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3.13 만세시위> 102주년에 즈음하여
3월은 실로 위대하다. 우리 조상들이 생명을 걸고 바보처럼 만세를 부른 날이기 때문이다. 그로서 나라를 잃은 조상들이 만든 위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써졌는데 조선 500년 역사에 있었던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 전 민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순진무구하게 만세를 부른 무저항 비폭력의 시위로 <삼일절>은 자손만대에 물려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유산이 되었다. 한국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삼일절>은 계속해서 우리 역사의 거울이 될 것이다.
3.1만세 시위와 뒤를 이어서 일어난 모든 만세 시위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우리의 시위는 전 세계를 향해서 바보 같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순응하지 않고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음을 가슴 뜨겁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에의 의지를 확인하며 자존감이 높아져 망국의 백성으로서 열등감과 자기 비하를 극복하였기 때문이요. 이로서 임시정부를 출범시키며 다양한 차원의 독립운동이 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일절>을 선물로 주신 우리 조상님들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오늘은 1919년 북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3.13 만세시위> 102주년이 되는 날이다.
용정의 <3.13시위> 또한 위대하고 아름답다. <3.13 만세시위>는 북간도의 모든 이주 조선인들과 독립투사들의 피땀과 눈물, 기도와 믿음의 결정체였으며 북간도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어서 간도를 독립에의 열기로 화산처럼 끓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용정의 <3.13만세시위>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서곡이 되었다. 그런데 이 서곡이 캐나다장로회 신년 초 <기독교대전도회 총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919년 용정 <3.13 만세시위>가 일어난 과정과 그 이후의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거울을 삼고자 한다.
1919년 신년 초 북간도지역 <기독교대전도회> 총회가 국자가에서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 지도자들은 1919년의 독립운동계획을 세우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에 파송할 대표를 뽑고 독립운동자금 모금위윈회를 구성하였다. 1월 25일, 연변대표로 김약연, 정재면, 이중집이 뽑혔고 정기영은 수행원으로 뽑혔다. 훈춘지역은 문병호, 윤동철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연변대표들이 연해주로 가는 목적은 ①러시아령 대표들과 함께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고 ②<독립선언서>를 작성해서 공포하고 ③금후 민족독립운동방침을 토의 결정하고 ④대표 중 1명을 선발하여 이동휘, 백순과 함께 파리로 가서 강화회의에 참여케 하는 것이었다.
대표들이 떠난 후, 연변지역 독립투사 33명이 2월 18일, 2월 20일에 국자가의 박동원 집에 모여서 독립운동방침을 토의하면서 <독립운동의사부>를 구성하였으며 3가지를 합의하였다.
첫째 간도 각지의 교회 및 단체는 서로 일치단결하고 협력하여 민족독립운동에 힘쓴다.
둘째 러시아령의 조선인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 간도의 각 단체들은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한다.
셋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간도의 각 단체의 협력자들은 용정촌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을 공포하면서 민족독립운동기세를 앙양시킨다.
세 가지 합의사항을 정하고 <독립운동의사부>에 속한 33명의 지도자들은 예수교, 천주교, 대종교 및 공교회 유력자들과 긴밀히 연락하고 지 교회 교우들과 친구들을 권고, 동원하여 <정의, 인도>, <민족자결>과 민족독립을 주장하며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2월 18일 밤에 박동원의 집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생명을 걸기로 각오하는 <철혈광복단>이 결성되어 모두가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들은 영신학교(캐나다장로회 지회 산하에 있는 학교) 교원을 함흥에 파견하여 함께 만세운동의 행보를 함께 하기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후 간도의 사립학교, 관립학교 학생들도 <독립운동의사부>의 결의를 쫓아 <학교대표회의>를 열고 시위에 적극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히 정동학교 (용정시 광개향, 캐나다장로회 정동교회), 광성학교(소영자, 캐나다장로회 소영자교회), 명동학교(명동촌, 캐나다장로회 명동교회),영신학교(용정시, 용정중앙교회) 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시위를 위한 조직과 인원 동원 등에 대하여 협의를 활발하게 하였다. 영신학교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같이 하는 기독교동지청년회가 결성 되었다. 2월 중순 이후로 북간도는 독립운동의 열기로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3월 7일, 3월1일에 있었던 서울의 만세시위와 <독립선언> 소식이 용정에 전하여졌다.
