 출병
김웅원이 당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정기는 토벌된 이후.
이곳에서 김웅원은 당나라 소장 장보고를 만난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김웅원이 도움을 받은 장보고
그후 귀국한 김웅원은 김우징은 신라 군사적 실세
장보고는 김웅원 후원으로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
해안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말 대표 세력으로 성장.
그러나, 후원자 김우징이 신라왕위 쟁탈전에서 패배
왕위에 오르려던 김우징 아버지 균정은 피살.
김우징은 장보고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모면
흥덕왕 사망후 후사가 없어 김우징이 왕에 등극.
그러나, 김우징은 즉위 몇 개월 후 등창으로 운명.
아들이 문성왕으로 즉위해 장보고는 진해(鎭海)장군.
문성왕의 아버지와 장보고 간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하려 하자
신라 신하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심기가 불편했던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두문불출.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 의해 장보고를 살해된다.
이어서, 청해진 주민들은 벽골군(김제)으로 강제 이주.
현재 완도읍 장좌 계곡 동백림 구릉 지대 여섯 기의 묘.
'그중 '목 없는 무덤'으로 알려진, 장보고의 무덤.'
신라말 신라 지도부는 분열되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국가 이념도 목표도 사라졌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백성들은 호족의 사병이나 노예가 되거나 도적 떼가 되었다.
통일신라 왕조가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유력인물 몇 사람이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구제
장군 견훤이 완산주와 인근 군현에 후백제를 세웠다.
고구려 옛 땅에서는 장군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통일 신라는 이미 이들의 적수가 아니라 후삼국 정립
909년 서남해안을 둘러싼 궁예와 견훤의 대해전
서해안 임자도 해역에서 시산혈해의 벌어진 전투
수륙 양면 전쟁 결과 서해 제해권을 장악한 후백제.
그후 영산강 하구에서 견훤과 왕건 두 영웅의 결전
견훤은 전함을 벌여 세우며 후백제 위력을 과시했다.
왕건은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화공을 명령했다.
왕건 측에서 쏘는 불화살과 불더미는
늘어선 견훤군의 배에 맹렬히 붙었다.
왕건은 견훤 체포와 잔적소탕에 나섰다.
대해전 승리로 후고구려는 서남해안 패권을 장악.
궁예는 왕건을 대아찬(5등급)의 장군으로 삼았다.
'파괴자는 건설자가 되지 못한다.'는 격언.
후고구려를 세웠던 궁예에게도 적용되었다.
통일 신라를 무너뜨린 혁명가 궁예는 실각.
궁예는 측근과 장졸에 대한 잔인한 처단을 자행.
부인이 간통했다며 쇠로 음부를 지져 죽인 만행.
왕건은 궁예의 포악함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대해전 이후 파진찬(4등급)으로 승진된 왕건
자진해 나주로 내려와 체재하며 민심을 얻었다.
910년 경 왕건은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과 결혼.
훗날 그 아들이 왕건의 후계자.
후삼국을 통일한.,고려 2 대 왕.
후백제 지도부에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의 큰아들 신검이 견훤을 유폐.
김제의 금산사에서 왕위를 빼앗았다.
견훤은 석달뒤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 영토였던 나주로 도피 은신.
왕건은 병선 40여척을 보내 환대.
견훤은 왕건이 보낸 배로 북상해 왕건에게 투항
견훤의 고려망명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 김부
곳간 열쇠와 미녀를 데리고와 개성의 왕건에게 투항.
훗날 고려 현정은 '김억렴의 딸'의 외손.
신라 경순왕이 데려온 미녀는 '김억렴의 딸.'
왕건은 신안군에 와서 일곱 가지을 얻었다 한다.
일개 무장으로 수군을 이끌고 신안군을 방문했던 왕건
정치기반, 경제력, 측근들, 목숨, 나라, 통일, 후계자.
신안군은 왕건의 고려 창건에 결정적 공헌을 했던 고장.
.............고려사에 '신안군의 힘'에 관한 기록.................
十四年八月 憲司上疏曰 諸島漁鹽之利 畜牧之蕃 海産之饒 國家之不可無者也
我神聖之未定新羅百濟也 先理水軍 親御樓船 下錦城而有之 諸島之利皆屬國家
資其財力 遂一三韓
헌사에서 상소하였다.
여러섬에서 고기잡고 소금 만드는 이익과 목축의 번성
해산물의 풍족은 나라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태조께서 신라,백제를 평정하지 못했을 때 수군을 양성
친히 배타고 나주에 내려가 이를 점령하니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우리나라로 돌아왔고
그 재물의 힘을 이용해 3한을 통일하였습니다.
................................................
신안군의 힘을 이용해 통일대업을 이룬 왕건
29명이나 되는 왕비로부터 얻은 많은 아들 중
장화왕후(오씨)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으니
고려 2대왕 혜종이고 신안군은 고려 건국의 모태
당시 임치현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사찰
주민들은 매향(埋香)이라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매향이란 향을 땅에 묻는 미륵불 신앙 불교 의식.
주민들 생활은 매우 엄격한 법에 의해 통제되었다.
약간의 잘못에도 수 십 대의 곤장을 맞거나 귀양.
............고려시대의 형법 내용................
외사촌끼리 결혼, 처가 죽은 후 처제들과 결혼
6촌간이라도 성씨가 다르면 결혼 할 수 있었다.
