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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나님께서 여순사건에 대한 글을 올리셨는데요
그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이 제임스 하우스먼이라는 인간백정입니다.
이 글을 읽고나니 이 놈은 미군방첩대 ( 현CIA의 전신) 에서 체계적으로 교육받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인간백정은 그야말로 정신이상자일겁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 제임스 하우스먼
1.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은 누구인가?
- 1981년 6월 24일, 보안사령관인 노태우 육군중장은 하우스만을 불러 두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하우스만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 1960년, 장면은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한다. 하지만 미 대사관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이에 대해 장면은 "일등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돕기를 꺼리지 않았던 하우스만이 국무총리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라고 토로한다. 이제까지 이승만을 도왔던 하우스만이 장면정권을 도우면 안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1960년 3월 1일, 하우스만은 한국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한다.
- 1961년 5월 18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 집을 방문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고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튿날 미국으로 날아간 하우스만은 한국 사태를 소상히 설명한다. 그 뒤 국방장관은 그에게 공로표창을 수여한다.
- 1949년 서울 근교 수색,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던 김종석 등 군내 좌익세력 처형장. 하우스만은 무비 카메라로 총살이 진행되는 상황을 천천히 녹화한다.
- 1949년, 남로당 프락치로 숙군 대상에 오른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우스만은 백선엽, 정일권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함께 이승만에게 구명을 요청하고,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정희를 살려준다.
- 1949년 10월 여수에서 군 반란으로 시작된 저항이 순식간에 순천 등 전남 동부지방을 휩쓸자 하우스만은 진압군의 고문관으로 광주에 파견된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준장의 명령을 받은 하우스만은 미군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국군의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한다. 여순사건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작전으로 1주일만에 진압된다.
이것은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한국 현대정치사와 얽힌 몇 개의 장면이다.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군사고문단 고문, 1951년 미 국방부 국방정보부에서 한국담당, 1950년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던 하우스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공식 이력만으로는 모자란다.
별로 똑똑하지도 않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였지만 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니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2. 하우스만- '국군의 아버지'
하우스만이 남한에 처음 들어 올 때 국군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각각 점령한 상태에서 양측은 군대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직 치안유지만을 위한 경찰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남한 군대는 경찰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하우스만은 미군정 하에서 국방경비대 창설요원으로 배속 받으면서 남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하우스만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배치 받아 처음 느낀 것은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매우 자주 일어난다는 점과 지방좌익에 의해 조정되어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 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 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 이들은 국방경비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형근이 그랬고, 채병덕이 그랬고, 정일권이 그랬으며, 백선엽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러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국방을 책임질 든든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승만은 정일권을 참모총장, 백선엽을 1군사령관에 임명하고는 이형근에게 줄 자리가 없자, 결국 1954년에 합동참모본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이형근을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이었지만, 하우스만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했다. 그 뒤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중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고, 송호성이 아직 임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우스만은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다. 하우스만은 김완룡, 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는 등 건군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다른 미군 병사가 언제쯤이나 본국으로 돌아갈까 골몰할 때, 하우스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문화를 익혔고 한국말도 알아듣기 시작하는 충성스런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방경비대가 만들어져가고 있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군 내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하우스만은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 군인이 되어 어느새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다. 미국 장군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책과 조치가 적합한지 그리고 한국군과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하우스만을 필요로 했고, 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하우스만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기가 아끼는 인물은 챙겨주는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 가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했다 해도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것도 하우스만이 사형장면을 찍는 필름을 돌리는 앞에서. G-2라는 정보부에서 일하며 장차 한국군을 이끌어갈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었던 김종석의 운명이 그랬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PMAG], 나중에 군사고문단[KMAG]으로 변경)이 만들어지자,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을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정부 수립 뒤부터 이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로버츠 고문단장, 그리고 하우스만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가 매주 열렸다. 이승만은 수시로 하우스만을 경무대로 불러 군사관계를 묻곤 했다. 대통령은 개별보고서를요구하곤 했는데, 군대의 사기문제라든지 군 조직 개편 등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했지만 어떤 특정 사건, 특정 인물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하곤 했다.
3. 여순사건과 하우스만
하우스만이 남한에서 직접 전투작전을 지휘하게 된 것은 여순사건 때였다. 미군이 여수에서 군 반란이 일어난 것을 처음 보고 받은 것은 10월 19일로써 반란이 발생한 당일이었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은 즉시 하우스만을 호출했고, 기동작전군(Task Force)을 편성해야겠다고 말하였다.
