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5일 성탄절
눅2:8~14
영광과 평화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의 미사'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사란? 라틴어에서 유래 한 것으로 곳 제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날이 예수님의 탄생일인지 확인할 수 없고 로마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던 이교(異敎)도의 축제일과 같다는 사실과, 1세기 초에 기독교인들이 이 날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념하지 않는 일부 교단도 있다고 합니다.
또 Χ-mas는 영어의 X가 아닌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첫 글자 Χ(키)에 mas를 붙여서 쓴 것입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론 '크리스마스'로 읽지만, 관용적으로 '엑스마스'라고도 읽습니다.
현재는 종교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문화적인 행사로 발전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교회에서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축제이자 교회력 절기인데,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일 동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대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원 전 부터 로마, 이집트 등 이교도 지역에서는 태양 숭배와 관련한 신화에 따라서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1년 중에 해가 가장 짧아지는 동지(冬至) 이후부터는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세력을 얻어서 만물이 소생해 나갈 수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12월 25일이 기념일로 지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교황 율리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이 축제가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와 서구 문명이 퍼지면서 크리스마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리는 명절이 되어서 17세기 초 명나라에서는 서광계의 근거지인 쉬자후이 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열렸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부터 기독탄신일이란 이름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관용적으로는 성탄절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며, 대한민국의 대부분 학교들은 크리스마스 즈음에 겨울 방학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라는 말의 뜻과, 크리스마스에 대한 유래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껜 영광이 되시고,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는 평화가 깃드는 날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의미와 뜻이 있는 날이 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자들이 밤 늦은 시간까지 양 떼를 지키다가 주의 사자가 그들의 옆에 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는 놀라운 축복의 시간을 맞이한 것처럼,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를 통해 순복음 전주 성령교회에 모인 우리와, 또, 이 땅의 모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 까지, 기쁨의 좋은 소식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평화, 직장, 사업, 모든 범사에 평화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를 누리려면
첫째: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가 임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많은 목자들이 양 떼를 치는데 특별히 그 지역 곳 하나님의 영광이 비출 그 자리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지역이 어떤 지역이기에 천사들이 그들의 곁에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게 되었는가?
우리 성경에는 그 지역에 라고 특별하게 지목하는 것 중 그 라는 지시대명사 하나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곳인지 잘 알 수 없는 곳입니다.
한 가지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실 베들레헴 부근 인 것 같은 느낌은 줍니다.
외냐 하면 그 지역 이라고 말하는 그 지역이란 바로 예수님이 나실 지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나실 베들레헴 지역 중 어느 곳에서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었는가?
원문 성경을 보면 목자들이 양들과 함께 있었던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 이라는 이 지역의 원문은 헬 코라(χώρᾳ)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공간,(a space) 장소, 지방(place) 시골들(field)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카스마(χἀσμα)에서 왔는데 이 말은 하품하다 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갈라진 틈, 깊은 구렁, 간격,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문 코라(χώρᾳ)라는 말과 카스마(χἀσμα)라는 말로, 원문으로 성경을 직역하면, 그 지역이란, 어느 공간과 장소, 지역인 동시에, 환경은 갈라진 틈 사이이며, 깊은 구렁이고, 무엇과 무엇의 간격이 멀리 떨어져서 건널 수 없는 그런 장소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신 시기는 역사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때 즈음으로 본다면 중동 지역은 낮과 밤의 기온 차는 살인적인 차이입니다.
한 낮 기온은 영상 3~40⁰를 오르내립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영하로 뚝 떨어집니다.
그 채감 온도는 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이런 중동 기후조건에 본다면 목자들의 지금 상황은 매우 어렵고 힘든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산이 갈라진 협곡 사이이고, 깊은 구렁이며, 양 우리로 가기에는 멀리 떨어져서 한참을 가야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아니면 양 우리에는 갈 수 없고 이제 그곳에 텐트를 치고 치즈와 양의 젖과 마른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청해야 하는 그런 상황 일 수 있습니다. 유목민들의 일상생활이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자들은 밤에 텐트 안이 아닌, 밖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 합니다. 그 들의 딱한 처지를 간략하게 문자에 희석시켜 기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의 심정을 원래 목동 이었던 다윗을 통해 잘 이해시켜 줍니다.
삼상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목자의 가장 힘든 싸움은 추위와 더위 보다 사나운 들짐승들 이었습니다.
저와 우리들의 삶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힘든 환경은 어떤 것들입니까?
혹한 추위와 더위로 다가오는 환경은 무엇입니까?
집에 가스가 끊겼습니까? 그래서 너무 춥습니까?
올해 가장 전주가 더웠는데 그 더위에 에어컨이 없었습니까? 아님 전기가 끊어져 선풍기를 켤 수 없었습니까? 쌀이 떨어져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었습니까?
그럼 사자와 곰으로 다가오는 환경은 없었나요?
남편이 사자처럼 나를 공격하고 아내가 곰처럼 나를 공격하며 형제가 친구가 이웃이 나를 사자처럼 곰처럼 공격하는 일들은 없었습니까?