부인이 마음대로 집을 나가 징역 2년
개가하면 2천리 밖으로 귀양을 보냈다.
부모와 의논않고 처를 버리면 삭탈관직
남편이 아내를 때려 상처내면 곤장 80대
아내가 첩을 구타해도 곤장 80대의 형벌.
유부녀가 간음하면 방탕 명단에 등록
바느질하는 공인으로 귀양 배속하였다.
종이 상전 여인과 간통하였을 경우
화간이면 교형, 강간은 참형에 처하고
상대 여자는 한 등급을 낮춰 처벌하였다.
일반인으로서 여승과 간통할 경우
화간이면 징역 1년반,강간이면 2년.
형이나 누나에게 욕하면 곤장 100대, 구타는 2년 반 징역
가까운 친족의 죄를 고발하면 징역 2년에 처하였고
아랫사람의 죄를 고발하면 곤장 60대에 처했다.
부모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면 징역 1년
상기 내에 상복을 벗고, 보통 옷을 입는 자는 징역 3년.
소를 도살한 자는 얼굴에 낙인을 찍고 형이 끝난 뒤 귀양.
도박을 한 사람은 곤장 100대
도박장소 제공자도 곤장 100대.
이웃 강도를 외면하면 곤장 80대
남의 재물을 빼앗으면 곤장 70대
남의 밭 과일 농산물을 훔치면
피륙으로 환산해 한 자당 70대
저울 눈금을 속이거나 농간을 부리면
피륙 한 자분 당 곤장 60대에 처하였고
도로와 밭둑을 침해한 자는 곤장이 70대.
군대에 가지 않으면 1일에 곤장이 40대
허가받지 않고 현을 넘어가면 곤장 90대
종이 세번 도주하면 얼굴에 낙인을 찍었다.
..........................................
대부분 당시 신안군 일대의 엄격한 형벌 제도.
고려 형벌제도 기초는 신안군의 형벌 제도인듯.
이조 공도령으로 무인도가 된 신안군.
고려 이후 이조 시대 신안군은 유배지.
임진왜란 이후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한다.
1895년 임자도진이 여러 수군진영과 함께 폐지
일본은 남해에서 서해안까지 담장을 무너뜨린다.
임진왜란 일본의 야욕을 무너뜨린 방어벽을 파괴,
신안군은 일제 치하에서 항일운동의 중심지.
1945년 8.15 해방후 친일파 세력이 혼난 곳.
1950년 6.25후 다시 돌아온 친일파 경찰 조직.
주민들이 반발하자 좌익 세력으로 몰아 처단.
그 억울한 죽음에 반발한 신안군 일대 주민들.
여수 순천 남해 서해안 일대에서 격렬하게 시위.
옛부터 한반도의 북문은 임자도 해협
명량해협은 남문, 흑산도 일대는 서문.
백제시대 남해는 일본 진출의 해상 관문.
통일신라 시대에는 양자강유역을 잇는 무역로
후삼국시대 에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요충지.
고려시대에 송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해상 통로
대각국사 의천은 이 해협을 통해 송나라 유학.
송나라 서적,도자기,예술품,비단,약재,향료,차
이 해협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와 꽃핀 고려문화.
중국 천태종이 들어와 해동 천태종으로 심화되었고
중국의 인쇄술이 들어와 고려 대장경을 목각하였고
송 인쇄술과 도자기 기술이 고려 상감청자 기술로 비약
남부지방의 세미가 해협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양곡이 북의 관군에게 운반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던 이조의 수군들.
바로 이 해역에서 재건되어 이조를 구해냈다.
임진왜란 후 이조 공도령에 의해 폐쇠된 해협.
일제 치하에서는 완전 폐쇄된 이곳 국제 항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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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 인양된 보물선.
발굴 위치는 임자도(荏子島)와 증도(曾島)의 중간.
1975년 8월, 도덕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
그물에 청자화병 등 6점이 걸려 발굴계기가 되었다.
그후 9년 간 문화재관리국 주관 아래 11차에 걸친 발굴
문화재 관련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해군함정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인양작업.
유물은 도자기류 및 기타 2만 2,000 여 점,
동전 약 28t, 자단목(紫檀木) 1,017개, 선체.
특기할 것은 목제상자 안 나무 물표(物票) 364점.
목선은 길이 20m 폭 6.9m 정도로 매몰된 상태였다.
선체 내부 도자기들은 70×70×50㎝ 목제상자에 격납
10개, 20개씩 포장된 점으로 보아 무역상품.
침몰선은 중국 목선으로 보이며,
침몰 연대는 1331~50년경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박물관에 소장.
.............남해 수중 문화유산..........
지진 대홍수 천재지변으로 바다물에 잠긴 문화유산.
인류의 옛 정착지, 교역, 어로활동, 해전, 해상활동.
침몰된 선박 난파선과 그 선적물 등이 많은 남해일대.
현재 전세계에 3백만 척 난파선이 있는 것으로 추정
지진으로 잠긴 지중해 알렉산드리아 등대(14세기),
자마이카 포트 로얄 고대 도시(17세기) 등 유적지
수중 문화유산은 육상 문화유산보다 보존상태 양호.
우리나라에서 수중 문화재와 수중 고고학에 대한 관심
1976년 신안해저문화재 발굴조사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신안 해저발굴 이후, 10여건에 이르는 수중문화재 발굴
우리나라 옛 해양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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