다음날 오전 고문단장실에서는 국방장관,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하우스만, 몇몇 고문단 참모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갖고 제일 먼저 광주에 기동작전군사령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 그리고 총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사령부에 배속됐다. 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공식명령 네 가지를 주지시켰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이 명령에는 미군이 직접 나서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을 전면에 내세우고, 미군은 작전을 세워 한국군을 지휘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군사령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장악한다고 상당히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전부터 한국군은 사실상 미국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국군은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경험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미군사고문단은 반란이 터졌을 때 무기, 군수,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가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역할은 단지 군 작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해주는 이상이었다. 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하우스만이 현장에 투입됐을 때 맨 먼저 그는 화차 2량에 무기 화약 식량 등을 가득 싣고 갔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대부분 일본식 38식, 99식으로 무장하고 있던 형편이었는데, 미군은 사건진압에 파견된 부대원 들에게 모두 미24군 탄약고로부터 지원된 M-1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미군은 수송도 맡았다.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어느 하루는 쌀 6톤, 육류 20박스를 싣기도 했다. 쌀은 한국 산이었지만 육류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무쵸 주한미대사는 국무장관에게 "지난 10월에는 여수, 순천지역에 대한민국 사람들, 탄약, 통신장비를 수송하느라 미국 수송기가 러시를 이루었다"는 전문을 타전했을 정도였다.
통신은 광주에 주둔한 미20연대에서 지원했다. 최신 무전기 M208이 작전 하루 이틀 뒤에 보급되어 작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가끔 반란군은 경찰 전화선 껍질을 벗기고 통화내용을 도청하곤 했는데, 최신 무전기는 안전한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반란의 진원지인 여수와 순천을 빨리 탈환하고자 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우스만은 먼저 이 사건이 군인과 지방좌익세력의 합세로 인해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여수 14연대의 최초 봉기 때 골수 추종자는 불과 40명이고 전투에서는 첫 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차공격을 가해 반란군의 자만심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우스만은 주요한 것은 여수·순천의 신속한 탈환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산 게릴라로 침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백운산, 지리산 등의 퇴로를 우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우스만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이번 여순사건이 북한과 호응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 무쵸대사, 로버츠 단장 등은 여수·순천을 탈환하는 것에 변함없는 우선 순위를 두고 하우스만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우스만의 판단이 옳았다.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 등에 입산했고 장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이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그릇된 것이었다. 게릴라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이끌려 벌어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반란군이 지리산 등지로 입산하여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자, 미군사고문단은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이른바 4F 전술을 지시하면서, 진압작전을 원호했다.
여수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대부대가 참가함으로써, 한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전에 있었던 군대와 경찰간의 마찰은 군의 압도적 우위로 결판났다. 사건이 발발한 요인에는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기도 했거니와, 진압작전 과정 자체를 군대가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분규를 진압하는데는 소규모 화력이아니라 정규군의 압도적 화력이 역시 중요했다.
여순사건이 종결된 뒤 미 국방부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해 미 공훈장을 주었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다음가는 4번째 서열쯤의 훈장이었고,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이런 훈장은 드문 일이었다. 아니, 미국은 당시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이 최근에 펴낸 {손님}이라는 소설에는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벌어진 좌우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상세히 그려지고 있다. 빨갱이를 사탄으로 생각한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과의 투쟁을 성스런 십자군의 활동으로 여기면서 가솔린을 부어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여자들은 능욕하는 등의 빨갱이사냥을 감행한다. 그 형상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학살이 등장하여 더욱 충격적이다. 여자들을 술자리 노리개로 쓰는 것에 화가 난 한 사람이 놀고 있던 자기 친구에게 면박을 주고 자리를 파했는데, 이 친구는 분풀이로 자기에게 면박을 준 친구의 친척을 죽여버린다. 비슷한 시간에 딴 곳에서도 똑같은 보복 살인이 이루어진다. 인간 심리의 끝을 보는 느낌이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심리의 저 밑바닥은 숙군 과정을 주도한 김창룡이라는 인물에서도 확인된다.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한 경력이 있고, 북한에서 소련군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남하한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과정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진행되었다. 그것도 국가권력이라는 이름 밑에서. 김창룡은 이승만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맘놓고 자행했다. 단지 정치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마음 들지 않는 인간을 가차없이 숙청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 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 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이는 것이 진보인 것으로 믿었던 사람이 자랑스럽게 '역사를 진보시킨 일'들은 계속 밝혀질 것이고 또 밝혀져야만 한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하우스만이 일반인과 연구자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하우스만 증언}(한국문원, 1995)이 출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은 이 책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던 전쟁 직후에 자신이 목격한 학살사건이 적혀 있다.
6월 27일 밤 안소위라는 포병대위는 한 떼의 서북청년단원들을 태우고 노량진 쪽에서 한강 다리를 넘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폭파계획이 하달된 때였으나, 그는 헌병을 권총으로 위협하고는 곧장 서대문형무소로 직행했다. 청년단원들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최상급 악질 빨갱이'들을 끌어냈다. 트럭은 강기슭에 세워졌고 수감자들은 한남동 모래사장에 끌려와 서북청년단원들에게 총살당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하우스만은 이들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훗날의 회고에서 이 사실을 담담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우스만은 한남동 모래사장 학살에서와 같이 단지 '목격'만 하고 자신의 손은 하얗게 남겨두었을까? 한강교폭파가 하우스만의 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때도 담담하게 아니라고 말할까?
