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은 일제치하였던 1931년에 북한 땅, 개풍군에서 태어나셨다.
서울로 건너와 척박한 삶을 올곧게 살아내셨다.
그것도 곱고 훌륭하게 말이다.
한국전쟁 때 가족들 중 일부를 먼저 떠나보내셨는데 그건 애가 끓는 아픔이었다.
그런 빈한하고 곤고한 환경 속에서도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시며 틈틈이 글을 쓰셨다.
남들은 대부분 꿈을 포기할 나이인 '불혹'에 '소설가'로 한국 문학계에 등단하셨다.
늦깎이 등단이셨지만 집념어린 집필로 한 시대를 풍미하셨다.
정이 많고 유달리 미소가 고왔던 선생님은 2011년 1월 22일, '담낭암'으로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영원한 별리.
향년 79세였다.
식민지, 전쟁, 쿠데타, 산업화, 민주화 등등 역사의 격랑과 시대의 파랑을 온몸으로 부대껴가며 다양한 작품을 많이 남기셨다.
불타는 정념이었다.
숱한 작품 속에서 선생님은, 섬세한 심미안과 따뜻한 감성으로 이 땅의 수많은 심령들에게 잔잔한 위로와 격려를 얹어주셨다.
또한 그분은 늘 약자들의 편에 서셨다.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조용히 다가와 단비를 뿌려주시고는 소리없이 현장을 떠나셨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셨다.
그런 고운 분이 가셨다.
이틀 전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셨다.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몸가짐을 낮게 유지하셨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을 더 높여 주셨다.
타고난 성품에 일생의 수행과 기도가 더해져 몸에 밴 자세였다.
정말로 순백의 서설 같이 고결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우리는 그 분을 영원토록 보내드리지 못할 것 같다.
세월은 쉼없이 흘렀다.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스크랩을 해두거나 메모해 두었던 내 노트를 펼쳐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가슴 아픈 별리를 기록해 두었던 나만의 노트였다.
선생님이 떠난 빈 자리가 너무 허전하고 공허해 최근 몇 년 새에 별과 달이 되신 분들의 고귀한 족적을 다시 한번 반추해 보고 싶어서 였다.
이 좁은 지면에 가신 님들을 모두 열거할 순 없다.
다만 내 가슴 속에 각인되어 쉽사리 잊혀질 수 없는 분들만 간추려 적어보려 한다.
리영희 교수님, 트위스트 김 선생님, 황잡엽 님, 최윤희 님, 옥한흠 목사님, 앙드레김 선생님, 백남봉 선생님, 사마란치 위원장님, 박춘석 작곡가님, 법정스님, 배삼룡 선생님, 조오련 선생님, 코라손 대통령님, 산악인 고미영 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님, 노무현 대통령님, 장영희 교수님, 김수환 추기경님, 오리 전택부 선생님, 배우 최진실 님 등 이다.
한 때 우리 시대의 심장을 관통했던, 그리하여 큰 족적과 삶의 향기를 남겨주신 분들을 축약해 기술해 보았다.
'박완서 선생님' 빈소에 며칠째 계속해서 긴 조문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왔으면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생자필멸'이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각자에게 부여된 인생의 도화지 위에 어떤 물감으로 어떻게 채색할 것인 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며 결정이다.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던지는 단 하나의 화두도 바로 이것이리라.
그래서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새벽 Q.T를 중단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심으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따스함과 모성, 순백의 미소, 늦깎이 도전과 희망, 박애와 순수 그리고 사랑.
"문인들이 돈이 없을 테니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고 잘 대접해 드려다오"
역시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도 선생님을 닮았다.
선생님이 유산으로 남겨주신 고귀한 선물들을 잘 간직하고 싶다.
영원히 가물지 않는 그 분의 깊은 서정과 훈훈한 사랑의 옹달샘처럼.
항상 어머니 같았던 우리의 선생님.
편히 영면하소서.
"고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2011년 1월 24일.
사랑하는 선생님을 그리며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