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지랄 발광 사건
‘지랄 총량’의 법칙을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라는 의미이지요. 저에게 있어서 이 법칙에 의하면 거의 1/3을 소진한 사건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었던 고모 댁의 마을에 17~18살 정도의 언어장애인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런 아이들이 갈 수 있는 농아학교도 없었던 터라 늘 우리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곤 하였습니다. 비록 귀먹고 말은 못 하였지만, 눈치는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리면 비위를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 놀리면 웃음으로 응수하곤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승재였습니다. 어느 날 형 또래 되는 한 청년이 승재에게 “승재야 너 바보 못난이지~~?”그랬습니다. 이 말을 알아들은 듯 웃으면서 어버버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손바닥을 치면서 웃었습니다.
제가 그때 톡 나서면서 똑같이 했습니다. 그러자 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어 머리를 세게 후려치며 화를 내는 것입니다. 저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아픔을 느끼면서 형평성에서 벗어난 그의 행동에 놀라고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달려들어 고모에게 승재에게 맞았다고 울면서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때 고모는 냉정하게 “이놈아 네가 맞을 짓을 했으니 그렇겠지~~”그러시는 겁니다. 그때 안에서 열불이 터졌습니다. 맞아서 억울하고 고모가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내어 울었지만 달래 줄 생각마저도 하지 않는 고모가 미워졌습니다.
대문간에서 벌떡 누워 온몸을 뒹굴며 지랄 발광을 하였습니다.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부모와 형제 곁을 떠난 내게는 아무도 내 편이 없다는 낙심이 제 마음을 무척 서럽게 만든 것이지요.
이 글을 쓰려다 저와 동갑인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평생을 목회를 해오면서 제대로 꿈을 펼쳐 보지 못한 채 내년에는 지치고 힘들었던 목회에서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목사님이십니다.
지금은 지하교회에서 성도라곤 달랑 자기 가족뿐입니다. 게다가 등산하다가 발목을 다쳐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고, 회복되었을 때는 흉선종을 앓고 죽을 뻔하였고, 여기서 벗어났을 때는 근무력증에 빠져 고생을 한 분이었습니다.
주위에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삶의 여정을 지냈던 그분을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저녁에 중화요리 집으로 초대를 하여 세트메뉴로 음식을 대접하고 커피숍에서 음료를 마시며 지난 온 이야기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픔을 함께하였습니다.
누구에게 한마음을 품어주고 그편이 되어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가르치려 하지 말고 공감해주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있어 주는 따뜻한 노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영원한 내 편이 되어주시는데 저 역시도 외로운 자들의 편이 되는 것은 마땅한 태도라 생각되었습니다.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