한남동에서 학살이 있었을 때는 남하하기 시작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압박했을 때였다. 대통령은 라디오로 서울을 지킨다는 허위방송을 전국민에게 떠든 채 몰래 달아나 버리고, 참모총장은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비워가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미8군에 의하면 국군 9만 8천 명 가운데 한강을 건너온 군인은 불과 2만 4천 명 뿐이었고, 경찰 병력 중 피난 간 사람은 4,500명에 불과했다. 다리 위에서는 피난 가려는 시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인민군을 피해 피난 가던 국민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어떤 미군 장교는 이 폭파로 인해 5∼800여 명이 죽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대 육사교장이었던 이형근은 현장을 목격한 뒤, 유엔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인민군이 선수를 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누가 한강교를 폭파했는가? 이승만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최창식 공병감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형까지 시켰지만 64년 재심청구소송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5·16군부 쿠데타 뒤에는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하우스만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이 당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고문단장은 퇴역차 한국을 떠나 있었고, 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 또한 선임 통신장교는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공병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고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반공체제의 굳건한 지원자이자 형성자이기도 했던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보면 꼬맹이 같은 인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승만의 반공극우체제는 물론이거니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와 50년간 이루어졌던 민간인학살의 핏방울이 그가 뿌려 놓은 유산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군사정권이 수십 년을 지배했던 한국에서 그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배후 실력자'로서 활동했고, 미국과 한국에서 수많은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훈장들은 그가 흘린 땀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아니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피의 대가였을까?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떠나면서, 하우스만은 한편으론 "긍지를 느꼈지만, 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이라고 하였다. 그가 몇 십 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발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에 죽었다.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50826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미군으로 들어와서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으로 제대했군요.
그럼 미군 = 유엔군???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 집을 방문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고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남로당 프락치로 숙군 대상에 오른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박정희 = 빨갱이???
별로 똑똑하지도 않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
아니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은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다
건군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군생활하신분은 아시겠지만 일반군인이 이렇게 활동할수있을까요?
이런 활동과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은 보안이나 첩보관련 직책이
아닐런지요
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 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 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
이승만대통령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친일파를 흔히 이승만이 등용했다고 하지만 그 속내를 알수있는 위 글에서는
미군정이 있었다 할수있네요.
능력이나 가치관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고 오로지 충성.........
윗 글에서는 제임스 하우스먼 개인의 마음이라 기술했으나
그가 군인의 신분임을 감한하면 그 대상이 누구일지는 자명합니다.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마치 80년 광주의 현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저만의 감정일까요?
여순사건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작전으로 1주일만에 진압된다.
제임스 하우스먼 = 전두환과 신군부???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제주 4.3사건.
통설로 제주 남성들의 씨가 말랐다던 그 사건....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 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신이상자 아니면 인간백정 혹은 극단적 인종주의자...
지 생각으론 위 세가지가 골고루 섞여있다 여겨집니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하우스만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이 당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역사에서 진실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결국은 밝혀지네요...
커밍스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보다는
시카고대 교수이며 한국통으로 알려졌고 확실친 않으나 한국인 출신
부인을 둔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시 가재는 게편이군여ㅉㅉㅉ.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이라고 하였다. 그가 몇 십 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발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
1945년에서 1955년 사이에 그 자신이 행한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잘 표현되있습니다.
그러니 1800년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인디언(잘못된 표기임) 즉 아메리카대륙의 원래주민들.
그들이 어떻게 학살되어 갔을지 짐작해볼수있는 단서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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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쥐고 있었다.
그 권한은 1949년 6월 30일까지. 이 기간에 미군은 제주 4.3 ,여순병난 광주학살등 미국책임인거죠
<< 이제까지 이승만을 도왔던 하우스만이 장면정권을 도우면 안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닌데 제가 상상하기로는 이미 미국은 장면정권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 이니고 장면정권을 없애버리려고 박정희장군님에게 쿠테타 일으키라고 명령 내려 놓은 상태인 것인데 ............. 장면 정권을 어떻게 돕나요?
말이 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때에는 미국은 한국에게 민주주의 허용할 수 없는 시절이거든요.
혹 하우스 만은 스웨덴계 미국인 아닌가? 알아 볼 수 있는 방법 없을까? 종묘공원에서 한국 말 잘하고 그런 냄새 - 정보계통의 냄새를 풍기는 미국 늙은이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살살 긁었을 때 스웨덴계 미국인 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80대 말이거나 90대 초반 정도일텐데- 가능성이 있을까? 1981년 7월 군사고문직 에서 벗어났으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면도 친일파 출신임
당시 이승만이 쫒겨난후 남한에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라며 민족주의가 들불처럼 번지자
위협을 느낀 양키놈들이 다카기마사오를 배후 조종해서 군사독재의 발판을 만든것임
그런데 호호 당신은 정체가 뭐야?
박정희장군님?
나 당신 깐죽대는 댓글보고 예의 주시하고 있어
하우스만은 독일계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