<독립운동의사부>는 연해주에서 오는 선언서를 기다릴 것인가? 조선 국내의 만세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일어날 것인가? 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3월 10일, 국자가와 용정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시가지를 돌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으며 <독립운동의사부>에게 바로 만세 시위를 할 것을 요청하며 압력을 가했다. <독립운동의사부>는 조선 국내와 맞추어서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로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에서 온 <독립선언서>를 한글과 한자로 인쇄하였다. 그들은 대회를 주관할 대회장에 김영학목사, 부회장에 배형식목사를 뽑고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를 3월 13일 오전 12시, 캐나다장로회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행사 당일에 3만 여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간을 1시간 늦추었고 장소도 영신학교에서 동북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서전대야(현재 간도 보통학교 뒤쪽, 용정 제 1유치원)로 옮겼다.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는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의 명의로 된 김영학목사 <독립선언서포고문>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뒤이어서 배형식 목사, 류례균, 황지영여사의 일제 타도와 조선독립에 대한 연설이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일본용정영사관 앞으로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행진의 선두에 <조선독립을 성원>이라고 적힌 오장기가 서고 그 뒤를 태극기와 중화민국기가 따랐다. 밴드와 학생 충렬대 300명이 앞장서고 군중대오가 뒤따르며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 구호를 외쳤다. 서전대야에서 상부지(시내 상권이 형성된 곳) 내로 들어갈 때 일본의 사주를 받은 수십 명의 중국 군경들이 발포하여 현장에서 시위대원 10명이 사망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에서 치료 중에 4명 사망하였고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5명이 사망하여 총 19명이 순국하였다. 그 외에도
4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94명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3월 13일 당일 밤에 <독립운동의사부> 부원들이 국자가 서쪽 교외 솔만자에 모여서 사망자와 부상자 문제를 논하면서 <독립운동의사부>를 <간도독립운동기성총회>로 바꾸고 구춘선(캐나다장로회 지도자)을 회장, 마진(캐나다장로회 지도자)을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들은 우선 직면하고 있는 부상자 치료와 사망자 장례, 체포당한 사람들의 신변 처리에 만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3월 17일, 14분의 열사( 박상진, 정시익, 공덕흡,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홍식, 장학관, 최익선, 현상로(현남호), 리유주, 차정룡(차선균)) 장례식에 3,000여 명의 피 끓는 청년 학생들과 군중들이 날창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용정에 집결하여 열차들의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희생된 열사를 추모하고 일제와 중국 군경들의 탄압에 항의하였다. 용정 제창병원에서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라는 현수막을 들고 14명의 수난자들의 영구를 메고 합성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3월 20일, 훈춘에서는 황병길, 노종환, 채룡, 이정호, 이명순, 라정화, 양하구, 양하운 등의 지도로 3천명이 시위에 참여하는 훈춘 시위가 일어났다. 훈춘집회에는 두만강 대안의 각지 기독교 신도 대표들도 참석하였다.
3월 13일부터 5월 20일까지 연변 각지에서는 전후하여 수십 차례의 집회와 시위행진이 있었다. 용정, 국자가, 화룡, 안도, 왕청 등지의 애국애족의 청년들과 군중들이 노도처럼 일어나 독립운동 열기로 북간도는 불타고 있었다. 남만주의 유하현 삼원포, 신빈현 왕청문 등지에서도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3월 말에 <간도독립운동기성총회>를 <간도국민회>로 개칭하고 회장을 구춘선, 부회장을 강구우로 선출하였다.
3.13만세 시위를 통해서 전쟁 없이 독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북간도 독립투사들은 무장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3.1만세 시위가 있은 3월 초부터 12월 말 사이에 북간도에서 결성된 30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아래와 같다.
조선국민의사회, 자위단, 충렬대, 대한신민단, 청년맹호단, 건국회, 의형제단, 야단, 구제단, 자유공단, 대의전의사회, 한당의사부, 의군부, 훈춘대한국민의회지부(훈춘한민회), 대한국민회(간도국민회), 대한독립군, 독립운동의사부, 창의단, 오숭단, 정명단, 대한광복단, 훈춘대한애국부인회, 대한독립의사회, 서북청년회, 보황단, 소년단, 간도청년단, 북로군정서, 대한적십자회지부, 대한의민단.
독립운동단체들은 무장 투쟁을 위해서 의연금을 모금하고 독립군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독립군으로 훈련받은 청년들이 1919년 9월부터 두만강을 건너 초소들을 공격하였으며 쉼 없이 국내진공작전을 벌여 드디어 1920년 6월 4일~7일에 있었던 봉오동전투에 이르게 된다.
102년 전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오늘 일어난 <3.13만세시위>는 준비된 시위였으며 북간도의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이 다 망라된 연합운동이었다. 독립투사들과 애국애족의 청년들이 시위 중에 일어난 유혈사태를 겪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무장독립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사실에 감사드린다.
오늘만이라도 <3.13만세시위>가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최고의 독립운동,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서곡이라고 큰 소리로 떠들고 싶다.
용정 <3.13만세시위>에 순국하신 19분들과 밤새워 또는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용정에 모인 모든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마음 모아 감사의 인사를 바친다.
코로나19 때문에 <3.13>순국자들의 묘소에서 기념행사가 있을런지요!
2021.3.13.금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