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찍었어 이정이 동시집
이정이 글 | 시와동화 | 2023년 07월 11일
책소개
『눈으로 찍었어』는 〈비가 온다〉, 〈그 해 여름〉, 〈그럴 줄 알았어〉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소개 이정이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2019년 계간 <시와 동화> 동시 신인 추천 이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동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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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이정이
학교 공부 끝나서 좋은데 비가 온다
오늘 숙제 없어서 좋은데 비가 온다
텅 빈 집에 혼자 있는데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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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동생
이정이
-엄마, 냉장고 아이스크림 봤어?
-아니,
-아빠는?
-나도.
마침, 동생이 화장실에서 나왔어
-너 아이스크림,
-먹었어.
-왜?
-썩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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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이정이
일요일 아침
홈쇼핑 모델이 옷을입고
뽐을 내어
내 옷장을 열어 보니
한숨이 난다
-엄마, 은행잎도 노랗게 입고
단풍잎도 빨갛게 입잖아
내 옷도 좀...
-그래, 아빠랑 시장 갈까?
우리는 웃으며 아빠를 봤어
아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걔네들 다 작년 옷 꺼내 입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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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됐다
이정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 아저씨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승객은 할머니와 나
앞으로 몸이 쏠려
의자 등받이에 머리가 쿵,
-죄송합니다. 떠돌이 개가 지나가는 바람에...
-그래, 괜찮으슈?
-네, 잘 지나갔어요.
-아니, 기사 양반 말이유.
-네,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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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중이야
이정이
학원 가는 길 버스 안, 할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올랐지 허리고 굽었는데
옆에 있는 보따리는 더 컸어 한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기 앉으세요."그러는 거야 그러고는 할머니 앞에 서 있더라
사람들이 빠져 있었지 잠에 빠지거나 핸드폰에 빠지거나,
그런데 이 아이는 창밖만 내다봤어
드디어 할머니가 내리시면서
-에구에구, 금세 내리는 것두 아니구. 고맙다, 아가.
그 애가 전학 온 내 짝꿍이야
맨날 맨날 지우개 빌려 달라고 해도 안 빌려줬는데...
내일은 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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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도 모르고
이정이
화장실 앞에서 교장 선생님을 만났어
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보셨지
-잘.
내가 대답했어
지나가던 체육 선생님,
화장실을 들어가는 나를 붙잡았지
-교장 선생님께 그렇게 짧게 말하면 안 돼.
길게, 다시!
나는 다리를 비비꼬며 말했어
-자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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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이정이 시인은 오랫동안 문학 수련기를 거쳐 내공이 깊다.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묵묵히 시의 여정을 가고 있다.
생애 처음으로 상재하는 시인의 첫 동시집 『눈으로 찍었어』 에는
소소한 어린이들의 삶이 녹아있고,
그것을 시로 크게 성공하게 하는 것은 반전이다.
그래서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시의 재미와 감칠맛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반전이 일어나면
우리 삶은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간다.
어린이들의 삶을 소재로 한 이른바 생활동시집도 반전이 필요하다.
그 맨 앞에 이정이 시인이 있다.
-이창건 (시인)
눈으로 찍었어/이정이/시와 동화(2023.6) - 울산시민신문 (ucinews.kr)
울산시민신문 <이도윤 기자(시인)의 책 소개>
어린이다운 어린이가 아닌 어린이 혹은 어른답지 않은 어른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시인을 꿈꾸며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존의 잘 만들어진 작품을 읽으며 공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럴 경우, 기존의 작품들과 거의 비슷하게 작품을 만들어낼 무렵에 고비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다.
자신의 작품이 매끄러워진 듯 보여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 망하는 고비에 접어든 것이다. 반대로 매끄럽기는 하지만 내 것은 아니라는 느낌 때문에 불편함을 갖게 된다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전자의 경우, 그런 느낌에서 멈추면 그저 그런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복잡하다. 불편함을 느껴 이제까지 배운 걸 내다버리면 세 가지 경우 중 하나가 될 확률이 높다. 멋진 시인이 되거나 혹은 이상한 시인이 되거나 시인이 되지 못하고 지망생에 머물게 된다.
2019년 계간 ‘시와 동화’ 동시 부문 신인 추천을 받고 시인의 길에 들어선 이정이 시인이 자신의 첫 번째 동시집 ‘눈으로 찍었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정이 시인의 동시는 때론 거칠고 때론 삐걱이며 때론 당황스럽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행간에서 진한 눈물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정성스럽게 숨겨 놓았기에 건성으로 찾으면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정이 시인은 앞서 이야기했던 케이스 중에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코 그 누군가를 따라하지 않는다. 거칠지만 매끄러움으로 치장하지 않는다. 삐걱이더라도 익숙한 기름칠은 하지 않는다. 당황스럽더라도 군더더기 설명은 붙이지 않는다. 자존심이 강하다. 그게 자산이며 장점이고 그게 단점이다. 그러나 단점 속에 색다른 미학이 숨어 있다. 눈 밝은 독자는 그런 발견 하나 만으로도 시집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듬어야할 곳이 많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은 끝이 멀다는 것이며,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고, 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이유와 명분과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것이며, 늙지 않았다는 것의 증명서이기도 하다.
시집을 펼치면 어린이답지 않은 어린이가 불쑥 튀어나와 동시답지 않은 동시를 읊으며 다가온다. 조심해야 한다. 속으면 안 된다. ‘얘는 어린이가 아니야’라고 속단하는 순간, 읽는 내가 어린이로 변해 있고, ‘이건 동시가 아니야’라고 오판하는 순간, 주변의 글자들이 모두 동시로 변할 수 있다. 눈으로 찍힐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감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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