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은 천하에 떨쳤으나 운명이 기구했던 김정희
김정희(1786__1856)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 호는 완당 또는 추사이다.
순조 9년(180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0년 뒤인 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가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번암 채제공이 그 집 앞을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더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참판은 바로 추사의 아버지였다. 채제공이 김노경의 집안과는 대대로
전해오는 혐원이 있어서 서로 만나지 않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떠나
특별히 그 집을 방문하자, 김노경이 몹시 놀라며 말하였다.
"각하께서 어인 일로 소인의 집을 찾아주십니까?"
채제공이 대답하였다.
"대문에 붙여 있는 글씨는 누가 쓴 것이오?"
김노경이 응대하였다.
"소인의 아이가 썼습니다."
채제공이 말하였다.
"이 아이가 틀림없이 명필로 한 시대에 명성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기필코 그 아이의 운명이 기구해질 터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해서는 안 되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존귀하게
될 것이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조진관(조엄의
아들)이 광주 부윤으로 있었는데 관할 지역 내인 남한산성의 군량미를 향리가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그 책임자로서 파직된 일이 있었다. 김정희가 비록 명필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하였지만 익종(헌종의 아버지)이 조진관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세자빈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듣고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장리의 손녀를 어찌 한 나라의 국모로서 모범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로 조정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결국 이 사건 때문에 김정희도
제주도로 귀양 가서 10년을 지내고서야 돌아와 벼슬이 겨우 참판에 이르렀으나
후사가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