이처럼 인생이라는 깊은 골짜기에, 협곡에 ,갈라진 계곡에서, 힘들어 눈물 흘리며 살고 있는 우리 인생에게 가장 필요 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목자들이 양을 돌보고 있는 이 지역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어둡고,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고, 연약한 낮은 자들의 삶의 터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며,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에어컨에서 지내고, 넓은 평수와 고급 주택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건강하고 잘나가는 큰 사업가들이나, 권력을 자랑하며 높은 관직에서 권력과 지식을 무기로 힘없고 무식한 백성들의 피를 뽑아먹고 사는 파렴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힘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한 밤중에 양을 먹이기 위해 잠을 설치며 추위와 더위와 온갖 어려운 환경과 싸우며 일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시기 위해 능력의 사자로, 위로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바로 다윗의 동네를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므로 막2:1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물질 문제로 자주, 아니면 가끔이라도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에 병이 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 문제로, 자녀들 문제로, 가정의 이런 저런 문제로, 자주, 아님, 가끔 힘든 일들이 생깁니까? 바로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와 병으로 가득한 우리내 인생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의 주체가 되셔서 목자들 옆에 섰던 천사와 같이 교회를 통해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심을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평화로 이어지는 최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최고로 낮은 곳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마음은 낮아지심의 마음이셨습니다.
고전9:22절에도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 사도도 자기의 낮아짐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하는 진실한 마음에서 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분명한 뜻을 바울 사도는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81년도에 운전 부주위로 수원 교도소에 간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교도소에 31대 법무부 장관이었던 이종원 법무부 장관이 오기로 됬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약속된 몇 일 전부터 교도소 내는 온통 청소, 정리 정돈, 재소자들의 규율의 엄격함이 예사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를 담당하고 있던 교도관 이었습니다. 교도관은 시간 날 때마다 법무부 장관 앞에 보고해야할 내용을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도착한 날 교도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법무부 장관이 우리 곁에 왔을 때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향수의 냄새 였습니다. 한 나라의 법을 대표하는 장관의 직임에는 여러 가지 갖춰야 할 품위나 품격 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울산에 있는 EG라는 박지만 씨의 회사 였습니다.
이곳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회사에 회장인 박자만 씨가 온다는 것입니다.
일터는 일하는 곳이 아니라 정리 정돈 이었습니다. 회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어야 하겠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각 나라 원수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을 둡니다. 경호원들은 나라의 원수를 자기 목숨을 바쳐 지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은 경호원도 필요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좋은 자리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야 말로 신변보호를 받아야 되고 또 그동안의 우리가 살아온 모든 보고를 받을 만한 분이 아니신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라중의 가장 적은 나라인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나사렛을 택하시며 그곳에서도 더 낮은 마굿간의 말 구유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렇게 낮아지심을 볼 때 우리의 낮아짐은 어디가 낮아짐일 까요?
오늘 크리스마스를 통해 누가 낮아지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누구든 그 사람 앞에서 낮아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보다 낮아지심을 본 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낮아지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지막으로: 평화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세상은 평화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사는 성도님들은 모두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샬롬~~~
우리들의 세상은 평화의 세상입니다.
왜요? 평화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84년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자동차 정비사로 처음 가게 됬습니다.
이 때 사우디 정부에서 유목민들을 위해 정책을 세운 것 중 하나가 무료주택 사업이었습니다. 집을 잘 지어서 유목민들에게 무료로 거저 주었습니다.
단 유목민들에게 다달이 주는 생계비를 끊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목민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는 사람, 하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렇게 둘로 나뉘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 의미도 둘 이었습니다.
하나는 유목민 생활을 자기의 천직으로 삶고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서 집에서 사는 것보다 나라에서 주는 생활비를 받아쓰고 또 이곳저곳 다니며 양치는 일이 자기의 일생 직업이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부류는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내가 지은 집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주는 집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떳떳하게 내가 지은 집이 내 집이라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준 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듣기 실은 소리를 듣고 때로는 눈총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피땀 흘려 노력해 번 돈으로 집을 짓기 전에는 그런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두부류다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럴 듯한 자기 발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 적으로 미련한 사람들이다 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으면 구원받고, 믿으면 이기고, 믿으면 평화롭고, 믿으면 행복한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독생자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그동안 살아왔던 내 방식의 삶대로 그냥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구속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라고 나를 구속하고, 명령하며, 내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속셈이 그들에게 다분히 있습니다.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믿음은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믿음으로 내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나를 평화롭게 하고,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 먹은 대로 만들어 가겠다는 속셈입니다.
성경은 인생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욥5: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우리가 무슨 큰 성을 쌓는다 할 찌라도 그 일이 고생이고, 수고뿐이고, 슬픔뿐이었다면
쌓아놓은 성이 무슨 가치가 있고 소용이 있겠습니까?
갈라진 틈바구니와 동 떨어진 광활한 광야 같은 곳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수고하며 양을 지키는 죄와 허물로 가득한 목자와 같은 우리 인생을 위해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가 이 땅에,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업체에, 우리 한 개인의 인생 깊숙이 찾아 오셨습니다.
본문14절 다 같이 합독하시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아멘-
지극히 높은 곳은 저 높은 하늘나라를 의미하기도 하겠으나, 더욱 친밀하게는 우리들의 이상일 수 있고, 마음일 수 있으며, 영혼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모든 생각이 매시,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복의 나라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하신 말씀의 본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낮고 낮은 예루살렘 마굿간 말구유로 나심을 기억할 때, 우리의 신분을 생각하면 예수님보다 더 낮아질 수 있는 신분임이 분명 함으로,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부모와, 이웃, 그리고 친구, 친지, 모든 사람 앞에 낮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평화로운 삶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주신 이 땅의 선물은 평화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곳 우리의 영혼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늘 비춰지는 감사와 찬송의 삶이 되어지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오신 가장 첫 번째의 귀한 우리의 선물입니다.
-아멘-